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3화
‘이동마법진?’
칼을 꽂아 넣으면 작동하는 원시적인 형태의 이동마법진이었다.
고검은 이 마법진을 활성화하기 위한 시동키였고.
오색찬란한 빛무리가 뿜어내는가 싶더니 세상이 빙글빙글 돌았다.
테르서박과 한세린이 동공이 풀린 눈을 하고선 소리쳤다.
“무, 무지개가 보여!”
“일곱 빛깔 무지개!”
“두더지우먼보다 내가 나아!”
“웅아! 결혼하자!!!”
이동마법에 따른 부작용으로 정신에 어떤 영향을 받는 모양이었다.
게다가 현대의 워프포탈보다 훨씬 더 멀미가 심했다.
“우웨에에엑!”
펭귄 마법사 다칸은 구석으로 달려가 구토했다.
황금웅에게 프로포즈하다가 겨우 정신을 차린 테르서 박이 황급히 뛰어가 다칸의 등을 정성스레 토닥여주었다.
그사이 차진혁은 주변을 둘러보며 짧게 감탄했다.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공간입니다.”
다섯 평 남짓한 작은 공간.
비유하자면 우물 속에 들어온 것 같았다.
위에서는 뜨거운 빛이 내리쬐고 있었고 주변은 습했다.
“저곳에 꽃 한 송이가 피어 있는데요.”
작은 봉분 위로 하얀색 꽃 하나가 피어 있었다.
중계자의 통찰로 이름을 확인해 봤다.
[불로초]
‘설마 진짜 불로초?’
차진혁이 가까이 다가가자 불로초의 꽃망울 위로 하얀빛이 몰려들어 구체를 형성했다.
수백 개의 방울이 차진혁을 향해 쏘아졌다.
그것은 일견 산탄총을 쏘아낸 것 같기도 했다.
‘어라?’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불로초의 기운이 차진혁의 몸에 흡수되어 버렸다.
순간, 고검이 요사한 붉은 빛을 뿜어내며 웃음을 터뜨렸다.
-으하하하! 꼴 좋다!
고검의 몸이 허공에 둥둥 떠올라 바르르 떨었다.
-특별한 방식으로 정제하지 않은 불로초는 극독이나 다름없지! 백사왕보다 더한 극독이다!
독과 약은 한 끗 차이.
약효가 지나치게 뛰어난 것은 독이 되기도 했다.
불로초가 그랬다.
인간에게 영생을 가져다준다고 알려진 보물 중의 보물.
영생의 기적은 인간의 몸으로 감당하기에는 지나치게 거대하고 위대한 기적이었다.
-곧 몸이 폭발할 것이다!
그간 성질 죽이며 사느라고 너무 힘들었다.
속마음을 들키지 않기 위해 무던히 노력해야만 했다.
-걱정 마라. 네 피는 모두 내가 빨아마셔 줄 테니!
고검은 김철수의 피를 마실 수 있다는 생각에 무척 행복해졌다.
고검이 특별히 사악하다고 보기에는 어려웠다.
제널드가 이토록 오랜 시간 자아를 유지하며 무구에 자신의 영혼을 가둘 수 있었던 방법이 바로 ‘욕망’을 검에 이식하였기 때문이었다.
피를 원하는 순수한 욕망.
그것이 원동력이 되어 그 오랜 세월 자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약간의 시간이 흐른 뒤, 차진혁이 물었다.
“뭐라고 했냐?”
* * *
차진혁은 약간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까지 위험한 독이란 말이지?’
가르비누는 정말 어마어마하게 철두철미한 녀석이었다.
자신이 아닌 다른 자.
그러니까 자신에 근접한(혹은 더 강한) 힘을 가진 누군가가 아무런 지식 없이 불로초를 취하려 하면, 오히려 불로초에 의해 살해당하도록 계략을 꾸며놓은 듯했다.
막을 시간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
솔직히 절대 결계로 막으려면 막을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러한 긴장과 쫄깃함은 가뭄 속에 내려진 단비 같은 것이었다.
‘드디어 위기다!’
지금은 마침 1인칭 시점으로 녹화 중.
이 긴장과 떨림을 시청자들에게 전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일부러 절대결계를 사용하지 않고 불로초의 기운을 몸에 받아들였다.
그리고 고검이 제멋대로 떠들도록 내버려 두었다.
-곧 몸이 폭발할 것이다!
-걱정 마라. 네 피는 모두 내가 빨아마셔 줄 테니!
이러한 대사들 또한 시청자들로 하여금 엄청난 긴장감을 느끼게 하겠지.
그리고 몸속의 변화에 주시했다.
‘개운한 느낌이 들어.’
