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튜토리얼이… 종료되었습니다?”
맛있는 음식을 음미하기라도 하듯 허공에 뜬 메시지를 한 자 한 자 천천히 곱씹었다.
그렇게 하고 나서야 어떤 상황인지 확실히 감이 왔다.
“그래, 튜토리얼!”
내가 녹시아의 몸에 빙의 후, 옴짝달싹 못 하고 갇혀서 지내왔던 지난 1년은 게임으로 치면 튜토리얼에 해당하는 기간이었다.
안내를 따라 누르라는 것만 누르고, 하라는 것만 해야 하는 그 튜토리얼 말이다.
그래, 내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게임 스토리대로 흘러가는 것을 두고 볼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바로 이거였다.
진작 알았더라면 좀 더 맘 편하게 지낼 수 있었을 텐데.
“튜토리얼의 본질을 아주 리얼하게 살린 시스템 이구만… 이 아니고 그럼 스킵도 가능했어야지! 튜토리얼은 원래 스킵이 기본인 거 몰라!? 그리고 녹시아로 빙의했을 때 지금은 튜토리얼이라고 설명을 해줬어야지!”
우리 회사 게임이 시스템으로 컴플레인 받은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이게 어찌 된 일인지 모르겠다.
“이러면 플레이어들 사이에서 말 나온다니까.”
물론 여긴 불만을 토로할 플레이어 따위는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미흡한 점이 많았다고는 해도 시스템이 등장한 순간 어쩐지 안심이 되어 말이 많아진 것뿐이었다.
시스템이란 무엇인가. 게임이 작동하도록 하기 위한 구조가 아닌가.
그럼 그 게임을 작동하는 사람은? 당연히 시스템과 상호작용이 가능한 나, 녹시아였다.
내가 왜 이 게임 세계에 빙의했는지, 심지어 플레이어 캐릭터도 아닌 NPC나 다름없는 공략 캐릭터에게 빙의하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플레이어로서 이 게임에 참가하는 거라면 난 자신 있었다.
밤고구마를 목구멍까지 밀어 넣는 답답한 녹시아로 살지 않을 자신 말이다.
“이젠 호구 녹시아가 아니라 이거지.”
머릿속에서만 떠돌던 생각이 입을 통해 공기 중으로 울려 퍼지고 다시 내 귓속으로 전해진다.
이전엔 인식해본 적도 없는 이 당연한 과정이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로 짜릿했다.
난 양팔을 힘껏 뒤로 넘기며 기지개를 켰다.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내뱉어 보기도 했다.
마치 햇볕도 들지 않는 독방에 십 년쯤 갇혔다가 석방된 심정이었다.
‘자, 그럼 카미앙에게 이 빚을 어떻게 갚아줄까.’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 본 적은 없었다. 그때그때 ‘욱’하는 감정이 치밀어 오를 때마다 기분을 달랠 만한 상상을 했을 뿐이었다.
카미앙의 볼따구를 양쪽으로 쭉 잡아당기면서 매번 미운 소리만 했던 입이 어디 있을까 하고 괴롭힌다든지.
사람들 앞에서 검술로 마음껏 농락한 다음에 지금까지 나를 가지고 논거냐고 따진다든지.
그러나 이건 지나치게 감정적인 귀여운 복수였다. 진지하게 생각해보면 내게 어떤 식으로 행동했든 녀석은 바렌시드의 왕세자였다.
이 세계에서 계속 살아야 한다면 연인으로든 죄인으로든 카미앙과 더는 엮이지 말고 현실적인 이익을 취하는 게 최선이었다.
어쨌든 다시 얻은 삶인데 왕세자 모욕죄로 감옥에서 여생을 보내고 싶진 않았다.
게임 스토리 대로 카미앙의 곁에 남아있는 건 더더욱 사양이었다.
한 남자를 두고 여자들끼리 기 싸움을 하는 건 내 성미에 맞지 않았다.
게다가 그 한 남자가 카미앙이라니 차라리 검을 들고 변방을 지키는 게 나았다.
‘그래, 역시 바렌시드를 떠나자.’
하지만 이대로 바렌시드를 떠날 수는 없었다. 나는 카미앙에게 받아야 할 10만 골드가 있었다.
아나드 토벌전을 치루는 동안 카미앙이 녹시아를 통해 파르미엔 백작가에서 빌린 돈이었다. 아무리 백작가라고 해도 단시간에 십만 골드를 마련하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척박한 국경 지대에 위치한 내 고향, 파르미엔의 영토는 부유하지 않았다. 군사 요충지로써의 역할만 하고 있을 뿐 풍요로운 농업 도시나 활기찬 상업 도시와 비교했을 때 수입이 매우 적었다.
‘아버지, 이번에는 오만 골드가….’
‘지난번에 군마 500필과 병사 삼천 명을 지원해 주지 않았느냐.’
