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는 그만 강해지고 싶다 388화
항문검 이현성과 함께 피사트 가문의 정문에 도착한 차진혁은 약간 의아함을 느꼈다.
‘가주가 직접 나왔네?’
피사트 가문 입장에서는 무리한 요구를 했나 싶어 조금 미안한 감정이 있었는데, 그리들은 전에 없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차진혁을 맞이해 주었다.
“어서 오게, 김철수 경.”
모습만 보아 하면 수십 년 된 친구를 맞이하는 것만 같았다.
“그쪽이 지구의 그…….”
그리들은 크흠, 헛기침을 한 번 한 뒤 민망한 듯 말을 이었다.
“항문검 이현성 경인가?”
“예, 그러합니다.”
이현성의 당당한 모습에 그리들은 조금 놀랐다.
‘저런 별호를 가지고 있는데 왜 자랑스러워하는 거지?’
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지구는 미친놈들만 모여 있는 곳 같았다.
아무래도 터가 안 좋은 것 같다.
“검이 노래하는 절벽에서 수행할 수 있게 배려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그리들 경. 만나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오.”
다시 보니 항문검은 굉장히 상식적인 사람 같았다.
“내게 고마워할 것 없네. 이건 어디까지나 김철수 경의 제안이었으니까.”
차진혁은 ‘검이 노래하는 절벽’에서 콘텐츠를 제작해도 되냐고 물었으나 거절당했다.
그러면 대신 동료를 한 명 데려가도 되느냐고 물었고, 그리들은 고심 끝에 그것을 허락했다.
“자. 따라오게.”
가문 안에 들어섰고, 수많은 건물을 지나 뒷산을 오르니 커다란 동굴이 하나 보였다.
“동굴을 따라 들어가다보면 검의 노랫소리가 들릴 것이야. 그 소리를 따라가면 검이 노래하는 절벽에 닿을 수 있을 걸세.”
“검의 노랫소리라니. 신기하군요.”
“정말 아름다울 거야. 장담하지.”
그 말에 미리가 경계심을 드러냈다.
-지들이 아름다워봤자지!
그리고 차진혁에게 재차 강조했다.
-그년들에게 시선 빼앗기면 안 돼요.
미리는 무구들을 늘 여성체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다 부숴버릴 테다.
예전에는 뒤통수를 부수는 것에 가장 큰 희열을 느꼈다면, 이제는 무구를 파괴하는 것에 더 큰 즐거움을 느끼는 것 같기도 했다.
태생이 브레이커 –미리의 태생은 룰 브레이커다- 라서 그런가 싶기도 했다.
“자. 검의 노랫소리를 만끽하고 돌아오게.”
* * *
어두컴컴한 동굴 입구 앞에 서자 동굴 내부로부터 시원하고 습한 공기가 새어 나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차진혁이 방송용 조명을 켜고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저벅저벅, 그들의 발소리가 바위 벽에 부딪쳐 메아리쳤다.
“천장은 드높고 벽은 반짝이는 종유석과 석순으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동굴 바닥에는 이끼로 두껍게 덮여 있.”
“뭐하는 거지?”
“아……!”
차진혁은 자신의 실수에 제법 만족했다.
방송 중도 아니고 녹화도 안 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방송을 하는 것처럼 플레이에 임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에서 꽤 치열함을 엿볼 수 있었다.
“뭐, 네 치열함이라면 익히 알고 있기는 하지. 그런데 김철수. 하나만 물어도 되나?”
“물어봐.”
“날 왜 여기로 데려온 거지?”
차진혁은 히죽 웃었다.
“네가 너무 약해서?”
“…….”
이현성은 순간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동안 김철수를 목표로 삼으며 수없이 정진하고 노력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철수에게서 돌아온 대답은 ‘너무 약하다’였다.
자존심에 크게 상처를 입은 이현성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한국 맵에도 그럴듯한 검술가가 한 명쯤은 있으면 좋겠기도 하고. 네 잠재력은 무척 뛰어난 편이니까 검이 노래하는 절벽에서 수행하면 커다란 깨달음을 얻을 수 있지 않겠냐?”
“……!”
이현성은 차진혁에게 인정받은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약간 감격스러웠다.
“물론 그래봤자 나한테 안 되기는 하지만.”
“…….”
대화를 나누는 와중 이현성은 기묘한 사실을 깨달았다.
“김철수. 그거 아나?”
“뭐?”
“너는 보통 본인이 기만하는 줄도 모르고 상대를 기만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나를 상대로는 늘 대놓고 기만을 하더군. 마치 너 따위는 나한테 안 되니까 까불지 마라라고 말하는 것처럼 말이야.”
굳이 표현하자면 김철수가 이현성 자신에게 경쟁심을 느끼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현성 입장에서는 이상한 일이었다.
