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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렘 게임의 공략캐가 되었다-23화 (23/95)

23

‘어장에 구멍을 뚫어라?”

<세 명의 공략 캐릭터가 카미앙의 어장에서 벗어나면 퀘스트를 달성하게 됩니다.>

난 신탁이라도 받는 듯한 경건한 자세로 퀘스트를 수락했다.

***

숙소로 돌아온 나는 시스템 창을 열었다.

퀘스트를 달성하기 위해 해야 할 일은 명료했다. 앞으로 카미앙이 다른 캐릭터의 호감을 얻는 것을 방해하면 된다.

마침 헤슬루, 라라벨 그리고 마룬시에와의 첫 이벤트가 코 앞이었다. 첫 만남부터 틀어져 버린다면 어장에 충분히 커다란 구멍을 뚫어놓는 셈 아닐까.

게다가 헤슬루와 라라벨은 첫 만남 이벤트를 제대로 진행하지 못하면 다음 이벤트를 볼 수가 없었다.

‘이런 거라면 문제없지.’

캐릭터별 공략집까지 만들었던 나였다. 이번 퀘스트는 어장에서 빠져나오는 일보다 훨씬 수월하게 느껴졌다.

게다가 모든 공략 캐릭터와의 관계를 방해해야 하는 것도 아니니 이 정도면 누워서 떡 먹기 아닌가.

‘아니지, 좀 더 노력해서 아예 곁에 아무도 없게 만들어 버리자고.’

하렘 게임의 주인공 주변에 공략 캐릭터가 없다? 그럼 그 주인공은 어떻게 되는 거지?

카미앙의 앞날에 펼쳐진 꽃밭을 싹 밀어버릴 생각을 하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

드디어 오늘, 모도루 백작가의 영애인 헤슬루와 카미앙의 첫 만남 이벤트가 일어나는 날이었다.

카미앙과 헤슬루 사이에 일어나는 이벤트는 고전적이었지만 클래식 이즈 베스트라는 말답게 헤슬루의 마음을 확실하게 얻는 계기가 된다.

사건의 경위는 이러했다.

축일 행사를 위해 대 신전에 카미앙과 신관, 귀족들이 모인다. 대 신관이 설법을 펴던 중 성물이 떨어지는데 그 아래 하필이면 헤슬루가 있었다.

주인공 버프로 남들보다 먼저 사고를 감지한 카미앙은 자신의 몸을 던지며 아슬아슬하게 헤슬루를 구해낸다.

이 사건으로 카미앙은 단숨에 ‘백마 탄 왕자님’ 타이틀을 획득하며 헤슬루의 마음을 독차지한다.

덕분에 이 첫 만남 이벤트만 성공한다면 헤슬루 공략은 수월했다.

중간중간 등장하는 ‘다른 영애와의 데이트 들키지 않기’라는 미니게임만 성공하면 되었다.

‘그러고 보니 헤슬루를 구해라 미니게임은 꽤 악명이 높았는데.’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는 조각상을 피하며 목적지까지 도달하는 미니게임이었다.

첫 만남이 중요한 헤슬루인 만큼 난이도를 높였는데 그것이 웬만한 슈팅 게임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어려웠다.

현실에서는 그 미니게임이 어떻게 나타날지 예측할 수가 없었다. 그냥 평범하게 떨어지는 성물을 피하기만 하면 좋으련만.

이것이 내가 이른 새벽부터 신전을 찾은 이유였다. 다른 사람들이 도착하기 전 대예배당을 살펴보며 게임에서의 상황을 시뮬레이션해 볼 계획이었다.

‘축일이라고 특별한 장식은 없네.’

크리스마스를 상상했던 내게 평소와 똑같은 신전의 풍경은 다소 심심했다.

‘설마 잠깐 나오고 말 배경 일러스트라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던 게 반영된 건 아니겠지?’

물론 신관에게 이 썰렁한 축일에 관해 물어본다면 나름의 이유를 대긴 할 것이다.

바렌시드의 신께서는 과한 장식을 싫어하신다든지.

‘뭐, 크게 상관없는 일이긴 하지. 그나저나 화면으로 보던 것보다 훨씬 넓어 보이네.’