머리가 맑아지는 느낌이었다.
마치 경치가 무척 좋은 산에 올라 상쾌한 공기를 들이마시는 기분이었다.
‘시력이 좀 더 좋아진 것 같고.’
몸이 조금 각성한 느낌이었다.
카페인을 섭취한 것과 꽤 비슷했다.
심장이 뛰는 속도가 조금 빨라지는가 싶더니 목과 뒷덜미 부근에서 맥박이 느껴졌다.
혈압이 강해진 느낌이었다.
‘고검의 말이 정말인가?’
혈압이 높아지다가 폭주하게 되는 건가?
미세하게 증폭되는 이 기운이 정말로 큰 해일이 되어 나를 덮치게 되는 건가?
그렇게 되면 즉시 명상에 돌입하여 기운을 다스리는 데 집중해야 할 것이었다.
소우주에 진입하여 불로초의 기운과 전력을 다해 싸워야겠지.
‘온다……!’
거대한 마력이 커다란 파도가 되어 자신을 덮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것은 환상에 가까웠다.
매섭게 들이닥치는 환상이 그를 덮쳤다.
그리고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뭐라고?”
고검 때문에 한껏 기대했는데.
이번에야말로 진짜 긴장을 연출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아…….’
조금 화가 났다.
“야.”
-아,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그러니까, 나는 배신하려던 게 아니라…….
“왜 시청자를 기만해, 이 새끼야!”
피에 미쳐서 배신하려던 건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모양새였다.
* * *
차진혁은 고검에게 벌을 내렸다.
“저기 벽 보고 둥둥 떠 있어라.”
-이, 이봐. 나는 제널드의 자아를 가진 위대한 무구……!
“미리 재료로 줘버린다?”
-…….
고검의 몸이 둥둥 떴다.
힘없이 흐물흐물 날아가 벽 앞에 멈췄다.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하지?
“내가 그만하라고 할 때까지.”
그 와중에 차진혁은 미리가 고검을 부러워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너는 또 뭐가 그렇게 부러워?”
-저 녀석의 행실은 괘씸하지만…… 저 실력은 진짜인 것 같아서요.
미리는 고검의 능력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우연한 기회로 자아를 갖게 된 미리와 달리, 고검은 생전 위대했던 마법사가 온갖 마법을 사용하여 자신의 영혼을 무구에 삽입한 것.
당연히 차이점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미리는 부럽다는 듯 말을 이었다.
-의지로 물리력을 구현하는 건 사실 엄청 힘들거든요.
육체가 없는 상태로 물리력을 구현하는 것.
그것은 마치 마력이 없는 마법사가 마법을 구현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했다.
차진혁은 미리의 자루 부분을 토닥여주었다.
“그래봤자 벌서기밖에 더해? 미리, 네가 훨씬 낫다.”
적어도 미리는 자신의 뒤통수를 깨고 싶어 하진 않으니…….
“너 설마?”
-아, 아, 아니거든요! 저는 아무 뒤통수나 먹지 않거든요! 주인님 뒤통수는 안 먹고 싶거든요!
차진혁은 인상을 찡그렸다.
“너희는 도대체 왜 그러냐?”
-네?
-무엇을 말이지?
보통 정신이 연결된 무구는 주인의 정신에 큰 영향을 받는다.
어떻게 자신처럼 멀쩡한 정신을 가진 주인과 연결된 아티팩트들이 하나같이 저 모양이란 말인가.
“너희는 차라리 내 손에 들어와서 다행인 것 같다.”
지극히 제정신인 사람 손에 있어도 저 정도로 돌아있는데, 조금이라도 미친 사람의 손에 들어갔다가는 재앙을 불러오는 끔찍한 마구가 되었을 것이 틀림없었다.
* * *
차진혁이 불로초를 흡수하던 그 순간.
그곳에는 불청객이 한 명 숨어 있었다.
그는 행방불명 된 1황자, 델리악크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자. 어서 불로초에게 가까이 다가가라!’
델리악크의 몸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가르비누.
정확히 말하자면 가르비누의 파편이었다.
그는 완벽하지 않았다.
김철수에게 너무 심하게 당해버린 바람에 영혼이 박살이 나버렸으니까.
그나마 델리악크가 나름 나쁘지 않은 그릇이어서, 이 정도 파편으로 겨우 육신을 유지하고 있었다.
‘나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군.’
하긴 자신 같아도 그럴 것 같았다.
보물 중의 보물.
보물의 왕 불로초를 눈앞에 두고 어떻게 이성을 유지할 수 있단 말인가.
지금 김철수의 눈에는 불로초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었다.
‘됐다! 불로초에 접근했어!’
