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결국 은화 두 개를 헌금했다. 신성력 고속 충전의 대가치고는 비싸지 않았지만 괜히 속이 쓰렸다. 아무래도 손에 넣지 못한 성물 때문인 것 같았다.
‘빨리 카미앙에게나 가봐야지. 꾸물거리다가는 이벤트 시간 전에 도착하지 못할지도.’
신전에서 생각보다 시간을 지체한 바람에 마음이 급했다. 난 뛰다시피 하며 비밀 통로를 통과했다.
성문 근처에서 왕실의 뜰로 이어지는 통로였다. 비상시를 대비해 궁의 가장 내밀한 곳에서 곧장 성 밖으로 빠져나갈 수 있게 만든 길이였다.
물론 함부로 드나들 수 있는 곳은 아니었다. 밖에서 안으로 진입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여기저기서 함정이 발동했다.
하지만 녹시아의 몸이었다. 날렵한 움직임으로 얼마든지 피하는 게 가능했다.
긴 통로를 따라 걷다 막다른 곳에 다다라서 천장을 들어 올렸다. 눈부심에 잠시 눈을 감아야 했다.
내가 들어 올린 천장은 바닥에 깔아놓은 대리석 일부분이었다. 아무래도 식물원으로 들어온 듯했다.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흔들의자에 앉아 한가로이 책을 읽고 있는 카미앙이 눈에 들어왔다.
‘아씨, 또 후광이.’
어두운 곳에 적응했던 눈이 착각하고 있는 거라 믿고 싶었다. 한참을 기다렸지만 카미앙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빛은 여전했다.
금빛 머리카락은 햇살을 떼다가 한가닥 한가닥 엮은 것 같았고 파란 눈동자는 동 트기 전 하늘을 담은 것 같았다.
책장을 넘기는 기다란 손가락은 아름다운 선율을 연주하는 것처럼 보였고 글자를 따라 흐르는 눈빛은 사람을 취하게 만들었다.
‘이러면 당연히 심장도 반응하겠군.’
어쩔 수 없었다. 난 어장 속 물고기의 제약을 되새기며 카미앙에게로 걸어갔다.
‘분하거나 서운한 일이 있어도 어장 주인에게 말할 수 없고, 어장 주인의 말은 다 들어주고 싶고, 어장 주인이 세상에서 최고로 잘생기고 멋져 보인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증상은 ‘지금이야말로 입을 열 타이밍’과 ‘의미 없는 이사님의 잔소리 흘려듣기’ 스킬로 대응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좋은 아침이네요. 카미앙.”
내게로 고개를 돌린 카미앙은 잠시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날 잘못 본 거로 생각했는지 눈 주위를 비비고는 다시 날 응시했다.
“설마 녹시아?”
“네, 저예요.”
카미앙의 미간이 살짝 일그러졌다.
“어제부터 예상치 못한 때에 등장하는군. 장미 정원은 그렇다 치고 대체 여기는 어떻게 들어왔지?”
당신 약혼녀니 당연히 들어올 수 있었다는 가벼운 농담도 카미앙에게는 할 수가 없었다.
‘역시 베르만하고는 레벨이 다른 상대로군.’
“됐소. 굳이 대답이 듣고 싶은 건 아니오. 어제 일로 날 찾아온 거지? 그렇지않소?”
어제 일이라니, 자신도 내게 심하게 대했던 걸 알고 있기는 한 모양이었다.
카미앙은 자리에서 일어나 내 양어깨에 살며시 손을 얹었다. 그리고는 별 박은 눈동자를 내게 맞추었다.
“녹시아, 알다시피 이곳은 왕성이요. 보는 눈도 많고 왕실의 권력을 탐내거나 넘보는 자들도 많지. 왕세자로서의 삶은 하루하루가 긴장의 연속이라오. 내 감정에 솔직해질 수 있었던 전장과는 상황이 많이 달라.”
카미앙은 자신도 이런 상황이 고통스럽다는 듯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말을 이어갔다.
“내가 그대를 곧바로 약혼녀라 발표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 것 같소. 자신의 여식을 왕비로 만들려 하는 여러 가문에서 어떻게든 당신을 음해하려 할거요.”
진심으로 나를 위하는 듯한 눈빛에 딱히 틀릴 것 없는 설명까지. 진짜 녹시아라면 깜박 속아 넘어가고도 남을 상황이었다.
“검술? 물론 당신의 검술이 바렌시드 제일인 건 알고 있지. 하지만 그들은 검이 아닌 더러운 술수와 비열한 말로 당신의 목을 조여올 게 분명하오.”
