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4화
(18)번 퀘스트를 공개한 지도 벌써 세 달이 흘렀다.
그동안 천사소녀 송하영과 함께 꽤 많은 시도들을 해봤다.
“아쉽지만 황궁비고의 문을 열기 어렵습니다.”
“잠ㄲ…….”
송하영은 ‘아냐, 열 수 있을 것 같은데?’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차진혁의 엄한 얼굴에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지금의 내 수준에서는 파악할 수 없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나 보다 하고 생각할 뿐이었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
천사소녀 송하영과 팀을 이루어 황궁을 몰래 잠입했다가 빠져나오기도 하고 (일부러 위험에 노출되는 등의 연출을 덧붙였다), 황궁의 관리들과 접선하여 비고로 가는 길을 뚫어보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송하영이 물었다.
“진짜로 들어갈 생각이 있는 거지?”
황궁에 잠입은 한 번이 아니었다.
그녀가 기억하기로 대략 10번도 넘었다.
과연 황궁인지라, 첫 세 번의 시도는 완전한 실패였다.
그다음 세 번의 시도는 그럭저럭 성과를 냈고, 그다음 시도부터는 얼추 성공에 가까웠다.
새로운 황제가 선출되면서 황궁도 정신없었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꽤 의미 있는 성과들이었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순간에 차진혁이 자꾸만 발걸음을 돌리는 것이다.
처음 한두 번은 그렇다 쳐도 그다음부터는 의심스러워졌다.
‘일부러 진입을 안 하는 건가?’
싶을 정도로 말이다.
“당연하지.”
“지금 살짝 움찔한 것 같은데?”
“아냐. 이제 진짜로 클리어할 거다.”
“이제 진짜로?”
그럼 여태까지는 가짜로였다는 건가?
송하영이 눈을 가늘게 뜨자 차진혁은 슬쩍 다른 곳을 보며 말했다.
“가보자.”
“이번엔 진짜로 비고를 털 수 있는 거겠지?”
“긴장해. 우리가 입구까지 뚫어놓은 건 사실이지만 그곳은 황궁의 비고니까. 입구도 계속해서 바뀌고는 있지만 네 실력이라면 충분히 커버 가능하고.”
조금 과장하자면, 숨 쉬는 공기 분자 하나에까지 온갖 마법이 걸려 있는 금단의 성역.
그곳에 발을 들여보기로 했는데 이상한 서신이 하나 도착했다.
[친애하는 김철수 경에게.]
과거의 스승, 현재의 황제인 카일에게서 온 서신이었다.
[수많은 관료들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황궁의 비고를 공개하기로 하였습니다.]
황궁의 비고를 공개하는 과정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상세하게 적혀져 있었다.
수많은 관리들을 설득해야 했고 전 황가의 인장도 찾아내야 했으며 검의 명가 파사트가문의 협조가 필요했다.
뿐만 아니라 전전대 황제를 모시던 원로들을 찾아가 동의를 구하기까지 했다.
그 개고생을 했던 건 결국 황궁의 비고를 열어 수많은 제국민들을 위해 쓰고 싶다는 카일의 결단이기도 했지만, 차진혁을 돕고 싶다는 마음이 일부 있다는 것도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공개식에 김철수 경을 귀빈으로 초대하고 싶습니다.]
“…….”
[검의 제국 스웨딘의 대표로서, 전대 황가에 의하여 큰 피해를 입을 뻔했던 김철수 경에게 보상을 하고 싶습니다. 비고에서 필요한 것을 골라주십시오.]
‘이걸 그냥 준다고?’
예의를 갖춰 보낸 서신을 받은 차진혁의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 * *
새로운 황제가 된 카일은 뿌듯하게 웃었다.
“이 정도면 무척 기뻐하겠지?”
“그럴듯합니다. 생각해 보면 김철수 그자는 꽤 기특한 자입니다. 황제 폐하께 그 어떤 사적인 도움도 요청하지 않았으니까요.”
함께 전투를 치렀던 전우이자 스승이 황제가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황궁의 비고’ 가 우주급 시나리오와 관련되어 있는 상황.
보통 말 한마디라도 꺼내볼 법 하건만 김철수는 아무런 도움도 요청하지 않았다.
황궁 비고 근처에 수상한 움직임들이 감지된 것은 사실이었으나 그건 늘상 있는 일.
명예로운 검황대 출신인 그는 김철수가 그런 짓을 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후후.”
이 정도면 커다란 선물이 되었겠지.
스웨딘 제국 차원에서 보상도 해야 했기에 이번 귀빈 초대는 꽤 큰 의미가 있다 할 수 있었다.
“김철수의 방송은 파급력이 어마어마합니다. 김철수를 귀빈으로 부르고 사죄의 선물까지 전한다는 것은 제국에도 선한 영향력이 있을 것이라 사료됩니다.”