게다가 파르미엔 백작가에선 이미 전쟁에 필요한 각종 물자를 지원하고 있었다.
절대 부족함 없는 지원이었건만 녹시아가 보채는 바람에 마지막에는 결혼할 때 받았다던 백작 부인의 장신구마저 팔아넘겼다.
파르미엔 백작마저 녹시아와 약혼하겠다는 카미앙의 말을 믿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보다는 사랑하는 딸이 저렇게나 목매는 사람이니 지원을 해주지 않았을까.
일 년 남짓이었을 뿐이지만 파르미엔가에서 지내는 동안 백작 부부가 녹시아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충분히 느낄 수 있었으니까.
상황이 이러하니 내가 카미앙에게 십만 골드를 받아간다 해도 백작가는 이미 크게 손해를 본 셈이었다.
그러니 10만 골드는 반드시 받아야 했다. 인도적 측면에서는 사람 좋은 백작 부부를 위해서였고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가세가 기울어가는 가문의 영애로 살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다.
난 품 안에 고이 지닌 카미앙의 어음을 꺼냈다.
파르미엔 백작가에게 빌린 10만 골드를 갚겠다는 증서였다.
우리 사이에 이런 게 웬 말이냐며 필요 없다던 녹시아에게 카미앙이 한사코 써주었던 어음.
그냥 돈을 빌리는 것이 면이 서지 않는다는 생각에서 그런 거겠지만, 어음을 준 것은 카미앙이 한 일 중 가장 잘한 일이었다.
이 돈조차 받지 못하고 돌아가면 백작 부부를 볼 낯이 없었다.
‘10만 골드를 받아 내고 영지로 돌아가 새 삶을 시작하는 거지.’
아니지, 그걸로 끝낼 수는 없었다. 받을 수 있다면 전쟁에 들어간 물자와 이자까지 받아 내자.
그럼 십오만 골드 정도 될까? 이십 만 골드? 아무래도 파르미엔가에 기별을 넣어 정확한 액수를 알아봐야겠다.
물론 카미앙이 이 돈을 쉽게 줄 리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돈을 받는 대신 왕세자의 약혼녀 자리에서 조용히 사라져 주겠다고 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어차피 카미앙이 녹시아에게 마음이 있는 것도 아니니 그 돈으로 날 떼버릴 수 있다면 기꺼이 그리하지 않을까.
명색이 왕세자이니 절실하게 머리 좀 굴리고 입만 잘 놀리면 그 정도는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돈 많은 가문을 찔러보든 가지고 있는 성물이라도 팔아보든 하라고.
나는 장미 정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장미 정원. 사시사철 꽃을 피운다는 특별한 바렌시드 품종의 장미가 계절마다 다른 빛깔을 뽐내는, 왕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소였다.
융단처럼 깔린 잔디밭 위에 장미 덩굴이 담을 이루며 만들어낸 산책로는 미로 같은 형태로 이루어져 있었다.
비밀스럽게 데이트를 즐기기에 딱 좋게 말이다. 왕세자님의 연애 사업을 위한 제작진들의 배려였다.
‘지금이라면 카미앙과 루티시나의 재회 이벤트가 일어나는 중이겠네.’
루티시나는 녹시아와 마찬가지로 공략 캐릭터 중 한 명이었다.
바르하르트 후작가의 영애로 카미앙의 충실한 부관인 베르만이 그녀의 오빠였다.
어려서 만난 건 단 한 번뿐이었지만 소꿉친구 같은 설정까지 더해져 루티시나를 진 히로인이라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물론 똑같은 공략 캐릭터라고 해서 카미앙에게 같은 대접을 받는 것은 아니었다.
귀족적인 까칠함과 도도함, 그리고 적당한 밀당을 할 줄 아는 루티시나를 카미앙은 결코 무시하는 법이 없었다.
카미앙에게 루티시나는 어엿한 귀족 영애고 녹시아는 그냥 부리기 좋은 신하였다.
‘하, 생각하니 열 받네.’
왕세자에게 신체적 위해를 가하면 안 된다는 것쯤은 당연히 알고 있지만, 그래서 감옥에 가지 않기 위해 조용히 바렌시드로 돌아가는 계획도 세웠지만 카미앙에게 아무런 복수도 하지 못한다는 게 참 아쉽기는 했다.
시원하게 따귀 한방 올려치면 딱 좋을 것 같은데. 내 징벌에 일그러질 녀석의 얼굴은 생각만 해도 짜릿했다.
내 안에 나도 모르던 폭력성이 내재되어 있던 건지 녹시아의 몸이라 그런 것인지 아니면 카미앙이 진짜 맞을만한 놈이라 그런 것인지 모를 일이었다.
그래도 역시 난 이성적인 사람이었다. 카미앙의 얼굴이 보이기 시작하자 따귀를 올리고 싶다는 생각이 사라졌다.