카미앙이 시종일관 내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기에 나 역시 뚫어 저라 그를 바라보는 수밖에 없었다.
절대 째려봤을 리는 없는데 너무 심각하게 경청하는 바람에 미간을 찌푸리기라도 했나.
사용하려면 상대방을 강하게 째려보라는 조건을 충족했는지 의도치 않게 스킬을 시전하게 되었다.
“내 어찌 아무런 대책도 없이 당신을 그런 위험에 노출 시킬 수가 있겠소. 그래도 다행히 당신은 다른 영애들과는 달리 내 곁에 둘 명분이 있소. 바로, 그대가 기사라는 점.”
마치 화면에 자막을 입히는 것처럼 카미앙이 말하는 것을 따라 글이 눈앞에 떠올랐다.
「녹시아를 약혼녀라 생각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는데 어떻게 약혼녀라고 소개할 수가 있겠는가. 그나마 넌 기사로서 쓸모가 있으니까 내 옆에는 있게 해주지.」
사람의 말에 섞인 본심을 적나라하게 자막으로 보여 주는 것. 그게 <사람을 분석하는 마케터의 혜안> 스킬의 능력이었다.
“그래서 난 일단 당신을 내 수호기사라 알리고 적당한 곳에 배치할 생각이오. 베르만에게 이야기는 들었소. 근위병의 훈련에 참석하는 것을 거부했다지. 왕궁으로 오자마자 그런 일을 맡게 되어 상심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오. 그대 맘 내가 백번 이해하고말고. 하지만 내 뜻이 이러하니 당분간은 그곳에서 몸을 낮추고 날 기다려 주길 바라오.”
「근위병 훈련을 거절했다지? 한 번 정도의 반항이야 있을 법도 한 일이지. 원체 유순하고 내 말도 잘 들으니까 일단 근위대에 넣어놓으면 사람들에게도 완전히 기사라고 인식되겠지. 그렇게 대충 시간 때우다가 난 다른 영애 만나면 되는 거고 그때 가서 또 다른 말로 둘러대면 될 일이다.」
짧은 실력으로 원서를 읽다가 번역본을 볼 때의 기분이랄까.
카미앙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가감 없이 속내를 확인하니 속이 부글거리고 열이 뻗쳤다.
“볼이 빨갛군. 여기가 더운 거요? 하긴 파르미엔 영지에 비하면 이곳이 덥기는 하지. 실내로 자리를 옮기는 게 어떻겠소.”
카미앙은 세상 다정한 표정으로 내게 손을 내밀었다. 어제의 카미앙과 동일 인물이라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이 손을 잡고 카미앙의 집무실로 들어가면 메인 이벤트가 시작되겠구나.’
난 그를 바라보며 가볍게 미소지었다. 녹시아에게 관심을 가졌다면 이 미소가 평소와는 다르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을 것이다.
<1. 카미앙, 새삼스럽지만 정말 잘생겼네요>
<2. 어디서 이런 얕은 수작을 부리는 거죠?>
그림의 떡 같은 2번은 스킬 레벨 때문에 선택 할 수 없는 선택지였다. 하지만 이번엔 첫 번째와 두 번째 대답의 갭이 너무 컸다.
어장 속 물고기인 내가 어장의 주인에게 제대로 스킬을 시전하기란 힘든 일일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말이다.
혹시 아무것도 선택 안하면 안되는 걸까?
시스템씨 친절한 설명에 무진장 감사드립니다.
난 이런 선택지만 내놓는 시스템을 원망하며 울며 겨자 먹기로 대답했다.
“카미앙, 새삼스럽지만 정말 잘생겼네요.”
그래, 이건 그냥 객관적인 사실일 뿐이다. 내가 어장 속 물고기여서 그렇게 보이는 게 아니라 만인이 다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대가 내 외모를 칭찬한 건 처음인데.”
그러고 보니 녹시아는 부끄러워서 이런 말조차 한 적이 없었지. 앞서 걸어가는 카미앙의 뒤통수에 그의 속마음이 나타났다.
「하여튼, 이 여자는 날 너무 좋아해서 탈이라니까. 다른 영애가 이런 대접을 받았다면 화가 나서 난리를 쳤을 텐데. 겨우 한다는 말이 잘생겼다는 소리니. 이거야 원 사람이 아니라 애완견 같군. 아니 애완견도 이 정도로 재롱을 떨진….」
이 스킬은 꽤 중독성이 있었다. 보고 있어봤자 불쾌하고 혈압이 상승할 뿐이지만 저 녀석이 날 뭐로 보고 있는지 계속 알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아니지, 이것도 다 신성력을 사용하는 거잖아. 아꼈다 중요한 순간에 써야지.’
