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6화
인간의 몸.
그리고 하마의 얼굴을 가진 지략가 하메디스는 오래전부터 포식의 드라건의 참모 역할을 해왔다.
드라건이 그림성의 백작 피클루의 모습을 하고 있었던 것도 하메디스의 계략이었다.
피클루는 전투력이 거의 없는 사진기 형상의 악마.
상대를 방심하게 만들기에 딱 좋았다.
“드라건 님. 다만 문제점이 하나 있습니다.”
“문제점?”
“지구는 김철수 님의 고향입니다.”
“김철수 님이 누구냐?”
드라건이 인상을 잔뜩 찡그리자 거대 슬라임과 같은 그의 몸에서 검은 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몹시 화가 났다는 의미였다.
감히 내 앞에서 ‘님’을 붙여?
하메디스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쉴 뻔했다.
그렇게 많은 악마를 잡아먹었으면서 아직도 저 모양이라니.
“악마왕의 존함이 바로 김철수입니다.”
“……아.”
드라건이 그제야 인상을 폈다.
그리고 잊지 않기 위하여 ‘김철수, 김철수, 김철수’를 중얼거렸다.
“저는 그분의 성향을 모릅니다. 그래서 고향 침공을 어떻게 생각하실지 판단하기가 어렵습니다.”
“흠, 괜찮다. 네 말은 틀린 적이 없으니. 편하게 말해봐.”
“그분은 확실히 인간족이 맞으시지요?”
“……그런 것 같다.”
“그렇다면 저희의 침공을 좋아하실 가능성이 큽니다.”
하메디스는 인간들의 생리에 대해 제법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명분이나 명예. 도덕 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종족입니다.”
“그런 것들을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왜?”
힘이 최고 아닌가.
명분이든 명예든 도덕이든 그게 뭐가 중요하단 말인가.
드라건으로서는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었다.
“저도 잘 모릅니다. 그냥 그렇습니다.”
하메디스는 악마왕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
악마 차원들 곳곳에 악마왕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었으니까.
그것은 가르비누가 남긴 기록들이었다.
훗날, 본인이 재림하였을 때를 대비한 기록들.
악마왕은 완벽한 지배를 원하고 있었다.
“악마왕께서는 분명 지배를 원하고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족인 이상 명분이나 도덕 등을 신경 쓸 수밖에 없는 상황일 것입니다.”
“결론만 말해라!”
“저희가 대신 침공하여 인간 놈들을 지배하는 것을 원하실 것입니다. 악마왕께서는 전면에 나서서 지배하고 싶지 않으실 테니까요. 적어도 이곳, 지구만큼은 말입니다.”
“네 생각이 옳다! 크하하핫!”
포식의 드라건은 크게 웃었다.
일단은 어린 악마들만 보내놓았지만 이 정도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곧 지구는 큰 혼란에 휩싸이게 될 것이었다.
그것은 거대한 불안과 공포를 낳을 것이고, 악마들을 더욱 강하게 만들어줄 것이었다.
“먹어치워주지, 지구.”
* * *
곳곳에 악마들이 모습을 드러내 플레이어들과 전투를 치렀다.
그러나 그것이 어마어마한 공포와 혼란을 야기하지는 않았다.
[새로운 차원에서 나타난 이종족들.]
[스스로를 악마라 불러.]
[인간에게 매우 적대적이므로 주의를 요함.]
정도의 이야기들이 언론과 커뮤니티에 떠돌 뿐이었다.
이것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낀 몇몇 기자들과 엘튜버들이 이와 관련하여 심층 취재를 하겠다고 나섰으나 크게 의미는 없었다.
-플레이하다가 죽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
-플레이어들도 다 알고 하는 건데…….
지구는 김철수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은 서버였다.
-악마 호소인들이 나타날 수도 있지…….
-악마들이 뭐 별건가?
지성을 가진 마물에게 악마라는 이름을 붙이면 다 악마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중요한 건 경험치를 많이 주느냐, 혹은 난이도에 비해 좋은 아이템을 드랍하느냐였다.
-마물이 아니라는데?
-최근에 서버로 승격된 악마차원에서 넘어오는 거라던데…….
-아. 서버 전쟁 뭐 그런 건가?
지구는 이상하리만치 평안했다.
악마차원에서 누가 넘어와서 정복전쟁을 벌이는 것이 아주 비일상은 아니었던 것이다.
-뭐…… 그럴 수도 있지.
-도시 쪽으로는 접근 안 하는 듯?
