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카미앙과는 표면적인 약혼 관계였을 뿐이지만, 그래서였는지 베르만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날 몹시 싫어했다.
날 이용해 먹기 위해 앞에서는 상냥하게 굴었던 카미앙과는 대조적으로 대놓고 싫은 티를 팍팍 냈다.
‘칙칙한 갈색 군복에 빛바랜 부츠라니. 귀족 영애라고는 상상할 수도 없는 옷차림이로군요.’
자신은 진영만 지키고 있던 주제에 적군과 맞서 싸우는 녹시아를 이런 식으로 비웃는 건 다반사였다.
‘제대로 연주할 줄 아는 악기가 한 개도 없으시다고요? 이런, 바이올린과 플루트를 능숙하게 다루는 제 동생과는 참으로 다르시군요. 그거 아십니까? 왕세자님께서는 음악에 관심이 많으시답니다. 일반적인 상황에서 만났다면 어느 쪽이 왕세자님의 시선을 사로잡았을지는 굳이 입에 올릴 필요도 없겠군요.’
본인의 동생인 루티시나와 나를 비교하는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물론 더 나쁜 쪽은 이런 사정을 알면서도 베르만에게 아무 제재도 가하지 않았던 카미앙이었다.
‘혹시 모르지, 베르만에게는 루티시나와 반드시 결혼할 거라고 얘기해 놨을지도.’
왕도로 돌아왔다고 해 이런 성향이 바뀐 건 아니었다. 달라진 게 있다면 전선에서보다 나를 더 푸대접한다는 것 정도였다.
그 주군에 그 신하라고나 할까.
난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베르만의 집무실을 찾았다.
“녹시아 님, 미리 약속도 하지 않고 이렇게 찾아오시면 곤란합니다. 여기는 제 일터입니다.”
“풋.”
평소에 그러했던 것처럼 짜증 섞인 말투였지만 이번엔 주눅이 드는 대신 웃음이 터져나 왔다. 베르만의 얼굴 역시 오징어로 보인 탓이다.
“그건 또 무슨 예의 없는 행동입니까.”
그래도 신관과는 달리 그동안 계속 봐 왔던 얼굴이기에 베르만이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는 상상이 갔다. 미간을 있는 대로 찌푸리고 입꼬리를 아래로 축 내린 채 세상 못 볼 꼴을 봤다는 듯 날 쳐다보고 있겠지.
세상에서 가장 적대적이고 불만 많은 오징어에게 말을 건넸다. 오징어 머리 덕분인지 스킬 덕분인지 다른 때보단 말을 붙이기가 수월했다.
“아까 말씀드렸던 일 때문에 찾아왔어요.”
“그거라면 저도 아까 말씀드렸죠. 왕세자님께서는 지금 다른 분과 중요한 만남 중입니다.”
그래, 네 동생과 꽤나 중요한 만남을 갖고 있겠지. 어차피 내 용건은 카미앙에 관한 것이 아닌 지금 머무는 내 거지 같은 방을 옮겨달라 요청하는 것이었다.
“그게 아니고 방 말인데요.”
“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과연 여기서 베르만에게 숙소에 대한 불만을 토로할 수 있을 것인가. 이마에서 식은땀이 삐질 새어 나왔다.
설명을 떠올리며 베르만을 향해 왼쪽 입꼬리를 한껏 끌어올렸다. 제대로 한 게 맞나 싶었는데 마침 스킬 시전을 알리는 메시지가 나타났다.
예상했던 대로 의사 표현을 하지 못하는 답답한 녹시아가 할 말을 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스킬인 것 같았다.
<1. 좀 나은 곳으로 옮겼으면 합니다. 파르미엔 백작가의 영애인 제게 걸맞은 곳으로.>
<2. 당연히 문제가 있지. 당신 같으면 그 방에서 자고 싶겠어?>
당연히 2번. 이건 물어보나 마나 2번이지. 푸대접당한 걸 생각하면 1번은 너무나 점잖은 요청이었다.
하지만 2번을 선택함과 동시에 달갑지 않은 경고가 나타났다.
사람 실망시키는 재주가 있는 시스템이었다. 그럼 처음부터 선택지를 하나만 보여줄 것이지 왜 사람 설레게 만들어?
1번을 선택하자 내 입에서 선택지와 같은 말이 흘러나왔다.
