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신전. 카미앙을 만나기 전에 신전을 먼저 가야 했다. 신성력을 충전하기 위해 어둑어둑한 새벽녘부터 일어나 기도를 했지만 영 신통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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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메시지를 몇 번이나 봤는지 모르겠다. 내 기도로는 저런 메시지나 뜰 정도의 신성력을 충전하는 게 고작이었나 보다.
시스템을 처음으로 불러온 게 내 기도였는데, 그때와 같은 간절함이 나오질 않는 걸까.
하다못해 쿨타임이라도 알 수 있으면 덜 답답할 텐데 말이다.
혼자 머리를 굴려봤자 전혀 알 수 없는 부분이었다. 아무래도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할 것 같았다.
그래서 선택한 곳이 신전이었다.
***
이 세계는 꼭두새벽부터 신전에 와 기도를 한다던가 예배를 드리는 문화는 없는 듯했다.
날 알아볼 만한 사람과 만날 일이 없다는 건 좋은데 문제는 신관들도 눈에 띄질 않았다.
한참 동안 신전을 뱅뱅 돈 후에야 난 벽에 붙어있는 안내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신관들의 출근 날짜와 시간을 표시해 놓은 표였다.
‘신관 출근표. 대지의 신관 휴일, 물의 신관 휴일….’
신관은 참으로 워라벨이 훌륭한 직업이었다. 일하는 날보다 쉬는 날이 월등히 많았다.
‘정말 신의 직장이군.’
결국 내가 지금 만날 수 있는 신관은 ‘예지의 신관’ 뿐이었다. 예지의 신관은 다른 신관에 비해 새벽 일찍 근무하는 날이 많았다.
‘이분은 뭐지, 돈이 많이 필요하신가. 아님 막내 신관이라 다 짊어지고 가시는 건가… 근데 잠깐, 예지의 신관?’
생각났다. 예지의 신관은 게임에서도 등장했던 캐릭터였다.
게임 기획 초기엔 공략 캐릭터로 여신관도 있었으나 이사님의 반대에 무산되었다. 덕분에 신전이나 신관은 게임 내에서 별 비중이 없었다.
신전이 배경인 주요 이벤트는 달랑 한 개, 대신관은 지나가는 엑스트라처럼 잠깐 등장할 뿐이었다.
하지만 예지의 신관만큼은 예외였다.
예지의 신관. 이름만 들으면 바렌시드의 장례를 예언할 것 같지만, 게임에서의 역할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카미앙에게 공략 캐릭터의 호감도와 상성, 미래에 일어날 일 등을 예언해주는 신관. 그것이 바로 예지의 신관이었다. 말하자면 게임에 여러모로 도움을 주는 NPC랄까.
사실 이름만 예지의 신관일 뿐이지 연애운을 봐 주는 점쟁이와 비슷했다.
초보 플레이어일수록 예지의 신관을 찾아갈 일이 많았다. 나 같은 베테랑 플레이어는 그 존재를 깜박 잊을 정도로 만날 일이 없는 건 당연했다.
‘오늘같이 중요한 날에 용한, 아니지 신성력 높으신 신관님께 기운을 팍팍 받고 싶었는데.’
사랑의 점쟁이 같았던 예지의 신관을 떠올리니 실망스러웠지만 달리 방도가 없었다. 가까이서 보니 예지의 성소는 문패도 익숙했다.
“레이디 아닙니까.”
나를 안다는 듯한 목소리였다. 무심코 얼굴을 확인했지만 원래 신관들은 얼굴을 반쯤 가리고 있었다.
게다가 게다가 이 하렘물 게임 속에서 신관은 다 남자고 나는 지금 남자들의 얼굴은 전부 오징어로 보이니 쓸데없는 짓이었다. 신관이 다시 한번 나를 아는 척했다.
“장미 정원에서 만났던 레이디 맞으시죠?”
그러고 보니 목소리가 낯설지 않았다.
“그때 제게 기도를 해주셨던 그 신관님?”
“네, 맞습니다. 그날은 어찌나 빨리 사라지시던지.”
예지의 신관이 혹시 사이비가 아닐까 걱정했는데 이 사람이라면 안심이었다. 그가 불어넣어 준 신성력은 확실히 효과가 있었으니까.
“그땐 정말 감사했습니다. 신관님의 기도 덕분에 그… 몸과 마음이 아주 신성력으로 넘쳐날 수 있었다고나 할까요.”
“신의 종이 되려는 자도 아니신데 이렇게나 예민하게 신성력을 감지하시다니 대단하시군요.”
그런 건가. 설마 나 오늘도 또 과하게 대답한 건 아니겠지.
