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역시나, 퀘스트 달성을 알리는 시스템 메시지가 나타났다.
‘좋아, 이제 하나만 더 달성하면 어장 속 물고기 신세는 면하는구나.’
발걸음이 절로 경쾌해졌다. 가뿐한 발걸음으로 코너를 돌아 큰길로 나갔을 때였다.
“파르미엔 기사님.”
지금 날 부르는 건가.
“파르미엔 기사님.”
확실했다. 난 알아보지 못하더라도 상대는 날 알고 있는 거겠지.
떠오르는 사람은 카미앙과 베르만 밖에 없었지만 두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주의를 두리번거리자니 눈에 띄는 차림의 오징어가 있었다. 저 몸에 딱 맞는 붉은 장교 복은 분명 근위대의 것이었다.
군인이라고 해도 전쟁터보다는 왕궁에 있는 시간이 훨씬 더 긴 근위대의 군복은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이 허름한 거리에 서 있으니 더더욱 그래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나를 부른 건 근위대 오징어였다.
“안녕하십니까? 기사님. 일전에 왕세자님의 집무실에서 뵈었던 다리스 입니다.”
다리스, 다리스…. 아, 근위대 대장이라던 자였다. 설마 근위대에 들어오라고 권유하러 여기까지 날 찾아온 건가?
“아, 예….”
나도 모르게 반갑지 않은 티를 내며 인사를 해버렸다.
“왕궁으로 가시는 길입니까?”
“네.”
다리스는 인사치레 없이 단도직입적으로 본론을 꺼냈다.
“좋은 생각이십니다. 안 그래도 왕세자님께서 찾으셨습니다.”
“카미앙이요?”
내뱉고 나니 ‘님’을 붙이던가 왕세자님이라고 불러야 했나 싶었다. ‘카미앙’과 같이 친근해 보이는 호칭은 ‘약혼녀라 주장하는 미친 백작 영애’라는 의혹을 커지게 만드는 게 아닐까.
그러나 의외로 다리스는 별 관심이 없는 눈치였다.
“네, 아침 일찍 기사님의 방에 들리셨다가 어젯밤 외박을 하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셨습니다.”
“일이 있었거든요.”
“왕세자님께선 화를 내시며, 돌아오거든 본인을 찾아오라 명하셨습니다.”
잠깐만, 내가 외박을 한 게 왜 화가 나는 일이지?
“제가 외박을 해서 카미앙 님이 화를 내셨다고요?”
“네, 그렇습니다.”
“왜죠?”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혹시 아침 일찍 저한테 시킬 일이라도 있었나요?”
“저한테는 아무 말씀 없으셨습니다.”
“그럼 다른 짐작 가는 일이라도.”
“없습니다.”
근위대 대장이라더니 정말 고지식한 군인 스타일이었다. 아니면 날 싫어하는 것이던지.
묻지도 않은 말을 하며 남의 속 긁어놓는 베르만보다야 낫지만, 대화를 이어가기가 답답했다.
“그렇군요. 대장님께서는 저를 찾으러 여기까지 나오신 건가요?”
“아닙니다. 전 다른 공무를 수행하는 중입니다.”
어떤 공무인지는 전혀 알고 싶지 않았다. 근위대의 일에 휩쓸렸다간 나도 모르는 사이 근위대의 장교로 이름이 올라가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상한 일이네요. 아무튼, 알겠어요.”
“걱정되셔서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대화를 마치려던 차에 다리스가 뜬금없는 말을 했다. 내가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얼굴을 해 보이자 다리스가 설명을 덧붙였다.
“기사님께서 밤새 어디 계셨는지, 혹 무슨 사고가 난건 아닌지 이런저런 걱정이 되셨을 거로 생각합니다.”
“저… 지금 카미앙이, 아니 카미앙 님이 절 걱정했다고 말하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이건 듣고 있는 내 애마 볼리가 웃을 소리였다.
“제가 야영을 한 것만 해도 백일 밤이 넘을 될 텐데요. 그걸 다 알고 계시는 카미앙 님께서 절 걱정하실 리가 있겠어요.”
