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렘 게임의 공략캐가 되었다-5화 (5/95)

5.

‘어장 속 물고기’

잠깐이었지만 불길하기 짝이 없는 단어였다.

‘혹 잘못된 메시지는 아니었을까? 아님 내 환상이었다던가.’

그런 희망을 품은 건 곧 메시지가 바뀌었기 때문이었다.

<플레이어는 자신의 상태를 확인하는 ‘상태창’과 카미앙의 상태를 확인하는 ‘공략창’ 메뉴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상태창을 확인하려면 오른쪽 눈으로 두 번 윙크하세요.>

<공략창을 확인하려면 왼손 검지와 엄지로 하트를 만드세요.>

백만 년쯤 늦은 설명이었다. 이런 건 본 게임이 시작됐다는 메시지에 이어서 바로 떴어야 하는 거 아닌가.

불만이야 많았지만, 마음이 급했기에 불평은 이만 끝내기로 했다.

정말 내 칭호가 ‘어장 속 물고기’인지 빨리 확인해 봐야 했다.

‘내 상태창을 확인….’

한숨이 새어 나왔다. 머릿속으로 ‘상태창’을 외치던가 떠올리면 화면이 나타나는 게 기본 아닌가.

이 문제 많은 시스템은 모션 인식을 도입했다. 그것도 상당히 우스꽝스러운 모션 말이다.

“그래, 해주자 해줘. 에잇. 에잇.”

윙크인지 시린 눈을 씰룩거린 것인지 모를 행동이었지만 명령은 제대로 입력된 것 같았다.

「당신의 칭호 : 어장 속 물고기

칭호에 따라 다음과 같은 효과가 발동됩니다.

1 분하거나 서운한 일이 있어도 어장 주인에게 말할 수 없습니다.

2 어장 주인의 말은 다 들어주고 싶습니다.

3 어장 주인이 세상에서 최고로 잘생기고 멋져 보입니다.

4 어장의 주인 이외의…….」

“하아, 진짜였네. 어장 속 물고기.”

설명을 다 읽기도 전에 한숨이 흘러나왔다. 사실 지금의 녹시아에게 딱 어울리는 칭호였다.

이보다 더 적절할 수는 없었기에 더더욱 부정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몰랐다.

녹시아는 카미앙의 어장 속에 있는 물고기였다.

먹이를 주지 않아도 제가 알아서 구해 먹고 눈이 멀기라도 했는지 웬만한 구멍으로는 빠져나갈 생각조차 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당연하게도 어장 속 물고기는 좋은 게 하나도 없었다. 말도 안 되는 제약들이 줄줄이 붙어있을 뿐 내게 플러스가 될 만한 건 단 한 개도 없었다.

“그래, 이 제약 때문에 그랬던 거란 말이지.”

좀 전에 카미앙 앞에서 나타났던 증상들이 떠올랐다.

일단, 저 3번. 저것 때문에 어장 주인인 카미앙 앞에서 가슴이 콩닥거리고 후광이 보였던 것이다.

“그나마 다행이다.”

불행 중 다행이라고나 할까. 바보 같은 과거의 내 행적이 영향을 미친 건 줄 알았는데 칭호에 따른 제약이었다.

물론 긍정적인 상황은 아니었지만 내 탓이 아니라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근데 저 제약대로라면 난 앞으로도 카미앙 앞에서는 제대로 말도 못 하고 바보처럼 있어야 한단 말이네.”

가장 끔찍한 건 2번이었다. 장미나 다듬으라는 빈정거림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고는 실천하려고 했던 물고기였다.

카미앙이 앞으로 어떤 일을 부탁할지 어떻게 알겠는가.

10만 골드는 없던 일로 하자던가 왕실 근위병으로 남아 평생 자신과 가족들을 지켜달라고 한다던가. 전처럼 야만족 수장을 잡아 오라는 둥 말도 안 되는 부탁을 하기라도 하면….

“안돼, 안돼.”

온몸에 경련이 일 정도로 암담한 미래였다. 그리고 꽤 가능성 있는 미래였다.

