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렘 게임의 공략캐가 되었다-20화 (20/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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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봐, 위험하니까 얌전히 있어!”

일단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나도 알고 있었다.

크로버는 창살에서 적당히 떨어져 있었고 적들은 그를 신경 쓸 만한 여유가 없었기에 충분히 안전했다.

크로버도 그것을 알고 이러는 듯했다. 꼭 운동 경기를 관람하는 관중 같았다.

차라리 비등비등한 실력을 갖춘 상대와 겨루느라 저 말소리를 들을 여유가 없었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마지막! 마지막 일격! 그렇지! 레이디께서 승리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덤빈 사내가 고꾸라지자 크로버는 중계를 마치며 손뼉을 쳤다.

“레이디, 듣던 대로 훌륭하십니다. 저런 것들은 상대가 안 되는군요.”

“정말 얄밉네요.”

“네? 저 말입니까?”

한마디는 하고 넘어가야 속이 후련할 듯했기에 결국 ‘지금이야말로 입을 열 타이밍’ 스킬을 사용했다.

“도움받는! 주제에 레이디란 말은 그만 쓰시는 게 어떨까 싶네요. 전 공주님이라도 구하러 온 기사가 된 기분이거든요.”

그 말을 던지고는 쓰러진 녀석들의 주머니를 뒤지며 감옥 열쇠를 찾았다.

“파르미엔 가문의 녹시아에요. 레이디는 집어치우고, 이름으로 불러요.”

대장의 안주머니에서 열쇠를 발견했다. 난로 된 굵은 열쇠 꾸러미를 보란 듯이 쩔렁이며 창살 앞으로 걸어갔다.

“감사합니다.”

“왜요?”

“절 여기서 구해주셨으니 당연히 감사하죠.”

“아직 완전히 구해준 건 아닌데요?”

난 크로버의 눈앞에서 열쇠를 흔들어 보였다.

“제가 이걸로 문을 열고 당신을 꺼내줘야 완벽하게 구해줬다고 할 수 있겠죠.”

“맞는 말씀입니다.”

크로버는 어서 그렇게 해 달라는 듯 창살에 바짝 붙어 날 쳐다보았다.

‘저 얼굴이 그렇게 잘났단 말이지.’

내 눈에는 여전히 오징어일 뿐인데, 어젯밤 질리도록 들었던 찬사를 떠올리니 웃음이 새어 나왔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 좀 해 보시죠. 제가 당신을 찾느라 얼마나 애먹은 줄 알아요?”

“아, 그런 거라면 신전으로 돌아가서 얼마든지 말씀드리겠습니다.”

나는 검지를 좌우로 까닥거렸다.

“지금이 아니면 제대로 된 설명을 못 들을 것 같아서 하는 말이에요.”

“그것이…. 이야기가 좀 길어서. 녹시아 님도 힘드실 거 아닙니까. 어서 쉬셔야죠.”

자꾸만 말을 돌리는 게 더 수상했다. 다른 건 몰라도 난 이 한 가지 만큼은 꼭 알아내야겠다고 마음먹은 참이었다.

“그럼 크로버가 누군지 그거나 얘기해 봐요. 신관이 왜 이중 신분으로 활동하는 거죠?”

나는 자리에 주저앉으며 이야기를 꼭 들어야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신관의 신분으로는 아무래도 여러 가지 제약이 많으니까요.”

“무슨 제약을 말하는 거죠?”

“바렌시드에 일어나는 이런저런 사건들이요. 지금처럼 향료 연구회가 물건을 독점해 비싸게 유통 한다든지, 이름만 그럴싸한 상인 보호 연합회가 상인들에게 보호비 명목으로 돈을 뜯어 간다든지…. 이런 일들에 신관이 직접 개입하기는 어려우니 크로버란 이름으로 돌아다니는 겁니다.”

크로버는 이게 전부라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마침 신관은 남들에게 얼굴이 노출되지 않으니 가짜 신분으로 활동하기도 편하고요.”

신비감을 위해 디자인한 신관의 의복이 이렇게 큰 역할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 디자이너가 들었으면 뿌듯해할 만한 일이었다.

“근데 왜 당신이 그런 걸 신경 써요? 슈퍼맨도 아니고….”

“네? 슈퍼 뭡니까?”

“아뇨, 그런 건 위병대나 아니면 나라를 다스리는 분들이 신경 써야 할 문제가 아닌가 싶어서요.”

