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렘 게임의 공략캐가 되었다-2화 (2/95)

2.

저 시스템이 내게 해주는 일이라고는 캐릭터를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다는 경고 메시지를 보내는 것뿐이었다.

어쩌다 이런 후진 시스템이 적용됐는지 모를 일이었다.

♥역시 난 그를 실망 시킬 수 없어.♥

궁서체로 쓰인 결의가 나타났다. 하트와는 백만년 쯤 거리가 있어 보이는 저 궁서체가 나타나면 게임 끝이었다. 녹시아의 결심이 확고해졌다는 뜻이었다.

“네, 제가 적장의 목을 바치겠습니다.”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카미앙이 녹시아를 껴안았다.

녹시아의 가슴이 터질 것처럼 두근거렸다. 아나드 대장과 싸울 때보다 더 거세게 뛰고 있었다.

우. 와. 로맨스다 로.맨.스. 망할 로맨스. 젠장맞을 로맨스!

카미앙의 숨이 녹시아의 귓가에 내려앉았다.

귀 간지럽거든요, 좀 떨어져 주시죠.

바렌시드로 돌아가면 카미앙이 녹시아에게 어떤 짓을 하는지 잘 알고 있었기에 그의 이런 행동이 같잖을 수밖에 없었다.

“고맙소. 녹시아. 이번 전투만 끝나면 우린 함께 바렌시드로 가는 거요. 왕세자의 약혼녀로 말이오.”

그래, 될 대로 돼라. 일 년이 다 돼가는 시간 동안 늘 이런 식이었다.

카미앙은 녹시아를 꼬시고 호구 같은 녹시아는 그것에 홀랑 넘어가 무리한 부탁을 받아들인다.

모든 걸 알고 있는 난 혼자 흥분하며 상황을 바꿔보려 하지만 만나는 건 저 ‘진입 금지’ 같은 시스템 메시지뿐 녹시아의 행동을 바꾸지 못한다.

인생이 어떻게 흘러갈지 알고 있으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이 바로 이런 거였다.

그날 새벽 녹시아는 병사들을 이끌고 요새에 잠입했다. 당연히 잠입 과정은 순탄치 않았고, 희생자는 계속 나왔다.

피가 난무하는 상황에서 녹시아가 적장의 목을 베는 데 성공 했을 때, 함께 온 정예병은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다.

녹시아는 약속했던 대로 아나드의 요새에 불을 놓았다. 그건 아군에게 보내는 신호임과 동시에 적군을 부르는 행동이었다.

대장의 처소를 지키고 있던 아나드의 병사들이 대장의 죽음을 깨닫고는 일제히 녹시아를 공격했다.

살아있는 생명을 상대한다는 것도 잊을 정도로 밀려오는 것들을 찌르고 베었다. 그것만이 살길이었다.

녹시아가 활약하는 동안 난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대체 얼마나 싸웠는지. 아무리 압도적인 실력을 갖춘 녹시아라고 해도 몸이 지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팔은 검을 들기가 버겁다는 듯 덜덜 떨려왔고 다리는 적을 보고도 움직일 생각을 하지 못했다.

어차피 이 전투는 녹시아의 승리로 끝난다는 것을 알고 있는 나조차 이제는 한계라는 생각이 들 때였다. 드디어 승리를 알리는 뿔피리 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녹시아는 눈가로 흘러내리는 피를 닦아내며 창문 너머의 탑을 올려다보았다.

창백한 햇살이 대지를 밝히기 시작하는 새벽녘, 드디어 아나드 요새에 바랜 시드의 깃발이 올라갔다.

카미앙의 군대가 아나드 토벌전에서 승리한 것이다. 녹시아와 파르미엔 백작가의 희생을 발판 삼아 얻어낸 결과였다.

왕실은 큰 출혈 없이 얻게 된 영토와 전리품에 매우 만족했다. 전쟁에 동의하지 않았던 귀족들도 카미앙의 뛰어난 용병술과 혜안에 감탄하며 뒤늦게나마 지지하는 태도를 보였다.

녹시아의 활약으로 카미앙은 선대의 어느 누구보다도 가장 공고한 세력을 가진 왕세자로 자리매김했다.

게임 제목대로 이제 카미앙에게 남은 일이라고는 왕세자님의 특별한 연애를 즐기는 것뿐이었다.

