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아, 이야기가 이렇게 흘러가나.
의도했던 건 아니지만 좋은 타이밍이었다. 이 게임에서 라라벨은 연애사에 가장 능통한 캐릭터였으니 말이다.
“어쩌다 보니 의리라고는 엄마 배 속에 놓고 온 놈을 만나게 됐네요.”
“난 그런 얘기 듣는 거 재밌더라. 더 얘기해 주시려나.”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정말 관심 있는 게 맞나 싶을 정도로 따분하다는 듯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난 이게 라라벨의 말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시선을 내게 고정한 건 나의 이야기가 제법 흥미롭다는 뜻이었다.
“제가 나쁜 놈한테 걸려서 말이죠. 어장 관리를 당하고 있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그런 상황인데. 어떻게 해야 그 남자에게서 벗어날 수 있을까 고민 중이에요.”
내뱉고 나니 너무 기다렸다는 듯 말한 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단숨에, 일목요연하게 내 상황을 정리했다.
“흐응.”
라라벨은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작은 콧소리를 냈을 뿐 별다른 대답은 하지 않았다. 결국, 민망함을 이기지 못하고 말을 덧붙였다.
“한심한 고민이긴 하죠.”
“한심하다뇨.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중인데.”
“대단하다고요?”
“보통 그런 경우에는 자신이 어떤 상황인지 파악을 잘 못 하니까. 여기가 어장 속인지 그 남자 마음속인지. 저게 내 남자인지 내 주인인지.”
“무슨 얘기야?”
가게 주인 우리 곁으로 다가오며 흥미를 보였다. ‘오후의 수다 카페’ 주인은 게임에서도 라라벨과 가까운 사이라는 설명이 있었다.
“비밀 얘기. 사랑하는 님과 알콩달콩 살고 계신 분께는 알려 줄 수가 없는데.”
“오호라, 연애 얘기구먼? 무슨 일이여 응?”
“아가씨, 이거 말해도 되나?”
그녀는 굵게 웨이브 진 머리카락을 한 손가락으로 느긋하게 돌리며 내게 물었다.
난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든 들어도 되니 어서어서 아이디어를 좀 내보시죠.
“양아치 같은 놈한테 걸렸나 봐.”
“어떤?”
두 사람이 동시에 나를 바라보았다. 카미앙의 양아치 짓이야 말하자면 날밤을 셀 정도지만 신분 노출의 위험이 있으니 자세한 이야기를 할 수는 없었다.
“그냥, 돈 빌려 가고, 이 일 저 일 다 부탁하고, 다른 사람 앞에서는 애인이 아닌 척하고….”
라라벨은 잘 알겠다는 듯 말을 덧붙였다.
“그러면서 딴 여자 만났겠지, 안 그래요?”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주인의 입에서 한탄이 터져 나왔다.
“아이고, 어쩌다 그런 놈한테 걸렸어. 딱 봐도 순진해 보이는 아가씨를 웬 놈이 가지고 놀았구먼.”
“그런 놈이 뭐 한둘인가. 우리 극장에도 그런 애들 많아.”
“그르치, 극장은 뭔 쓰레기 처리장인가 버려도 되는 쓰레기들을 막 집어가는 애들이 많더라고.”
“애들이 아직 세상 물정 몰라서 그래.”
빨간 머리 누구, 빵집의 누구, 내가 알지 못하는 가여운 희생양들의 안타까운 사례가 이어졌다. 마치 과거의 내 이야기를 듣는 것 같아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다행히도 주인은 날 안타깝게 바라보는 거로 끝내지 않았다.
“일단 그놈하고 한 약속 같은 거 있으면 이제부턴 싹 무시햐. 왜 보통 그런 놈들이 교묘하게 말로 사람을 자기 옆에 잡아두잖어.”
“아아 그런 경우 꽤 많지.”
라라벨은 내 쪽으로 몸을 틀며 나와 시선을 맞췄다.
“아세요? 이런 경우는 대부분 두 가지인데 첫 번째는 남자가 ‘난 너 없으면 안 된다’면서 보호 본능을 자극하는 경우에요. 이러면 여자는 그 옆에서 엄마 노릇 시녀 노릇 다 해주고 있더라고요.”
라라벨은 엄지손가락을 접으며 말을 이었다.