며칠 후, 차진혁은 귀빈 자격으로 황궁에 도착했다.
요즘 무척 바빴던 카일이지만 만사를 제쳐두고 차진혁을 직접 맞이했고, 둘은 독대의 시간을 가졌다.
“어서 와라, 김철수!”
“오랜만이군, 카일.”
차진혁은 그리 기쁘지 않은 모양새로, 반쯤 빈정거리듯 말했다.
“나를 귀빈으로 초대한 것도 모자라 황궁비고의 물건까지 내어주겠다니. 정말 고마운 일이군.”
“그 정도는 응당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전대 황가가 그대에게 그토록 몹쓸 짓을 저질렀으니 말이야.”
“…….”
차진혁을 바라보는 카일의 시선에는 호감만이 가득했다.
중계자의 통찰로 살펴봐도 정말 순수한 호의였다.
‘이걸 뭐라고 할 수도 없고…….’
그래도 황궁 비고 공개식의 VIP 참여 자체라도 꽤 괜찮은 콘텐츠가 될 수 있으니 감안해 주기로 했다.
“황궁 비고에 [옛 시대의 검]이 있나?”
“정확한 명칭은 알 수 없다. 그러나 바위에 꽂힌 특별한 성검 한 자루는 있었지. 오랜 시간 방치되었는지 상당히 낡아 있다.”
차진혁은 곧장 그것이 ‘옛 시대의 검’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간 헛짓을 했구나…….’
이렇게 쉽게 획득할 수 있게 되었는데 말이다.
그렇다고 그걸 안 받고 다른 걸 받자니 억지 연출이 될 것이 틀림없었다.
“그 검을 원하는 건가?”
“그렇긴 하지.”
“그대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내줄 수 있다.”
“……그것참 기쁘군.”
“그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니 내게도 영광이군. 후후. 다만 문제가 하나 있다.”
“문제?”
차진혁이 반색했다.
문제가 있다니, 이왕이면 스토리 짜기 좋은 문제면 좋겠다!
“말 그대로 바위에 꽂혀 있는 검이다. 몇 번이나 뽑으려고 시도해 봤지만 뽑히지 않더군.”
“정말인가?”
“황궁비고에 들어갈 수 있는 자가 지극히 한정적이기에 아직 많은 이들에게 실험해 본 것은 아니다. 나보다 완력이 강한 자라면 뽑을 수도 있겠지만……. 아무튼 무작정 힘으로 뽑기에는 어려움이 따르는 것 같다.”
“그렇군!”
차진혁은 저도 모르게 히죽 웃었다.
비록 겸양을 떨고 있기는 하지만 카일은 아르비스 내에서도 손꼽히는 랭커이자 검황대전의 우승자.
그가 뽑지 못하는 검이라면 누구에게나 공평히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검 수급 자체에는 문제가 없는데 그 검을 제대로 뽑을 수가 없다라…….”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황궁학사들을 지원해 줄 수 있다.”
“황궁학사들까지는 필요 없을 것 같다.”
황궁학사들이라면 제국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들의 집단.
말하자면 치트키를 제공하겠다는 그 말에 차진혁은 인상을 찡그릴 뻔했다.
“그대라면 그렇게 말할 줄 알았지.”
카일은 온화한 눈으로 차진혁을 바라보았다.
보면 볼수록 놀라운 사내였다.
황제가 된 자신에게 그 어떤 요구도 하지 않고, 황궁학사들의 지원까지 거절하다니.
“거절할 필요 없다. 황궁학사들도 뽑히지 않는 검에 대해서는 연구해 보고 싶을 테니.”
“필요 없다니까.”
“……그대가 그렇게까지 거절한다면 나로서도 더 이상 강권할 수는 없겠군. 하지만 기억해 주면 좋겠군. 그 정도로 저어하지 않아도 된다. 나와 황궁은 반드시 그대의 편에 서서 지원할 테니까.”
* * *
수백 년간 비밀에 싸여 있던 황궁비고가 공개되었다.
황궁비고로 가는 길은 이미 수백 가지가 존재했고, 그마저도 실시간으로 바뀌었다.
길 자체가 살아 숨 쉬는 생명체와도 같아서 계속해서 변화하는 것이었다.
황궁학사 중 한 명, 스웨딘 제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학사인 율레트가 VIP들을 직접 안내했다.
“매일매일 유능한 길잡이들이 지도를 그려가며 변화를 조사 중입니다. 패턴을 예측하고 새로운 루트를 개척하죠. 황궁비고로 진입한다는 건 미궁에 들어가는 것과 별반 다를 것이 없습니다.”
6대 가문의 가주들(키옌 가문의 가주는 불참했다).
아르비스 내에서 영향력이 큰 영웅 및 최상위 랭커들.
