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렘 게임의 공략캐가 되었다-11화 (11/95)

11.

이 녹시아 드 파르미엔느의 목표가 카미앙을 후회하게 만드는 거라 이거지.

생각할 것도 없었다. 당연히 yes였다.

그래, 카미앙. 이 세계의 시스템도 네가 후회해야 마땅한 놈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구나. 그런데, 목표를 달성하면 어떻게 되는 거지?

게임이라면 최종 목표달성은 곧 엔딩을 보는 것이었다. 내 인생이 거기서 또 끝나는 건 설마 아닐 테고….

<목표달성 후 바렌시드에서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마치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메시지가 나타났다. 잘 읽어보니 나쁜 조건은 아니다.

유서 깊은 귀족가에 본인 역시 뛰어난 검술을 갖추고 있는 녹시아였다.

바렌시드에서 녹시아로 사는 삶이라. 나쁘지 않았다.

카미앙에게 발목 잡히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그나저나, 후회 남주라….”

복수가 아니고 후회였다. 내가 내뱉었던 말이기도 했다.

‘세계관 최고의 기사임에도 무시당하는 약혼녀’라는 녹시아의 포지션으로 보았을 땐 차라리 복수가 쉬웠다.

여차하면 무력으로 왕실을 상대할 수도 있으니까. 이 게임이 액션이라든가 RPG 혹은 전략 시뮬레이션이었다면 이런 방향으로 스토리가 진행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부분에서는 원작에 충실한 시스템이었다. 그 목표가 남성향 ‘연애’ 시뮬레이션이란 장르를 벗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 역시 복수보다는 녀석의 후회를 원했다. 이전 어장의 주인들에게 느꼈던 심정이기도 했다.

후회 남주란 무엇이던가.

뒤늦게 여주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깨닫고 여주를 붙잡기 위해 환골탈태한 모습을 보여주며 매달리는 존재 아닌가.

환골탈태까지는 무리더라도 카미앙이 녹시아를 놓친 걸 후회하게 만들고 싶었다.

상대가 원하는 건 어떻게 해서라도 손에 쥐여 주고 싶은 그 간절한 심정을.

사랑한다는 이유만으로 자존심이든 자존감이든 다 무너져 버린 그 마음을. 카미앙도 느껴봐야 했다.

“내가 얼마나 멋진 사람인지, 매력적인 여자인지! 카미앙 네놈이 깨닫게 해주겠어! 무슨 뜻인지 알아? 내 앞에서 부디 날 다시 받아달라고 애원할 때, 시원하게 차버리겠다고!”

시스템이 알아들었다는 듯 메시지를 보내왔다.

그래 퀘스트!

원래 게임에서는 최종 목표를 달성하기까지 크고 작은 퀘스트가 있기 마련이었다.

“시스템, 너 이제야 나랑 손발이 좀 맞는구나. 그럼 혹시 퀘스트 달성을 위한 과제들도 준비했니?”

나는 웃으며 메시지를 넘겨보려 했지만, 더 이상의 할 말은 없다는 듯 오직 저 문구만 보였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윙크하며 내 상태 창을 불러왔지만 ‘어장 속 물고기 탈출하기 퀘스트 진행 중’ 이외엔 다른 내용이 없었다.

“내 욕심이 과했지. 그래도 말이지 이것만은 꼭 알아둬. 퀘스트를 달성하면 그에 상응하는 보상이나 레벨 상승이 꼭 있어야 하는 거라고. 알겠지?”

게임이 끝난 후에 주어지는 선물보다도 퀘스트 보상이 내겐 더 절실했다. 시스템이 듣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자, 그럼 어장을 탈출하기 위한 구체적인 실천 방안을 생각해 볼까.’

사실 막막했다. 해 보지 않은 일보다 실패한 경험이 있는 일이 몇 배는 더 어렵게 느껴지는 법이었다.

이전의 나는 어장에서 스스로 빠져나온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친구들의 진심 어린 조언이 있었음에도, 이 남자가 날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어장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버림받은 후에도 구질구질하게 한동안 그 주변을 맴돌았다.

심지어는 주인이 그물을 걷어갔음에도 다시 어장 안에 들어가 앉은 적도 있었다.

역사는 되풀이된다지만 그런 역사가 되풀이되는 건 막아야 했다.

“그래도 옛날보다 훨씬 유리하지. 지금 나는 카미앙을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아직 카미앙 앞에서는 제대로 효과를 발휘하진 못하지만 어쨌거나 새로 생긴 스킬도 있다.

이제 남은 것은 행동뿐이었다.

***

바렌시드는 왕궁이며 신전, 그리고 귀족들의 타운하우스나 저택이 자리 잡은 동쪽, 다양한 가게들과 시장, 평민들의 주택이 있는 서쪽으로 나뉘어 있었다.

왕도를 동서로 가르며 흐르는 모루강이 그 경계가 되었다.

모루강을 건너 시가지로 들어섰다.

강변을 따라 부티크나 보석상, 고급 레스토랑 등 귀족들을 상대하는 고급 가게들이 있었다.

반면 한 블록만 내려가면 각종 수공업자 길드와 식료품점, 베이커리, 소형 잡화상 등 평민들이 자주 찾는 상점들을 볼 수 있었다.

진흙으로 구운 붉은 기와를 얹은 가게들이 앙증맞게 늘어선 게 눈에 들어왔다. 작은 손수레를 끌고 다니는 장사꾼들도 많았다.

실제로 와 보니 게임 내에서 구현했던 것보다 훨씬 넓고 복잡했다.

게임에서는 지도 위에 표시된 장소를 클릭하는 것만으로도 이동이 가능했기에 더욱더 낯설었다.

