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내가 말하고도 놀라웠다.
설마 카미앙의 약혼녀인 건 사실이기 때문에 지금 같은 어장 속 물고기 상태에서도 말할 수 있던 거야?
입단 거절 의사를 밝힌 건 아니었지만 카미앙의 약혼녀라는 대답만으로 충분했다. 왕세자의 약혼녀가 근위대라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가장 먼저 입을 연 건 근위대 대장이었다.
“약혼녀라니… 지금 약혼녀라고 하셨습니까?”
“왕세자님께서 약혼하셨다고요?”
오징어들은 내가 아닌 카미앙을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렸다.
카미앙의 목 언저리부터 붉게 변하기 시작했다. 곧 얼굴이 여름 한낮에 몇 시간쯤 나가 있던 사람처럼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지금까지 카미앙의 저런 얼굴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만큼 당황스럽고 화가 났다는 뜻이겠지.
“…녹시아 경. 농담이 지나치군. 다들 재미있지 않소? 하하.”
어쨌거나 왕세자는 왕세자였다. 카미앙은 내게 화를 내는 대신 웃는 낯짝으로 급하게 말을 둘러댔다.
하지만 이런 자리에서 농담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 몇이나 되겠는가.
귀족들도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는지 미동도 없이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그렇습니다. 녹시아 님이 평소에도 장난기가 많으셨죠. 하하.”
베르만이 굉장히 어색한 말투로 한마디 거들었지만, 그걸로는 부족했다. 그러자 카미앙이 급하게, 그러나 태연한 척 덧붙였다.
“실은 전장에 있을 때 종종 농담으로 하던 얘기였소. 녹시아 경의 미모가 워낙 출중하다 보니 주제도 모르고 귀찮게 구는 놈들이 있었지 뭐요. 계속 이대로 가다간 군의 기강도 흐트러지니 임시방편으로 녹시아 경은 왕세자의 약혼녀니 경거망동하지 말라 공포했던 거요.”
절박함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카미앙은 대장 오징어를 지목했다.
“그렇지, 다리스 대장이라면 이해할 수 있겠지? 군대의 분위기라던지 그런 거 말이오.”
“예? 네, 네. 무슨 말씀인지 잘 알겠습니다.”
카미앙이 대장 오징어를 지목한 덕분에 나 역시 그에게 스킬을 다시 한번 사용했다.
<1. 제가 지금 농담하는 거로 보이시나요?>
<2. 정 못 믿겠으면 토벌전에 참가했던 장교들에게 물어보시죠>
안타깝게도 카미앙과 내 관계를 설명해 줄 장교는 없었다.
내가 카미앙을 위해 뭐든 해온 것은 알 테지만 약혼녀였기에 그리했다고 여기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건 카미앙과 나, 그리고 파르미엔 백작 부부만이 알고 있는 비밀 언약이었으니까.
아, 단 한 사람. 베르만이 있었지만, 그가 증언을 해줄 리는 만무했다. 오히려 내가 카미앙을 모욕하고 있다며 당장 추방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을까.
카미앙의 말에 연신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대장에게 난 담담하게 말했다.
“제가 지금 농담하는 거로 보이시나요?”
반대편에 있는 귀족들이 다시 웅성거렸다.
“아하하, 녹시아 경이 아무래도 내게 뭔가 불만이 있는 것 같군. 이건 녹시아 경과 내가 해결해야 할 문제이니 오늘은 이만 물러들 가주시겠소? 문제가 정리되는 대로 이 안건에 대해서는 다시 이야기하겠소.”
이제 목소리마저 살짝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이쯤 되자 모인 사람들도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한 것 같았다. 그들은 먼저 나서서 집무실을 나갔다. 카미앙도 그들을 잡지 않았다.
대신 마치 날 위하는 척하면서 은근히 그들을 압박하는 것으로 회의를 마무리 지었다.
“오늘 집무실에서 있었던 일은 어디에도 발설하지 않기를 바라오. 왕세자와 여러분들 앞에서 쓸데없는 농을 던졌다는 게 소문나면 녹시아 경 뿐만이 아니라 파르미엔 백작가의 명예가 땅에 떨어지지 않겠소.”
나 역시 나름대로 확인해야 할 것이 있었다.
문이 닫히는 마지막 순간까지 눈을 부릅뜨고 사람들이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아보았다.