황궁으로부터 직접 초대받은 몇몇 기자들과 마시멜로.
그리고 차진혁이었다.
차진혁은 속으로 생각했다.
‘황궁학사도 과장이 심하시군.’
비고로 가는 길이 어렵고 복잡한 건 맞았다.
계속해서 바뀌는 것도 맞았다.
그렇지만 천사소녀 송하영은 10번 중 무려 5번이나 비고 입구까지 도착하는 데 성공했다.
한 서버(지구) 규모의 랭커인 천사소녀가 이렇게 길을 찾을 수 있다는 건, 우주 규모의 랭커들이 나서면 길을 쉽게 뚫어낼 수 있다는 의미였다.
“실제로 124년 전, 아르비스의 독보적 1위였던 도적이었던 마가렛이 비고에 잠입하려다가 무한시간의 결계에 갇혀 실종된 뒤 10년 전쯤 백골로 발견된 적이 있을 정도죠.”
124년 전 랭커들의 실력이 생각보다 좀 별로였나 보군.
“이와 비슷한 사례는 수도 없이 많습니다. 마가렛 뿐만 아니라 릴튼, 아미움, 죠론 등, 당대의 이름난 도적들 중 상당수가 황궁비고에 잠입하려다가 실종되거나 크게 다쳤죠. 모두가 실패했습니다.”
황궁학사 율레트의 얼굴에는 자부심이 가득했다.
“이번 공개식을 앞두고 우주의 몇몇 도적들에게 비밀스럽게 의뢰를 맡기기도 했습니다. 황궁 비고로 가는 길을 뚫어달라고 말입니다. 모두가 실패했죠.”
차진혁이 조심스레 물었다.
“천사소녀 송하영한테도 의뢰를 했습니까?”
“예. 본래 그 정도의 명성을 가진 도적은 아니지만……. 김철수 경과 관계가 깊다는 특이점이 있었으니까요.”
“송하영도 실패했다고요?”
“예. 물론입니다.”
차진혁은 약간 의심스럽기 시작했다.
‘나랑 있을 때는 몇 번이나 길을 뚫었는데?’
아마 황궁비고의 보안을 자랑하기 위해 과장을 하고 있는 거겠지.
“비고로 가는 길 자체가 그야말로 완벽에 가까운 마법 미궁이라 할 수 있죠. 아마도 검술 제국 내에서 가장 진보된 형태의 마법공간일 것입니다. 그것을 여러분께 증명하기 위하여 지구의 랭커, 김철수 경과 친분이 깊은 송하영 경을 초대하였습니다.”
황궁 비고의 공개식은 단순히 비고를 공개하는 행사가 아니었다.
비고의 보물들로 어려운 이들을 돕겠다는 선한 의도도 있었지만 스웨딘의 기술력을 과시하고자 하는 의도도 있었다.
“지구에서 이름난 도적조차도 황궁학사들의 도움이 없다면 비고에 닿을 수 없죠. 제 말이 맞지요, 송하영 경?”
VIP들의 시선이 일제히 송하영에게 쏠렸다.
마시멜로의 방송에 입장한 40억 명의 시청자들도 각종 의견을 쏟아냈다.
-황궁비고가 저 정도라고? 아무리 그래도 과장이 좀 심한 듯 ㅋㅋㅋ
-마가렛도 실패했다는데 과장이 뭐가 심해? 당시 압도적 1위의 도적이었음.
-근데 왜 아르비스 도적도 아니고 고작 지구따리의 도적임? 거기 김철수 빼고 뭐 있나?
-ㅇㅇ 김철수 말고 딱히 볼 거 없는 신생 서버인데…….
-걍 천사소녀 망신 주려는 거 아님?
“네. 일단 그런 거 같아요.”
“혹시 시연해 주실 수 있습니까?”
그 말인즉슨, 도적으로서 최고의 스킬을 발휘하여 비고로 가는 길을 뚫기 위해 노력한 뒤 실패해 달라는 의미였다.
“혹시 김철수랑 같이해도 되나요?”
“예?”
‘김철수 경이 함께하면 뭐가 달라지나?’
김철수가 도적도 아니고 말이다.
‘차라리 잘 됐군.’
천사소녀의 실패과정을 생생히 전달한다면 오히려 황궁의 기술력을 과시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겠지.
율레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가능합니다.”
그리고 김철수에게 다가가 작게 속삭였다.
김철수는 황궁의 VIP.
황궁학사로서 조언을 줘야 할 것은 줘야 했다.
“하지만 함께하지 않는 것을 추천합니다. 어차피 실패할 도전입니다. 모든 것들에서 승리를 거머쥐었던 김철수 경의 무패 이미지에도 타격이 갈 수 있습니다. 제 짧은 식견으로는 거절하시는 게 유리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