“너는 이미 우주랭커의 반열에 들었다. 엘튜버의 몸으로 검황전에서 우승까지 했지. 그런데 어째서 내게 경쟁심을 느끼는 거지?”
“그야…….”
회귀 전에 네가 하도 나를 이긴다고 설쳐댔으니까 그렇지.
사람들이 항상 이현성이 더 강하네, 차진혁이 더 강하네로 언쟁을 벌였던 걸 생각하면 지금도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훨씬 강했는데 말이다.
차진혁은 대놓고 이현성을 비웃었다.
“풉.”
“뭐지, 그 반응은?”
“내가 너한테 경쟁심을 느낀다고?”
“나는 그렇게 느꼈다.”
“내가 왼손만 써도 이길걸?”
“…….”
이현성의 눈에 승부욕이 깃들었다.
“물론 네가 강하다는 것은 인정한다. 그러나.”
“왼손만 써도 널 이긴다는 말에는 동의하기 어렵다고?”
“이기기는 어렵겠지. 그러나 지지 않을 자신도 있다.”
이현성은 자신이 갈고닦은 검술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다.
차진혁의 왼손에는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승부욕에 불타는 그의 모습을 보며 차진혁은 히죽 웃었다.
‘그래, 저거지. 저게 이현성이지!’
아무리 패배해도 꺾이지 않는 마음.
자기가 더 약한 것이 분명해도 검술에 대한 자부심만큼은 포기하지 못하는 저 모습!
기분이 좋아진 차진혁이 말했다.
“그래. 내가 실수한 것 같군.”
“그래. 네가 실수했다.”
“발만 써도 내가 너 이긴다.”
이현성은 검을 뽑을 뻔했다.
그러나 그는 가까스로 이성을 부여잡았다.
‘정말 이상하다. 김철수는 왜…….’
차진혁의 행동과 말들을 여전히 이해하기 어려웠다.
‘나한테만 저렇게 인성질을 하는 거지?’
차진혁은 저도 모르게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나도 몰랐던 응어리들이 꽤 남아 있었던 모양이야.’
이현성을 상대로 하는 기만과 능욕이 꽤 재미있었다.
“원하면 언제든지 덤벼라. 발만 써서 싸워준다. 나약한 항문검아.”
“나는 나약한 항문검이 아니다!”
이제 그는 성장했고, ‘나약한’ 이라는 수식어는 사라진 지 오래.
“나는 항문검이다!”
* * *
이현성은 끓어오르는 마음을 다스리고 또 다스렸다.
‘나는 나약하지 않다!’
‘나약한 항문검’이라는 별명을 극복하기 위해 고된 훈련을 견뎌왔다.
“내가 나약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해 주지.”
“응, 나약해.”
“…….”
“존나 약해.”
차진혁의 도발과 놀림은 이현성에게 커다란 기폭제가 되었다.
강해지고 싶다는 열망이 드글드글 끓어올랐다.
우우우-
수많은 남녀의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노랫소리가 들리는군.”
“검술은 후진데 청력은 좋네?”
이현성은 이를 악물었다.
“이참에 악사계열로 전직해 보는 건?”
“김철수. 나는 검술가다. 오로지 검의 길 하나를 바라보고 걷는 검객이지.”
“하지만 약한걸.”
저만치 멀리, 희미한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상쾌한 바람이 느껴지는 것으로 보아 바깥과 연결된 곳인 듯했다.
차진혁은 입구를 등지고 섰다.
“나보다 약하다고 세 번 외쳐라. 그러면 나갈 수 있게 해주지.”
“…….”
차진혁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이현성의 대답을 기다렸다.
회귀 전.
이현성은 절대 인정하지 않았다.
“나는 결코 너보다 약하지 않다.”
그때처럼 바락바락 대들면 좋겠다고 생각했으나 지금의 이현성은 조금 달랐다.
“나는 김철수보다 약하다. 나는 김철수보다 약하다. 나는 김철수보다 약하다.”
바락바락 대들지 않고 수긍하는 모습을 보니 기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아쉽기도 했다.
차진혁이 또 도발했다.
“나는 발만 쓰는 김철수보다 약하다.”
“…….”
“싫어?”
이현성은 결국 참지 못하고 검을 뽑아 들었다.
“더 이상 참아줄 수 없겠군. 덤벼라, 김철수.”
이런 모욕을 들었는데도 참는 건 검객이 아니었다.
차진혁은 뒷짐을 진 채 오른발을 들어올린 뒤 발가락을 까딱거렸다.
“응, 네가 덤벼.”
이성을 잃은 이현성은 차진혁을 향해 달려들었고, 그 이후의 기억은 없었다.
차진혁은 낄낄 웃으며 이현성의 등에 글씨가 써진 종이를 붙여 주었다.
[왕나약한 항문검]
* * *
정신을 잃었던 이현성이 눈을 떴다.
