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는 그만 강해지고 싶다 366화
“힘을…… 숨겼던 거군.”
그렇게 말을 하기는 했지만 현실감은 없었다.
힘을 숨긴다니.
그 상황에서 그게 가능하단 말인가?
눈으로 직접 봤음에도 불구하고 납득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깨달음이니 뭐니 하는 것보다 그냥 원래부터 훨씬 여유가 있었다…… 라는 편이 차라리 더 개연성이 있어.’
문득 신유리의 말이 떠올랐다.
“깨달음이 아니라 그냥 피지컬이었던 거 같은데…….”
아까는 듣지 못했는데, 불현듯 갑자기 떠올라버린 것이다.
‘나만 절박했어.’
얼굴이 화끈거렸다. 민망함을 감추기 위해 연신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나를 속으로 비웃었겠군요, 김철수 경.”
“그럴 리가요.”
차진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일리나 경의 명품 연기 덕택에 수많은 시청자들이 방송에 완벽히 몰입할 수 있었습니다. 일리나 덕분입니다.”
“……연기?”
내가 연기를 했던가? 그것도 명품 연기를?
일리나는 당혹스럽긴 했지만 그것을 내색하지는 않았다.
눈치 빠른 한세린이 중간에 끼어들었다.
“일리나 경의 적극적인 방송협조 덕택에 우리가 원한 대로 상황이 흘러가고 있어요. 잠시 전열을 재정비하고 다음 스텝을 진행하죠. 우리도, 마법수사대에게도 약간 곤란한 상황이 벌어졌으니까 말이에요.”
환경운동가 닉트만을 필두로 하여 수많은 환경단체들이 시위를 하기 시작했고, 그들은 자극적이고 감성적인 영상들을 제작하여 각종 커뮤니티와 SNS에 지지를 호소했다.
시민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3대 제국 입장에서는 꽤 부담이 되는 일이었다.
“일단 나도 베이스 캠프를 다시 차리고 상황을 주시하도록 하죠.”
“혹시 빌스마르크 경이 미리 얘기를 한 거 있어요?”
“…….”
이후의 상황에 대해서는 딱히 대화를 나눈 것이 없었다.
한세린의 눈에 실망의 빛이 스쳐지나갔다.
‘빌스마르크쯤 되는 군주라면 이 이후의 상황도 예측했을 줄 알았는데.’
신생서버의 풋내기 군주인 자신조차도 지금 이 사태를 예측하고 있었는데, 빌스마르크가 그렇게 하지 못했다는 것은 몹시 속상한 일이었다.
‘못한 게 아니라, 안 한 거겠지!’
빌스마르크 본인이 여기에 와 있었다면 조금 더 열과 성을 다했을 것이었다.
‘빌스마르크와 내 수준 차이가 어느 정도 나는지 벽을 느껴보고 싶었는데 아쉽게 됐어.’
* * *
한세린이 말했다.
“환경운동가 닉트만과 헬람은 한 아카데미의 동기 출신이에요. 이걸 먼저 풀 겁니다.”
-응 닉트만이랑 헬람 친구 사이임 ㅅㄱ
-단순 동기인게 뭐 어때서?
-억측 ㄴㄴ 김철수 짓이 좀 끔찍한 건 사실임.
“주장의 내용을 반박하기에는 약간 한계가 있는 건 사실이에요. 어쨌든 바위산을 일부 날려버렸고, 환경을 중시하는 사람들에게는 몹쓸 짓인 건 맞거든요.”
한세린이 선택한 전략은 주장의 내용을 반박하는 것이 아니라, 주장하는 상대를 공격하는 것이었다.
“닉크만을 개새X로 만들려고 해요.”
일리나 입장에서는 그리 달가운 전략은 아니었다.
“물론 일리나 경의 입장에서는 싫겠지만…….”
한세린은 일리나에게 가까이 다가가 작게 속삭였다.
