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렘 게임의 공략캐가 되었다-4화 (4/95)

4.

끔찍한 일이지만 내가 녹시아의 마음으로 카미앙을 바라보고 있는 게 확실했다.

카미앙 앞에서 이렇게 바보처럼 버벅거리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본 게임이 시작되었다고 했는데, 이게 웬 날벼락이야!’

살다 살다 게임 시스템을 이렇게 원망해보긴 처음이었다. 아무런 설명도 없이 알림 메시지만 툭 던지고 사라진 거지 같은 시스템.

안 그래도 심란한데 저쪽에서 날 더 심란하게 만드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머, 이쪽이 녹시아 님? 안 그래도 한번 뵙고 싶었어요.”

카미앙과 똑같은 완벽한 바렌시드 상류층의 억양. 친절하지만 결코 만만하게 느껴지지 않는 어조.

붉은 머리카락을 깔끔하게 틀어 올리고 정원의 풍경과 잘 어울리는 연둣빛 드레스를 입은 루티시나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사교계의 꽃. 세간에서 루티시나를 칭하는 말이었다.

화면 너머로야 자주 보았지만 이렇게 사람 대 사람으로 만나니 예쁘다, 아름답다는 감상 이전에 왠지 모를 위압감이 느껴졌다.

“처음 뵙네요. 루티시나 드 바르하르트예요.”

정확히는 괜스레 주눅이 들었다. 얼굴도, 배경도, 그녀가 카미앙에게 있어 나와는 다른 존재라는 것도 이미 다 알고 있는데 말이다.

“녹시아 드 파르미엔입니다.”

“반가워요. 안 그래도 오빠랑 카미앙 님께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여자 기사님이라고 해서 궁금했거든요. 아, 저희 오빠를 아시려나요. 왕세자님의 부관으로 이번 전쟁에 참여했었는데요.”

“그런가요.”

이미 루티시나는 신경 안 쓰기로 했었다. 어차피 카미앙을 버릴 거니 라이벌이 될 일도 없었다.

그런데 왜 힐끔거리면서 루티시나와 나 자신을 비교하게 되는 걸까.

“녹시아 님도 계속 전쟁터에 계셨던 거죠? 남자분들과 동등하게 검을 맞대시다니 정말 대단하세요. 하긴 기사님은 키도 크시고 뼈대도 굵으시니 가능할지도 모르겠네요. 전 영 힘이 없어서 말이죠.”

루티시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레이스 소매 끝으로 나온 손목을 들어 보였다.

내 손으로는 양쪽 다 붙잡을 수도 있을 것 같은 가녀린 팔목이었다.

연이어 부채를 들고 있는 희고 고운 손이 눈에 들어왔다. 굳은살이 박힌 거친 내 손과는 천지 차이였다.

그뿐만 아니라 꾸민 모양새 또한 비교되었다.

전문가들이 한땀 한땀 정성껏 땋아 내린 후 다시 정수리 쪽으로 말아 올린 머리는 혼자서는 엄두조차 낼 수 없는 스타일이었다.

반면에 나는 어떠한가. 곧 적군이 쳐들어오기라도 할 듯 급하게 빗은 머리를 포니테일로 질끈 묶었을 뿐이었다.

제대로 된 머리 장식이라도 올렸으면 좋겠지만 내게 있는 건 전쟁터에서부터 써왔던 낡은 가죽끈뿐이었다.

‘자꾸 비교하지 말자.’

잡생각이 머리에 붙어있기라도 한 듯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이럴 때는 빨리 용건을 끝내고 사라지는 게 상책이었다.

“이거 말이에요.”

품에서 어음을 꺼내려 했는데 손이 잘 움직이지 않았다. 손의 문제라기보다는 몸 전체가 빳빳하게 굳어버렸다.

목소리도 마찬가지였다. 10만 골드를 갚으라 요청하려 했건만 말이 나오질 않았다.

“혹시 제가 있으면 곤란한 건가요?”

“아니, 그럴 리가 있소.”

“어머, 저는 왕세자님이 아니라 기사님께 여쭤본 거랍니다.”

카미앙이 가장 싫어하는 세 가지 행동 중 하나. 대놓고 그의 말에 반박하는 일.

하지만 카미앙은 녹시아에게는 한 번도 보여준 적이 없는 겸연쩍은 표정을 지어 보일 뿐이었다.

루티시나는 내게로 한 발 더 다가오며 대답을 종용했다.

“기사님, 제가 자리를 비켜드릴까요?”

기사님이라는 단어를 유난히 강조하면서.

베르만의 동생인 그녀가 카미앙과 나의 약혼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나를 자신의 연적이 될 만한 카미앙의 약혼녀가 아닌, 그저 기사로 대하겠다는 의사를 내비친 것이다.