-수호수 때문에 못하는 것 같던데.
차진혁이 강해짐에 따라 수호수의 권능도 대폭 강화되었다.
전 세계에 널리 퍼져 있는 수호수와 연계한 서울 수호수의 영역은 이제 서울을 넘어 전 세계를 아우르고 있었다.
수호수는 크게 하품했다.
-하아아암. 심심하시도다.
수호수는 차진혁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인격체였다.
차진혁 정도의 모험을 간접적으로 매번 경험하다가, 이런 평화가 지속되니 무척 지루했다.
말하자면 도파민에 중독된 상태에 가까웠다.
새로운 자극, 짜릿한 모험. 쫄깃한 긴장감이 필요했다.
-흐음.
어느 날, 수호수는 가뭄으로 메마른 지역과 홍수가 난 지역을 동시에 살펴보았다.
지구 반대편이기는 했지만 별 상관은 없었다.
-위대한 이 몸께서 좀 도와줘 볼까?
홍수가 난 지역의 물을 뿌리로 힘차게 빨아들였다.
그리고 역대급 가뭄이 닥친 땅에 그 물을 뿌려주었다.
그리고 곳곳에 자신이 한 일이라는 표식을 남겨두었다.
-By 김민지.
어떤 대륙에 또 역대급 산불이 났다 하여 홍수가 난 지역의 물을 빨아들여 산불을 끈 뒤 또 표식을 남겼다.
-By 김민지.
도대체 ‘김민지’가 무엇이냐.
이것이 혹시 신의 표식이 아니냐는 의견이 일 정도였다.
수많은 이들이 ‘김민지’에게 감사하며 눈물을 흘렸다.
‘어라?’
수호수는 괜스레 기분이 좋아졌다.
사람들의 칭송이 꽤 달가웠던 것이다.
도파민 중독 상태의 수호수는 그렇게 자극적인 일들을 찾아 나서기 시작했다.
그러자 인류학자들이 입을 모아 말했다.
-인류는 그동안 경험하지 못했던 부흥기를 맞이할 것.
-기후 위기의 해결책은 바로 ‘김민지’다.
-기적의 김민지.
한편, 편애광신 김민지는 수호수 앞에서 인상을 찡그렸다.
“너. 왜 나 사칭하냐?”
-사칭이 아니시도다! 내 이름은 김민지시도다!
“김민지는 내 이름이거든?”
-내 이름도 김민지로 하기로 하셨도다!
“왜?”
김민지는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김민지는 차진혁이 직접 지어준 소중한 이름.
이 이름을 멋대로 도용하는 것이 별로 유쾌하지 않았다.
-그야…….
“똑바로 대답해라. 안 그러면 뿌리를 뽑아버릴 거니까.”
-공식 철수랜드 1호의 이름이니깐…….
“뭐?”
-나도 철수랜드니까…….
김민지의 눈이 반달처럼 휘어졌다.
“착한 나무였네.”
김민지의 이름을 도용하는 걸 허락해 주기로 했다.
* * *
포식의 드라건이 하메디스의 멱살을 붙잡고 들어 올렸다.
“어째서 공포와 불안이 확산되지 않는 것이냐?”
“커, 컥! 용서하여 주십시오. 드라건 님!”
하메디스로서도 의아할 따름이었다.
보통 악마들이 나타나서 정복전쟁을 시작하면 아비규환에 빠지고 공포에 물들기 마련인데, 지구에서는 그런 낌새를 느낄 수가 없었다.
오히려 어디 홍수가 김민지 덕분에 괜찮아졌다느니, 인명피해를 막을 수 있었다느니, 어디 가뭄을 해결해서 식량난을 해결했다느니, 그런 희망적이고 밝은 소식이 지구를 강타하고 있었다.
“무능한 놈.”
드라건은 하메디스를 바닥에 던져버렸다.
쾅! 소리와 함께 머리를 부딪친 하메디스는 그 자리에서 기절해 버렸다.
“먹어버릴까?”
하지만 하메디스는 여러모로 쓸모가 있는 녀석이었다.
먹어치운다고 그 능력을 모조리 가져올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당분간은 더 살려두기로 했다.
“이래서야 악마왕께 면이 서질 않는데…….”
아무래도 어린 악마들만 내보내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을 것 같았다.
“김민지가 방해한다라.”
아무래도 공포를 심어주는 것에 가장 효과적인 것은 세계의 대도시들을 습격하는 것인데,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했다.
“어이. 일어나라.”