“내키지 않는 걸 하는 게 뭐 어때서? 당신은 당신 의지와 상관없이 김철수를 죽이려고 했잖아. 우리 철수는 몰라도 난 알아.”
일리나는 대답하지 못하고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원죄가 있는 그녀는 다리를 꼬고 앉았다.
“내키지는 않지만 반대할 명분도 없군요. 브리핑 계속 해보시지요, 한세린 경.”
“닉크만은 7형제에요. 그중 둘이 폭행치사로 감옥에 갇혀 있고 하나는 사기로 쫓겨다니고 있죠.”
“연좌제를 적용하자는 겁니까?”
“라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겠죠?”
한세린이 말하고 있는 것들은 현재 김민지와 송하영의 주도아래 실시간으로 벌어지고 있는 일이었다.
-연좌제는 너무한 거 아니냐?
-가족까지 끌어오는 건 좀 비겁하지 ㅋㅋㅋ
-와 이건 선 넘었다
-설마 김철수가 이렇게 뻔히 보이는 짓을 한다고?
“근데 형제 중에 불법으로 곰을 포획하여 산 채로 빨대를 꽂아 담즙을 채취하는 업자가 있거든요.”
-가족들이 쓰레기는 맞네.
-아무리 그래도 환경운동가의 가족이 저런 짓을 한다고?
-닉크만이 저걸 몰랐다고?
-지 가족이 저러는데 무슨 환경운동 ㅋㅋㅋㅋㅋ ㅅㅂ 내로남불 개오지누 ㅋㅋ
일리나는 후- 담배연기를 내뿜었다.
“그것만으로는 닉크만을 침몰시키기 불가능할 텐데요, 한세린 경.”
“닉크만은 유명한 환경운동가이고, 환경을 사랑하는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막대한 후원금을 받았어요. 그 후원금 중 일부가 차명계좌를 통해 담즙 업자한테 전달된 정황을 포착했어요.”
-왘ㅋㅋ 뒤통수 미쳤냐?
-???: 환경운동 후원금으로 곰 잡아먹은 썰 푼다
“일부는 골드바나 보석, 시계 등 현물로 바뀌어서 전달됐고요.”
곧장 닉크만은 현재 퍼지고 있는 모든 소문들은 악성루머에 불과하며, 이 거짓소문을 퍼뜨린 자를 찾아 명예훼손의 죄를 묻겠다고 답했다.
“이미지로 먹고사는 놈이니까 당연히 증거들을 없애기 시작하겠죠.”
“…….”
“그럼 그 틈을 타서 우리는 그걸 훔칠 거고요. 어차피 닉크만은 그게 자기 거라고 주장도 못할 테니까! 그럼 보석이랑 각종 진귀한 것들은 우리 것이 되는 거죠! 후후후.”
일리나는 대화의 흐름이 약간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어째서 도둑질로 얘기가 이어진단 말인가.
‘김철수는 저기서 왜 감탄하고 있는 거지?’
이들의 목적은 닉크만의 주장에 힘을 빼서 김철수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함 아니었던가.
그냥 도둑질이 목적이었던가? 그럴 리는 없을 텐데.
“얼마나 빡치겠어요? 그렇게 어렵게 차명계좌를 써가면서 티 나지 않게 현물을 몰래몰래 긁어모아서 평생을 모았는데 하루아침에 그걸 다 잃어버리면. 와, 나는 진짜 잠도 못 잔다.”
일리나 또한 평생 일군 재산을 한 번에 빼앗긴다고 상상하니 눈앞이 아찔해졌다.
“그대들의 목적이 닉크만을 괴롭히려는 것이라면 성공이겠지만, 그렇다고해서 수많은 이들이 김철수 경에게 힘을 실어줄 것 같지는 않은데.”
“쯔쯧.”
한세린은 검지 손가락을 까딱까딱 흔들었다.
