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9화
‘원래 성격이 좀 낙천적인가?’
그냥 걸어오라니.
자연이 낳은 천혜의 미궁 안개의 숲을 통과하는 방법에 대한 조언치고는 지나치게 낙천적이었다.
아무래도 혼자 찾아가는 것은 어렵지 않을까 싶어 전직 패스파인더 한세린을 불렀다.
“진짜 나 부른 거 맞지?”
한세린은 무척 흥분한 상태였다.
과거에야 길잡이 랭킹 1위였다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한국에서 제일 실력이 뛰어난 길잡이를 꼽으라면 사람들은 주저없이 두더지우먼을 꼽을 것이었다.
특정 상황에서는 아르비스의 르세핌보다 더 두각을 드러낼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맞아.”
“두더지우먼이 아니라 나를 부른 게 맞는 거지?”
한세린 스스로도 궁금했다.
“왜? 왜 두더지우먼이 아니라 나야?”
“그야…… 너도 뛰어난 실력을 가진 길잡이잖아. 폼은 일시적이어도 클라스는 영원하다라는 말도 있고.”
한세린은 군주로 각성하며 한국에서 가장 유능한 군주 플레이어로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 중.
그녀는 눈치가 무척 빨랐다.
‘자체 디버프?’
두더지우먼이나 르세핌은 너무 실력이 뛰어나서 차진혁의 콘텐츠에 오히려 방해가 되는 듯했다.
소 잡는 데에는 소 잡는 칼이 있고 닭 잡는 데에는 닭 잡는 칼이 있는 법.
지금은 닭 잡는 칼이 필요한 것 같았다.
‘이런 식으로 유능함을 인정받을 줄은 몰랐는데…….’
그녀는 괜스레 설레기 시작했다.
약해서 선택받았다지만 그것 또한 능력 아니겠는가!
한세린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힘들고 고된 여정이 될 거야, 김철수.”
차진혁의 표정이 미세하게나마 밝아졌다.
* * *
아르비스 서버, 안개의 숲.
앞이 하나도 보이지 않을 정도의 짙은 안개가 깔려 있는 숲이었다.
하얀 연기 속에 들어온 것 같았다.
“평범한 안개가 아니네.”
한세린은 멈춰서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 안개에는 암흑 속성이 더해져 있는 것 같았다.
안개 속에 들어와 있건만 깊은 어둠에 빠져 있는 느낌이었다.
“김철수. 너도 앞이 안 보이지?”
“보이긴 하는데…….”
한세린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이렇게까지 지독한 암흑속성의 안개는 처음 접하는 것.
‘빛 한 점 존재하지 않는 이 어둠의 세계에서도 뭔가를 볼 수 있단 말이야?’
하지만 놀람을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았다.
“우리의 선택지는 두 가지야. 이 암흑을 몰아내고 전진하느냐, 아니면 시각을 차단하고 다른 감각들을 활용하여 방향을 잡느냐.”
“길잡이로서 네 판단은?”
“나는…….”
한세린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녀는 이 녹화의 목적이 그저 키옌 가문을 찾아내는 것에 있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시각을 차단한 채 길을 찾지.’
실제로 많은 이들이 그에 성공하여 이 암흑안개 지대를 벗어났다는 기록이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조금 다른 선택을 하기로 했다.
‘완벽하게 디버프가 되어주는 거야!’
그것이 두더지우먼과 차별화되는 전략이라 할 수 있었다.
두더지우먼이었더라면, 아마 감각을 차단하고 능숙하게 방향을 찾아 안내했겠지.
“암흑을 몰아내는 방법을 선택해 보자.”
“빛을 불러오면 되나?”
“그래. 어렵긴 하겠지만.”
암흑은 어둠과는 비슷하지만 다른 속성이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어둠은 암흑의 부산물이었다.
암흑은 어둠, 저주, 혼란, 공포 등의 수많은 속성들이 우연히 모여 이루게 되는 특별한 성질.
수많은 성질들이 촘촘히 얽혀 있기 때문에 단순히 빛만으로는 이 암흑속성의 안개를 몰아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시도해 볼 가치는 있다고 봐.”
한세린이 판단했을 때 그렇게 억지스러운 연출은 아니었다.
차진혁은 일반적 기준의 하이랭커들보다 훨씬 더 강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고, 그러한 능력을 바탕으로 ‘중계용 조명’을 사용해보는 건 충분히 개연성이 있는 것이었으니까.
