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7화
드라건의 몸체 뒤쪽.
사람으로 치면 뒤통수와 목 뒷덜미 부근 즈음에 새겨진 ‘By 김민지’라는 글자가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그와 동시에 드라건은 온몸에 활력이 치솟는 것을 느꼈다.
‘이것이 나의 힘!’
마치 세계를 발밑에 둘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보았느냐?”
포식의 드라건은 이 기현상에 대해서 그렇게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자신의 힘에 굴복한 수호수가 자신에게 힘을 더해주고 있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
“힘이 끓어오르는군.”
“대단하십니다, 역시 악마왕을 모시는 악마군주 답습니다!”
참모인 하메디스는 이상함을 감지했지만 그걸 굳이 짚지는 않았다.
악마들의 세상에서 인정받는 참모가 되기 위해서는 똑똑함보다는 처세술이 더 필요했다.
지금은 처세술을 발휘할 때였다.
“흐흐흐.”
그동안 그 어떤 악마들도 결계 안쪽에 진입하는 것에 성공하지 못했었다.
그러나 드라건은 달랐다.
그가 움직이자 결계가 옅어지는가 싶더니 이내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를 뒤따르던 악마들은 드라건의 힘에 감탄했다.
그때, 드라건에게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최선을 다해서 나와 싸워라.
그 목소리에 드라건은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렸다.
그토록 기다리던 악마왕의 목소리였으니까.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말 그대로다. 나를 죽여라.
-저를 시험하시는 겁니까, 왕이시여! 저는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그는 악마왕의 오른팔이 되어 전 세계를 지배하고 싶었지, 여기서 죽고 싶은 마음은 일절 없었다.
-너를 시험하는 것이 아니다.
차진혁은 현재 한세린의 ‘군주통신’을 모방하여 사용하고 있는 중.
전반적으로 한세린의 도움을 받고 있었다.
한세린의 군주통신은 경우에 따라 상대의 정신에 미묘하게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
-나는 어쩌면 네가 진정한 악마왕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물론 완전한 세뇌는 아니었다.
말 그대로 약간의 영향을 끼치는 것 정도.
-네 능력을 믿어라. 너야말로 진짜 악마왕이 될 그릇이다.
-후후후. 역시 그랬던 것인가?
* * *
차진혁은 일부러 뇌룡을 타고 등장했다.
괜히 축제 전에 축포를 쏘아올리고 온갖 화려한 드론쇼를 벌이는 게 아니었다.
세상을 살다 보면 이런 보여주기식 화려함이 꽤 효과를 발휘하는 법이었다.
보랏빛 뇌운이 하늘을 뒤덮고 번개가 내리쳤다.
번개의 폭풍 가운데 차진혁이 뛰어내렸다.
“포식의 드라건. 네가 기어이 일을 그르치는구나!”
차진혁이 바닥에 착지했다.
그의 오른손에는 미리가 들려 있었다.
드라건이 움찔 놀라자 차진혁이 군주통신을 보냈다.
-명심해라. 진정한 악마왕의 그릇은 너라는 것을.
그 말에 드라건은 용기를 되찾았다.
수호수의 버프를 받고 있는 그는 더욱 자신감이 생겼다.
‘김민지’ 글자가 빛을 발함과 동시에 드라건의 몸체가 커졌다.
그의 몸 전신에서 은은한 황금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흐흐흐. 드디어 나타났구나, 가짜 악마왕.”
“내가 여기서 죽는 한이 있더라도 너를 막아설 것이다.”
그리고 차진혁과 드라건의 전투가 시작되었다.
차진혁은 확실히 여느 엘튜버보다 빠른 움직임을 보여주었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고 순간이동하듯 뛰어오른 그가 미리를 휘둘러 허공을 때렸다.
쾅!
허공을 때린 충격파가 터져나왔다.
그것은 공기를 압축시켜 어마어마한 충격량을 가진 공기탄으로 변환되어 드라건의 몸체를 향해 쏘아졌다.
순간, 드라건은 눈앞이 캄캄해지는 느낌이었다.
아주 잠깐이지만 ‘내 주제에 무슨 악마왕!’ 하는 마음도 들었다.
그러나 그 또한 잠깐이었다.
‘아무렇지도 않다?’
그의 몸을 둘러싸고 있던 황금빛 기운이 모여들어 한 점을 지켜주었다.
전신에 둘러져 있던 보호막이 한 곳으로 집중되어 충격파를 막아낸 것이었다.
‘정말 아무렇지도 않잖아?’
자신감이 조금씩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래. 진짜 악마왕은 나였다!’
그의 주변으로 점성질로 이루어진 수십 갈래의 물줄기가 생성되었다.
하나하나가 강대한 마력을 담고 있는 물줄기였다.