거미줄 같은 골목골목을 돌아다니며 사실 난 길치였던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 무렵, 드디어 내가 찾던 곳이 나타났다.

<오후의 수다 카페>

저 이름이 이렇게나 반가운 날이 올 줄이야!

출입문에 그려진 노을 풍경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는 가게로 냉큼 들어갔다.

카미앙의 주 활동무대는 왕성이었다. 공략 캐릭터도 대부분 귀족이었기에 시가지 이벤트가 일어나는 곳은 한정적이었다.

기껏해야 좀 전에 지나온, 한 블록 위의 고급 상점들을 방문 할 뿐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오후의 수다 카페’는 특별했다.

돈만 있다면 평민이든 귀족이든 상관없이 자유롭게 대화를 할 수 있다는 모토를 지닌 이 카페의 주 이용객은 부유한 평민 계층이었다.

‘즉, 내가 원하는 정보를 얻기 가장 좋은 장소란 뜻이지.‘

정면으로는 바 테이블이 보였고 창가 쪽에선 사람들이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홀 중앙에 자리를 마련한 악단의 현악 연주곡이 들려왔다.

나는 바에 앉았다. 종업원과 수다를 떨기엔 이쪽이 제격이었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의 대화 주제는 정치, 예술, 경제 등 다양했지만 역시 가장 인기인 주제는 연애사였다.

나라를 들썩이게 할 스캔들은 물론이고 개인의 소소한 연애 고민을 풀어놓는 사람도 많았다. 인터넷상의 ‘연애 상담 게시판’ 정도의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었다.

여기라면 바렌시드의 집단 지성을 기대해 볼 만 했다. 어장을 탈출하려면 무엇부터 해야 좋을지 혼자서는 좀처럼 아이디어가 떠오르질 않았다.

“로미아나 홍차에 바렌시드 장미를 띄워서 주세요.”

게임 속에서 카미앙의 공략 캐릭터 중 한 명인 라라벨이 늘 시켰던 메뉴였다. 아무리 게임 설정이지만 홍차에 장미를 띄우다니 대체 무슨 조합일까 싶었다.

이왕 여기까지 온 거 직접 확인해 보자.

“저랑 취향이 같은 분이 있으시네.”

그때, 벨벳이 온몸을 감싸는 듯한 도톰하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옆자리의 의자가 뒤로 빠지더니 누군가가 걸터앉았다.

“라라벨?”

내가 이 카페를 알고 있는 건, 당연히 게임 속 플레이캐릭터인 카미앙이 이곳에 자주 들렀기 때문이다.

카미앙이 귀족들의 거리를 두고 굳이 이곳을 찾았던 이유는 공략 캐릭터 중 한 명인 라라벨 때문이었고.

바렌시드 극장의 배우인 그녀는 공략 캐릭터 중 유일한 평민이었다.

덕분에 그녀와의 해피 엔딩을 보려면 다른 캐릭터의 두, 세배는 노력해야 가능했다. 초보자는 건들지 않는 게 좋다는 공략도 자주 볼 수 있었다.

“흐응, 처음 보는 아가씨께서 저를 알고 계시다니.”

아, 우리 초면이었지. 나 혼자 아는 체를 해버렸다. 나는 곧 말을 덧붙였다.

“바렌시드의 프리마돈나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요.”

아무래도 나 같은 사람이 적지 않았나 보다. 그녀는 더 캐묻지 않고 알았다는 듯 가볍게 눈웃음을 지었다.

게임에서 보았던 것보다 훨씬 더 매력적인 웃음이었다.

부드러운 아치를 그리고 있는 짙은 눈썹과 옅은 갈색 섀도를 얹은 눈매는 깊고 고혹적이었다.

한국에서 배우 생활을 했다면, 남녀 모두에게 인기가 많았을 얼굴이었다.

종업원이 장미를 띄운 로미아나 홍차 두 잔을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여느 홍차보다 더 붉은 것이 꼭 와인처럼 보였다. 그 위에는 노란빛을 띠는 봄의 바렌시드 장미가 올려져 있었다.

“이 로미아나 홍차의 별명이 뭔지 아시려나….”

라라벨이 잔을 입으로 가져가며 속삭이듯 말했다. 딱히 맞춰보시게나 하는 느낌은 아니었지만, 제작사의 일원으로서 꼭 맞추고 싶다는 의욕이 일었다.

‘그러니까 분명 라라벨과 카미앙의 두 번째 데이트에서 라라벨이 알려줬었는데.’

안타깝게도 그 상황은 기억이 나는데 정확한 이름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기억을 더듬으며 입을 떼는 순간 라라벨이 모르는 게 당연하다는 듯 답을 말했다.

“신의 없는 노란 장미는 결국 버림받는다…. 재미있는 별명이지요.”

신의 없는 노란 장미는 버림받는다? 내가 기억하기로는 저런 이름이 아니었다. 분명 사랑 어쩌고 하는 굉장히 달콤한 뉘앙스를 풍기는 단어였다.

내가 모르는 사이에 업데이트를 진행했었나. 시나리오 담당자가 누구인지, 연애 게임에 왜 이렇게 어두침침한 별명 붙인 건지 모르겠다.

“노란 장미는 어쩌다가 신의 없는 장미가 됐는지….”

라라벨의 중얼거림에 나도 한마디 보탰다. 장미 정원에서 내게 면박을 주고 루티시나의 손을 잡고 떠나버린 카미앙을 떠올리면서.

“그러게요. 신의가 없는 건 사람이지 장미는 아닐 텐데요.”

“흐음.”

라라벨이 시선을 찻잔 위로 떨구며 의미심장한 소리를 냈다.

“누군가 아가씨께 신의 없는 행동을 했나 보네요.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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