‘물론 안 되겠지.’
아무리 강한 빛이 있다고해도 암흑 속성을 몰아낼 수는 없는 법이었다.
아무리 단단단 망치라고 해도 물을 부술 수는 없는 것처럼 말이다.
[스킬, ‘중계용 조명’을 사용합니다.]
“……밝아졌네?”
순간, 한세린은 발견할 수 있었다.
한세린 자신을 향해 은은한 실망이 담긴 눈길을 보내고 있는 차진혁의 눈빛을.
* * *
“중계용 조명의 효과가 생각보다 좋은 것 같습니다.”
주변이 완전히 밝아졌다.
숨을 마셔보면 미약한 독기가 느껴지기는 했으나 그것을 제외하면 안개가 있다는 것조차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안개를 걷어내고 보니 굉장히 신비로운 숲이군요.”
암흑 속성의 안개로 긴장감 연출은 글러 먹었으니 급히 방향을 선회했다.
여행 엘튜버들처럼 이 신비로운 숲을 자세히 보여주기로 한 것이다.
“거대한 나무들이 즐비합니다.”
나뭇가지 사이로는 청설모가 뛰어다니고 있었다.
일반적인 숲과 달리 스켈레톤이라는 특이점이 있기는 했지만.
“오랫동안 암흑속성의 안개에 노출되어서 그런지, 땅에는 독기와 저주가 가득한 편입니다.”
때마침 한세린은 암흑 속성 저주에 저항하는 포션을 마셨다.
“너도 마실래?”
“아니, 난 괜찮아.”
한세린이 가까이 다가왔다.
혹시 몰라 차진혁의 상태를 살펴보았으나 지극히 멀쩡해 보였다.
그녀는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멀쩡할 수가 있지?”
“독 저항이 있어서 그런 것 같은데.”
“저주랑 독은 완전히 다른 거잖아.”
시력이 좋다고 해서 청력도 뛰어난 건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독 저항이 뛰어나다고 해서 저주 저항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독 저항이 일정 수준 이상 넘어가면 저주에도 면역이 생기더라고.”
그게 이론적으로 가능한 얘기인가?
한세린은 고개를 갸웃했지만 이제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설마 이게 되나? 싶은 것들은 대부분 된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몸에 조금이라도 이상이 있는 것 같으면 바로 얘기해. 포션은 넉넉히 준비해 왔으니까.”
“그래.”
한세린은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이상하다.’
슬슬 식인 나무들이 가지를 채찍처럼 뻗어와야 하는데 말이다.
숲은 이상하리만치 고요했다.
‘안개의 숲’에 대해 공부를 해온 차진혁도 이상함을 느낀 건 매한가지였다.
‘동쪽으로 걷다 보면 식인나무들이 공격해 온다고 하지 않았나?’
수많은 모험가들을 잡아먹고 점점 강해진 나무들.
암흑 속성의 안개를 양분 삼아 자라서 악마수라고도 불리는 나무들이 군집을 이루고 있다고 했다.
‘저것들 같은데?’
다른 나무들에 비해 유독 시꺼먼 녀석들이 있었다.
나무 주변에 검은 기운이 넘실거렸고, 그 나무들 주변에는 그 어떤 생명체도 자라지 못하고 있었다.
흙마저도 시꺼멓게 물들어 있었다.
암흑 속성으로 오염된 땅 중에서도 가장 심하게 오염된 곳들이었다.
‘눈이 마주쳤다?’
파르르-
식인 나무의 가지들이 떨리기 시작했다.
바람도 불지 않았는데 말이다.
‘공격을 아예 안 하는 건가?’
차진혁은 일부러 팔을 늘어뜨리고 무방비한 상태로 걷기 시작했다.
혹시 한세린이라도 공격해 줄까 싶어 한세린과 살짝 거리를 벌리고 걸었는데, 식인나무들은 한세린조차 공격하지 않았다.
“김철수. 저기, 시꺼먼 나무들이 빽빽하게 모여 있는 공간 보이지?”
그곳은 나뭇가지들이 가시덤불처럼 뒤엉켜 있었다.
“저길 통과해서 지나가야 할 것 같아.”
“그렇군.”
한세린은 조금 긴장하며 걷기 시작했다.
방송각을 살려주기 위해 일부러 위험한 길을 자처하게 될 줄이야.
‘내 쓸모를 증명해야지.’
이번에야말로 좋은 그림이 나와주길 빌었다.