“그래도 그게 아닐 겁니다.”
오징어 머리가 좌우로 왔다 갔다 했다. 하지만 그런 건 카미앙이 자신을 사랑한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던 ‘진짜 녹시아’나 할 법한 착각이었다.
그것보다 카미앙이 날 왜 찾은 건지 모르겠다. 또다시 근위대 이야기를 꺼내려고 했다면 다리스 대장과 미리 이야기했을 텐데.
‘아, 혹시!’
난 오징어 머리를 한 다리스 대장을 쳐다보았다.
이런 식으로 날 안심시켜 성으로 불러들인 다음 내게 무슨 짓을 하려는 거 아냐?
저절로 눈에 힘이 들어갔다.
반사적으로 ‘사람을 분석하는 마케터의 혜안’ 스킬이 발동했음을 알리는 시스템 메시지와 동시에 다리스가 입을 열었다.
“전, 파르미엔 기사님을 믿고 있으니. 그… 힘내십시오!”
다리스는 그 말을 남기고는 바람처럼 빠르게 사라져 버렸다.
… 이게 무슨 일이람. 난 휑하게 남겨진 스킬 창을 멀뚱하니 바라보았다.
「긍지 높은 파르미엔 가문의 기사가 거짓말을 할 리 없다. 허튼 농담 따위를 입에 올릴 리도 없다. 왕세자님께서 부정하신 건 다 뜻이 있어서겠지. 아무튼, 두 분은 약혼한 사이가 맞을 것이다.」
“세, 세상에.”
게임에 빙의한 이후 들었던 말 중에 가장 감동적인 말이었다.
이런 감격스러운 대사를 저런 엑스트라에게 들을 줄이야.
다리스 대장은, 아니 그냥 다리스가 아니다. 저 사려 깊고 의로운 무인은 카미앙의 집무실에서 내가 했던 말이 진실임을 믿고 있었다.
‘저런 의인을 의심하다니.’
그동안 카미앙이나 베르만 같은 족속들과 함께 있었던 탓에 내 영혼이 더럽혀 진 게 분명했다.
근데 내가 파르미엔 가문의 사람이라는 것 하나만으로 내 말을 믿어 주는 건가? 백작가와 무슨 인연이라도 있나?
카미앙으로 플레이할 땐 녹시아가 근위대 대장 노릇을 하는 바람에 다리스란 존재를 신경 써본 적조차 없었다.
‘그러니 알 수가 있나. 좀 더 붙잡고 이야기해 볼걸.’
이렇게 보낸 것이 못 내 아쉬웠다. 이른 시일 안에 다시 만나야 할 인물 첫 번째였다.
***
다리스에게 대답했던 것과는 달리 난 왕궁이 아닌 신전을 향했다.
다리스가 날 믿고 있는 것과는 별개로 카미앙이 무슨 꿍꿍이가 있는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왕궁은 너무 위험했다.
‘게다가 난 아직 어장 속의 물고기이니까.’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허공에 윙크를 날렸다.
- 카미앙의 유일한 선물이었던 목걸이 처분하기 (완료!)
- 카미앙이 마음에 든다고 했던 긴 머리 자르기 (완료!)
- 파르미엔 가문에서 빌려준 10만 골드 받아내기 (난이도 상)
- 카미앙이 참석한 파티에서 드레스 입고 나타나기
- 카미앙이 보는 앞에서 다른 남자와 데이트 하기(난이도 상?)
- 내가 카미앙만을 위한 기사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뭐야, 어느 틈에 과업 옆에 난이도까지 표시해 놓았다. 내가 어렵다고 중얼댔던걸 귀담아듣고 있었나 보다.
다른 남자와 데이트 하기 옆에 달린 물음표가 묘하게 거슬리긴 했지만 말이다.
‘시스템 녀석. 보기보다 깜찍한 짓을 하네.’
이쯤 되니 시스템의 정체가 궁금했다.
