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겨우 생각해 낸 게 이깟 머리카락? 난 몹시 흥분했다.
그렇게나 머리카락이 마음에 들었으면 신비한 느낌의 보랏빛 눈동자와 어울리는 녹색의 머리카락이 아름다웠다고 하던지.
바렌시드의 여름을 떠올리게 하는 머리카락이 당신의 분위기와 참 잘 어울려서 인상적이었다고 하던지.
차라리 이 성의 없는 대답으로 녹시아가 정신이라도 차렸으면 좋았겠지만 그건 내 과한 욕심이었다.
“머리카락이요?”
녹시아는 특별할 게 없는 제 머리카락을 바라보았다. 종종 특별한 머리카락 색으로 구분되는 가문도 있었지만, 파르미엔 가문은 아니었다.
꼭 파르미엔 백작가의 일원이 아니라도 영지 내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녹색 머리였다.
‘왕도엔 녹색 머리가 드문가.’
아니면 카미앙이 특별히 녹색을 좋아하는 걸지도 몰랐다.
긴 머리를 쥐었다 폈다 하며 자꾸만 쳐다보다 보니 제 머리카락이 좀 특별해 보이기도 했다.
‘하긴 유모랑 어머니가 내 머리카락은 마치 나무의 줄기에서부터 이파리까지의 색을 가져온 것 같다고 하셨었지. 머리 뿌리의 색과 끝의 색이 이렇게 다르잖아.’
꿈보다 해몽인 게 분명했지만 이미 녹시아의 속마음에는 엄청나게 큰 하트가 붙어있었다.
“낯간지러우니 이런 이야기는 그만하는 게 어떻겠소.”
그러면서 카미앙은 앞서 걷기 시작했다. 안타깝게도 녹시아의 눈에는 카미앙이 부끄럼을 타는 것처럼 보였다.
그날 이후로 이 머리카락은 녹시아에게 신체에서 가장 중요한 곳이 되었다.
그동안은 특별한 날에만 사용했던 고급 향유들로 머리를 감았고 시녀들에게도 더욱 정성껏 빗질해 달라고 요청했다.
때때로 카미앙이 ‘그대의 머릿결은 늘 부드럽군.’이라고 말해주며 가까이 다가온다던가 ‘오늘따라 유난히 머리가 아름답군, 아침이슬을 머금은 잔디 같아.’라고 감탄하지 않을까 기대하며 말이다.
물론 그 후로 카미앙이 녹시아의 머리카락을 입에 올리는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단언컨대 카미앙 그놈은 제 입으로 이 머리카락이 가장 마음에 든다고 말한 것을 까맣게 잊어버렸을 것이다.
‘한편의 샴푸 광고 같은 추억이로군.’
그래도 이게 가장 연인 관계라 할 만한 추억이었다. 입 안이 썼다.
‘그래봤자 결국 전쟁터에서 먼지며 피, 땀을 뒤집어쓰느라 이 꼴이 돼버렸지만.’
난 푸석푸석하게 축 늘어진 머리를 바라보았다. 전쟁터에서 지낸 시간도 시간이지만 내가 제대로 신경 쓰지 못한 요 몇 주 사이 더더욱 상태가 안 좋아졌다.
‘그래, 첫 번째는 이거다.’
나를 얽매고 있던 카미앙의 말.
‘이 머리카락이 맘에 들었소.’
그리고 그 말 한마디에 정성껏 관리해 온 머리카락.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검집에 고이 모셔져 있는 바스타드소드를 꺼냈다.
양손 검보다야 짧다지만 아무리 그래도 바스타드소드는 머리를 자르기엔 거추장스러운 물건이었다.
‘닭 잡는 데 소 잡는 칼 꺼낸다는 게 이럴 때 쓰는 말이겠네.’
그런 생각이 잠시 머릿속을 스쳤지만 어쩐지 내가 닭이나 소에 비유되는 것만 같아 얼른 지워버렸다.
‘이만큼, 아니 이만큼?’
나는 반대 손으로 머리카락을 한 움큼 쥐었다. 내가 지금 끊어내는 건 단순한 머리카락이 아니라 녹시아를 가두고 있는 카미앙의 그물이었다.
직접 자신의 머리를 자르며 결의를 다지는 영화나 책 속의 주인공들이 떠오르며 어쩐지 숙연한 기분이 들었다.
난 바닥으로 곧 후드득 떨어질 초록빛 과거를 그리며 머리카락을 움켜잡은 손 위에 검의 날을 가져갔다.