혹시 나무들이 차진혁에게 겁을 먹은 것일지도 모르니, 자신이 먼저 가보기로 했다.
자연스레 차진혁을 뒤따라오게 했다.
“잘 따라와.”
“그래.”
덤불 바로 앞까지 도달한 뒤, 한세린은 바닥에 네 발로 엎드렸다.
“여기, 사람이 통과할 만한 작은 구멍이 있어.”
이 안으로 들어가면 움직임이 굉장히 제약된다.
그야말로 함정 속으로 기어들어가는 모양새.
“내가 먼저 들어갈게.”
조금씩 전진하기 시작했을 때, 나무들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드디어 움직인다!’
바람에 의한 움직임이 아니었다.
이것은 식인나무 스스로가 움직이는 것.
무방비로 노출된 인간을 잡아먹기 위한 본능이 꿈틀대고 있는 것이었다.
‘자! 나를 낚아채봐라, 이 괴물들아!’
비장한 표정을 지었으나 상황이 그리 만만하지는 않았다.
가시덤불이 이리저리 움직이는가 싶더니 길을 열어준 것이다.
사람 두어 명이 허리를 펴고 걸어갈 수 있을 정도로 쾌적한 길이었다.
“…….”
한세린은 무안한듯 허리를 폈다.
-너 도대체 얼마나 강해진 거야?
이건 디버프로 해결될 수준이 아닌 것 같았다.
* * *
차진혁은 직접 경험한 한세린은 나름대로 냉철한 판단을 내릴 수 있었다.
-이건 네가 엘튜버라서 그런 것 같아. 아마 방송 송출에 방해되는 모든 요소를 네 무의식이 삭제해 버리고 있어. 약한 버전의 [전능의 연출가]가 상시 펼쳐지고 있는 느낌?
그건 좀 너무 억지 아닌가?
“난 전능의 연출가를 사용한 적이 없는데.”
”그러니까 말이야.”
차진혁은 조금 억울해졌다.
모든 위기를 일상으로 만들어버리는 이 강함이 오히려 방송을 방해하고 있는 것 아닌가?
-잘 생각해 봐. 엘튜버 본인에게 위해가 가해지면 방송이 어떻게 되겠어?
그것은 방송 송출에 심각한 위기를 초래한다.
-암흑 속성의 안개가 뒤덮어서 시야를 가리면 방송이 어떻게 되겠어? 저주에 당해서 엘튜버가 제정신이 아니면 방송이 어떻게 되겠어?
차진혁은 약간 울컥했다.
그렇게 따지면 그 어떤 콘텐츠도 진행할 수 없는 거 아닌가? 이것도 저것도 다 방송에 문제가 될 테니까!
‘……근데 지금 실제로 콘텐츠 진행이 잘 안 되긴 하네.’
가끔은 인정하기 싫어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들이 있기 마련이었다.
지금은 한세린에게 화를 낼 때가 아니었다.
“굳이 귓속말로 안해도 돼. 어차피 편집으로 덜어낼 거니까.”
“알겠어.”
“그래도 조금 반가운 소식이 하나 있어.”
안개의숲은 하나의 치열한 생태계였다.
식인나무는 모험가뿐만 아니라, 안개의 숲에 서식하는 수많은 스켈레톤들에게도 위협이었지만, 그 식인나무를 장난감처럼 가지고 노는 생명체도 있었다.
“식인나무의 나뭇가지들이 인위적으로 꺾여 나간 흔적들이 보이지?”
어떤 식인나무는 통째로 뽑혀 있기도 했다.
또 어떤 식인나무에는 곰의 발톱자국 같은 것이 나있었다.
“아마도 이 언저리의 지배자일 거야. 움직이는 나무를 장난감으로 가지고 놀고, 표식을 남겨서 다른 놈들이 감히 영역을 넘보지 못하도록 만들었어.”
“이 주변의 제왕이라는 뜻인가?”
“어. 하지만 주변에는 발자국 하나 남아 있지 않아. 기척도 전혀 느껴지지 않고.”
한세린은 판단을 끝냈다.
“짐승계. 강력하지만 아주 은밀하고 조심스러운 놈이야. 사람으로 비유하면 힘이 강한 자객 정도? 만약 우리를 공격한다면 야영할 때, 특히 내가 불침번을 설 때 습격하지 않을까 싶은데. 그 중계용 조명은 언제쯤 꺼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