불로초가 김철수의 마력을 폭주시킬 것이었다.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기적이 김철수의 몸과 영혼을 부숴버리는 그 순간.
그 순간에 김철수의 몸을 차지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불로초의 기운을 활용하여 망가진 김철수의 몸을 복원할 예정이었다.
‘네게는 없는 지식이 내게는 있다, 김철수.’
결국 마지막에 웃는 사람은 자신일 것이었다.
계획이 망가졌을 때를 대비하고, 또 대비하고, 다시 또 대비한 섬세함과 신중함이 승패를 가를 것이었다.
‘내가 이겼…….’
김철수가 멀쩡한 목소리로 말했다.
“뭐라고 했냐?”
김철수가 지나치게 멀쩡했다.
가르비누는 전면에 모습을 드러내지 못했다.
“야.”
순간, 가르비누는 들켰나 싶어 움찔했다.
이제 더 이상 준비한 패가 없었다.
여기서 들키면 끝이었다.
“왜 시청자를 기만해, 이 새끼야!”
다행히 김철수는 고검에게 정신이 팔려있었다.
‘일단 몸을 숨겨야겠어.’
신중하게 기다리면 기회는 또 올 것이었다.
단 한 번이면 되었다.
‘결국 승자는 내가 될 것이다, 김철수.’
* * *
차진혁은 키옌가문에 며칠 더 머무르기로 했다.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신비가문이다보니, 여기서 분량을 좀 더 뽑을 생각이었다.
차진혁은 키옌가문의 정원에 앉아 한세린과 대화를 나누었다.
“한세린. 불로초의 공간에서 말이야. 몰래 숨어 있던 녀석이 하나 있었거든?”
“지, 진짜?”
“어. 뭐 그렇게 강하지는 않았는데…… 아마도 델리악크의 몸을 빼앗은 가르비누 같아.”
옆집 강아지의 이름은 봄봄이고 갈색 푸들이야.
거의 그정도 수준의 나긋나긋한 어조에 한세린은 잠시 얼떨떨해했다.
“그러니까…… 내가 들은게 가르비누랑 델리악크 맞지? 우주에서 가장 섹시, 아니 위대했던 마왕 가르비누와 행방불명된 스웨딘의 전 황자 델리악크.”
“어, 맞아. 아무튼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그게 안 중요하다고?
한세린은 약간 황당한 표정으로 차진혁을 바라봤다.
슬슬 익숙해졌다 싶으면, 또 많이 이상해져 있어서 도무지 익숙해지기 어려운 타입이었다.
“분명히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거든.”
“……위험하다는 거야?”
차진혁은 아쉽다는 듯 혀를 찼다.
“그런 억지 긴장감 연출은 안 하기로 했어.”
좀 위험하면 좋을 텐데.
하지만 델리악크의 몸을 가진 가르비누는 너무 약했다.
“대신 참교육 쪽으로 가닥을 잡고 싶은데, 녀석이 엄청나게 신중해.”
슬쩍 살펴본 것만으로도 차진혁은 가르비누의 상태를 거의 정확하게 읽어냈다.
“아마 영혼의 파편 정도가 델리악크의 몸을 지배하고 있는 것 같거든. 기회가 많지 않을 거야. 지나치리만큼 신중하게 기회를 노리고 있어. 일부러 깊게 잠든 척도 해보고 명상도 해봤는데 도통 달려들질 않더라고.”
“혹시 지금도 주변에 있어?”
“아니. 지금은 없어. 어느정도 활동하면 일정시간 휴식을 취해야 하는 모양이더라고.”
차진혁은 약간 조급한 상태였다.
가르비누에게 남은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았으니까.
저 소중한 콘텐츠 재료가 의미없이 사라져 버리는 건 무척 쓰라린 일이었다.
“어떻게 하면 걔가 날 공격하게 만들 수 있을까?”
“흠…… 자는 척이나 명상 정도로는 안 된다고 했지?”
“어. 가까이 오지도 않던데.”
“그러면 좋은 생각이 있어.”
한세린은 잠시 말을 멈췄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약간 미친 생각을 떠올렸다.
‘하지만 상대는 김철수야.’
그녀가 아는 한 세상에서 가장 미친놈.
이 미친놈과 제대로 어울리기 위해선 자신도 미쳐야만 했다.
“마도왕에게 결투를 신청하는 게 어때?”
“마도왕?”
차진혁의 눈이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마도왕과 싸우다 보면 빈틈이 생기지 않을까?”
“확실히, 그럴 것 같긴 하네.”
아르비스에서 가장 강한 생명체라 불리는 불멸의 마도왕 세이도.
그의 또 다른 이명은 전투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