“일리나 경은 의외로 순진한 구석이 있네요. 선동은 한 문장으로 돼요. 그걸 반박하려면 수많은 시간과 서류가 필요한데, 그 준비가 끝나고나면 사람들은 이미 다 선동되어 있어요.”
“…….”
“닉크만은 제정신이 아닐 거예요.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기 힘들어질 거고요. 아직 우리가 파악하지 못한 여러 약점들을 드러낼 거라고 봐요.”
흐흐 웃고 있는 한세린을 보며, 일리나는 약간의 두려움마저 느껴졌다.
“설령 약점을 드러내지 않아도 상관없죠. 그놈이 평생 축적한 보물 다 내 거, 아니, 다 우리 건데. 개꿀 아니에요? 흐흐흐.”
“…….”
광기에 물든 사람 같았다.
“이걸 오히려 기부하면 우리 철수 이미지도 챙길 수 있고요. 아무리 생각해도 좋은 거밖에 없네. 아, 그리고 천사소녀가 물건들을 훔치는 장면은 우리의 홈마, 은우 씨의 도움을 받아서 다 촬영할 거고요. 거기에 닉크만이나 닉크만의 형이 찍히면 참 좋겠죠? 뭐 안 찍혀도 상관없지만.”
* * *
홈마 강은우는 ‘전능의 옵저버’의 대상을 송하영으로 바꾸었다.
송하영이 도둑질하는 모습을 사진으로 촬영했다.
일단의 무리가 잘 훈련된 와이번들의 등에 커다란 짐짝들을 옮기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에는 닉크만도 있었다.
-변장을 좀 한거 같기는 한데…….
-저거 닉크만 아님?
-닉크만 맞는 듯?
아무리 변장을 했다고는 해도 홈마 강은우의 눈썰미를 피하지는 못했다.
오히려 간파 스킬을 통해 변장을 꿰뚫어 보는 통찰력까지 발휘했다.
-천사소녀가 저거 다 털은 거?
-흑장미연합이 제대로 한 건 했네 ㅋㅋㅋㅋ
-와 금괴 장난 아닌데?
-근데 생각해보면 닉크만 ♩♪씹새X 아니냐? 쟤 환경운동가 아님?
-결국 지 형이랑 한통속이었네?
-그런 주제에 김철수를 욕해?
-착한 환경운동가인 줄 알았는데 완전히 미친놈이었던 건에 대하여
송하영은 간만에 큰 수확에 즐거워했다.
“철수 님. 오늘도 정의로운 도둑이 되는 걸 허락해 주셔서 고마워. 주인 없는 걸 털어서 너무 기뻐.”
* * *
닉크만은 하루아침에 명성과 전재산을 다 잃었다.
그 원망의 화살은 헬람에게 향했다.
헬람과의 군주통신에서 닉크만은 울부짖듯 소리쳤다.
“이게 다 당신 때문 아닌가!”
“유감입니다.”
“어떻게 책임질 거야?”
“진정하시지요. 결국 이 모든 일을 저지른 자는 김철수입니다. 그가 간악한 흉계로 당신을 나락으로 밀어버린 거지요. 당신의 적은 내가 아닙니다, 김철수지.”
“닥쳐. 네가 나한테 이 일을 의뢰하지 않았어도 나는 김철수와 척을 질 일이 없었잖아.”
닉크만은 으르렁대며 헬람을 노려보았다.
“최소한 절반은 복구해 주어야겠어.”
“김철수를 제거하고, 우리가 지옥의 자유를 되찾게 된다면,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하겠소. 그러니 이성을…….”
닉크만이 책상을 세차게 내리쳤다.
홀로그램이었지만 정교하게 구현된 공간이니만큼 쾅! 소리가 났다.
“이성은 빌어먹을 이성!”
닉크만은 일방적으로 통신을 종료해 버렸다.
‘차라리 이 모든 것을 밝히고 내 재산의 일부라도 돌려받아야겠다.’
이제 환경운동가로서의 생명은 끝났다.
사람들에게 손가락질받는 건 이제 어쩔 수 없었다.