전날 오버하다가 난처했던 경험을 떠올리며 얼른 본론을 꺼냈다.
“그래서 오늘도 기도를 받으러 왔습니다.”
나는 얼른 그의 맞은편 의자에 걸터앉았다.
전과 마찬가지로 그가 양손을 내밀었고 난 그 손을 맞잡았다.
따듯했다. 지난번엔 시스템에 정신이 팔려 미처 느끼지 못했는데 맞잡은 그의 손은 기분 좋을 정도의 따스한 온기를 지니고 있었다.
신관의 손이 따듯한 건지 원래 신성력이라는 게 따듯한 성질을 가지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왜 이리 노곤하지, 피로가 많이 쌓였었나.’
하긴, 그동안 있었던 일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따스한 손을 잡고 있으니 경직되어있던 무언가가 사르르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기도란 참 좋은 거구나… 그러고 보니 이 손 딱 좋네.’
손바닥의 크기에 비해 길게 뻗은 손가락이며 적당히 눈에 띄는 힘줄 하며, 내 취향의 손이었다.
‘보기에도 좋고 잡기에도 좋고.’
오징어 얼굴을 한 신관의 손이라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은 귀한 레어템이었다.
신성력을 주입하는데 꼭 엄숙한 기도가 필요한 건 아닌지, 아니면 손을 향한 내 시선이 너무 노골적이었던 것인지 그가 먼저 말을 걸었다.
“검을 다루시는 분 같은데 신성력이 자주 바닥나시는군요.”
다른 사람들은 어떻지? 시스템을 사용하지 않으면 신성력이 빠져나가는 일도 없는 건가?
“신성력 주입을 위해 기도를 받는 분은 별로 없습니다. 굉장히 드문 일이죠.”
혹시 나 지금 수상해 보이는 건 아니겠지? 이상한 사람 취급받을 수는 없었기에 적당한 핑계를 댔다.
“새로운 검술 연습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떤 검술이길래 신성력이 필요한지 참으로 궁금합니다.”
“검에 오롯이 정신을 집중해 신성력을 담아 휘두르는 그런 방법입니다.”
“오호, 그러시군요.”
판타지나 무협을 보면 ‘검기’라 든지 뭐 그런 게 있었다.
검에 신성력을 담는 게 가능한지는 모르겠지만 나름 전쟁 영웅인 녹시아의 실력이라면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신관의 반응을 보니 이번에야 말로 그럭저럭 잘 둘러댄 것 같았다.
“그럼 다음에는 검에서 신성력을 빼는 연습을 해보시는 건 어떨까요.”
“그것도 가능한가요?”
“아뇨, 레이디께서 농담을 하시길래 저도 농담 좀 해봤습니다.”
이런, 이 세계엔 그런 것 따윈 없나 보다.
장미 정원에서의 일이 데자뷰처럼 떠올랐다. 민망함을 감추며 마치 처음부터 농담이었던 것처럼 웃어넘겼다.
“아하하, 눈치채셨나요”
“물건에 신성력을 담을 수 있는 분은 대신관님 뿐이니까요.”
그렇다고 한다. 왜 신성력이 동나는 건지는 더 캐묻지 않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자, 이제 다 되었습니다.”
그의 말대로였다. 시스템도 신성력 충전이 완료되었음을 알리고 있었다.
“신관님께선 신성력이 얼마나 남아있는지 아실 수가 있나요?”
“네, 그 사람의 눈동자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의 신성력도요?”
“그건 그냥 느낌으로 알 수가 있죠.”
“혹시 방법을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신성력이 얼마나 남았는지 알면 시스템과의 상호작용을 좀 더 효과적으로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렵지 않습니다. 단지 레이디께서 겁이 좀 많으시다면 추천하고 싶지 않네요.”
“저는 기사입니다. 신관님이 하실 수 있는걸 제가 겁낼 것 같진 않네요.”
“좋습니다. 그럼 밤 12시에 거울을 가지고 달빛이 잘 비치는 곳으로 가십시오. 그런 다음 거울을 바라보며 말하는 겁니다. 거울아 거울아 내 신성력이 얼마나 남았니?”
잠시 정적이 흘렀다.
“정말인가요?”
“그럴 리가요.”
아니, 무슨 신관이 입만 열면 거짓말이람. 원래 게임에서도 이런 캐릭터였나?
워낙 비중이 작아서 제대로 기억이 나진 않았지만, 그냥 마치 시스템처럼 제 본분에만 충실한 NPC였던 것 같은데 말이다.
“죄송합니다. 대신 사과의 뜻으로 이 성물을 보여드리죠.”