“악마왕의 채찍이다.”
채찍 하나가 휘둘러졌다.
차진혁이 스텝을 밟아 그 채찍을 피해내는 순간, 또 다른 물줄기 채찍이 차진혁을 향해 날아들었다.
절대결계의 힘을 머리위에 집중했다.
그러자 채찍들이 순식간에 휘어져 절대결계의 영향을 피해 차진혁의 복부를 강타했다.
“컥!”
“악마왕의 채찍에는 권능이 깃드는 법. 가야 할 길을 스스로 알아내는 법이다.”
점점 자신감이 생기기 시작한 드라건은 쉴 새 없이 물채찍을 휘두르며 차진혁을 압박했다.
그는 신세계를 경험 중이었다.
‘지치지 않는다.’
그것은 수호수의 버프 덕분이었지만 그런 건 상관없었다.
‘내가 악마왕이다!’
* * *
차진혁은 이 전투가 제법 마음에 들었다.
‘수호수가 생각보다 잘해주고 있잖아?’
-수호수 아니고 민지라고 부르기로 약조하였도다!
‘그래, 민지.’
아무래도 차진혁의 공격루트를 미리 다 알고 있다 보니, 차진혁의 공격을 알아서 잘 막아주었다.
덕분에 차진혁은 어느 정도 마음 놓고 공격할 수 있었고, 드라건은 방어에 대한 부담 없이 공격에만 치중할 수 있으니 공격력이 몇 배는 강해졌다.
‘드라건이 생각보다 약하긴 하지만…….’
정확히 말하면 자신이 지나치게 강해진 것 같기는 했다.
이 순간에도 수많은 이들이 경험치를 몰아주면서 자꾸만 레벨이 오르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런 경우에는 이 강함이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 상황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이건 진짜 쫄깃함을 위한 전투가 아니니까!’
어차피 진짜 싸우는 게 아니고 저기 숨어서 지켜보고 있는 가르비누를 끌어내기 위한 연출일 뿐이었다.
“죽어라!”
물채찍 여러 갈래가 가닥을 이루어 그물처럼 변하는가 싶더니 커다란 물덩이가 되어 차진혁을 향해 쏟아져 내렸다.
그 안에는 강대한 마력이 담겨 있었고, 차진혁은 절대결계를 사용하지 않았다.
맨 몸으로 맞아야 어느 정도 타격이 있을 것 같았으니까.
“컥!”
실제로 타격이 있었다.
머리 쪽에 약간이나마 충격이 있었던 것이다.
수호수의 버프가 확실히 강력했다.
‘피가 좀 났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게도 피는 나지 않았다.
“겨우 이 정도냐?”
-잘하고 있다, 새로운 악마왕의 그릇이여. 깨어나라. 그리고 나를 집어삼켜 진정한 악마왕으로 거듭나라!
더 크게 흥분한 드라건이 주문을 외웠다.
의미를 알 수 없는 영창이 이어지는가 싶더니 차진혁의 발 밑으로부터 끈적한 점성질의 액체가 뿜어져 나와 차진혁을 가두었다.
“보아라. 이것이 악마왕의 [흐르는 감옥]이다.”
흐르는 감옥은 드라건의 필살기였다.
저곳에 갇혀서 살아 나온 자는 없었다.
살아 있는 자의 생기를 빨아들여 양분으로 삼는 감옥.
“이제부터, 가짜 악마왕의 포식을 시작한다. 만찬이다!”
드라건의 심장이 쿵쾅대며 뛰었다.
처음에는 함정인가 싶었다.
충성심을 시험하는 줄 알았다.
그러나 아니었다.
저 가짜 악마왕이 진짜 악마왕의 그릇을 알아보고 자신에게 투항하고 있는 것이었다!
가짜의 몸을 바쳐서 진짜를 탄생시키려고 하는 것이었다!
한편, ‘흐르는 감옥’에 갇힌 차진혁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시야가 차단됐다.’
안에서도 그렇지만 밖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지금의 가르비누라면 이 안쪽을 투시할 수 없을 터.
‘미리. 내 뒤통수를 깰 기회를 줄게.’
-지, 진짜요? 아, 아니. 나는 그런 걸 원하지 않았…….
‘시간 없어. 빨리.’
-이건 주인이 시켜서 하는 거예요. 나는 이걸 원하지 않았어!
미리의 특성, ‘집요하고 끈적한 욕망’이 사용되었다.
빛줄기가 차진혁의 머리를 강타했다.
-흐흐, 흐흐흐흐!
극도로 흥분한 미리는 황홀경에 빠져들었다.
-주인의 뒤통수를 먹었다!
마치 전류에 감전되기라도 한 것처럼 미리의 전신이 들썩거리며 경련했다.