“좀 나은 곳으로 옮겼으면 합니다. 파르미엔 백작가의 영애에게 걸맞은 곳으로.”
일단은 내 의사를 표현한 것만으로도 만족이었다.
‘좋았어. 이 스킬이라면 고구마로 목 막혀 죽지는 않겠군.’
루티시나와 카미앙 앞에서 버벅거렸던 것을 생각하면 실로 엄청난 발전이었다.
“아, 카미앙 님께서 직접 고르신 숙소인데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
치사한 놈. 녹시아가 카미앙이라고 하면 껌벅 죽는 것을 알고 그 이름을 가져다 붙인다.
진짜로 카미앙이 지시한 걸 수도 있지만, 지금의 이 녹시아에게는 안 먹힌다 이거지. 난 다시 한번 베르만을 향해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1. 그래요, 바꿔주세요.>
<2. 카미앙 님이 직접 고르셨다니. 정말 마음에 쏙 드네요.>
뭐야, 이 선택지는. 꼭 내 마음에 드는 선택지가 뜨는 건 아닌가 보다. 나는 조심스럽게 눈짓으로 1번을 선택했다.
“그래요. 바꿔주세요.”
“자꾸 억지만 쓰시는군요. 그것도 웃으시면서”
베르만이 신경 쓰인 쪽은 내 대답보다도 스킬 시전을 위한 제스처인듯했다.
내 딴에는 한껏 비웃어 준 거라 생각했는데 녹시아의 인상이 워낙 선량하다 보니 그저 웃는 것으로 보였나 보다.
어쩌면 아무런 의도 없이 웃는 게 베르만의 화를 돋군 건지도 모르겠다.
‘귀’라고도 부르는 오징어의 지느러미 부분이 새빨갛게 변했다. 세상 살다 보니 마른오징어가 빨개졌다 하얘졌다 하는 것도 본다.
‘내가 이렇게 나올 줄 몰랐겠지.’
베르만은 사람일 때와 똑같이 그 짜증 나는 가늘고 높은 목소리로 빠르게 조잘거렸다.
“전쟁 중에는 야외에서도 잘 주무시기에 금욕적이고 질서정연한 방을 좋아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백작가의 영애에게 어울리는 방같이 사치스러운 걸 원하실 줄은 몰랐네요. 물론 왕세자님께서도 그리 생각하셨겠지요.”
루티시나에겐 당연한 거고, 내가 누리면 사치스러운 거냐?
베르만의 말을 듣는 내내 입가에 웃음을 장착해 놓았지만 여기서 반격은 불가능했다. 스킬을 시전 한다는 추가 안내도 없었고 말이 술술 흘러나오지도 않았다.
하긴 녹시아에게는 속으로 별별 훈수를 다 두었지만, 과거의 나도 썩 말재주가 있는 편은 아니었다.
프레젠테이션이라든지 업무에 관해 설명하는 건 괜찮은데 논쟁이나 말싸움 이런 쪽에는 영 소질이 없었다.
내게 가당치도 않은 부탁을 하거나 말도 안 되는 변명을 늘어놓는 남자들에게 제대로 욕 한번 해보질 못했다.
‘레벨업을 하면 자연스럽게 말발이 생기는 건가.’
그것참 장래가 기대되는 스킬이었다.
“아무튼, 숙소를 바꾸는 건 시간이 좀 걸릴 겁니다.”
긴 빈정댐 끝에 마지못한 대답이 돌아왔다. 시일이 좀 걸린다니 한 달 이상 기다리게 만들려고 미리 밑밥을 깔아놓는 게 아닌가 싶었다.
“그리고, 녹시아 님께서 여기까지 찾아오신 김에 전달해 드리도록 하지요. 근위대 훈련 일정은 언제부터 가능하십니까? 장교 말로는 오전 검술 훈련을 맡아 주시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하던데요.”
“근위대 훈련?”
“전에 말씀드린 거 있지 않습니까.”
그제야 기억이 났다. 토벌전에서 승리하고 왕도로 돌아오는 길에 베르만이 넌지시 꺼냈던 말이었다.
‘녹시아 님, 왕도로 가시면 심심하실 테니 근위대 훈련을 도와주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왕세자의 약혼녀 자격으로 왕궁에 가는 녹시아에게 근위대 훈련을 맡아보라는 말도 안 되는 제안이었다.