번쩍 정신을 차린 그가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등에 종이가 붙은 건 몰랐다.)
“뭐, 뭐가 어떻게 된 거지?”
“내가 발만 써도 이긴다고 했잖아.”
“설마…….”
“그래. 너 기절했다. 나의 뛰어난 발재간에 말이야.”
“…….”
얘기를 들어보니 발에 맞아 기절을 했다고 했다.
‘나는 김철수의 움직임을 못 읽었는데?’
거대한 벽이 앞에 서 있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그는 좌절하지 않았다.
‘저 벽을 언젠가 넘어서고 말 것 이다! 반드시! 반드시! 반드시!’
우우우-
바람결을 타고 수많은 목소리가 섞인 노랫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이현성은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
저만치 아래.
병풍처럼 펼쳐진 거대한 절벽이 보였다.
절벽에는 수많은 검들이 꽂혀 있었다.
“저기가…… 검이 노래하는 절벽이군.”
“그래.”
“저기로 어떻게 가지?”
절벽과의 거리도 거리였지만, 지금 이곳은 천길 낭떠러지 앞.
여기서 내려가는 것부터가 문제였다.
“왜? 뭐가 문제인데?”
“나는…….”
이현성이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귓볼이 조금 붉어져 있었는데, 차진혁이 먼저 말했다.
“설마 고소공포증이 있다고 말하지는 않겠지.”
“…….”
“고소공포증을 가진 검객이 있다는 말은 들어본 적도 없다. 만약 있다면 검을 내려놔야지. 그런 한심한 검객 같은 건 세상에 존재할 리 없어. 그런 놈이 있다면 세상에서 가장 머저리 같은 놈이겠지. 그렇지 않냐?”
“그, 그, 그렇지.”
이현성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무지막지한 마물은 두렵지 않지만 높은 곳은 무서웠다.
“자, 뛰어내려라.”
차진혁이 먼저 뛰어내렸다.
저만치 아래, 뇌룡의 등을 향해서.
“뭐하냐, 안 뛰고?”
“잠시만 기다려라. 너한테 맞은 것이 아직 회복이 덜 된 모양이다.”
“겨우 그거 맞고?”
“…….”
“되게 약하게 때렸는데?”
자존심을 벅벅 긁는 말에 이현성은 주먹을 불끈 쥐고 뛰어내렸다.
“설마 그 정도로 나약했다고?”
그가 고소공포증을 극복하는 순간이었다.
* * *
수천 자루의 검이 꽂혀 있는 절벽 앞.
쉴 새 없이 노랫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수십개의 합창단이 각기 다른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 같았다.
절벽에 가까워질수록 귀가 아파왔다.
이현성이 인상을 살짝 찡그리고서 말했다.
“정신 사납군.”
“그러게.”
여기서 어떤 수련을 하길래 여길 경험한 검술가들의 실력이 다 일취월장하는 것일까.
“일단 이곳에 4주간 체류할 수 있도록 허가를 받았다. 일단 나약한 항문검인 네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검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다.”
“…….”
“굳이 서약을 맺을 필요는 없겠지만 검의 목소리를 듣는 것부터가 심검의 경지의 시작이라 할 수 있지. 그것도 못하면 검술가라고 할 수도 없다.”
“…….”
“검이 노래하는 절벽에는 수많은 검들이 노래를 하고 있고, 개중에서 네게 특별히 말을 거는 검이 있다고 한다. 심검을 깨우치는 데 좋은 계기가 되어줄거라고 들었다. 훌륭한 재능을 가진 검술가들은 2주면 도달하는 경지라고 하더군.”
“너는…….”
차진혁은 뻔뻔한 표정으로 거짓말했다.
“나도 2주 걸렸다.”
“그렇군.”
그리고 2주가 흘렀다.
사람의 성장에는 환경이 중요하다고 했던가.
“들린다, 검의 목소리가!”
이현성이 절벽 위를 바라보았다.
유난히 빛나는 검 한 자루가 눈에 보였다.
이루 말할 수 없는 환희가 그의 가슴속에 가득 들어찬 채, 그는 김철수에게 물었다.
“도대체 왜 이렇게 내 성장을 돕는 거지?”
이상하리만치 자존심을 벅벅 긁고는 있으나 결과적으로는 이현성 자신에게 모두 도움이 되었다.
만약 김철수가 없었더라면 이런 기회도 없었을 것이고, 이런 성장도 없었을 것이었다.
차분히 앉아 명상하던 김철수가 나지막히 진심을 꺼냈다.
“더 패고 싶어서.”
“……뭐?”
어떤 깨달음의 초입에 진입한 것처럼 경건한 모양새.
차진혁은 눈을 감은 채 진정성 있는 말을 읊조렸다.
“약하면 패는 맛이 없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