“시스템! 설마 이게 끝은 아니지? 모든 게임에는 해결 방법이 주어지는 법이잖아. 그치?”

난 오른쪽 눈을 연신 깜박이면서 소리쳤다. 이번엔 시스템이 내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것처럼 즉각 반응했다.

그것까지는 좋았는데 즉각 반응한 것으로 제힘을 다했다는 듯 시스템은 말을 채 다 하지도 못하고 사라져 버렸다. 내게 뭔가 스킬이 있다는 것만 암시한 채로 말이다.

“이봐, 시스템! 이대로 가버리면 안 된다고.”

난 생명이 다한 전우를 부르듯 시스템을 불러보았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허탈한 마음에 풀밭에 털썩 주저앉았다.

“어떻게 불러온 시스템인데!”

억울했다. 억울한데 어디 하소연할 때도 없고 해결 방법도 몰랐다. 다섯 살 떼쟁이가 된 것처럼 난 아예 풀 위로 드러누웠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떼쓸 사람이 없으니 소리를 지른다거나 하는 액션을 취할 필요는 없었다.

그래, 난 이성적인 인간이니까 침착하게 생각해보자.

잠시 눈을 감고 조금 전 시스템이 나타났던 순간을 되짚어 보았다.

장미 가지를 다듬다가 미쳤어 하고 손 때리고 검 떨어지고 조각상에 이상한 문구….

“그래, 기도? 기도가 필요한 거야?”

설마 싶었는데 역시 시스템을 불러낸 건 기도가 확실했다.

제대로 된 기도 자세가 있던가. 모르겠다.

난 그냥 살포시 눈을 감고 두 손을 가슴 위에 나란히 포갰다. 호흡을 가다듬고 오로지 기도, 기도에만 집중했다.

‘바렌시드의 신이시어 부디….’

“이, 이게?!”

… 이제 막 준비운동을 마친 참이었는데. 시작도 하기 전에 왠 방해꾼이 나타났다.

이렇게 후미진 곳을 굳이 찾을 사람은 없을 줄 알았는데. 혹시 ‘아, 사람이 누워있구나.’ 하며 그냥 지나가지는 않을까 싶어 그대로 눈을 감고 가만히 있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입니까!”

남자의 목소리가 한층 더 커졌다. 아무래도 날 무시할 생각이 없는 듯했다.

“음… 안녕하….”

“아무 말 마십시오! 굳이 힘들게 말씀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뭐지, 내가 힘들어 보였나. 이런 상황에서 기도를 하긴 틀렸다 싶어 몸을 일으키려는 날 그가 다시 한번 말렸다.

“움직이지 마십시오! 그대로, 그대로 누워 계세요. 괜히 잘못 움직였다간 상태가 더 안 좋아질 수도 있습니다.”

이쯤 되니 나 스스로 알아채지 못하는 병이 생긴 건 아닌가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왕궁 안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겠지만….”

그는 발꿈치를 들었다 내렸다 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니지, 범인을 잡기보다는 레이디의 상태를 살피는 게 우선이지.”

혼자 구시렁거리는 꼴이 큰 오해를 하는 것 같았다. 이럴 땐 단호하게 한마디 해줘야지.

“뭔가 오해가 있으신 것 같은데 일단 전 괜찮습니다. 완전 괜찮은 상태라고요.”

“절 안심시키려 배려해 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디 찔리거나 베이신 곳이라도….”

찔리거나 베이다니. 그런 끔찍한 일은 아나드 토벌전에서 충분히 당했단 말이다. 그런 내 마음을 알 리 없는 남자는 무언가 발견했다는 듯 소리쳤다.

“설마 저 붉은 것들이!”

더는 저자의 호들갑을 두고 볼 수가 없었다. 난 그가 말리기 전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죠?”

“레이디, 이렇게 일어나시면 위험합니다!”

“그러니까 자꾸 뭐가 위험….”

단면이 깨끗하게 잘린 나뭇가지들과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붉은 꽃잎, 그사이에 누워있던 나. 그리고 이 모든 것에 안 좋은 상상을 불어 넣는, 땅 위에 떨어진 검.