이렇게 된 이상 헬람에 대한 정보를 넘기고 김철수의 자비를 기대해 보는 수밖에.
그가 지옥으로 향했다.
* * *
“……니까 결국 우리 쪽으로 찾아오지 않을까요? 조금이라도 제 살길을 찾을 머리가 있다면요.”
그리고 얼마 후, 닉크만이 정말로 갈루이 바위산을 찾아왔다.
그는 차진혁과 만나자마자 무릎을 털썩 꿇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김철수 경. 제가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아 잠깐만요. 방송 켤 건데, 출연 동의하죠?”
“…….”
닉크만은 굳게 다짐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차악이 최선이었다.
‘돈이라도 돌려받으면 어떻게든 재기할 수 있다.’
“물론입니다. 김철수 경의 방송에 출연할 수 있어서 영광입니다.”
차진혁은 닉크만과 인터뷰를 나누기 시작했다.
실시간 시청자 숫자는 순식간에 10억을 돌파했다.
“그러면 뭐. 우리 편하게 산책하면서 얘기를 좀 나눠볼까요?”
닉크만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차진혁과 함께 걸으며 꽤 오랜시간 대화를 나누었다.
“지옥 자유연대의 연대장. 헬람의 의뢰를 받아서 그렇게 주장했다는 거군요. 참 안타깝네요.”
“……예.”
“근데 왜 이렇게 저자세로 나오는 거죠? 의뢰가 됐든 어쨌든 제가 이 주변의 환경을 파괴했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는데요.”
이번 사건으로 인하여 차진혁도 배운 것이 있었다.
지나치게 큰 화력을 사용할 때에는 반드시 환경적 영향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
처음에는 ‘재미만 있으면 되지 그게 무슨 상관이야?’라고 생각했으나 마음을 고쳐먹은 상태.
‘불편해하는 시청자들이 다수 있어요. 환경 운동가 말은 안 들어도 시청자 피드백은 받아들여야져, 철수 님!’ 이라는 왕유미의 조언 때문이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정말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아뇨, 닉크만씨는 제 할일을 했을 뿐인데요 뭐.”
닉크만의 눈에 기대가 서렸다.
생각보다는 김철수가 자신을 미워하지 않는 것 같았으니까.
“그럼…….”
“도둑 플레이어도 그냥 제 할 일을 했던 거고.”
닉크만의 눈앞이 캄캄해졌다.
마지막 희망의 끈마저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제, 제가 헬람의 위치를…….”
차진혁의 눈이 가늘어졌다.
지금이 바로 차진혁이 노리던 타이밍이었다.
‘슬슬 습격할 때가 됐는데?’
일부러 습격하기 좋게 함께 산책하며 방심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주변에 은폐 엄폐할 수 있는 바위들이 많아서 언제든 공격할 수 있는 상태.
어떻게든 닉크만의 입을 막으려고 애를 쓸 것이 분명했다.
“헬람의 위치를 알고 있습니다. 저와 군주통신한 기록이 있으니 추적 전문 길잡이들의 능력으로 추적하면 헬람의 위치를 잡아낼 수 있을 겁니다.”
안타깝게도(?) 습격은 없었다.
‘아쉽다.’
한편으로는 조바심이 들었다.
이렇게 허술한 모습을 보여줬는데도 습격을 하지 못했다는 건, 헬람도 별로 여유가 없다는 뜻이었으니까.
그렇다는 말은 헬렌 제국의 특임대와 스웨딘의 검황대가 헬람을 효과적으로 추적하고 있다는 것이기도 했다.
‘사실 산디에므보다 헬람이 더 거물 아닌가? 헬람도 내가 잡고 싶은데.’
산디에므를 얼른 처리하고 헬람 쪽으로 넘어가고 싶은 마음이 꿈틀꿈틀 피어올랐다.
‘방법이 없나?’
치열하게 고민하자 답이 보일 것 같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