쓱. 쓰윽. 쓰으윽.
‘한꺼번에 머리카락을 너무 많이 잡았나?’
머리카락은 내 생각보다 굉장히 소심하게 잘려나갔다. 결코, 긴 머리가 아까워 망설이고 있는 건 아니었다.
‘머리카락을 좀 더 팽팽하게 잡아당긴 다음에. 잠깐잠깐 이러면 귀밑 3센치 단발이 되어버리잖아. 녹시아가 60년대 중학생도 아니고 이건 아니지.’
검을 잘 쓴다고 미용을 잘하는 건 아니었다. 뛰어난 검술 실력이 지금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결국, 영화 속 주인공처럼 단칼에 단발머리로 변신하는 건 포기했다.
내 미적 감각과 솜씨를 최대한 끌어내서 난 한 줌 한 줌씩 머리카락을 잘라냈다.
“드디어 끝이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시스템 메시지가 나타났다.
“역시! 이런 거였어!”
너무 신이나 나도 모르게 발을 굴렀다. 가볍게 발을 굴렀을 뿐인데 녹시아의 우월한 신체는 머리가 천장에 닿을 정도로 높이 뛰어올랐다.
마치 세레모니를 하는 축구선수라도 된 듯한 기분이었다. 이왕 이런 기분을 누리는 김에 한마디 덧붙였다.
“라라벨과 오후의 수다 카페의 주인장에게 이 영광을 돌립니다!”
방법을 알고 나니 자신감이 붙었다. 더불어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난 책상 앞에 앉아 체크리스트를 작성했다. 어장 속 물고기에서 탈출하기 위한 과업이었다.
- ☆파르미엔 가문에서 빌려준 10만 골드 받아내기
- 카미앙이 참석한 파티에서 드레스 입고 나타나기
- 카미앙이 보는 앞에서 다른 남자와 데이트 하기(?)
- 내가 카미앙만을 위한 기사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10만 골드를 받아내는 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었다. 그 앞에는 크게 별표를 달았다. 하지만 중요한 만큼 어려운 일이기도 했다.
카미앙 앞에서 다른 남자와 데이트를 하는 건 어장 속 물고기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과감한 행동이었다.
상대의 질투를 불러일으키는 고전적인 방법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건 내가 마음먹는다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과연 내가 데이트할 남자를 찾을 수 있을까.’
당연히 연인 관계를 상상하는 건 아니었다. 이시아든 녹시아든 단시간에 이성을 꾀어낼 재주가 없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다.
‘돈을 주고 사람을 사야 하는 건가. 연인 대행, 이런 서비스는 바렌시드에 없겠지?’
고민하다가, 다른 남자와 데이트 하기 항목에는 조심스럽게 물음표를 그려두었다.
적어놓고 보니 만만한 게 하나도 없었다. 드레스 입기가 그나마 쉬워 보였지만 파티, 그것도 왕세자가 참석하는 파티는 흔하지 않았다.
당연히 파티를 내 마음대로 열 수 있는 게 아니고…. 그때 목 언저리에서 거치적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동시에 라라벨과 카페 주인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울렸다.
‘혹시 그놈한테 받은 선물 있어? 일단 그것부터 싹 정리해.’
‘그렇네, 마음을 정리하는 것보단 물건을 정리하는 게 더 쉬우니까.’
그러고 보니 왜 생각을 못 했지?
나는 얼른 목에 자물쇠처럼 걸려 있는 것을 풀었다.
그리고는 어장 속 물고기에서 탈출하기 위한 체크리스트에 한 줄을 추가했다.
- 카미앙의 유일한 선물이었던 목걸이 처분하기
***
“일어나셨네. 잘 잤어요?”
방들이 나란히 붙어있는 복도를 지나 일 층으로 내려가자 뜻밖에도 라라벨이 인사를 했다.
“덕분에 잘 잤어요. 그나저나 여긴 어디죠?”
“바렌시드 극장의 단원들이 지내는 숙소에요.”
당연히 여관인 줄 알았는데 의외의 장소에서 하룻밤을 보낸 셈이었다.
“생각보다 괜찮지 않으셨나요? 물론 귀족 아가씨의 기준에는 한참 못 미치겠지만….”
이야기를 들어보니 기숙사에서 가장 좋은 라라벨의 방을 내준 것이라고 했다.
