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오랜만에 카미앙의 얼굴을 보는 순간 든 생각은 한가지였다.
‘괜찮네?’
그랬다. 간만에 만난 카미앙은 이전보다 한결 평범해진 느낌이었다.
물론 카미앙의 얼굴이 하루아침에 못나졌다는 건 아니었다. 일러스트 그대로 화사한 금발의 반짝거리는 미남인 건 변함없었다.
하지만 일단은 그 얼굴 뒤에서 쏟아지던 후광이 사라졌다. 덕분에 나는 카미앙의 눈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었다.
“녹시아 경? 대체 어디 있다가 여기서 나타난 거지?”
“전 그냥 성으로 돌아가던 중이었는걸요.”
게다가 마주 보며 대화를 나눠도 이전처럼 심장이 쿵쾅거리지 않았다. 괜히 움츠러드는 느낌도 사라졌다.
‘어장에서 벗어난! 효과란 말이지. 괜찮네, 이거.’
카미앙의 주변을 지키고 선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관료들과 병사들, 그리고 몇몇 귀족들이었다. 바로 내가 예지의 신관을 구해왔다고 밝히며 명성을 올리기에 딱 좋은 상황이었다.
“여기, 예지의 신관님을 호위하면서 말이죠.”
나는 옆에 있는 크로버를 가리켰다.
‘자, 크로버. 이제 네 차례야.’
“지혜의 성소에 다녀오는 길에 도적의 습격을 당했는데 그때 마침! 딱! 파르미엔 기사님께서 구세주처럼 등장하셔서 절 구해주셨습니다. 실로 신께서 보내주신 분이 아니겠습니까. 덕분에 전 무탈하게 바렌시드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와우, 좀 과한 게 아닌가 싶었지만, 카미앙은 물론이거니와 뒤에 있던 귀족들까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예지의 신관이라면 납치당했다는 소문이 있지 않았나?”
“소문이란 게 다 부풀려지기 마련이지. 그나저나 무사히 돌아오셔서 다행일세.”
자, 시스템. 이걸로 난 바렌시드의 왕족에게 선량한 신관을 구출했음을 확인받았단다. 많은 사람에게 알리지는 못했지만, 이 정도면 충분히 명성이 올라갈 만한 일이라 생각하지 않니?
내가 시스템과의 대화를 시도하는 동안 카미앙과 크로버의 대화가 배경음악처럼 흘러 지나갔다.
“몸은 괜찮소? 다친 곳은 없고?”
“신의 가호와 왕세자님의 염려 덕분에 무사합니다.”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모르오.”
나는 정면에서 15도 정도 눈을 올려 뜬 채로 허공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스템 메시지가 매번 나타나는 위치였다.
좋았어! 명성 획득!
“그런데 녹시아 경.”
그러고 보니 공략 대상인 카미앙의 상태도 변하지 않았을까? 내가 어장 속에서 빠져나왔으니 말이다.
“녹시아 경?”
“네.”
내게 뭐라도 맡겨놓은 듯 보채는 카미앙의 부름에 대충 대답하며 슬그머니 엄지와 검지로 하트 모양을 만들어 보였다.
오호라. 카미앙 주제에 내가 변한 걸 눈치챘다 이건가. 그렇지만 내 변화를 알아차렸다고 해서 아직까진 날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 것 같진 않았다.
“흠흠, 그대는 잠깐 나와 할 이야기가 있지 않소? 신관님은 피곤하실 테니 먼저 보내드리고 그대는 잠시 나와 얘기 좀 하지.”
말 잘 듣는 사냥개에 부리듯 하는 것은 이전과 같았다.
“지금요?”
“마침 내가 한가한 시간이니 말이오.”
나 대신 크로버가 카미앙의 말을 받았다.
“사실 저보다 녹시아 님이 더 힘드실 겁니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강철 체력인 녹시아의 육체는 며칠을 쉬지 못했음에도 쌩쌩했지만, 과도한 업무에 내 정신이 지쳤다고나 할까.
“아아, 녹시아 경은 걱정 마시오. 전쟁터에서도 쉬지 않고 활약했던 사람이오. 다리스 대장은 병사들을 시켜 신관님을 신전으로 모시게.”
나에 대한 배려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그 말이 얄미워서라도 얼른 쉬러 가고 싶었다.
난 ‘이사님의 잔소리 흘려듣기’ 스킬을 시전했다. 정확히는 시전하려고 시도했다.
아직은 물고기라 카미앙의 말을 무시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내가 시스템 창을 확인하는 사이 카미앙을 호위하던 사람들이 멀찍이 물러났다.