“아니면 기사님도 저희와 함께 산책하시겠어요? 장미 정원을 지나 달의 호수까지 걸어갈 계획이었거든요.”

“같이 가긴 어딜, 왜 녹시아 경과 같이 간단 말이오.”

카미앙이 괜한 소리 말라는 듯 버럭버럭했지만 루티시나는 신경 쓰지 않았다.

“아니면 연무장을 안내해 드릴까요? 하긴, 기사님이라면 그쪽이 더 궁금하실 수도 있겠네요.”

루티시나와는 아무런 감정 없이 지나가고 싶었는데 저쪽에서 이렇게 적의를 드러내니 가만히 있다간 정말 가마니가 되고 말 상황이었다.

그래, 당하고만 있지 말자.

‘제가 카미앙과 중요하게 해야 할 이야기가 있거든요. 아, 자리는 비켜주시지 않아도 돼요. 여기는 너무 땡볕이고 하니 저희가 저쪽으로 가죠.’

머릿속에서는 세상 도도하게 대꾸했는데 실제로는 또다시 염소 한 마리가 등장했다.

“제, 제가 카미앙, 카미앙 님과 중요하게 할 이야기가….”

내가 들어도 우스꽝스러운데 상대는 어떻게 생각할까.

“네? 잘 안 들려서 그러는데 죄송하지만 좀 똑바로 말씀해 주시겠어요?”

당연히 우습게 여기고 있겠지. 루티시나가 부채를 까닥거리며 내 말을 끊었다. 비웃음이 가득 담긴 시선이 느껴졌다.

자신의 적수가 될 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확신한 듯한 태도였다.

난 배에 힘을 꾹 주고 다시 한번 입을 열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한심해서 봐줄 수가 없다는 듯 카미앙이 나섰다.

“지금 이런 태도는 좀 무례하군, 녹시아 경. 바르하르트 영애와의 시간을 이런 식으로 방해하면 곤란해.”

서릿발 같은 질책이었다. 아까와는 또 다른 박동으로 심장이 마구마구 뛰었다.

원래대로라면 싹싹 빌어도 모자랄 녀석이었다. 카미앙 저놈이 날 우습게 본다며 화가 나야 하는데, 머리채라도 잡으며 따져야 하는 건데 그냥 너무 서운했다.

왈칵 쏟아질 것만 같은 눈물을 겨우겨우 참는 게 전부였다.

내 심정은 알 바 아니라는 듯 카미앙은 루티시나에게 꿀 바른 목소리로 사과를 했다.

“파르미엔가의 영지가 변방 아니오. 바르하르트 영애는 상상이 안 가시겠지만 같은 귀족이라 하더라도 왕성 근처에 자리를 잡은 귀족과 변방의 귀족은 좀 다르다오. 게다가 녹시아 경이 군에만 있다 보니 왕궁의 예법에는 미숙해서 말이오. 내가 대신 사과하지.”

“전 그게 아니라….”

“녹시아 경, 평화로운 왕성이 심심하다면 그 검으로 이 장미 덤불이라도 다듬어 보는 게 어떻겠나.”

카미앙이 옆에 있는 장미꽃을 툭툭 치며 말했다.

“아니면 바르하르트 영애의 말대로 연무장이라도 찾아가 보던가.”

그리고는 루티시나의 손을 가볍게 잡으며 반대쪽으로 이끌었다.

“기사님, 기회가 된다면 또 뵙도록 해요. 오늘 정말 반가웠어요.”

녹시아의 미소가 내 콧잔등에 머물렀다가 나비처럼 날아갔다.

내게서 등을 돌린 두 사람이 걸어가는 모습은 마치 그림 같았다.

왕자님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사뿐사뿐 걸음을 옮기는 귀족 영애. 누가 봐도 잘 어울린다고 할 법한 한 쌍이었다.

‘어째서, 어째서 이런 거지?’

난 이제 녹시아가 아닌 빙의자 이시아였다. 이곳이 게임 속이라는 것도 알고 있고 카미앙이 어떤 녀석인지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내 꼴은 원래 녹시아와 다를 바 없었다.

‘설마, 나 평생 이대로 살아야 하는 건가?’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녹시아에게 훈수를 두며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해왔지만, 막상 내게 닥치니 결국 옛날과 똑같이 행동해 버렸다.

“근데 이거 왜 이래?”

카미앙에겐 아무 말 못 하고 루티시나에겐 업신여김받은 가여운 녹시아의 삶을 한탄 좀 해보려는데 몸이 가만히 있질 못했다.

자꾸만 검집을 향해 들썩거리던 손이 내가 힘을 빼자마자 곧바로 검을 빼 들었다. 날이 시퍼렇게 선 칼날이 햇살 아래 반짝였다.