눈동자를 열심히 움직이며 다섯 명에게 골고루 시선을 보냈지만, 모두의 생각을 읽는 건 불가능한 모양이었다. 그중 두 명의 생각이 나타났다.
「이거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당최 모르겠군. 그래도 왕세자님 앞에서 저런 농담을 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둘이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거 아닌가?」
「약혼녀라니, 왕족의 약혼이 그리 간단한 일이던가. 아무래도 파르미엔 백작가의 여식이 머리가 어떻게 된 것 같군. 아니면 엄청난 계략 가라던지.」
그래, 이 정도면 나쁘지 않았다. 경직되었던 몸에 힘이 빠지며 피로감이 몰려오려던 찰나 내 팔뚝을 우악스럽게 붙잡는 손이 있었다.
“대체 뭘 하자는 거지 녹시아?”
카미앙이 지금까지 한 번도 보지 못한 무서운 얼굴로 날 쏘아보고 있었다.
“내가 분명 잘 알아들을 수 있도록 이야기한 것 같은데. 왕세자의 말이 우습나? 아니면 갑자기 차기 왕비 자리가 미칠 듯이 탐이 나?”
조금 전까지만 해도 카미앙을 곤란하게 만들었다는 생각에 의기양양했는데 다시 어장 속 물고기로 돌아온 모양이었다.
카미앙의 분노에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심장이 쪼그라들었다. 그를 화나게 했다는 사실이 슬프기까지 했다.
스킬을 시전하려 했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는 걸 보니 하필 신성력이 바닥 난 모양이었다.
“난 그대의 마음이 순수하게 나를 향한 애정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어. 그대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내 지위만 보았던 거군.”
내가 제 지위만 봤다고? 이봐요, 녹시아가 지금까지 당신에게 해준 걸 생각해봐. 한자리 얻기 전에 세상 하직할 뻔한 게 한두 번이었어야지.
물론 입에서 나온 건 전혀 다른 말이었다.
“나, 난 그런 게 아니라.”
“오늘 일은 내가 수습할 테니 일단 방으로 돌아가시오. 당분간은 당신 얼굴을 못 볼 것 같소. 느낀 게 있다면 그대도 방에서 자숙해주길 바라오.”
카미앙의 집무실에서 쫓겨나다시피 나왔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내 의사도 확실히 밝히고 귀족들 앞에서 카미앙을 곤란하게 만들 좋은 방안이라 생각했는데.
이 일을 빌미 삼아 경거망동하는 여자를 약혼녀로 받을 수 없다며 파혼하고 귀족들에겐 날 정신이 약간 이상한 사람으로 몰아가는 게 아닐까.
‘이렇게 되면 나 십만 골드도 못 받는 거 아냐? 허언증이라든지 이 어음도 위조라던지 하면서.’
안된다. 카미앙에게 눈이 먼 녹시아가 파르미엔 백작가의 재산을 꽤 털어왔는데 이 10만 골드가 없다면 가세가 기울게 뻔했다.
게다가 사교계에 이상한 영애라고 소문이 퍼지면 가뜩이나 고립된 백작가가 더더욱 고립될 가능성이 있었다.
***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났다.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오늘부턴 바깥출입이 가능하십니다만.”
베르만이 못 미덥다는 듯 말을 덧붙였다.
“전과 같은 말썽을 일으키실 거면 알아서 숙소에만 계시는 것도 괜찮은 방법인 것 같습니다.”
일주일이나 이 작고 후진 방에 갇혀있었다. 아무리 형편없는 신앙심을 가지고 있다 해도 그 정도 시간이면 신성력이 회복되기엔 충분했다.
베르만의 말이 귓등으로 스쳐 지나갔다.
난 바깥 현관으로 나가 햇살을 마주했다. 감옥에서 석방된 죄수 같다고 느낀 적이 불과 열흘 전이었는데 또다시 같은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베르만은 굳이 내 뒤를 쫓아와 묻지도 않은 말을 조잘댔다.
“왕세자님께서 녹시아 님의 말실수를 덮으시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셨는지 모릅니다.”
피식, 한쪽 입 끝이 저절로 올라갔다.
<1. 약혼녀라고 밝힌 게 말실수였다고요?>
<2. 카미앙 님은 괜찮으신가요.>
순간 울컥할 뻔했다. 난 흐린 눈으로 애써 두 번째 선택지를 무시했다.
“약혼녀라고 밝힌 게 말실수였다고요?”
