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뭐 그렇죠. 녀석이 외모는 괜찮았죠.”
아무리 엑스트라라 할지라도 게임에서 굳이 못생기거나 험상궂은 캐릭터를 그릴 필요는 없을 테니 말이다.
“그냥, 괜찮다 정도가 아니죠!”
직원이 테이블을 가볍게 쾅쾅 두드렸다. 괜찮은 외모라는 내 대답이 그녀의 안에 있는 무언가를 건든 게 분명했다.
“얼굴로는 왕세자님께도 전혀 뒤질 게 없다는 게 저의 의견입니다. 게다가 어딘가 모르게 위험하고 퇴폐적인 분위기가 있으시잖아요? 그게 또 매력이죠.”
사람들과 신뢰를 쌓긴 쌓았는데 그게 다 얼굴로 쌓은 신뢰였나보다. 이 정도 반응이라면 팬클럽이 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게 표현하기가 어렵지만, 독이 든 성배, 가시를 잔뜩 두른 장미, 날 망치러 온 구원자. 이런 느낌이죠. 뭔지 아시겠어요?”
... 아니, 난 그냥 성배, 가시 없는 장미, 구원만 해주는 구원자가 좋은 사람이었다.
크로버의 뛰어난 외모에 대한 찬양을 한참이나 들어야만 했다. 물론 성과가 없는 건 아니었다.
‘크로버와는 비교가 안 되는’ ‘감히 비교조차 할 수 없는’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연구회의 총무 카를루의 외모에 대한 단서를 얻을 수가 있었으니까.
일반적인 수사라면 꽤 도움이 되는 정보였다. 하지만 불행히도 난 제약에 걸린 물고기였다. 모든 남자의 얼굴이 오징어로 보이는 지금 저런 정보를 활용할 수가 없었다.
***
“으메, 머리 잘랐다더니 이게 훨 잘 어울리는구먼.”
오후의 수다 카페의 문을 열자 주인이 날 반갑게 맞이했다.
“어디, 전에 이야기하던 일은 잘돼 가는감?”
“글쎄요, 요즘 다른 일로 정신이 없어서….”
“그것도 좋네! 그려, 바쁘다는 핑계로 그놈하고 슬슬 멀어지는 거지.”
바쁘다는 핑계로 멀어질 만한 상대는 아니라는 게 아쉬웠다.
“저녁으로 먹을 만한 거 있어요? 배가 고픈데.”
비밀 구출 작전을 위해 이것저것 준비하다 보니 점심도 먹질 못했다.
“소시지 모듬허구 감자 수프를 기가 맥히게 해서 가져올 테니 조금만 기다려. 지금 사람이 많아서 말이지.”
주인의 말대로 카페의 테이블은 빈 곳이 하나도 없었다.
나처럼 저녁 식사를 하는 사람보다는 술을 마시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카페라더니 술집으로 더 흥하고 있는 듯했다.
‘이 정도면 바렌시드의 핫플이라해도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네. 근데 대체 지금 카를루가 여기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어쩔 수 없지. 오징어 머리만 득실거리는 것처럼 보이는 나로서는 주인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뭐 좀 물어보고 싶은데. 바빠요?”
“아냐, 뭐든 물어봐!”
주인이 소시지가 가득한 접시를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제가 은밀히 사람을 찾고 있는데 말이죠.”
“은밀히 사람을 찾아?”
주인은 나를 따라 목소리를 낮췄다. 어차피 바이올린 연주 소리에 묻혀 다른 사람에게 들리진 않을 것 같았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누굴 찾는디?”
“그게 남잔데.”
남자라는 대답에 주인이 몸을 내 쪽으로 기울이며 흥미를 보였다.
“남자? 드디어 그 양아치 말고 맘에 드는 사람이 생긴겨?”
“아뇨, 아뇨. 그런 게 아니라.”
“부끄러워 할 것 없어. 원래 딴 놈, 아니지 다른 사람으로 갈아타는 게 젤 간단한 일이여. 근데 그 사람을 우연히 만난겨? 누군지는 모르겠구?”
주인이 이렇게 넘겨짚는다면 그걸 활용하기로 했다. 납치범을 찾는다고 하는 것보다는 이쪽이 보안 유지에도 좋았다.
“사실 선…….”
“선?”
작전상이긴 했지만 선 자리라는 단어가 쉽사리 입 밖으로 나오질 않았다.