‘자 녹시아, 중요한 순간이다. 차갑고 냉정하게. 드라마에서 봤던 차도녀처럼.’
지금이야말로 이전의 녹시아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기선 제압을 할 때였다. 난 내 쪽으로 등을 보인 채 서 있는 카미앙을 불렀다.
“카카, 카미앙.”
… 젠장. 차도녀는 커녕 목소리가 염소처럼 떨렸다.
그나마 만족스러운 건 나의 등장만으로 카미앙을 당황하게 했다는 것이다.
“그대가 어떻게 여길.”
물론 약혼녀에게 다른 여자와의 데이트를 들켰다고 이러는 건 아닐 것이다.
분명 녹시아가 ‘감히’ 이 자리에 끼어들었다는 것에 대해 놀라움이겠지.
진짜 녹시아라면 우연히 카미앙을 발견했더라도 루티시나와 함께 있는 것을 확인했다면 알아서 그들을 피해 갔을 테니.
지금까지 녹시아는 카미앙이 부르기 전까지는 먼저 찾아가는 법이 없었으니 말이다.
‘그나저나 왜 이렇게 눈이 부시지.’
카미앙이 뒤돌아보는 순간부터였다. 녀석에게서 정확히는 얼굴 부근에서 LED 전구가 한 번에 백 개쯤 켜진 것 같은 광채가 쏟아졌다.
나도 모르게 눈썹을 찌푸리며 손으로 눈가에 그늘을 만들었다.
방향이 좋지 않은 건가 싶어 잠시 고개를 들어 하늘을 살폈다.
남서쪽에 떠 있는 태양은 절대로 카미앙 뒤에 조명을 만들어 줄 만한 위치가 아니었다.
다시 카미앙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눈이 부셨다.
설마 녹시아, 눈이 좋지 않았던가. 그런 설정은 없었는데.
그러고 보니 지난 전투에서 이마에 상처를 입지 않았었나? 그거 제대로 치료는 된 거겠지? 이마의 상처가 시력에 영향을 줄 수도 있나? 인터넷 검색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녹시아 경, 여기는 어쩐 일이요.”
응? 잠시 다른 생각을 하는 사이 듣지 못했던 호칭이 들려왔다.
‘경’이라면 기사들을 부를 때나 쓰는 호칭이었다. 녹시아가 기사라고는 해도 카미앙은 늘 녹시아를 이름으로 부르곤 했었다.
가장 가성비 좋은 방법으로 녹시아를 꼬시기 위해서였겠지만, 말투만큼은 진짜 약혼녀를 대하듯 항상 다정했다.
“설마 여기서 만난 게 우연은 아닐 테고. 나를 찾은 거요?”
그러나 지금은 누가 보아도 왕족이 신하를 대하는 태도였다.
그래, 루티시나가 있다는 거지. 그녀 앞에서는 내게 조금이라도 친근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다는 결연한 의지가 돋보였다.
‘바렌시드에만 도착하면 날 약혼녀로 모두에게 소개하겠다고? 이런 네가?’
기가 찼다. 알고는 있었지만 정말 쉽게도 버려지는 약속이었다.
신의 없는 행동과 가벼운 혓바닥을 그렇게나 잘 보이고 싶어 하는 루티시나 앞에서 비웃어 줘야 했다.
“할, 할 말이….”
그래야 하는데 가슴은 또 왜 이렇게 두근거리는지 모를 일이었다. 목소리도 아까와 마찬가지로 제대로 나오지 못했다.
걸어오는 동안은 분명 아무렇지도 않았다. 눈부실 정도의 후광과 마찬가지로, 가슴이 두근거리고 목소리가 떨리는 이 증상 역시 카미앙을 만난 방금, 갑자기 생겼다.
주인이 자신의 존재를 확실히 인식할 수 있을 정도로 쓸데없이 심장이 열일하고 있었다.
녹시아, 혹시 부정맥이라도 있던 걸까. 난 다시 한번 녹시아의 설정을 곰곰이 떠올렸다.
나도 모르는 사이 녹시아에게 시한부 약혼녀라는 설정이 추가되었다던가 하는 일은 없기를 바라면서.
“중요한 일이 아니라면 다음에 얘기했으면 좋겠는데. 여긴 전쟁터가 아니니 촌각을 다투는 일도 없을 테고.”
이상한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갑자기 카미앙이 멋져 보였다.
다른 여자와 데이트를 하고 있던 것도 알고 있고 대놓고 날 무시하는 것도 느끼고 있는데 말이다.
‘익히 알던 얼굴이잖아. 일러스트 잘 나왔다고 다들 좋아했고.’
그림 잘 나왔다, 주인공 잘 생겼다 하는 것과 이렇게 막 가슴이 두근거리고 눈이 부신 건 천지 차이….
‘설마.’
아, 나는 드디어 깨달았다. 카미앙에게서 후광이 비치고 심장이 뛰었던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