신성력도 부여받았겠다 계속 농담만 하는 오징어랑 말을 섞느니 그냥 가는 게 낫지 않을까 싶었다. 그만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그의 말이 내 발을 붙잡았다.
“신성력을 측정하는 성물입니다.”
그가 내민 상자 안에는 투박한 디자인의 팔찌가 들어있었다. 아무런 장식도 없이 그저 팔에 걸 수 있게 깎아놓기만 한 것 같았다.
“지금 보시기에는 그냥 쇳덩어리 같겠지만.”
그가 성물을 손목에 차자 팔찌의 색이 금빛으로 변했다.
“이렇게 손목에 걸고 있으면 색이 변하면서 착용자의 신성력을 측정합니다. 전체가 금색이면 신성력 풀, 신성력이 줄어들수록 금색은 줄어들고 은색으로 변하게 되죠.”
“한마디로 금색이 신성력 게이지라는 거네요.”
“맞습니다. 이해가 빠르시군요. 게다가 착용자가 아닌 다른 사람의 눈에는 그저 평범한 은팔찌처럼 보이니 더욱 좋죠.”
이것 참 구미가 당기는 물건이었다.
팔찌에 눈이 먼 나머지 신관의 말투가 어디선가 많이 들었던 것과 비슷하다는 것도 알아채지 못했다.
“지금 구매하시면 특가에 드리겠습니다.”
“아니… 파는 물건이었나요?”
“그럼요, 아직 모르시는 분이 많은데 신전에서는 여러분들의 충만한 신앙생활을 돕기 위해 다양한 성물들을 판매하고 있답니다.”
“얼마죠?”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른 시간이라 레이디께는 특별히! 할인된 가격으로 드리는 겁니다.”
그래, 저 팔찌야말로 내게 꼭 필요한 물건이었다. 설령 할인이 거짓일지라도 무조건 사야했다.
난 후드 밖으로 튀어나온 오징어 다리를 바라보며 그가 얼마를 부를지 진지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천 골드! 천 골드에 드리겠습니다.”
“처, 천 골드요!?”
구매 욕구에 찬물을 끼얹는 가격이었다. 귀족들에게는 이게 살 만한 가격인 건가?
다른 귀족들의 주머니 사정은 모르겠지만 카미앙에게 십만 골드도 받지 못했는데 그런 큰돈이 내게 있을 리가 없었다.
‘카미앙이 돈을 갚았으면 저걸 살 수 있는 건데! 아니 그러면 굳이 저 팔찌가 필요 없나?’
카미앙이 아니라면 신성력이 얼마나 남았는지, 스킬을 한 번 사용할 때마다 신성력이 얼마나 소모되는지 일일이 신경 쓸 필요도 없을 테니 말이다.
“비싸다고 하진 않으시겠죠? 자주 신성력이 떨어지는 기사님께 꼭 맞는 물건일 겁니다.”
“혹시… 할부는 안 되나요?”
“신을 모시는 신성한 곳이다 보니 그런 거래는 지원하지 않습니다.”
“그럼 대여라던지.”
“아시다시피 성.물 아니겠습니까. 빌려줄 만한 물건이 아니지요. 기사님을 못 믿어서가 아니라 신전의 규정이 그러합니다.”
결국 그림의 떡이란 말이었다.
“저에게 정말 꼭! 필요한 성물인데 안타깝게도 제가 수중에 돈이 없네요.”
마지막으로 신관의 동정심이라도 살까 싶어 궁색해 보일 수 있는 말까지 꺼냈다.
하지만 신관은 실없는 소리만 하는 오징어라고 생각 했던 것에 비해 꽤나 단호했다.
“아, 그러시군요. 부디 레이디의 앞날에 큰돈이 굴러들어오길 바랍니다.”
신관은 빠른 손놀림으로 성물을 수납했다. 한치의 동정심도 느낄 수 없는 깔끔한 태도였다.
“그렇군요오. 그럼… 오늘도 감사했습니다.”
반면에 난 길게 늘인 말꼬리만큼이나 미련을 떨치지 못하고 있었다.
“레이디, 잠시만요.”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날 혹하게 했다. 아까 그 팔찌보단 못하지만 비슷한 기능을 가진 성물이 있는 건가? 팔찌 말고 다른 물건을 보여주려는 건가?
“신관의 기도는 은화 한 개를 받고 있습니다.”
그가 내민 건 헌금함처럼 생긴 작은 상자였다.
“지난번엔 너무 빠르게 사라지셔서 미처 받지 못했지만, 오늘은 꼭 지급해 주셔야겠습니다.”
김칫국도 이런 김칫국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