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렘 게임의 공략캐가 되었다-16화 (16/95)

16

그렇게 와서 묻는 사람이 꽤 많았던 모양이었다. 신관은 크게 헛기침을 하더니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일단 신관과 대화를 이어가려면 예지의 신관이 사라지거나 납치를 당한 게 아닌 ‘휴가’를 갔다는 설정에 맞춰 질문할 필요가 있었다.

“그럼 예지의 신관님은 언제 돌아오시나요?”

“외부인에게는 알려줄 수 없소.”

“신관님은 휴가도 비밀인가요?”

“지금 신전의 규율에 도전이라도 해 보겠다는 거요?”

자꾸 화만 내는 것이 수상쩍었다. 나는 흥분해 살짝 부풀어 오른 오징어 머리를 지긋이 째려보며 스킬을 발동했다.

“자, 이만 돌아가시오. 당신 같이 헛소리를 유포하는 사람들 때문에 신전이 어수선해지지 않소.”

「그렇게 입막음을 했는데 대체 어디서 소문이 새나간 거지? 일이 귀찮게 됐잖아. 신전에선 비밀유지를 하라고 그러지, 사람들은 어떻게 알아낸 건지 자꾸만 물어보지. 이거 미치겠군.」

역시, 뭔가 감추고 있는 게 있었다.

“그렇네요, 정말 죄송합니다. 사죄의 의미로 다른 사람들에게 예지의 신관님은 납치당한 게 아닌 휴가차 자리를 비우셨다고 알려주도록 하겠습니다.”

“아니, 굳이 쓸데없는 소리 할 필요 없소. 그냥 조용히 나가시오.”

「지금은 무슨 말을 해도 다 쓸데없는 소리지. 녀석이 휴가를 간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진짜로 납치를 당한 건지 아닌지 아무도 모르잖아?」

하지만 상대도 예지의 신관의 행방을 정확히 알고 있지는 않았다. 더 스킬을 시전해 봤자 영양가 있는 정보는 없을 듯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수고하십시오.”

「그나저나 대신관님은 대체 무슨 생각이신 건지. 헌병대에라도 알려서 사람을 찾아야지. 이렇게 쉬쉬해서야 원.」

그의 반응을 보니 신전에서는 예지의 신관을 빨리 찾아야겠다는 의지가 없는 듯했다. 되려 외부에 이 사건이 알려질까 전전긍긍하는 것 같았다.

설마 바렌시드의 신전은 내부의 비리를 감추려고만 하는 썩을 대로 썩은 곳인가. 아니면 예지의 신관이 왕따라도 당하고 있었다거나.

일전의 새벽 시간표를 떠올리며 그럴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급한 대로 우선 다른 신관에게 기도를 받았다. 예지의 신관이 고속 충전기였다면 이쪽은 일반 충전기였다.

상대방이 부담스러워할 정도로 오랜 시간 기도를 한 후에야 신성력이 전부 충전되었다는 메시지를 볼 수 있었다.

이번엔 잊지 않고 헌금함에 은화를 넣는데 어린아이가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성도님께 신의 축복이 있길 바랍니다.”

웬 인사말이 이런가 했더니 회색 수련 사제복을 걸치고 있었다.

“실례지만 혹시 기사님이신가요?”

어린이의 목소리로 최대한 또박또박 말하려고 애쓰는 모습이나 공손하게 인사하는 모습이 귀여웠다. 비록 오징어였지만.

“맞아, 넌 누구니?”

“안녕하세요. 저는 예지의 신관님을 수행하고 있는 제델이라고 합니다.”

이런 어린애에게는 반할 일도 없는데 무조건 이성이라고 오징어로 보이는 건 너무한 게 아닌가 싶었다.

“반가워. 그런데 예지 신관의 수행 사제가 내게 무슨 용건일까?”