“아….”

오해할 수도 있었겠네.

“그게… 소품들이 절묘하게 배치돼서 그렇지 상상하시는 그런 상황은 아닙니다. 보시다시피 저는 다친 곳이 없고요.”

나는 양팔을 벌린 채 한 바퀴 빙그르르 돌았다.

“요 검은 제 것이고요.”

떨어진 검을 잽싸게 칼집에 집어넣었다.

“그러니까… 검술 연습 중이었습니다.”

카미앙은 멀리 갔겠지? 변명하는 와중에 카미앙이 나타나 비웃을까 걱정이 됐다.

“아, 검술 연습.”

남자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믿지 못하겠다는 듯 말했다.

“제가 검을 잘 다루진 못해도 병사들이 검술 연습을 하는 건 자주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보라는 듯 내 주위를 가리켰다.

“이렇게 꽃잎과 잎사귀들을 땅에 깔고 하는 검술은 본 적이 없습니다. 죽은 사람처럼 누워있는 검술은 더더욱 본 적이 없구요.”

이 사람…. 방금 전까지만 해도 좀 맹한 거 아닌가 싶었는데 갑자기 매섭게 허점을 파고든다.

“역시 다른 일이 있던 게….”

“보여줄게요. 보여주면 되잖아요. 제가 했던 검술 연습.”

그래 백 마디 말보다 한 번 보여주는 게 낫겠지. 더 이상 왈가왈부하는 것도 귀찮고 해서 난 몸소 검을 잡았다.

“자 보세요. 이렇게 자신의 몸을 축으로 삼아 검을 빙그르르 휘두르면.”

역시 녹시아였다. 천부적인 검술 능력과 꾸준한 노력으로 단련해 온 신체는 검만 들었다 하면 뭘 해도 빛이 났다.

즉, 내가 발 가는 대로 손 가는 대로 아무렇게나 움직여도 남들이 보기엔 꽤나 멋진 검술을 펼치는 것처럼 보인다는 뜻이었다.

“오오, 정말 그렇군요.”

이제야 납득이 간다는 상대방의 목소리에 으쓱해진 나는 그럴싸한 설명까지 덧붙이는 여유를 보여주었다.

“전장에서 백병전을 펼칠 때 사용하는 기술이랍니다. 사방에서 적들이 달려들 때 이렇게.”

난 다시 한번 몸을 돌리며 검을 휘둘렀다. 나뭇가지가 후두둑 땅에 떨어졌다.

“정말 대단합니다.”

상대는 박수까지 치며 감탄했다. 이쯤 되니 재롱이라도 부리는 어린애가 된 기분이었다.

내가 너무 과했다. 멋쩍어진 나는 헛기침을 하며 말을 돌렸다.

“그러고 보니 신관님이셨군요.”

남자가 걸치고 있는 흰색 로브와 금빛 허리띠, 그리고 콧등까지 내려오는 흰 후드는 바렌시드 신관의 의복이었다.

이래서야 앞이 제대로 보이겠냐는 의견도 있었지만, 이 정도는 해 줘야 뭔가 신비롭고 신성한 느낌이 난다는 의견에 따라 완성된 디자인이었다.

“신관님께서 여긴 어쩐 일로 오셨나요?”

한껏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는데 순간 거센 바람이 일었다.

“무슨 바람이 이렇게 세게….”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난 보았다. 후드가 잠시 벗겨진 사이 드러난 신관의 얼굴을. 그건 분명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오, 오징….”

이성이 온 힘을 다해 완성된 단어가 튀어 나가는 것을 막았다. 신관은 당황했는지 허둥지둥 후드를 뒤집어썼다.

얼굴이 있어야 할 자리에 오징어가 한 마리가 붙어있었다.

상대의 얼굴이 못생겼다고 오징어라 비유하는 게 아니었다.

그의 얼굴은 버터를 발라 굽기도 하고 마요네즈에 찍어 먹기도 하는 마른오징어,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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