바렌시드로 귀환하는 데는 두 달 반이 걸렸다. 왕국에 승리를 안겨준 왕세자를 위해 성대한 개선식을 준비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

“카미앙 왕자님 만세! 바렌시드 만세!”

왕성에 들어서기도 전에 사람들이 카미앙을 알아보며 환호를 보냈다.

“저, 저분이 왕세자님이라는 거요?”

“그렇다니까. 오늘이 카미앙 왕자님의 개선식이 있는 날이니께. 왕성 거리에 꽃이며 깃발이며 잔뜩 꾸며논 거 못 봤남?”

“그런 거 다 몰라도 말이죠. 누가 봐도 딱 왕세자님 아니시겠어요. 저 기품 넘치는 모습을 좀 보세요.”

사방에서 듣기 거북한 찬사가 쏟아졌다. 카미앙이란 단어는 흘려보내려 노력해도 이 정도니 본인에게는 더 잘 들리겠지. 아니나 다를까 카미앙의 턱 끝이 점점 하늘을 향해 치솟는 게 보였다.

‘어디로 사라져 버렸으면.’

이렇게 된 거 행렬에서 벗어나 버리고 싶었지만, 당연하게도 자의로 움직일 수 없는 나에겐 불가능한 꿈이었다.

“어쩜 저렇게 인물도 훤하실까.”

“저분이 왕이 되시면 분명 더 살기 좋은 나라가 될걸세.”

귀라도 막아보고 싶지만, 그조차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그때 카미앙이 내 쪽으로 다가왔다.

‘뭐지, 설마 왕세자의 약혼녀로서 사람들의 환호를 받는 기분을 묻는다거나 하는 건… 당연히 아니겠지?’

말머리를 나란히 한 채 입을 연 카미앙은 뭔가 조급해 보였다.

“잠시 후에 있을 개선식에서 말인데.”

잠시 말을 멈춘 카미앙이 별 서너 개쯤 박은 눈동자로 녹시아를 바라보았다.

저러는 걸 보니 또 녹시아에게 무언가 부탁할 게 있는 모양이었다.

“그대는 제3소대 곁에서 행군하는 게 좋지 않을까 싶소.”

3소대는 기병이나 보병부대를 이끌었던 나와는 아무런 관계없는 궁수 부대였다. 그리고 개선식에서 가장 뒤쪽에 배치되는 부대이기도 했다.

“그대가 곁에 서주면 궁수 부대도 사기가 오를 것 같고. 이번에 유난히 궁수 부대에서 사고가 잦았잖소.”

전쟁이 다 끝난 마당에 병사들의 사기를 왜 신경 써야 할지 모를 일이었다.

그보다, 녹시아가 곁에 있으면 왜 사기가 올라간다는 결론이 나온 거지?

분명 진짜 이유는 따로 있을 거다. 카미앙은 제 생각에도 민망한 이야기를 할 때는 늘 쓸데없는 서론을 늘어놓곤 했다.

알고 싶지 않았지만 알게 된 카미앙의 버릇이었다.

“그리고… 그대도 알다시피 토벌전에 참가한 여기사는 그대뿐이오. 여자가 선두에 서면 아무래도 사람들의 이목이 그리로 집중될 거요.”

인제야 본심이 튀어나왔다. 본인이 가장 주목받으며 입성해야 하는데 녹시아가 눈에 띄어버리면 곤란하다 이 말씀이었다.

욕심도 많았다. 전쟁터에서 적군 한 명 무찌른 적 없는 주제에 개선장군 노릇은 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이번 토벌전의 일등 공신인 녹시아는 가장 뒷줄에 처박아 놓고 말이다.

“다시 말하자면 난 그대를 기사이기보다 내 약혼녀로 바렌시드의 사람들에게 소개 주고 싶소. 그대는 이런 마음이 뭔지 헤아려 주리라 믿소.”

이제 시작이구나. 녹시아 밀어내기.

오늘이야말로 저 뻔뻔스러운 주둥이를 후려칠 때였다. 그것만으로는 좀 부족하니까 제게 배운 것처럼 나지막이 속삭여 줘야겠다.

‘헛소리 마.’

이런 망상도 사치라는 듯 시스템 메시지가 나타났다. 지금은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다면 대체 언제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다는 건지 답답할 따름이었다.

강스파이크를 날려야 하는 손은 앞으로 가지런히 모여 있었다.

입에서는 헛소리 말라는 대답 대신에 긍정하는 대답이 흘러나갔다.