“반대로 남자가 네까짓 게 어디 가서 사랑받을 수 있을 것 같으냐고 사람 기죽이며 떠나지 못하게 잡아두는 경우도 있더라고요. 답답한 게 여자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난 정말 못난 사람인가보다 하면서 남자 곁에 있는 거죠.”
주인이 듣기만 해도 답답하다는 듯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라라벨의 말이 맞어. 아가씨는 어느 쪽에 해당하는지 모르겠지만 말이지. 그 사람이 했던 말이나 약속 뭐 이런 건 싹 다 잊어부려.”
그러니까…. 어쩐지 난 양쪽 전부에 해당하는 것 같았다. 이 말까지 해버리면 주인이 상이라도 뒤엎는 게 아닐까 싶어 입에 올리지는 않았다.
“올려치기든 내려치기든 그놈 말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니까. 그놈은 다 저 좋자고 하는 멍멍이 소리니까. 그거 생각하다가는 평생 도망 못가지. 그놈 손아귀에서 벗어나려면 귀 닫고 눈 감고! 어디서 개가 짖는구나 해야 혀. 무슨 뜻인지 알지?”
해가 지자 주인은 술을 내왔다. ‘오후의 수다 카페는’ 해가 지면 술을 파는 곳이었다.
술잔이 오가며 내 연애 선배쯤 되는 누구누구가 어떻게 남자를 걷어찼는지와 같은 이야기가 이어졌다.
정말이지 바렌시드의 집단 지성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
‘응?’
낯선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몇 주간 지냈다고 익숙해진, 그 후진 근위대의 당직실이 아니었다.
‘아아, 어제 외박했지.’
술을 많이 마시진 않았는데 녹시아의 주량이 얼마 되지 않는지 머리가 지끈거렸다.
칭찬해줄 만한 건 왕궁으로 돌아가지도 못할 만큼 취한 상황에서 카미앙의 이름을 입 밖에 내는 실수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허언증 걸린 기사라는 소문은 아직 귀족들 사이에서만 도는 모양이었으니까.
굳이 왕세자의 이름을 들먹여 굳이 바렌시드의 서쪽까지, 그것도 굳이 본인이 직접 소문을 확산시킬 필요는 없었다.
‘잠깐, 술, 외박, 숙취 이런 상황이라면….’
로맨스 게임이나 로맨스 소설, 아무튼 로맨스가 들어가는 모든 스토리에서는 이런 상황에서 보통 모르는 이성이 옆에 누워있지 않나.
그렇다 해도 나만큼은 예외일 거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손에 살짝 힘이 들어갔다. 조심스럽게 오른쪽으로 눈을 돌렸다.
‘아무도 없네.’
하긴,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애초에 이 침대는 두 사람이 나란히 눕기에는 너무나 좁았다.
‘대체 뭘 기대한 거냐.’
카미앙에게서 날 구원해주고 녀석을 질투의 화신으로 만들어 줄 진짜 남주? 상상하면서도 헛웃음이 나왔다.
녹시아의 인생에 그런 인연이 영화처럼 나타날 일은 없었다. 난 이불을 휙 치우며 벌떡 일어났다.
라라벨이 안내해 준 숙소였다. 귀족 아가씨가 이런 곳에서 자도 되는 거냐고 걱정하는 찻집 주인에게 검을 보여주었던 것이 생각났다.
그래도 좋은 곳으로 안내해 준 것인지 왕궁에 있는 내 숙소보다 훨씬 아늑하고 깨끗했다.
우선 정신을 차리기 위해 세면대 앞에 섰다. 세숫물이 놓여 있었다. 난 물을 뒤집어쓰기라도 할 기세로 세수를 했다.
고개를 들어 올리는데 거울 너머로 낯선 얼굴이 비쳤다. 아무리 익숙한 캐릭터라고 해도 화면으로 보던 것과 내 얼굴로 달고 있는 건 큰 차이가 있었다.
‘사실 녹시아도 얼굴로는 어디 가서 빠질 얼굴이 아닌데.’
당연한 일이었다. 게임 회사에서 굳이 못난 공략 캐릭터를 만들 이유는 없으니까. 취향의 차이일 뿐 외관은 루티시나와 비교해도 녹시아가 뒤질 게 없었다.
