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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렘 게임의 공략캐가 되었다-21화 (2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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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버가 도망친 날, 예지의 신관이 보란 듯이 나타났다. 당신을 납치한 향료 길드에서 보면 이상한 일 아니겠어요?”

“그것도 그렇군요.”

“그리고 어떻게 알게 된 건지 모르지만 근위대장이 당신을 찾고 있었어요. 이중생활을 하는 거 왕실에도 비밀로 하고 싶다면서요.”

“네, 그렇죠.”

난 그 알리바이를 만들 준비를 하느라 얼마나 바빴는데 지나치게 태평한 반응이었다.

“그럼 계획은요? 명색이 예지의 신관이잖아요?”

역시, 얼굴을 가리니 말하기가 한결 수월했다.

“신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번 일은 파르미엔 가문의 녹시아가 다 해결할 것이다. 라고요. 전 그것을 믿고 녹시아 님을 지지할 뿐입니다.”

그것참 나만 일복 터지는 엄청나고도 신통한 예언이었다. 이럴 줄 알고 내가 마룬시에의 레시피 대로 비약을 만들어왔으니 말이다.

바렌시드에 정말로 신이 있다면 녹시아의 껍데기를 뒤집어쓴 이방인을 좋아하지 않는 게 분명했다.

“신관님이 예지하신 이 일꾼은 안 그래도 준비해온 게 있답니다.”

“일꾼이라뇨. 그리 표현하시면 제가 너무 송구스러운데…. 근데 뭘 준비해오셨을까요?”

크로버가 의복이 담겼던 보따리를 기웃거렸다. 두 번째 선물은 그쪽이 아닌 여기에 있단다. 난 품속에서 작은 약병을 꺼냈다.

“단기 기억을 지우는 향료에요.”

“네? 그렇게 위험한 물건이!”

“어째 좋아하시는 것 같네요.”

“아닙니다. 그래도 제가 명색이 신관인데…. 사실 신관들이 향료를 좀 좋아하긴 하죠.”

신관도 사람이었다. 기억을 지우는 아이템이라면 눈을 빛낼 만하지.

“물론 완벽한 물건은 아니에요. 보름 정도 지나면 지워졌던 기억이 다시 돌아온다고 하더라고요. 물론 그래도 지금 상황에선 꽤 쓸만한 물건이죠.”

나는 한 손엔 나무 막대기를 쥐고 쓰러진 납치범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녹시아 님?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이렇게 써야 하거든요.”

쪼그리고 앉아 납치범의 콧구멍을 쑤시는 게 참 없어 보이긴 했다. 실제로 마룬시에도 사용법이 너무 더러워 절대 쓰지 않는 향료라고 했다.

“이게 향료의 사용법이에요. 콧속에 묻히는 거죠.”

하지만 구하기도 쉽고 가격도 비교적 저렴했다.

“저런, 진작 말씀하시지. 레이디께서….”

크로버가 말을 멈추고 내 눈치를 보았다. 레이디라고 불렀다가 내게 한마디 들은 게 떠오른 모양이었다.

그래, 불과 몇 분 전의, 크로버의 얼굴을 보지 못했던 나는 꽤 단호했지.

크로버는 단어를 바꿔 말을 이어갔다.

“생명의 은인께서 이런 일까지 하시는 걸 보고만 있을 파렴치한은 아닙니다.”

난 크로버에게 가만히 나무 막대기를 넘겨줬다.

“… 다 됐습니다.”

크로버가 손을 탁탁 털며 몸을 일으켰다. 이것으로 길드의 총무까지 꼼꼼하게 작업을 끝냈다.

“좋아요. 그럼 이제….”

“잠시만요. 녹시아 님. 이건 어떨까요?”

크로버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제가 편지를 한 장 남기는 겁니다. 납치범 대장에게 말이죠.”

“어떤 편지요?”

“아까 제가 게임을 하고 있던 걸 보셨죠? 그건 대장을 대신해서 하고 있던 겁니다. 매번 지기만하고 어찌나 화를 내던지, 그러다간 분에 못 이겨 제 목이라도 칠 것 같기에 대신 이겨주겠다고 했죠.”

“아…. 그렇게 된 거군요.”

“설마, 제가 하고 싶어서 저 몹쓸 인간들과 게임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신 건 아니겠죠?”

“그럼요. 당연히 엄청난 이유나 협박이 있었을 거로 생각했습니다.”

찔리는 게 있어서인지 책을 읽는 듯한 대답이 튀어나왔다.

“흐음?”

난 크로버의 반응은 무시하고 말을 이어나갔다.

“그래서 계획이 뭐죠? ‘카드 게임에서 이겼으니 나갑니다.’ 이런 편지라도 남기실 건가요?”

“맞아요. 안 그래도 대장이 이렇게 계속 이겨준다면 그냥 풀어줄 수도 있다고 큰소리쳤었거든요. 물론 진심은 아니었겠지만 이렇게 된 거 한번 써먹어 봐도 좋지 않을까 해서요.”

그렇게 크로버는 게임을 하던 테이블 위에 편지를 한 장 남기고 나왔다.

‘저를 풀어주신 대장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편지였다.

“자, 이제 성 밖으로 나가죠.”

“성 밖이요?”

크로버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다시 물었다.

“우리 어디 가나요?”

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바렌시드로요.”

***

“전 정말 여러 번 감동했습니다. 녹시아 님께서 저를 위해 이렇게 많은 준비를 하셨다니.”