대부분의 장소가 사진발을 받아 실제로 가보면 더 좁기 마련인데 말이다. 신전은 벽이며 바닥까지 온통 흰 대리석으로 만들었기에 더 넓어 보이는 것 같았다.

“원래 대리석이 이렇게 단단했나.”

손가락으로 벽을 두드리자 단단한 석재가 손가락을 튕겨냈다. 이 딱딱한 바닥에서 구를 생각을 하니 갑자기 어깨가 쑤시는 것 같았다.

불과 두 달 전까지만 해도 이보다 훨씬 더 한 일을 겪었지만,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었다. 요사이 편하게 지낸 덕에 몸이 그 맛을 알아버린 것 같았다.

‘아니, 사실 이런 게 정상이지! 그동안 녹시아가 너무 몸을 굴린 거라고. 그나저나 저쪽이 정면이니까 헤슬루는 분명 이 왼편 앞쪽에….’

나는 헤슬루가 서 있을 위치로 가 주위를 살펴보았다. 천장에 부조로 조각되어 붙어있는 성물이 눈에 들어왔다.

바렌시드의 신들과 그 메신저들로 하늘에 계신 신을 표현하기 위해 천장의 대리석을 직접 조각했다고 한다. 말만 들어도 힘들었을 것 같은 작업이었다.

‘장관이긴 하군.’

백여 년을 이어져 내려온 성물이었다. 정말로 저 조각이 떨어질까 싶었다. 경비원이라든지 신관에게 일러줘도 전혀 믿을 것 같지 않아 보였다.

‘난 여기쯤 서 있을까? 가로막는 물건이 없으니 단숨에 뛰어갈 수 있을 것 같은데. 카미앙보다는 무조건 빠를 테고.’

이젠 카미앙을 본다 해도 가슴이 쿵쾅거린다거나 눈이 부신 증상이 없으니 녹시아의 신체적 능력을 백 퍼센트 사용하는 게 가능했다.

주인공 버프라든지 있는지 없는지 모를 ‘세계의 힘’ 같은 게 작용하지 않는 이상 카미앙보다는 내가 빠를 거라는 자신이 있었다.

처음으로 다른 공략 캐릭터가 아닌 녹시아에 빙의한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루티시나 같은 귀한 몸에 들어갔다간 헤슬루를 구하기 전에 내가 먼저 기절했을 테니까.

“녹시아 님, 오셨습니까.”

리듬감이 느껴지는 나긋나긋한 목소리. 고민할 필요도 없이 바로 주인을 떠올릴 수 있었다.

“정말 일찍 오셨군요. 예지의 성소로 바로 찾아오시지 않고요.”

머리부터 발끝까지 신관 복을 깔끔하게 차려입은 크로버의 모습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무엇보다 턱 바로 위쪽까지 내려오는 후드가 내 마음을 아주 편안하게 해주었다.

“축일 행사가 시작되면 아무래도 바쁘실 것 같아서요. 몸은 좀 어떠세요?”

“걱정해주신 덕분에 많이 좋아졌습니다.”

오늘은 헤슬루 이벤트가 있을 뿐만 아니라 크로버에게 성물을 받으러 가기로 약속 한 날이기도 했다.

마음 같아서는 크로버를 구해 온 그날 당장 받고 싶었다. 하지만 카미앙에게 붙잡혀 쓸데없는 이야기를 듣는 통에 타이밍을 놓쳐 버렸다.

다음날이라도 찾아갈 수 있었지만 제델에게서 크로버가 몸져누웠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러다 보니 며칠이나 지난 오늘에야 성물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천 골드짜리 성물이 드디어 내 손에 들어오는구나.’

이제 스킬을 한 번 사용할 때마다 신성력이 얼마나 소모되는지 알 수 있겠지. 남은 신성력을 좀 더 효과적으로 운용하고, 평소에 신성력이 회복되는 속도를 가늠할 수도 있을 것이다.

상자에서 꺼내지는 그 영롱한 자태를 보고 있으니 나도 모르게 꿀꺽 침이 넘어갔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만 이건 드리는 게 아니라 ‘빌려’ 드리는 겁니다. 알고 계시죠?”

“물, 물론이죠.”

크로버가 알아챌 정도로 탐욕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었나 얼굴을 훑어내렸다.