내가 눈을 깜박이자 얇은 눈까풀이 따라서 움직였다. 맑고 또랑또랑한 눈동자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신록을 담은 듯한 녹색 머리카락….
탐스럽게 늘어뜨린 이 머리카락은 녹시아에게 차분하고 얌전한 분위기를 더해주었다.
언뜻 봐서는 아무도 기사라고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말이다.
개인적으로는 파르미엔 기사에게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스타일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이 머리카락.’
갑자기 생각났다. 녹시아가 고이고이 기르고 있는 이 머리카락에는 녹시아 혼자만 간직하고 있는 카미앙과 엄청난 추억이 있었다.
그리고 라라벨이 그렇게 강조한 ‘날 얽매고 있는 개소리’와 도 관계가 있었다.
카미앙과 녹시아가 만난 지 며칠 되지 않은 어느 날이었다. 녹시아는 카미앙과 함께 거울 호수를 찾아갔다.
“여기예요. 파르미엔 영지에서 가장 아름다운 거울 호수랍니다.”
북쪽에 있는 파르미엔 영지는 다른 지역에 비해 기온이 낮았다.
그리고 거울 호수는 영지 내의 고산지대에 있었다. 그런데도 일 년 내내 얼지 않는 신비한 호수였다.
늘 맑은 날씨 덕분이라는 말도 있었고, 신의 가호를 받은 신성한 장소라 그렇다는 말도 있었다.
이유야 무엇이 됐든 호수는 늘 맑고 파란 하늘을 비추며 잔잔하게 빛났다.
카미앙과 처음 눈을 마주쳤을 때 녹시아는 이 맑고 반짝이는 호수가 떠올랐다. 이곳은 녹시아가 카미앙에게 꼭 소개하고 싶은 장소였다.
산을 오를 때부터 녹시아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 아름다운 풍경을 카미앙과 함께 볼 수 있다니.
게임에는 등장하지 않았던 거울 호수는 내가 보아도 감탄할만한 경관이었다.
“그렇군, 듣던 대로 훌륭한 풍경이오.”
녹시아는 알아채지 못했지만 내가 보기에 카미앙은 별 감흥이 없었다. 고저 없는 목소리가 그러했고 지루하다는 듯한 눈빛이 그러했다. 들뜬 건 녹시아 혼자였다.
관심 없는 여자가 소개해 준 곳이어서 그런지, 왕세자님께선 하도 좋은 곳을 많이 다녀보셔서 그런 건지.
혼자 들뜬 녹시아가 안타까웠다.
“그렇죠? 왕세자님께서도 분명 좋아하실 거라 생각했어요.”
“왕세자라니, 둘이 있을 때만큼은 이름을 부르기로 했잖소.”
“아…. 왕세자님, 아니 카미앙님.”
“그냥 카미앙이면 충분해.”
“그럼, 카미앙….”
그의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특별한 사이가 된 것 같아서 녹시아는 가슴이 벅차올랐다.
분홍 꽃잎이 휘날리며 하트가 뿅뿅 달린 속마음이 내 눈앞을 가득 채웠다.
“묻고 싶은 게 있는데요.”
녹시아는 한참이나 뜸을 들였다. 그래도 이때의 녹시아는 제법 적극적이고 당당했다.
카미앙에게 구박받으면서 점점 주눅이 들어 버린 게 분명했다.
“제 어디가 마음에 들었나요?”
갑자기 무슨 소리냐고 묻는 듯한 카미앙에게 녹시아는 말을 덧붙였다.
“전 그렇게 예쁘지도 않고, 파르미엔 가문이 왕실에 비견할 정도는 아니니까요. 대체 제 어디가 마음에 드셔서 청혼… 하셨는지….”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잠시 정적이 맴돌았다.
이름 모를 풀벌레 소리가 앰프를 사용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시끄러웠다.
‘카미앙, 이 자식아. 빨리 뭐라도 말해.’
안절부절못하는 녹시아가 딱해 내가 다 안달이 났다.
괜히 물어봤다 싶은 녹시아가 꼭 대답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려던 찰나였다.
“이 머리카락.”
카미앙이 길게 늘어뜨린 머리카락의 끝을 살짝 들어 올리며 말했다.
“이 머리카락이 마음에 들었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