“자, 이제 무슨 일이 있던 건지 설명해 보시오.”
이렇게 된 거 한번 해보자는 심정으로 또다시 스킬을 사용했다. 필살기라도 사용하는 기분으로 말이다.
칭호가 변했더니 스킬도 레벨업을 했나보다. 앞으로는 내 마음과는 전혀 다른 생뚱맞은 선택지가 튀어나오진 않을 모양이었다.
<1. 좀 전에 말씀드린 게 전부예요.>
<2. 제 뛰어난 검술로 예지의 신관님을 구해온 거죠.>
게다가 선택지의 느낌도 미묘하게 변한 듯했다. 극단적인 대답 대신 무난하지만 비굴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들로 말이다.
“좀 전에 말씀드린 게 전부예요.”
단순한 대답이었지만 다 들었으면서 귀찮게 뭘 물어보느냐는 듯한 뉘앙스가 녹아있었다. 그게 마음에 들었다.
“그대가 성밖에 왜 나갔지? 그것도 야심한 밤에?”
간단한 거짓말이었지만 카미앙 앞이었다. 혹시 몰라 다시 한번 스킬의 힘을 빌렸다.
“성안에만 있으니 답답해서요. 늦은 시간인 줄 알면서 충동적으로 나갔죠. 깜박하는 사이에 밤이 돼버렸고요.”
“…그런가?”
“네, 그래요.”
“그래, 그러니까 ‘내가’ 예지의 신관을 찾는 걸 알고는 그대가 나섰단 말이군.”
“네?”
“다리스에게 들었소. 신관을 찾아다니다가 그대를 만났다고.”
그러니까 다리스를 만난 것과 내가 예지의 신관을 호위한 게 그런 식으로 연결이 된다고?
눈을 잠시 감았다 뜨며 고개를 흔드는 모습이 ‘하여튼 내게 필요한 일이 생기면 알아서 나서는군.’이라고 말하는 듯했다.
그래, 착각은 자유니까. 어차피 내 몇 마디로는 고쳐질 병도 아니었다.
“그럼 저도 이만 들어가서 쉬고 싶은데.”
“잠깐만.”
카미앙이 내 팔을 붙잡았다.
“무슨 일이 있었나? 달라졌군.”
“뭐가요?”
“내가 바본 줄 아나? 좀 전에 나를 향해 하트를 보냈잖소.”
내가 카미앙에게 그런 짓을 했다고?
“남들 앞에서는 제발 티 나는 짓 좀 하지 마시오. 전에는 안 그러더니 사람이 점점 부끄러움이 없어지는군.”
공략 대상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한 제스쳐를 자신에게 날리는 하트로 오해한 모양이었다.
이거 일 년 치 이불킥 감인데. 진실을 말해 줄 수 없어 아쉬울 따름이었다.
“며칠 전만 해도 그렇지. 외박이라니. 그게 미혼의 백작 영애가 할만한 행동이오?”
백작 영애? 난 내 귀가 잘못된 줄 알았다.
“대체 왜 외박했는지 말해 보시오.”
나야말로 대체 왜 내가 외박을 한 것에 왜 이렇게 집착하는지 궁금했다. 평소에 녹시아를 아끼던 것도 아니면서.
내 의지와는 달리 입술이 달싹거리는 게 느껴졌다. 아직도 카미앙의 말이라면 뭐든 들어주고 싶은 못난 몸이었다. 괜한 말을 떠벌리기 전에 스킬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1. 왜 외박을 하면 안 되는 거죠?>
<2. 저는 백작 영애가 아니라 녹시아 경 아니었나요?>
“저는 백작 영애가 아니라 녹시아 경 아니었나요?”
내 대답에 카미앙은 몹시 당황한 듯했다. 제가 잘못 들은 게 아닌지 눈썹을 찌푸리며 귓가를 만지기까지 했다.
나는 이 여세를 몰아붙이기로 했다.
“기사인 저는 전쟁터에서 야영도 자주 한 몸인데요.”
기대만큼 앙칼지고 단호한 어조는 아니었지만, 그럭저럭 할 말을 제대로 쏟아냈다.
“전쟁터와 바렌시드를 비교하는 거요? 기가 막힐 노릇이로군. 그건 특수상황이었다는 생각은 안 해봤소?”
바렌시드에 처음 상경한 시골뜨기를 걱정해서 하는 말이라고 들릴 법도 했다. 진짜 녹시아라면 카미앙의 말투가 좀 저래도 약혼녀의 신변을 걱정하는 거라 착각할지도 모르지.