갑자기 카미앙의 얼굴이 떠올랐다. 나라를 다스리는 분께서 신경 쓰지 않고 계실 것 같긴 했다.

“대 신관님의 신념이십니다. 이전에는 성 기사단이 있어서 사람들을 돕거나 나라를 지키거나 했는데 성 기사단도 해체된 지금 신전이 바렌시드를 도울 방법은 이런 방법밖에는 없다고 생각하신 거죠.”

“그럼 대 신관님도 크로버의 존재를 알고 계신 건가요?”

“물론이죠. 아, 다른 신관들에게는 비밀입니다.”

“그럼 신전에서 당신이 사라진 것을 비밀로 하려 했던 게….”

“대 신관님의 지시가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왜 하필 크로버, 당신이었죠?”

본업 외의 업무까지 하는 크로버에게 약간의 동정이 일었다.

“그거야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크로버는 잠시 말을 끊더니 자신의 얼굴을 내게 바짝 들이댔다.

“이 얼굴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 잠시 정적이 흘렀다. 잠시나마 그를 동정했던 내가 어리석었다.

‘증언도 있었으니 어느 정도 근거 있는 소리겠지만.’

하지만 어쩌랴. 내 눈에는 그저 마른오징어 한 마리일 뿐인데.

되려 분위기가 가라앉은 것을 눈치챈 크로버가 헛기침했다.

“이 정도면 답이 되었으려나요?”

난 대답 대신 쇠창살에 달린 자물쇠에 열쇠를 집어넣었다.

크로버가 철장 밖으로 발을 내딛는 순간 시스템 메시지가 요란스럽게 등장했다.

- 카미앙의 유일한 선물이었던 목걸이 처분하기 (완료!)

- 카미앙이 마음에 든다고 했던 긴 머리 자르기 (완료!)

- 내가 카미앙만을 위한 기사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완료!)

<총 세 개의 퀘스트를 완료하였기에 칭호가 한 단계 상승합니다.>

드디어! 어장 속 물고기에서 탈출했구나!

좀 더 격렬하게 기뻐하고 싶었지만 그럴 형편이 아니었다.

일단 오른쪽 눈으로 윙크를 하며 상태창을 불러냈다. 옆에서 크로버가 눈이 아프시냐고 묻는 건 가볍게 무시하기로 했다.

「녹시아 폰 파르미엔

칭호 : 어장을 탈출한 물고기

다음의 제약에서 벗어났습니다.

- 어장 주인이 세상에서 최고로 잘생기고 멋져 보입니다.

- 어장의 주인 이외의 이성은 오징어로 보입니다.」

‘그런데…. 나, 아직도 물고기야?’

어장에서 탈출하기 했지만 내 상태는 아직도 물고기였다. 어장 밖으로 나오긴 했지만 언제든지 다시 돌아갈 수 있는 그런 상태라는 건가.

하긴, 좋아했던 사람을 한 번에 잊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술이 한잔 들어가면, 야근하고 들어가는 길목에 문뜩문뜩 생각이 나곤 했으니까.

아직 물고기인 것이 불만스럽긴 했지만 이해는 갔다.

「칭호에 따른 제약이 남아있습니다.

1 분하거나 서운한 일이 있어도 어장 주인에게 말할 수 없습니다.

2 어장 주인의 말은 다 들어주고 싶습니다.」

제약 두 가지가 아직까지 남아있었다. 이 두 개는 다음 칭호로 올라가야 사라지는 건가?

“음….”

“녹시아님? 역시 많이 피곤하신 모양이네요.”

“아니, 아녜요. 잠시 생각할 일이 있….”

시스템 메시지 때문이라고 할 수는 없으니, 최대한 대수롭지 않게 답하려던 찰나, 크로버를 돌아본 그 순간.

“….!”

난 숨 쉬는 것도 잊은 채 얼어붙었다.

살짝 헝클어진 곱슬곱슬한 흑발, 그 틈으로 보이는 기다랗고 나른한 눈, 매끈한 코와 순한 눈매에도 전혀 순해 보이지 않는 또렷한 회색 눈동자….

“왜 그렇게 보세요?”

“헙.”

나도 모르게 너무 빤히 쳐다본 듯해, 얼른 시선을 내렸다.

‘미친! 진짜 세상 말아먹을 얼굴이었잖아?‘

지금까지 봤던 오징어는 이미 기억 저편으로 사라졌다. 과하게 찬양하던 길드 직원의 말이 백번 옳았다.

며칠간 제대로 씻지도 못했을 텐데 저렇게 빛이 나는 얼굴이라니.