“그게 선 자리…….”
“선 자리가 들어온 겨?”
다행히 주인이 찰떡같이 알아들었다. 난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 어떤 사람이여? 이번엔 확실히 괜찮은 놈이래?”
“그걸 잘 모르겠어요. 그래서 자리를 만들기 전에 그 남자를 한번 확인해 보고 싶은데….”
“그려, 당연히 그래야지! 무턱대고 만나면 안 된다니까.”
“알다시피 저는 사람 보는 안목이 꽝이니까. 혹시 저 대신….”
“그려 그려. 걱정 말아. 내가 또 사람 보는 눈 하나는 끝내주거든. 근데 지금 그 남자가 여기 있는겨?”
“모, 모르겠어요. 얼굴을 본 적도 없거든요. 저녁에 이곳에 자주 온다는 얘기만 들었어요.”
“아항, 다 계획이 있어서 왔구먼. 어디 보자. 근디 달랑 이름 가지고는 내가 누군지 알아볼 수가 없는디.”
난 길드에서 들은 인상착의를 말했다.
“밝은 갈색 머리에 코는 약간 휘어지고 눈이 좀 크다고 하던데…. 혹시 생각나는 사람 있어요?”
“어디 보자, 어디 보자, 어디서 본 것 같기도 한데.”
주인은 콧소리를 섞어가며 노랫가락을 만들었다.
‘제발 있어라. 일 좀 빨리 끝내자.’
“저기!”
콧노래가 멈추며 주인이 내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오른쪽으로 창가에서 두 번째 자리에 파란 셔츠를 입은 남자가 맞는 것 같은데?”
‘그렇지! 일이 척척 진행되는구나.’
속으로는 쾌재를 부르고 있었지만, 겉으로는 떨린다는 듯 입을 열었다.
“어, 어때요? 괜찮아 보여요?”
“흠. 나라면 썩 권하고 싶은 사람은 아닌데? 저 남자도 그렇지만 같이 있는 일행 중 한 명이 좀 거친 사람이어서.”
거친 사람? 설마 크로버를 납치한 일당? 그럼 카를루가 범인인 확률이 올라가는 거 맞지?
“뭐여, 거친 사람이라고 했는데 왜 눈을 반짝여. 설마 아가씨 그런 타입 좋야하는겨?”
주인이 걱정된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니까 매번 나쁜 남자나 만나고 그러는 거라고. 이 선 자리는 딱 거절허구 다른…. 근디 저 사람 나가는구먼.”
“네? 나간다고요?”
안되지. 범인을 놓칠 수는 없었다.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가게 밖으로 나갔다.
‘파란 셔츠를 입은 남자랬지.’
파란 셔츠를 입은 오징어를 따라 얼른 나갔다. 바로 뒤따라 나온 덕분에 카를루와 그 일행을 찾을 수 있었다.
‘날이 흐려서 달빛은 흐리고, 이쪽은 너무 밝으니 잠시 따라 붙어볼까.’
일행은 세 명이었다. 한두 명이라면 몰라도 세 명부터는 내 얼굴을 숨긴 채로 상대하기는 힘들었다.
어두운 골목에 들어섰을 때 난 카를루를 불렀다.
“카를루 씨.”
“카를루 씨?”
내 목소리에 그의 일행이 동시에 반응했다.
“카를루 씨, 잠시만요.”
“카를루 씨, 지금 저 아가씨께서 부르잖아요. 크크크.”
오징어 무리가 내 말투가 우습다는 듯 자기들끼리 내 말을 흉내 냈다. 카페 주인이 말했던 대로 질 나쁜 놈들인 게 확실했다.
“뭐요?”
“이봐 카를루 씨, 여자잖아. 좀 상냥하게 이야기해 보라고.”
술을 많이 마신 것 같지도 않은데, 늘 이런 사람들인 건가.
“시끄러워. 절로 빠지라고.”
카를루로 보이는 오징어가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맞아요. 전 카를루 씨와 할 말이 있으니 좀 빠져주시겠어요?”
“오오, 뭐야 이 분위기는.”
“네에네에. 잡놈들은 빠져드리죠. 어디 잘해 보라고.”
보통 뒤가 켕기는 놈들은 조심하기 마련인데 어찌 된 놈들인지 그런 조심성도 없었다. 설마 납치와는 아무 관계가 없나? 괜히 불안해졌다.