신성력의 제한이 없었더라면 유튜브처럼 계속 보고 있을 뻔했다.
***
베르만의 집무실도 좋다고 생각했는데 카미앙의 집무실에 비할 바가 못 됐다.
크림색의 잔잔한 무늬가 들어간 대리석이 환하고 고급스러운 공간을 만들어 주었고 그 안에 원목으로 만들었으리라 짐작 가는 가구들이 유려한 곡선을 띄며 자리하고 있었다.
곳곳에 까만 보석이 장식되어 있었는데 나로선 저것이 뭔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여기에 비하면 내 숙소는 화장실도 안 되겠군.’
집무실을 구경하는 사이 사람들이 하나둘 들어왔다.
바렌시드에서 한자리하시는 인사인 게 분명한데 게임에서는 대사 한마디 등장할까 말까 한 엑스트라들이었기에 누가 누군지 알 수가 없었다.
게다가 죄다 남자인 까닭에 얼굴이 다 똑같은 오징어였다. 그저 웃긴 제약이라고만 여겼는데 인제 보니 사회생활에 상당히 지장이 있는 제약이었다.
‘저건 베르만인가?’
회의가 시작되기 전에 카미앙에게 뭔가 속삭이는 오징어가 아무래도 베르만인 것 같았다.
다섯 명의 귀족이 둥근 탁자에 둘러앉았다. 카미앙은 그들 앞에 날 내세우며 소개했다.
“이쪽은 파르미엔 백작가의 녹시아 경이오.”
“익히 소문은 들어 알고 있습니다. 검술 실력이 출중하시다지요.”
“뿐만 아니라 이번 토벌전에서도 큰 공을 세웠소. 활약이 대단했지. 다리스 대장도 봤다면 놀랐을걸.”
다른 사람들 앞에서 카미앙이 날 추켜세우며 칭찬한 건 처음이었다.
“어떻소, 대장. 근위대에 꼭 필요한 인재라 생각하지 않소?”
“네, 그렇습니다. 녹시아 경께서 근위대에 힘을 보태주신다면 왕성의 치안은 더욱 견고해질 것입니다.”
붉은색의 장교 예복을 입은 오징어가 씩씩하게 소리쳤다. 누가 봐도 미리 입을 맞춘 질문과 대답이었다.
‘아, 나를 이렇게 몰아가겠다 이거지.’
이대로 흘러간다면 녹시아는 카미앙이 다른 캐릭터들과 알콩달콩 로맨스 영화를 찍는 동안 군대에서 썩게 된다. 게임에서 진행되었던 스토리 그대로 말이다.
그 최후는 높은 확률로 루티시나, 아니면 헤슬루나 마룬시에와 카미앙의 국혼을 지켜보는 것이었다.
어장 속의 물고기 수준에서 카미앙에게 스킬을 시전 해 봤자 변변찮은 선택지만 나올 뿐이었다. 베르만도 백 프로 안전하진 못했다. 타깃을 바꿔야 했다.
카미앙이나 베르만과 달리 원래의 녹시아가 아무런 감정도 느껴본 적 없는 근위대 대장이라면 제대로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겠지.
“할 말이 있는데요.”
“오, 녹시아 경이 근위대 입단 소감을 발표하려는 것 같소.”
카미앙이 기대에 찬 눈빛으로 날 바라보았다. 자기 뜻대로 잘 흘러가고 있다고 여기는 게 분명했다.
‘제발 좋은 선택지가 나오길.’
로또라도 뽑는 기분으로 대장 오징어를 있는 힘껏 째려보았다.
<1. 제가 근위대를 지상 최강의 군대로 만들어 보이겠습니다.>
<2. 저는 카미앙의 약혼녀인데.>
진짜, 시스템 너 왜 그러니. 지상 최강의 군대는 무슨 지상 최강의 군대야. 설마 저런 대답이 그동안 녹시아의 행동과 생각을 종합해 도출해 낸 결과는 아니겠지.
어쩐지 불안했다. 2번은 현재 칭호에선 선택할 수 없다는 메시지가 뜨지 않을까.
사실이긴 하지만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말이었다. 카미앙이 일부러 외면하고 공공연히 감추는 사실이기도 했다.
그런데 당연히 안될 줄 알았던 두 번째 대답이 내 입에서 흘러나왔다.
“저는 카미앙의 약혼녀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