“신관님께서 제게 예언을 하나 하고 가셨어요. 신뢰가 가는 보랏빛 눈동자의 키가 이 정도로 크고 훤칠하신 미인 기사님께서 오실 거라고요.”

“아하하하, 그, 그러니.”

예고 없이 들어온 칭찬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날 좋게 봐준 것까진 좋은데 무슨 신관이 애한테 이런 얘기를 한담.

“녹색의 긴 머리를 포니테일로 묶었다고도 말씀하셨는데 기사님은 그 머리가 아니시네요.”

가만 보니 이 수행 사제는 예지의 신관이 말한 사람이 내가 맞는지 확인하고 있었다.

‘그냥 파르미엔 드 녹시아를 찾으라고 하면 될 것이지.’

그러나 곧 신관이 내 이름을 모른다는 것이 떠올랐다.

‘예지의 신관이 사라지기 전날 이름도 모르는 나에게 메시지를 남기고 갔다 이거지.’

호기심이 일었다. 나는 무릎을 굽혀 아이에게 눈높이를 맞췄다.

“내가 오늘 아침에 헤어스타일을 좀 바꿨거든. 원래는 이렇게 묶고 다녔단다. 어때, 이 정도면 예지의 신관님이 말한 사람이 나 맞는 것 같지 않니?”

제델은 더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여기사님을 보는 건 처음이에요. 이 성안에 한 분 밖에는 안 계실 것 같네요.”

그러더니 나를 어디론가 이끌었다.

“어디로 가는 거야?

“예지의 성소에요. 지금은 신관님이 계시지 않아 잠시 문을 닫아놨죠.”

큼지막한 열쇠를 꺼내 문을 열고 들어간 제델은 안에 들어가서 다시 문을 걸어 잠갔다.

“신관님께서 이 이야기는 다른 사람에게 들리지 않게 해야 한다고 지시하셨거든요.”

확실히 이곳이라면 이야기가 남들에게 흘러 들어갈 일은 없을 듯했다.

“이걸 읽어주세요.”

제델은 주머니에서 작은 편지를 꺼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종이를 펴 보았다.

[존경하는 레이디, 저는 레이디를 처음 뵀을 때부터 정의감 넘치고 뛰어나신 분이라는 걸 한눈에 알아봤습니다….」

으, 처음부터 이게 뭐람. 팔에서 오소소 소름이 돋는 게 느껴졌다.

제법 길게 이어지는 아부성 발언을 대충 훑으며 내려가니 본론이 나왔다.

「제가 만일 변을 당해 신전에 나가지 못하게 된다면 레이디께서 저를 구해주시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단, 저를 찾으실 때 아래와 같은 사항을 유의하여 주시길 바랍니다.

1. 범인은 향료 길드입니다. 향료 길드를 조사하시면 제 행방을 찾으실 수 있을 겁니다.

2. 제 구출작업은 부디 남들이 모르게! 비밀리에! 진행해 주시기 바랍니다. 왕실 사람이나 그 수하라 해도 결코 예외가 아닙니다.

3. 저를 찾으실 땐 예지의 신관이 아닌 크로버라는 이름으로 찾아주시길 바랍니다.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예지의 신관이 아니라 크. 로. 버 입니다.」

이야, 부탁하는 주제에 요구하는 것도 많았다.

대체 뭘 믿고 내가 자기를 찾으러 나설 거로 생각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녹시아가 호구인 게 신전까지 소문이 났을 리도 없고.

그나저나 이런 쪽지까지 남긴 걸 보면 꼭 자기가 잡혀갈 걸 알고 있는 사람 같잖아?

예지의 신관이라 자신에게 일어날 일을 예지하고 있었던 걸까? 아니면 이런 사고가 일어날 만한 일에 연루되었던 건가?

“역시 신관님께 안 좋은 일이 생긴 거지요?”

아무리 요 꼬맹이가 기특하고 귀여워도 또 호구 짓을 할 수는 없었다.