“알겠습니다.”

이 망할 녹시아는 카미앙의 별 박은 눈동자와 마주쳤을 때부터 그가 무슨 부탁을 하든 당연히 들어줄 준비가 되어있던 게 확실했다.

빙의자인 나는 거스를 수 없는 원작의 흐름에 휩쓸려가고 있었다.

***

개선식이 끝났다. 환호와 나팔 소리가 아직도 머리를 뒤흔드는 것 같았다.

‘아주 멋진 하루셨겠어. 그 의기양양한 꼴이라니.’

바렌시드의 시가지를 행진하는 내내 사람들의 시선은 전부 카미앙에게 쏠렸다. 녹시아에게 관심을 갖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녹시아를 뒷줄로 치워두고 홀로 주목을 받는 카미앙은 아주 행복해 보였다. 면봉처럼 보이는 뒤통수만으로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그래, 백번 양보해서 그건 원래 그런 인간이니 넘어간다 치자. 하지만 이것만큼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카미앙이 내 숙소랍시고 마련해준 방은 마치 전생의 회사 탕비실 같았다. 그동안 전투와 야영으로 고단했던 몸뚱이를 이제 좀 편히 쉴 수 있으려나 했더니만 이딴 방을 내주었단 말이다.

‘왕궁에 이런 방이 있었다고?’

당직 사관이 머무는 곳이라고는 들었지만, 게임을 몇 번이나 플레이하면서 이렇게 후진 배경은 본 적이 없었다. 플레이어로서 카미앙과 함께 이동했던 곳은 전부 5성급 호텔의 스위트룸 같은 공간뿐이었다.

‘내가 이 왕궁에 얼마나 좋은 방들이 많은지 잘 알고 있는데.’

이건 약혼녀인 백작 영애 녹시아를 위해 준비 한 방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전쟁 영웅이나 다름없는 기사 녹시아를 위한 방도 아니었다. 그랬다면 응당 궁전 내 하녀가 딸린 객실을 내어주어야 했다.

하지만 다짐을 실행하기에는 큰 난관이 있었다. 그것이 다짐만 백 번 하게 된 이유였다.

대체 어떻게 해야 내 마음대로 이 몸뚱이를 움직일 수 있는 거지?

이런 고민을 하는 사이에도 녹시아는 이딴 것도 방이라고 내준 카미앙의 부관, 베르만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있었다.

‘아니, 고맙긴 뭐가 고마워. 이번 토벌전의 일등 공신을 이런 식으로 대접하냐고!’

답답한 마음에 소리치자 아니나 다를까 시스템 메시지가 나타났다.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거 아주 잘 알고 있거든. 사람 약 올리는 것도 아니고.

어쩐지 오기가 생겨 다시 한번 소리쳤다.

‘왕세자의 약혼녀를 이따위로 대접하냐고 따져야지!’

시스템의 말대로 난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녹시아는 그런 말을 할 위인이 아니었다.

그저 점잖은 태도로 카미앙을 언제 만날 수 있는지 물을 뿐이었다.

“저… 카미앙님은 아직도 많이 바쁘신가요?”

바렌시드에 온 지 이틀이 지났지만, 카미앙의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수도에만 도착하면 당장 녹시아가 자신의 약혼녀임을 공포하고 세상을 안겨줄 그것처럼 굴던 녀석이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었다.

“글쎄요. 왕세자님께서 워낙 바쁘셔서. 일정을 확인한 후 알려드리죠.”

시큰둥한 대답과 함께 방문이 닫혔다.

‘야! 이 건방진 놈아. 내가 누군 줄 알고.’

구닥다리 악당 같은 대사가 술술 흘러나왔다. 물론 내가 이렇게 악을 써봤자 상대에게는 들리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 점이 더 날 약 오르게 했다.

‘카미앙, 네 놈의 시커먼 속을 다 꿰뚫어 보고 있는 내가 여기 있다고! 무시하지 말라고!’

그때였다.

나의 의지와 녹시아라는 육체 사이에 끊어졌던 무언가가 연결된 것처럼 내가 생각하고 있었던 그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그러다가 후회해도 소용없다!”

… 잠시 방안에 정적이 맴돌았다.

방금 내가 소리 지른 거야? 그럴 리가.

나는 지금은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다고 알리는 시스템 메시지를 기다렸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생전 처음 보는 메시지가 나타났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