“뭐요? 말 해보시오.”
카를루가 퉁명스럽게 말을 내뱉었다.
이렇게 된 거 단도직입적으로 가 보자. 난 일단 마케터의 혜안 스킬을 발동했다.
그리고는 준비해 온 종이를 카를루의 얼굴에 대고 흔들었다.
“크로버는 우리가 데려갈게.”
카를루가 크로버를 납치했다는 가정을 한 것이었다.
칼을 들이대며 협박하는 게 더 편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갑자기 총무가 튀어버린다면 곤란했다. 가뜩이나 내가 길을 자주 잃었던 시가지 골목이었고 게다가 밤이었다.
“뭐라고?”
「뜬금없이 이게 뭔 소리야.」
이 반응으로는 카를루가 범인지 알 수 없었다. 난 한 번 더 그를 찔러 보았다.
“마에 님의 명령이야.”
마에는 마룬시에의 가명이었다. 향료 산업이 발달한 바이난 공국의 공녀답게 그녀는 마에란 이름으로 바렌시드의 향료 길드에도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잠깐만, 마에 님이라고?”
「그 이름이 여기서 왜 나와?」
“그래, 여기 이 사인 보이지?”
난 들이밀었던 서신을 상대의 눈앞에 대고 흔들었다. 미리 준비해온 작품이었다.
내가 자신 있게 사인을 위조할 수 있었던 건, 사실 마룬시에의 사인은 내 것이기 때문이었다.
초회판 이벤트로 준비한 캐릭터의 사인이 있는 일러스트 엽서. 평소에 글씨 좀 쓴다던 내가 그중 한 명을 맡게 되었는데 그게 바로 마룬시에였다.
“그러니까…. 마에 님이 크로버의 일을 알고 계신다고?”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드디어! 카를루의 입에서 크로버라는 이름이 나왔다. 이것으로 카를루가 납치범이라는 게 확실해졌다. 한결 마음이 여유로워졌다.
반면에 카를루는 내가 누구인지는 궁금해할 여유도 없어 보였다. 당연히 마에의 수하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는 희미한 달빛 아래 서신을 이리저리 비춰보며 제대로 된 사인인지 확인하고 있었다.
“그래, 열심히 확인해봐. 마에 님의 사인이 분명하니까.”
“좋아, 이건 그렇다 치고. 대체 왜 크로버를 데려가신다는 거지?”
「이건 애초에 그쪽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계획이었는데. 이해가 안 가는군.」
“그거야 당연히 크로버가 잘생겼기 때문이지.”
“잘생겨서…. 라고?”
“너도 봤을 거 아냐. 크로버의 얼굴. 마치 독이 든 성배, 가시를 잔뜩 두른 장미 같지 않아? 얼굴로는 이 나라의 왕세자와 비견해도 뒤질 게 없다던데.”
난 길드의 직원에게 들었던 말을 그대로 읊어주었다.
“… 겨우 그것만으로 마에 님이 길드의 일에 관여하신다고?”
「물론 얼굴이 잘나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지」
“미남이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 존재인지 잘 모르나 보네. 뭐 상관없어. 너한테 크로버를 내놔라 마라 할 건 아니니까. 이미 크로버는 우리가 데려가는 중이거든.”
“그게 무슨 뜻이야?”
「그럼 벌써 아지트가 털렸단 얘긴가? 진짠가?”」
오징어 머리가 나를 지긋이 째려보는 듯했다. 내 말을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되겠지.
“갑자기 크로버가 없어지면 놀랄까 봐 내가 친히, 친절하게도 마에 님의 서신을 전달해 주러 온 거야. 그럼 용건이 끝났으니 난 이만 가 볼게.”
“이봐! 이봐!”
「뭐야, 저 여자는? 그냥 간다니?
카를루가 날 불렀지만 난 그대로 퇴장하는 쪽을 선택했다. 카를루도 날 붙잡아 봤자 딱히 할 말은 없었는지 곧 포기하고 주변을 서성이기 시작했다.
내 말을 믿든 믿지 않든 총무 오징어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한가지였다.
‘그래, 얼른 움직여 봐.’
바로, 크로버를 감금해 놓은 곳으로 가는 것. 그곳에 가야만 내 말의 사실 여부를 판단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