‘그럼 저쪽에 서 있는 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려나.’
카미앙의 명령대로 열 걸음 정도 떨어져 서 있긴 했지만 온 힘을 다해 나와 카미앙의 대화에 귀를 귀울이고 있는 사람들 말이었다.
“설마 내가 그대를 녹시아 경이라 불렀다고 시위하는 거요?”
“그건 아니지만….”
“그럼, 말해 보시오.”
“무얼요?”
느릿한 목소리로 답답한 대답을 이어가는 건 굳이 스킬을 사용하지 않아도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덕분에 카미앙의 목소리가 커졌다.
“대체 누구와 무얼 하다가 어디서 잔 거요?”
“시가지에 있는 카페에서 사람들과 시간을 좀 보냈어요”
“카페에서 밤새?”
“네.”
“그건 카페가 아니라 술집 아닌가?”
“걱정 마세요, 여자들 뿐이었으니까. 수다를 좀 떨었을 뿐이에요.”
“설마 그대가 남자들과 있었을까 봐 내가 이러는 거라 생각하는 거요?”
“물론 아니시겠지요. 그런데, 저쪽에 서 계시는 분들도 그렇게 생각하는지는 잘 모르겠네요.”
“마음에 두고 있는 백작 영애의 사생활을 질투하는 왕세자님처럼 보일지도 몰라요. 물론 저는 아니라는 걸 알고 있지만.”
그제야 카미앙은 자신의 목소리가 그들에게까지 들릴 수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듯했다.
날 정신 나간 영애로 몰아가며 약혼 사실을 부인했는데 이런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여봤자 본인만 불리해질 뿐이었다.
“아무튼, 다음부터는 무슨 일이 있어도 외박 따위는 하지 마시오. 파르미엔 백작가의 가정교육을 의심케 하는 일이니.”
난 왕가의 인성교육이 의심된다. 이 녀석아.
카미앙은 손짓해 사람들을 불렀다. 나와의 대화가 누구나 들어도 상관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 것 같았다.
한결 편안해진 얼굴로 카미앙이 다시 입을 열었다.
“오늘 일을 보니 그대도 근위대 활동에 관심이 많은 것 같은데.”
근위대 권유는 참 끈질기게도 이어졌다. 혹시 게임의 스토리대로 흘러가게 만들려는 우주의 힘이라도 작용하는 건가 싶을 정도였다.
“오늘 일처럼 날 위해, 내 주변에서 늘 대기하며, 명을 받드는 게 근위대의 일이오. 평소에 그대가 하고 싶었던 바로 그 일이지. 그렇지 않소?”
이대로 두고 볼 수 없는 착각이었다. 난 이제 어장 속 물고기가 아니라고, 착각 그만하시라고 알려줘야 했다.
“다시 한번 기회를 줄 테니 잘 생각해 보시….”
난 카미앙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가 그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과묵한 녹시아에게는 말보다는 행동이 더 쉬운 모양이었다. 아니면 칭호가 바뀐 덕일지도 몰랐다.
“이,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카미앙은 손을 뒤로 빼내려 했지만, 녹시아의 손아귀를 벗어날 수가 없었다.
‘너만 사람 팔목 잡을 줄 아나 본데, 나도 할 수 있다고.’
나는 카미앙의 손목을 가볍게 돌려 손바닥이 하늘을 향하게 했다.
그리고는 그 위에 천천히 글씨를 써 내려갔다.
웃기지 마.
“파르미엔 드 녹시아. 정말 무례하군!”
카미앙은 손목을 잡혔다는 사실에 흥분한 나머지 내 메시지를 알아채지 못한 것 같았다.
‘이 정도면 만족이지.’
나는 슬쩍 웃음을 지으며 손아귀에 힘을 풀었다. 카미앙이 거칠게 손을 빼내며 다른 손으로 그곳을 부여잡았다.
지금까지 본 카미앙의 얼굴 중 가장 찌푸러든 얼굴이었다. 미간에 어찌나 힘을 주고 있는지 그 부분만 하얗게 질린 것 같기도 했다. 반면에 두 볼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래, 불쾌하고 열받는다 이거지? 내가 바란 게 바로 그거다.’
그 상태로 한참이나 날 흘겨보던 카미앙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파르미엔 경. 그대는 내 명이 있을 때까지 당분간 내 근처에 접근 금지요!”
‘응?’
내가 놀란 건 카미앙의 명령 때문이 아니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시스템 메시지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