“신경 쓰지 마요. 원래 책임감이 강해서 그런 거니까.”

하도 오랜만에 들어서 그런지 칭찬이 낯설었다.

“그래도 제가 다른 지역으로 휴가 갔다 온 것처럼 꾸밀 생각을 하시다니요.”

크로버와 예지의 신관이 동일 인물이라는 의심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성 밖에서 들어오는 시늉이라도 해야 했다.

“대체 남쪽 성벽에 그런 틈이 있는 건 어떻게 아셨습니까?”

“군인들이 알고 있는 기밀이에요. 너무 자세히 묻진 마세요.”

크로버가 다시 물어볼 생각조차 하지 않도록 단호하게 답했다.

카미앙이 알고 있는 비밀통로였으니, 플레이어였던 내가 아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크로버에게 이렇게 설명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참, 우리가 어떻게 만났는지 대답은 잘 기억하고 계시죠?”

크로버가 단순히 휴가를 갔다 온 거로 끝나면 내가 명성을 올릴 기회가 없었다. 그래서 바렌시드로 돌아오다 도적의 습격을 당한 신관님을 내가 구했다는 스토리를 추가했다.

그쪽이 이렇게 아무것도 없이 갑작스레 돌아온 것을 더 잘 설명할 수 있기도 했고 말이다.

“걱정 마세요. 그런 건 제가 또 잘합니다.”

그렇지, 나와는 달리크로버는 능청 떠는 게 익숙해 보였다.

워낙 늦은 시간이었기에 얼마 지나지 않아 동이 텄다. 바렌시드의 성문이 열렸다.

“예지의 신관입니다. 지혜의 성소에서 수련하고 돌아오는 길입니다.”

“파르미엔 드 녹시아예요. 예지의 신관님을 호위하는 중이고요.”

크로버와 나는 묻지도 않은 것을 떠들어 대며 검문소를 통과했다.

“이걸로 다 끝났군요.”

“아직이에요. 신관님이 무사히 신전으로 들어가는 것까지 봐야 안심할 수 있겠거든요.”

크로버가 또다시 감탄사를 연발했다.

‘당연히 아직 끝이 아니지. 아직 명성도 못 올렸는데. 내가 널 구해온 걸 사람들이 알아줘야 하지 않겠니.’

그런 의미에서 마차보다 걸어가는 것을 선택했다. 느긋하게 걷다 보면 다리스 대장이라도 만나지 않으려나.

“정말 신탁이었어요?”

그냥 걷다 보니 지루하기도 해 난 궁금했던 걸 물어보기로 했다.

“저한테 구해달라는 쪽지를 남긴 게 정말 신탁 때문이었나 해서요.”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나로선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나와 신뢰가 있던 사이도 아닌데 말이다.

“물론 신탁이었습니다. 곧 신변에 위기가 닥칠 테지만 정원에서 만난 기사가 절 구해줄 거라는.”

가벼운 웃음소리가 들렸다.

‘웃는 얼굴은 또 얼마나 아름다울까.’

무의식적으로 든 생각이었다. 나는 화들짝 놀라며 허벅지를 내리쳤다.

‘정신 차려라. 난 이성적인 사람이다. 이성적인 사람.’

마치 주문이라도 외듯 되뇌고 있는데 크로버가 웃음기 묻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순간 자신이 생겼지요.”

“무슨 자신이요?”

“기사님께서 반드시 절 구하러 와 주시고, 비밀도 지켜 주실 거라는 자신.”

“왜죠?”

“녹시아 님께서는 제 얼굴을 보셨으니까요.”

내가 크로버의 얼굴을 봐?

“아, 정원에서.”

“네, 잠깐이었지만요.”

어장 속 물고기의 제약을 받고 있던 내가 본 거라고는 마른오징어 한 마리뿐이었지만.

“제 얼굴을 보신 분이 제가 위험에 처한 걸 그냥 두고만 있으실 리가 없죠.”

뻔뻔한 대답에 대신관이 자신을 선택한 이유가 얼굴이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처럼 비웃어 주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는 불가능 한 일이었다. 미인의 얼굴이란 상당히 강력해서 아직도 그 잔상이 눈앞에서 아른거리고 있었다.

“안 그런가요?”

그래, 그렇다고. 네 말이 맞다고!

크로버의 얼굴은 내가 지금까지 만났던 나쁜 놈 중에 가장 잘났다. 아니, 그런 나쁜 놈들과 비교를 한다는 게 미안해 질정도였다.

그리고 이런 얼굴은 이시아에게도 녹시아에게도 상당히 강력한 무기였다.

그걸 잘 알고 있기에 난 가능하면 말을 섞지 않고 얼굴도 보지 않으려 애를 쓰는 중이었다.

다행히 크로버는 지금의 침묵이 아까와 같은 이유에서라고 생각한 것 같았다.

“아하하, 뭐 제 얼굴이 기사님의 취향이 아니실 수도 있지요. 그래도 성물을 갖고 싶어 하셨던 건 확실하죠?”

“아, 성물!”

그것 때문에 여기까지 왔는데 크로버의 얼굴을 본 순간 전부 잊고 있었다.

“간절하게 원하시는 것 같았거든요. 그 팔찌를 얻기 위해서라면 저를 찾아주실 줄 알았습니다.”

“그럼 그 팔찌는 언제….”

그때 누군가가 우리 앞을 가로막았다. 고개를 돌리자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카미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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