여하튼 완료된 과업 옆에서 반짝이는 느낌표를 보니 훈장이라도 되는 듯 뿌듯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어떤 과업을 시도해야 성공할 수 있을지 난감할 따름이었다.
‘일단은 신성력 충전을 좀 받고 팔찌 모양의 성물을 빌릴 수는 없는지 물어보자.‘
파이팅을 외치며 신전으로 들어섰는데 오늘따라 주변이 소란스러웠다.
행사라도 있는 건가 싶었지만 가까이 가 보니 행사 분위기는 아니었다.
“무슨 일 있나요?”
“신관님이 사라졌습니다.”
“신관이 사라졌다고요?”
그 말의 의미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잠시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도망을 쳤다는 건지 잡혀갔다는 건지. 아니면 바렌시드는 엄연한 판타지 세계니 말 그대로 사람들 눈앞에서 뿅 사라졌다는 건지.
멍하니 있는 내 꼴이 안타까웠는지 누군가가 힌트를 줬다.
“그게 말이오, 아무래도 야반도주를 한 것 같아.”
“야반도주요?”
사람들은 조용히 하라는 시늉을 했다. 곧이어 자기들끼리 수군거렸다.
“대체 언제?”
“오늘 새벽이라는 것 같던데.”
“아냐, 그게 아니라 납치를 당했다고 들었어.”
“벌써 죽었다는 소리도 있던데.”
조금만 더 있으면 신관이 귀신이 되어 나타났다는 말도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신관이 야반도주할 이유가 있나?’
물론 납치는 더더욱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바렌시드의 신전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곳이긴 했으나 입장하기 전에는 꼭 신원을 확인했다.
신전의 세력이 크지 않은 까닭에 성 기사단과 같은 사병을 거느리고 있진 않았지만, 왕실의 근위병이 상주하며 경비를 서고 있기도 했다.
다시 말해 신관이 납치당할 정도로 관리가 허술한 곳이 아니란 뜻이었다.
일단은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를 주워들으며 복도 안쪽으로 들어갔다.
대 예배실의 문 앞에 크게 안내문이 적혀있었다.
“예지의 신관님께서 당분간 자리를 비우십니다. 당신의 운명을 예언해 드립니다 코너는 문을 닫겠습니다…?”
사라진 신관이 예지의 신관이었어? 납치당했느니 어쩌니 하는 소리는 그냥 헛소문이었나?
“난 사랑의 신점을 보려고 저 아랫지방에서 닷새를 올라왔단 말이오.”
“불평해 봤자 소용없소. 왕세자님도 신전에 들렀다가 그냥 돌아가셨소.”
카미앙도 왔다 갔구나. 하긴 이쯤이면 뻔질나게 신전을 드나들 때였다.
카미앙이 자신의 연애사에 대한 도움을 구하던 사람은 예지의 신관이었으니까.
“봐봐, 왕세자님도 그냥 돌아가셨다잖아. 신관님이 예고 없이 성소의 문을 닫으신 적이 있었어? 역시 신변에 문제가 생기신 거라니까.”
사람들의 말도 일리가 있긴 했다.
그런데 예지의 신관이 납치당했다든가 하는 이벤트가 있었던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예지의 신관이 사라진 적은 없는 것 같았다.
내가 고인 물이었던 덕에 예지의 신관을 자주 찾지 않아서 모르는 걸까?
아니다, 반응을 살피기 위해 유저 게시판을 자주 모니터링 했지만 사라진 신관 이벤트에 대한 언급은 본 기억이 없다.
“예지의 신관님은 언제 사라지신 건가요?”
대 예배실에 있는 신관에게 조심스럽게 질문을 했다.
“누가 그런 불경한 소리를 한단 말이오!”
깜짝이야. 불쾌하다는 반응과 함께 신경질적인 대답이 돌아왔다.
“야반도주라는 둥 납치를 당했다는 둥. 다 말도 안 되는 소리요. 일이 있어 휴가를 내신 것뿐이니 괜한 소문 내지 마시오.”
“네? 전 그런 말 한 적 없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