게다가 사람 빨아들일 것 같은 저 눈은 뭐고?

‘위험해.’

난 잡념을 털어내듯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결코 직업으로 사람을 판단할 마음은 없었지만 저게 정녕 신관의 외모란 말인가.

이럴 줄 알았으면 예지의 신관도 적당한 일러로 뽑아놓을 걸 하는 후회마저 들었다.

때마침 시스템이 새로운 메시지를 보냈다. 명성? 이름만으로도 무슨 스테이터스인지는 알겠지만 이게 어떤 역할은 하는 것인지는 설명이 필요했다.

꺼졌다.

“신성력이 또 바닥난 모양이네.”

나도 모르게 중얼거린 소리를 크로버가 들었나 보다.

“그게 문제 셨습니까? 걱정 마십시오. 제가 기도를 해 드리겠습니다.”

크로버가 자신이 도움이 될 수 있어 기쁘다는 듯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잡으려는데 또다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나도 모르게 잽싸게 양팔을 등 뒤로 숨겼다.

“녹시아 님?”

“아, 저기, 그게… 기도는 꼭 손을 잡고 해야 하나요?”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크로버가 눈을 깜박였다.

“지금 험한 일을 끝낸 덕에 손이 더럽기도 하고 또….”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크로버가 덥석 내 손을 잡았다.

“절 구해주시느라 말이죠.”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난 그 손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눈을 꼭 감았다.마치 굉장한 기도라도 하려는 사람처럼.

분명 전에도 잡았던 손이건만, 오늘따라 유난히 긴장됐다.

충전이 끝나자마자 재빨리 손을 빼냈다.

“다 됐어요. 감사해요.”

내가 듣기에도 어색한 목소리였다. 설마 얼굴까지 빨개진 건 아니겠지.

이런 상황이었지만 상태창은 확인해야 했기에 잽싸게 뒤로 돌아 눈을 찡긋거렸다.

“녹시아 님, 아무래도 싸우시다 눈을 다치신 것 같은데….”

“아닙니다! 제발 걱정하지 마세요.”

미래지향적인 모션 인식 시스템 덕분에 상태창 하나 보는 것도 맘대로 하지 못하는구나.

그러니까 명성이 올라가면 내 칭호가 변한다는 뜻이었다. 일반 게임의 레벨과 비슷한 개념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았다.

아니지, 크게 다른 점이 하나 있었다. 레벨을 올리는 거라면 성 밖으로 나가 짐승이라도 때려잡든지 하면 된다.

‘하지만 명성을 그런 방법으로 높일 수 있을까?’

나에 대한 세간의 평판이 산짐승을 때려잡는다고 좋아지진 않을 테니 말이다.

결국,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일을 하라는 것이었다. 이 녹시아라는 이름을 널리 널리 알릴 수 있도록 말이다.

‘이래 봬도 전쟁 영웅인데 명성이 빵이라고?’

이게 다 홍보가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개선식 때도 사람들 눈에 제대로 띄지도 않는 맨 뒷줄에 서서 모든 공을 카미앙에게 돌렸으니 말이다.

‘크로버를 구한 건 꼭 공로를 인정받고 말겠어.’

잔인하고 악랄한 납치범으로부터 예지의 신관님을 구해낸 건 충분히 명성이 올라갈 만한 일일 테니까.

“이런 상황을 대비해 준비해 온 물건이 있어요.”

나는 일 층으로 성큼성큼 올라갔다.

정신을 잃은 채 널브러져 있는 납치범과 부서지고 쓰러진 상자들을 지나쳤다. 내가 들어 올린 것은 출입구 쪽에 뒹굴고 있는 가방이었다.

사실 가방이라기보단 천으로 만든 보따리에 가까웠다. 그 안에서 주섬주섬 신관의 의복을 꺼냈다.

“크로버와 예지의 신관은 다른 사람이라면서요. 신전으로 돌아갈 거면 신관복이 필요하지 않겠어요?”

“역시 녹시아 님, 이런 상황을 대비해 제 옷까지 준비해 주시다니요. 정말 감동입니다.”

물론 어제의 내가 상상한 이런 상황과 지금의 이런 상황은 좀 달랐다.

‘그때는 그저 크로버가 예지의 신관인 걸 들키지 않게 하려던 것뿐이었지만.’

지금은 저 부담스러운 얼굴을 가리는 것 역시 매우 중요했다.

“하지만 이걸로 완벽하게 동일 인물인 걸 감출 순 없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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