드라건은 점성을 가진 액체 채찍을 만들어 하메디스를 후려쳤다.
하메디스가 비명을 지르며 눈을 떴다.
“지구에서 가장 영향력이 강한 도시가 어디냐?”
“제, 제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서울입니다.”
“서울로 간다. 내가 직접. 그곳의 김민지를 깨부숴주마.”
서울의 경계에 도착한 드라건은 피식 웃었다.
손으로 매만져보니 무형의 결계가 펼쳐져 있었다.
“겨우 이까짓 결계 때문에 도시에 진입을 못했다?”
어이가 없었다.
악마들이 이런 결계 하나 통과하지 못하다니.
“보아라. 이것이 악마의 힘이다.”
그가 힘을 끌어올리자 검은색 마력이 넘실거렸다.
거대한 슬라임 형태의 몸에서 커다란 주먹이 쑤욱 모습을 드러냈다.
강대한 마력이 담긴 주먹.
꽤 많은 사람들이 그 주먹을 목격했다.
“저게 뭐야?”
“이번에 나타났다는 악마인가 뭔가 하는 그거 아님?”
“어? 나 저거 방송으로 본 거 같은데?”
몇몇은 드라건을 알아보기도 했다.
“포식의 드라건인가 걔 아님?”
“김철수 방송에 나왔던?”
드라건의 주먹이 점점 더 커졌다.
작은 동산만큼 커다랗게 변한 드라건이 결계를 내리쳤다.
“보아라. 이것이 악마왕을 섬기는 악마의 힘이…… 컥!”
드라건은 그자리에 기절해서 흐물흐물 녹아내렸다.
뒤통수에 커다란 구멍이 나있었다.
* * *
수호수 김민지는 무척 설레는 중이었다.
‘오시도다, 오시도다, 오시도다!’
수호수는 차진혁의 영향을 아주 많이 받는 존재.
차진혁은 지금 어떻게 해서든 가르비누를 끌어내려고 유도 중이었다.
일부러 자는 척도 하고 명상도 하면서 말이다.
그 영향을 받은 수호수는 드라건을 끌어들였다.
일부러 결계를 약화해서 말이다.
‘큰 공격이시도다!’
저렇게 큰 공격을 하게 되면 반드시 빈틈이 생긴다.
수호수 김민지는 드라건의 뒤통수를 노렸다.
‘흐물흐물하게 생겨서 한 방에 먹어치울 수 있을지 모르겠도다!’
하지만 상관 없었다.
한 방에 안 되면 두 방, 두 방에 안 되면 세 방.
뒤통수가 깨질 때까지 파괴력을 쏘아내면 그만이었으니까!
‘한 방?’
거창하게 등장한 주제에 생각보다 너무 약했다.
수호수는 아쉬운 나머지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고서, 기절한 드라건의 몸체에 표식을 남겼다.
-By 김민지.
서울 사람들은 이 기현상에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그냥 늘 있을 수 있는 평범한 일이 또 일어났을 뿐이었으니까.
‘오. 회복력이 제법이시도다!’
등판에 ‘By 김민지’를 새겨넣은 드라건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허공을 향해 외쳤다.
드라건은 수호수 김민지의 시선을 분명히 느끼고 있었다.
“김민지. 그래. 네놈이 김민지렷다?”
그때, 수호수 김민지에게 목소리가 들려왔다.
차진혁이었다.
-수호수.
수호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김민지.
-나를 부르셨도다?
-드라건을 좀 도와줄 수 있지?
-저 녀석을 도와주란 말이시도다?
수호수 김민지는 고개를 갸웃했지만 정신적으로 강한 결속력이 있는 만큼, 차진혁의 의도를 어느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아하!
차진혁은 수호수 버프를 받은 드라건과 싸울 예정이었다.
무려 서울 수호수의 버프를 받는다면 어느 정도 호각으로 싸울 수 있을 터.
가르비누가 습격해 주기를 바라는 함정이었다.
-하지만 나는 저 녀석의 뒤통수를 깨고 싶으시도다!
반고체를 깨는 건 나름대로 재미가 있었다.
푹신한 손맛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쓰다듬어줄게.
-흐, 흥! 이 몸, 김민지는 겨우 그런 제안에 혹하지 않으시도다!
차진혁이 대답하지 않자 수호수 김민지는 작게 말을 덧붙였다.
-내, 내 나뭇가지 위에서 낮잠을 자준다면 제안에 응하시겠도다.
거래는 성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