뒤통수에 얼얼한 충격이 느껴지며 피가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그 순간, 차진혁은 위기감을 느꼈다.
‘안 돼!’
불로초의 효과일까.
순식간에 상처가 아물기 시작했던 것이다.
조금 흘러내리는가 싶었던 피도 멈추었다.
아니, 멈추는 수준이 아니라 아예 상처 쪽으로 되돌아가 몸으로 흡수되어 버렸다.
‘왜 이렇게 쓸데없이 강해져서는.’
차진혁은 미리를 검의 형태로 변환시킨 뒤 왼팔을 향해 휘둘렀다.
팔이 잘려 나갔다.
‘됐…….’
되지 않았다.
잘려 나간 팔이 눈 깜짝할 사이에 다시 원래대로 붙어 있던 것이다.
이게 왜 돼? 당황할 겨를이 없었다.
‘시간이 없다.’
곧 ‘흐르는 감옥’이 사라질 것이었다.
‘나의 강함을 컨트롤할 수 있어야 한다.’
내가 원할 때에만 회복할 수 있고, 내가 원할 때에만 강할 수 있어야 했다.
불로초의 기운을 통솔할 수 있어야 했고, 팔이 잘리고 싶을 때에는 잘릴 수 있어야 했다.
그걸 다루지 못하면 진짜 강함이 아니었다.
차진혁은 다짐했다.
‘진짜로 강해져야겠다.’
* * *
차진혁의 다짐과는 별개로 지금 당장 강해질 수는 없는 노릇.
차진혁이 크게 비명을 질렀다.
“크아아아악!!!”
일부러 생채기를 계속내서 ‘흐르는 감옥’이 흡수하게 만들었다.
흐르는 감옥은 불로초를 머금은 차진혁의 피를 흡수하며 드라건에게 큰 활력을 불어다주었다.
“느껴진다. 나의 힘이……!”
드라건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정말로 세상이 발밑에 둘 수 있을 것 같았다.
엄청난 활력이 몸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진짜 악마왕이 탄생하는구나!”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가르비누는 애가 탔다.
‘이게 진짜인가?’
그에게도 이제 기회는 없었다.
그저 영혼의 파편으로 겨우 버티고 있는 중.
제대로 된 그릇을 차지하지 못하면 이 세상에서 소멸될 터였다.
‘김철수가 드라건에게 잡아먹힐 수 있는 건가?’
이건 함정이다.
아니, 함정이 아니다.
함정이다, 아니, 함정이 아니다.
하지만 저 드라건에게서 느껴지는 활력은 진짜였다.
거기서 가르비누는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저 흐르는 감옥이 정말로 김철수를 잡아먹고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지금 느껴지는 저 강대한 마력을 설명할 길이 없었다.
저 정도 활력이라면 김철수를 반쯤은 잡아먹어야 얻을 수 있을 터!
결국 가르비누는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지금이라도 김철수의 몸을 차지해야 한다!’
가르비누의 몸이 그림자가 되어 주욱- 늘어났다.
흐르는 감옥 속으로 스며들었다.
완벽하지 않은 몸 상태.
드라건의 기술 속으로 들어가는 것 또한 엄청난 위험부담을 지는 일이었으나 생각만큼 어렵지는 않았다.
흐르는 감옥을 뚫고 드디어 김철수에 도달했을 때.
둘의 얼굴이 서로 맞닿을 듯 가까웠다.
“왔다.”
히죽 웃는 김철수의 얼굴이 보였다.
가르비누는 공포에 휩싸였다.
“어째서…….”
몸이 성치 않을 거라 판단했는데 이상하리만치 멀쩡했다.
그 흔한 생채기 하나 없었다.
잠시 당황했지만 가르비누는 정신을 다잡았다.
“끝까지 허세를 부리는군, 김철수.”
겉으로는 저래 보여도 속으로는 이미 만신창이가 되었을 것이 분명했다.
드라건이 흡수한 양을 토대로 역산해 보면 김철수는 절대 멀쩡할 수 없었다.
김철수가 그러했듯 가르비누도 허세를 부렸다.
“네 몸을 차지하겠다. 그리고 우주의 지배자가 되겠다. 나의 일부가 되어 우주를 지배하려무나.”
“잠깐.”
차진혁이 검 형태의 미리를 휘둘러 손바닥에 상처를 냈다.
“먹이 좀 주고.”
작은 핏방울들을 흐르는 감옥을 향해 대충 털어주었다.
그러자 흐르는 감옥의 기세가 더욱 맹렬해지며 ‘으하하하! 느껴지는가! 이것이 나의 힘이다! 진정한 악마왕의 탄생을 모두 찬양하라!’라는 드라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느새 차진혁의 상처는 봉합되어 있었다.
“어디까지 말했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