녹시아가 자신의 몸보다 더 정성을 쏟아 갈고 닦아온 검이었다. 그 덕분인지 녹시아의 손안에서 춤을 추며 적의 목을 추풍낙엽처럼 베고 다녔다.

“…설마 카미앙을?”

솔직히 과격한 상상을 한 적도 있었다. 물론 그때는 결코 실행할 수 없는 진짜 상상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여긴 대한민국이 아니었고 녹시아는 세계관 최강의 기사였으며 손에는 검이 쥐어져 있었다.

완전히 내 마음대로 움직일 수는 없는 것 같지만 이번엔 카미앙 앞에서 녹시아나 이시아 중 누구의 마음이 발현될지 모르는 일이었다.

서걱.

그때였다. 발아래 장미 가지가 떨어졌다.

“응?”

서걱, 서걱. 나는 연달아 검을 휘두르며 비쭉 비쭉 튀어나온 가지들을 깔끔하게 잘라냈다.

그렇다. 난 지금 장미 덩굴이나 다듬으라는 카미앙의 비아냥거림을 몸소 실천하는 중이었다.

“미쳤어!”

반대 손으로 검을 쥔 쪽의 손등을 때렸다. 요란 맞은 소리를 내며 검이 땅으로 떨어졌다.

정말 미친 거다. 카미앙이 말한 대로 가지치기나 하려고 했다니 미친 게 아니고 뭐겠는가.

손이 덜덜덜 떨리며 식은땀이 흘렀다. 대체 어떻게 해야 이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지?

‘자, 참작하자. 침착해. 당황하지 말고 차분히 생각해보자고.’

여긴 게임 속이었다. 게임이라면 플레이어를 답 없는 곤경에 빠뜨리진 않는 법이었다.

그랬다가는 모든 플레이어에게 외면받는 망작이 되고 말 것이다.

그리고 우리 <왕세자의 특별한 연애사>는 나름대로 히트 친 훌륭하고 재미있는 게임이었지.

“그렇지 시스템?”

난 시스템의 등장을 기대하며 허공에 말을 걸어 보았지만 부질없는 짓이었다.

“아이템도 주고, 스킬도 주고. 실력에 맞는 적당한 시련으로 레벨업을 유도하고. 안 그래?”

다시 한번 시스템과의 접촉을 시도해 보았으나 무선 이어폰도 없는 이곳에서 미친 사람 취급당하기 딱 좋은 행동일 뿐이었다.

“안돼, 설마 나 망한 건가.”

난 그대로 풀 위에 풀썩 쓰러졌다. 하루에 천국과 지옥을 몇 번이나 왔다 갔다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때 눈앞에 있는 대리석 조각상이 눈에 들어왔다. 당연히 이곳에 쭉 있었을 테지만 갑자기 땅에서 솟기라도 한 것처럼 이제야 발견했다.

‘뭔가 꽈배기 모양 같긴 했는데 설마 꽈배기로 조각상을 만들었을 리는 없겠지.’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모양 덕에 난 잠시나마 마음을 가라앉히고 조각상에 집중할 수 있었다.

<위기의 순간에 선 그대여, 신께 기도하시오. 그리하면 신께서 반드시 길을 내어주시리라.>

무신론자인 내가 받아드리기에 조각상에 적힌 글귀는 너무나 신앙심 넘치는 내용이었다.

나도 모르게 살짝 비웃음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난 곧 태도를 바꿨다.

이곳은 바렌시드였다. 신전과 사제가 있었고 고오급 아이템인 성물이 있었다.

‘혹시 알아? 여기는 신이 엄청난 파워를 가지고 계실지도.’

기도라면 못 할 것도 없었다. 어차피 달리 해볼 것도 없겠다 물에 빠진 놈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난 양손을 꼭 부여잡았다.

‘제발, 하나님, 부처님….’

아니지, 대상이 잘 못 됐다. 이 세계 신의 이름은 모르지만 그 이름을 하나님이나 부처님은 아닐터였다.

‘이 세계에 계신 모든 신님. 제발, 제발 저 좀 도와주세요.’

형식도 신앙심도 없는 기도였지만 절실함 만큼은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겨우 다시 살아났는데 예전처럼 똑같이 살면 그건 너무 불쌍하잖아요. 게다가 전 착하게 살았다고요. 녹시아도 마찬가지고요. 이런 수모를 당해야 하는 사람은 상대의 마음을 가지고 논 카미앙 같은 놈 쪽이 아닐까요?’

내 절절한 기도가 신의 마음에 닿기라도 한 것일까? 눈앞에 다시 시스템 메시지가 나타났다.

「녹시아 폰 파르미엔

당신의 칭호 : 어장 속 물고기」

근데… 어장 속 물고기? 지금 내가 어장 속 물고기라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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