지금 난 어장 속의 물고기! 제 앞가림도 제대로 못 하는 처지라는 걸 명심하자.

아니지, 그것보다는 차라리 스킬을 쓰는 게 낫겠다. 갑자기 인정 많은 녹시아가 튀어나올지도 모르니까.

난 제델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1. 걱정하지 마. 기사 된 자가 어찌 위기에 처한 사람을 그냥 지나칠 수 있겠니.>

<2. 약은 약사에게, 사람 찾는 일은 위병대에게. 아쉽지만 난 위병대가 아니란다.>

2번을 선택하려고 할 때 제델이 깜박했다는 듯 입을 열었다.

“참, 신관님께서 봉투 안쪽에도 중요한 내용이 있으니 꼭 확인해 보라 하셨어요.”

안쪽에? 제델의 말대로 작게 흘려 쓴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덧, 위기에 처한 저를 구해주신다면 그 보답으로 신성력 측정 성물을 빌려드리겠습니다.」

이제야 확실해졌다. 예지의 신관이 내가 자신을 구하러 올 거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던 이유.

티끌 모아 태산을 외치던 내게 이건 둘도 없는 기회였다.

전에 목걸이를 팔아 얻은 삼십 골드로도 구매할 수 없는 성물이니 말이다.

‘게다가 이걸로 퀘스트를 완료할 수 있는 거… 아닌가?’

한번 긍정적인 측면을 바라보기 시작하니 예지의 신관을 찾아오는 게 이익인 이유가 연달아 떠올랐다.

나는 우선 퀘스트 창을 열었다.

- 카미앙의 유일한 선물이었던 목걸이 처분하기 (완료!)

- 카미앙이 마음에 든다고 했던 긴 머리 자르기 (완료!)

- 파르미엔 가문에서 빌려준 10만 골드 받아내기 (난이도 상)

- 카미앙이 참석한 파티에서 드레스 입고 나타나기

- 카미앙이 보는 앞에서 다른 남자와 데이트 하기(난이도 상?)

- 내가 카미앙만을 위한 기사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마침, 기다렸다는 듯 퀘스트 창 속 ‘내가 카미앙만을 위한 기사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곧 시스템 메시지가 나타났다.

<어장 속 물고기 탈출을 위한 신규 과업이 활성화되었습니다.>

업무에 대한 보상이 확실한 체계, 마음에 들었다.

예지의 신관이 누구에게 붙잡혀 갔든 녹시아가 이기지 못할 상대는 없을 것이다.

본인이 그렇게 강조하고 시스템이 과업으로 등록까지 해줬는데 설마 죽었을 리도 없고.

‘좋아, 이거야말로 꿩먹고알먹고네.’

“기사님, 저희 신관님을 찾아주실 건가요?”

나는 제델에게 한껏 부드러운 목소리로, 세상 자애로워 보이는 표정을 지어 보이며 첫 번째 선택지대로 이야기했다.

“걱정하지 마. 기사 된 자가 어찌 위기에 처한 사람을 그냥 지나칠 수 있겠니?”

내 완벽한 대사에 제델은 감동한 것처럼 보였다.

마른오징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윤기가 돌며 반짝거리는 걸 보면 알 수 있었다.

분명 날 향한 선망의 눈길을 보내고 있겠지.

“감사합니다. 그럼 신께 맹세해 주세요!”

“좋아, 신께 약속하지. 전 예지의 신관 크로버를 꼭 구해내겠습니다.”

“아니, 아니에요. 신께 올리는 맹세는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 무릎을 꿇고, 한 손을 하늘을 향해 올리고 다른 손은 자신의 심장에 대고 하는 거예요.”

제델이 야무지게 자세를 취해 보였다. 그래도 사제라고 이런 걸 챙기는 모습이 귀엽기 그지없었다. 제델을 따라 다시 한번 크로버를 구하겠다는 맹세를 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