“왕세자님과 의논하지 않고 단독적으로 말씀하신 그것부터가 실수입니다. 덕분에 녹시아 님에 대한 왕세자님의 신뢰가 바닥으로 떨어졌죠.”
그렇게 말하는 오징어 베르만은 제법 즐거워 보였다.
“이번 일로 파혼을 당하신다 해도 어쩔 수 없으실 겁니다.”
파혼이 겁날 건 없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파혼을 한다면 뒤따를 불이익이 두려웠다.
“아, 그리고 그 여파로 왕궁에 녹시아 님에 대한 몇몇 소문이 떠도는 것 같던데. 원래 궁이란 이런저런 소문이 생겼다 사라지곤 하니 크게 신경 쓰실 것 없습니다.”
베르만이 일부러 알려주기까지 하는 걸 보니 내 예감이 맞았나 보다.
내가 방에서 강제로 자중하고 있던 일주일간 나에 대한 불미스러운 소문이 이미 왕궁을 몇 바퀴쯤 돈 게 확실했다.
베르만이 떠나고 건물 앞에 오도카니 서 있던 때였다. 나를 알아본 사람들은 경계하는 눈빛을 보내며 수군거렸다.
“저, 저 여자 맞지? 정신이 좀 이상하다고.”
“아나드 지역에서 무슨 저주를 받았다지?”
“골치 아픈 게 검술 실력은 좋아서 한번 날뛰기 시작하면 막을 수가 없대.”
“그래서 왕세자님께서 특별 관리를 하는 거라고 하잖아.”
별다른 속셈이 있는 말은 아니었다. 마케터의 혜안 스킬을 사용해도 사람들의 말과 생각은 똑같았다.
사람들의 수군거림을 종합해본 결과 나는 자칫하면 폭주하는 살인 병기가 되어있었다. 덤으로 망상에 빠져 종종 이상한 소리를 지껄이는 망상 병자이기도 했다.
원인은 알 수 없지만, 아나드 토벌전 중 야만족의 저주를 받아 그렇게 된 것 같다는 게 사람들의 의견이었다.
그리고 카미앙은 이런 날 가엽게 여김과 동시에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지 못하도록 보호하고 있는 인정 많은 왕세자님이 되어있었다.
‘하, 이거 누구 머릿속에서 나온 스토리냐. 카미앙? 베르만?’
정말이지 이젠 감옥이고 왕족 모욕죄고 뭐고 다 무시한 채 당장 카미앙의 목에 칼을 들이밀 수 있을 것 같았다.
‘흥분하지 말자. 난 이성적이 인간이다. 이성을 되찾자. 이성….’
오랜만에 맛보는 바깥 공기였지만 난 다시 방 안으로 들어갔다. 사람들의 시선과 목소리에서 벗어나야지만 마음이 진정될 것 같았다.
‘카미앙, 네가 기어이 나한테 선전포고를 했다 이거지.’
난 되도록 평화적인 방법으로 이 상황을 타개해 나가려고 했다.
그동안 카미앙에게 휘둘린 세월이 억울하긴 했지만, 복수라던지 보상 따위는 바라지 않고 깔끔하게 10만 골드만 가지고 돌아가려 했단 말이다.
그래, 어차피 고향으로 돌아가서 백작 영애의 안락한 삶은 누리자는 계획은 ‘어장 속 물고기’라는 칭호가 생긴 순간부터 엎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전혀 그럴 기분은 아니었지만 난 엄지와 검지로 하트를 만들어 보이며 공략창을 불러왔다.
방에 감금되어 있던 동안 몇 번이나 확인했던 내용이 눈앞에 나타났다.
카미앙이었다면 다섯 명이나 되는 히로인들이 공략대상으로 나열됐겠지만 녹시아에게 공략대상은 오직 카미앙 한 명뿐이었다.
<카미앙 폰 라우치의 상태는 ‘녹시아 따위 신경 쓸 필요도 없지.’입니다.>
녹시아 따위라 이거지. 녹시아 따위.
다시는 카미앙이 날 하찮게 여기도록 두고 싶지 않다.
“두고 봐라. 카미앙, 네가 왕세자면 이쪽은 빙의자다. 그것도 원작 개발에 참여한 빙의자. 내가 널 반드시 후회하게 만들어 주마.”
그런데 그때, 부른 적 없는 시스템 메시지가 갑자기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