“사용 방법은 간단합니다. 착용자의 신성력이 최대치면 금색, 전혀 남아있지 않으면 은색….”

크로버의 설명이 끝나기도 전에 팔찌를 손목에 끼웠다. 마치 날 위해 준비한 물건이라도 되는 것처럼 내게 딱 맞았다.

“이것 봐요. 신기하죠? 꼭 맞춤 같네요.”

“아하하, 이건 착용자에 맞춰 자동으로 크기가 조절되는 성물입니다.

“아하하하…. 자동 사이즈 조절. 참, 좋은 물건이네요. 하하….”

맞춤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는 크로버를 따라 마른 웃음을 뱉어냈다.

“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 문제가 있네요.”

“무슨 문제요?”

“기사님이 사용하시기엔 적절치 않은 물건인가 하는….”

“그럴 리가요. 완전 적절한 물건인걸요.”

설마 이걸 다시 뺏어가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살아나고 보니 천 골드가 아까워졌어?

“이 성물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녹시아 님의 신성력이 얼마나 남았는지를 확인할 수 있으니 약점을 노출하게 되는 거 아닐까요? 분명 검술에 신성력을 담아 운용하신다고 했던 것 같은데.”

일리가 있는 지적이었다. 내가 정말로 검에 신성력을 담아 사용하는 거라면 말이다. 근데 내 말이 거짓인 걸 진작 알아채지 않았었나?

“적들이 팔찌의 색을 보고 녹시아 님의 공격에 대비한다면….”

“걱정 말아요. 신성력을 사용하지 못해도 전 충분히 강하니까 그런 쓸데없는 걱정은 하시지 않아도 됩니다.”

“그럼 신성력이 필요한 이유가….”

“기사로서의 촉을 발동시키는 데 사용하죠. 살기를 느낀다든지 갑자기 위험한 일이 생길 것 같다든지.”

“아하, 참 잘 됐군요.”

크로버의 목소리에 윤기가 돌았다. 그는 내게 가까이 다가와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은밀하게 속삭였다.

“사실 오늘 이곳에서 왕세자님은 운명의 여인을 만나게 되십니다.”

“운명의 여인?”

헤슬루의 얼굴이 딱 떠올랐다.

‘이런, 예지의 신관!’

게임 속 크로버의 역할이 카미앙의 연애 도우미라는 것을 깜박 잊고 있었다. 남의 연애사에 훈수를 두는 예지의 신관답게 카미앙과 헤슬루 사이의 사건을 감지한 모양이었다.

“카미앙 님도 그걸 알고 계시나요?”

“물론입니다. 어제 절 찾아오셨길래 넌지시 말씀드렸죠.”

잠깐만. 그러니까 카미앙도 오늘 뭔가가 있다는 걸 알고 온다는 말이지?

“신관님은 운명의 여인이 어떤 사람인인지도 알고 있나요?”

크로버는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신께서는 인간에게 모든 것을 알려주진 않으신답니다.”

그것참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신 정도씩이나 되는 분께서 체통 없이 인간의 연애사에 끼어들고 그러시면 안 되지.

“그래서 제가 녹시아 님께 말씀을 드린 겁니다. 신의 예언이란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라 원래는 다른 사람에게 누설하지 않는 법이거든요.”

신의 예언이라는 게 죄다 ‘연애사’라서 그런 게 아니냐고 반문하려다가 그만두었다.

“그 기사의 촉을 발동해 위험한 일이 생길 것 같다 싶으시면 왕세자님을 도와주십시오. 그럼 왕세자님께서는 무사히 신께서 준비한 인연을 만날 수 있을 겁니다.”

마치 내게 막중한 임무라도 맡기는 듯한 태도였다. 나도 헤슬루를 구하려던 참이었으니 고개를 끄덕이긴 했다.

“역시, 녹시아 님께 말씀드리길 잘했습니다.”

만족스러워하는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슬며시 불안감이 올라왔다.

‘설마 앞으로도 계속 이런 식으로 다른 캐릭터들과의 이벤트를 카미앙에게 알려주는 건 아니겠지?’

내가 성물에 눈이 멀어 엄청난 방해꾼을 구해온 것이 아닌가 하는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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