차기 왕비로 사교계에 데뷔하고 왕실의 일원으로 필요한 것을 배우는 등 할 일이 수두룩 할 사람에게 말이다.
‘그거 괜찮군. 왕궁에 가면 마음껏 검을 휘두를 수 있는 장소가 많지 않아. 그대 운동도 할 겸, 겸사겸사 병사들의 훈련도 봐주면 서로 좋은 일 아닌가.’
그 말도 안 되는 제안에 카미앙이 먼저 긍정을 표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베르만의 단독적인 제안이 아니라 카미앙과 사전에 입을 맞췄던 게 확실했다.
녹시아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었는데 그것이 긍정으로 받아들여졌나 보다. 아니, 어떤 반응을 보였어도 두 사람은 긍정의 뜻이라고 해석했겠지.
‘지금이야말로 입을 열 타이밍’ 스킬은 확인이 끝났으니 이번에는 다른 스킬을 사용해볼 차례였다.
나는 일언반구 대꾸도 없이 베르만에게서 휙 등을 돌렸다.
“연무장과 지금 숙소가 가까우니 내일부터라도… 녹시아 님? 듣고 계신 겁니까?”
와, 이것도 괜찮았다. 노이즈 캔슬링 이어폰이라도 귀에 낀 것처럼 상대방의 말이 제대로 들리질 않았다.
뭐라고 말을 하는 건 알겠는데 신경 써서 듣지 않으면 그냥 웅얼웅얼하는 정도로만 들릴 뿐이었다.
<5, 4, 3….>
스킬 종료를 확인하기 전에 베르만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 오징어 머리가 불쑥 내 눈앞에 얼굴을 들이밀었단 뜻이었다.
“녹시아 님, 이런 태도는 파르미엔 백작가의 평판에도 좋지 못한 영향을 미칠 텐데요.”
난 다시 싱긋 웃었다.
<1. 지금 파르미엔 가문을 걱정을 해주는 건가요?당신이?>
<2. 전 근위병 훈련을 약속한 적이 없습니다.>
첫 번째 대답을 할 수 있는 날이 빨리 오길 바라며 2번을 선택했다.
“전 근위병 훈련을 약속한 적이 없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된다. 그 말을 끝으로 베르만의 집무실을 빠졌나왔다. 베르만은 더 할 말이 있는 것 같았으나 난 더는 용건이 없었다.
‘잘했어. 잘했다 녹시아.’
녹시아가 된 이후 처음으로 맛보는 승리감이었다.
***
<왕세자의 특별한 연애사>에선 특별한 이벤트가 있는 날이 아니면 카미앙의 아침은 늘 똑같았다.
6시 30분경 기상, 간단한 아침 운동 후 7시 30분에 아침 식사. 9시까지 왕실의 뜰에서 독서나 산책 혹은 악기 연주 등의 취미생활. 그 이후에는 공식 일정 참석.
공략 캐릭터들과의 이벤트는 대부분 9시 이후에 발생했다.
참으로 모범적이고 이상적인 하루의 시작이었다.
플레이할 때는 왕세자이니 이 정도 일정은 당연하다고 여겼지만, 카미앙의 실체를 알고 있는 지금 녀석이 과연 왕세자로서, 일정대로 잘 행동하고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긴 했다.
‘일단 가보는 거지 뭐.’
오늘은 카미앙과 녹시아의 이벤트가 있는 날이었다.
튜토리얼 후, 게임 초반에 강제로 진행되는 이벤트로 카미앙이 근위대장에게 녹시아를 자신의 수호기사라 소개하고 근위대의 특별직으로 임명하는 내용이다.
메인 이벤트인 만큼 스킬이 제대로 먹히지 않을 수 있었다.
혹은 내가 알지 못하는 세계의 강제성이 있을지 몰랐다. 튜토리얼이 끝났다 해도 스킬을 얻지 못했을 땐 카미앙 앞에서 꼼짝없이 얼어버렸으니까. 본 이벤트가 시작되기 전에 카미앙을 만나 스킬이 통하는지 확인해 보는 게 여러모로 안심될 것 같았다.
그래서 내가 노린 건 카미앙이 왕실의 뜰에 있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 전에 들려야 할 곳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