라라벨에게 감사를 표하며 임시로 지내고 있는 왕궁의 거처보다 훨씬 좋았다고 대답했지만 믿지 않는 눈치였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라라벨은 내 바뀐 헤어스타일에 관심을 표했다.
“그런데, 아가씨 머리가?”
“이상한가요?”
난 멋쩍게 머리를 쓸어내렸다. 뒤통수를 따라 손을 훑어내리자 금세 머리카락의 끝이 만져졌다. 정말 짧아지긴 짧아졌다.
“으으응, 정말 잘 어울려요. 축하해요.”
따로 설명하지도 않았는데 라라벨은 바뀐 헤어스타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미 눈치챈 것 같았다.
“그런데.”
라라벨은 말없이 날 끌어다가 거실 한 귀퉁이의 의자에 앉혔다. 어디선가 가위를 들고 오더니만 내 어깨에 천을 둘렀다.
“조금만 다듬으면 훨씬 더 아름다우실 것 같아서요.”
이럴 줄 알았다면 진작 라라벨에게 부탁할걸.
그녀의 손끝에서 내가 상상했던 것처럼 다듬어지는 머리를 보니 방에서 혼자 끙끙거렸던 게 억울하기까지 할 지경이었다.
“어떠세요?”
“이대로 당장 파티에 참석해도 되겠는데요?”
“후후, 그렇게 되면 바렌시드의 귀족 영애들 사이에 단발머리가 유행할지도.”
나는 엄지를 치켜세웠다. 내 제스처가 재미있다는 듯 웃던 라라벨은 마찬가지로 내게 엄지를 치켜세웠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라라벨과 가까워진 느낌이었다. 카미앙을 제치고 라라벨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도 있을 것 같은 기분이랄까.
‘거지 같은 카미앙은 내버리고 공략캐끼리 행복하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겠는데.‘
나는 그 엄지 척에 담긴 응원을 마음에 담고 난 거리로 나섰다.
***
좋은 날이었다. 구름이 적당히 있어 햇볕이 너무 따갑지도 않았고 제법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한결 가벼워진 머리에 기분도 한결 홀가분했다. 산책 삼아 말을 끌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며 목걸이를 어떻게 돌려줄지 고민했다.
‘이 기세를 몰아 곧장 카미앙에게 갈까? 아니지, 그 앞에서는 또 어떤 돌발 행동을 할지 몰라. 난 아직 어장 속 물고기니까. 역시 베르만에게 주는 게 안전하겠지? 그놈 얼굴을 보는 것도 썩 유쾌한 일은 아니지만….’
골똘히 생각하다 보니 어제 왔던 길이 아닌 다른 곳으로 빠지고 말았다. 거미줄 같은 바렌시드 시가지에서 난 길치라는 사실을 잠시 잊고 있었다.
‘괜찮아, 아직 카페가 있던 곳에서 크게 멀어지진 않았을 테니.’
나는 비슷비슷한 외관의 건물들을 살피며 왔던 길을 되짚어갔다. 그때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은 간판을 단 가게가 눈에 들어왔다.
‘어, 여기는…?’
라라벨과 카미앙의 가슴 절절한 에피소드였던 ‘나에게 이런 옷은 과분해요’ 이벤트에 등장했던 그 가게 아닌가?
‘나에게 이런 옷은 과분해요’의 이벤트의 내용은 대략 이러했다.
귀족들의 파티에 라라벨을 데려가기 위해 카미앙은 그녀를 신데렐라처럼 변신시킨다.
하지만 병든 어머니와 어린 동생들이 있는 라라벨은 카미앙이 사 준 드레스와 장신구를 전당포에 넘기고, 그걸 카미앙이 알게 된다.
카미앙은 자신이 준 것을 팔아버렸다는데 실망하지만, 곧 라라벨의 어려운 상황을 알게 되어 라라벨에게 필요한 약을 구해준다.
‘라라벨 공략에 가장 핵심적인 이벤트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고….’
아무래도 라라벨이 카미앙의 선물을 팔았던 전당포가 여기지 싶었다.
게임에 제대로 등장하진 않았지만 분명 ‘오후의 수다 카페’에서 멀지 않은, 간판도 제대로 달지 않은 전당포라는 설명이 있었다.
그리고 전당포라는 이름을 떠올린 순간 머릿속에서 중간 과정 몇 개쯤은 생략한 결과가 도출되었다.
바로 신관이 보여주었던 성물, 신성력이 얼마나 남았는지 알려준다는 그 팔찌를 손에 넣은 내 모습!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