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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는 그만 강해지고 싶다-353화 (353/437)

회귀자는 그만 강해지고 싶다 353화

차진혁은 어떤 상황인지 쉽게 눈치챌 수 있었다.

아카시아가 사죄하고 있고 퓌렐이 왔다간 모양이었다.

“아. 아카시아가 가주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있습니다. 어떤 상황인지 쉽게 유추가 되네요. 정확히는 잘 모르겠지만 허공에 퓌렐이 일으키는 불꽃의 흔적도 좀 남아 있는 것 같고요.”

그리들은 한숨을 푹 내쉬고는 의자에 앉았다.

“무슨 일인가?”

“왜 이렇게 힘이 없습니까?”

“……나를 놀리나?”

“피사트 가문의 성유물이 파괴된 것 때문이라면 그 누구보다 제가 가장 아쉬운 상태일 텐데요. 그건 제거였으니까요.”

-ㅋㅋㅋㅋㅋㅋ맞기는 맞는뎈ㅋㅋㅋ

-인성 무엇ㅋㅋㅋㅋ

-놀리려고 찾아간 거 맞는 거 같은데.

1인칭 시점의 방송이라 차진혁의 마음을 일부 느낄 수 있는 시청자들은 대번에 알 수 있었다.

방송 멘트와 달리, 차진혁은 그다지 큰 아쉬움을 느끼지 않고 있었다.

-진짜 방송에 미친 자다 ㅋㅋㅋㅋㅋ

-그리들: 뭐 이런 새끼가 다 있지?

그런데 차진혁이 인벤토리에서 미리를 꺼내 들었다.

“이거. 잠시 봐주시겠습니까?”

미리를 받아든 그리들의 표정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이, 이건……!”

보구가 그냥 부서지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보구 안에 깃들어 있던 피사트의 격이 미리에 전이된 것이었다.

미리의 성능 자체가 강화된 것은 아니었으나, 하나의 실마리를 차진혁에게 안겨주었다.

미리의 손잡이 양면에 글자가 새겨졌다.

[피사트의 후예여, 주인을 맞이하라.]

[혹한의 홍염 속에 진실이 있으리.]

보구에 써 있던 것과 마찬가지로, 실제 ‘글자’는 아니었다.

피사트의 의지를 글자의 형식으로 읽어내고 있는 것.

일그러진 그리들의 표정을 보며 차진혁은 히죽 웃었다.

“느껴지시나 보네요. 이 숭고한 의지가!”

* * *

초대가주 피사트의 격이 녹아든 미리를 마주하자 그리들의 표정이 굳었고, 이후에는 몸이 굳었다.

‘젠장……!’

굳은 몸이 삐걱대며 제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차진혁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저항하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이것은 피사트의 피에 각인된 약속이었다.

‘바로 무릎을 꿇을 줄은 몰랐는데?’

그렇지만 차진혁은 당황하지 않은 채 미리의 손잡이에 써 있는 글자를 꽤 위엄있는 태도로 읽어내렸다.

“피사트의 후예여, 주인을 맞이하라.”

“…….”

그리들은 어떻게든 이 속박에 저항해 보려 했지만 저항할 수 없었다.

그가 피사트의 피를 이었고, 피사트의 검을 배운 이상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이게 무슨 일임?

-그리들이 무릎 꿇었는데?

-왘ㅋㅋㅋㅋㅋ 어질어질하다 ㅋㅋㅋㅋ

-스트리머인 줄 알았던 내가 사실 검의 가문의 맹주였던 건에 대하여.

차진혁은 위엄 있는 표정을 계속 이어갔다.

“혹한의 홍염 속에 진실이 있으리. 이것은 무슨 뜻인가, 검의 현인 그리들이여.”

“…….”

그리들은 난데없이 바뀐 차진혁의 말투가 무척 거슬렸으나 그것을 티 내지 못했다.

차진혁이 묻자 그는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혹한의 홍염은 헤이나 가문의 상징입니다, 주…….”

주인이시여.

그 말이 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참아보았으나 결국 실패했다.

“주인이시여.”

자존심이 구겨졌다.

차진혁은 그런 그리들의 마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으나 내색하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내가 나아가야 할 곳은 춥디추운 불꽃 속이로군.”

차진혁은 우주급 시나리오의 전체 내용을 공유했다.

───────

[버려진 여왕의 유산]

(1) 여왕이 사랑했던 제자

버려진 여왕이 무척이나 아끼고 사랑했던 제자가 있었다. 제자의 이름은 카르빙턴. 여왕은 자신이 가진 모든 지식과 지혜를 카르빙턴에게 전수하였다. 카르빙턴에게 배신당하는 그 순간에도, 베셀리티는 그를 사랑하였다.

(2) 황금나무를 지배하는 자가 세상을 얻으리라.

카르빙턴과 골디믐은 황금나무를 정성스레 보살폈다. 그들의 정성에 감동한 여왕은 그들에게 보물을 하사였다. 여왕의 보물을 머금은 황금나무는 무성하게 자라 세상을 뒤덮었으니, 그 권세와 영광이 세상 끝에서 끝까지 닿았다.

(4) 혹한의 불꽃 속에 진실이 있으리.

버려진 여왕에게는 목숨보다 소중했던 벗이 있었으니 그 이름은 헤이나였다. 버려지던 마지막 순간에 여왕은 헤이나에게 마음을 담은 보석을 건넸다. 마음을 담은 보석은 혹한의 불꽃 속에서 동면에 빠져들었다.

───────

차진혁은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

“뭔가 좀 이상한데요.”

오타인가 싶어 다시 살펴봤지만 오타는 아닌 것 같았다.

“(3)이 없네요? 이거 왜 이런지 아시는 분?”

우주급 시나리오처럼 거대한 스케일의 시나리오는 보통 한 명이 진행하는 개념이 아니었다.

최소 연합 단위.

보통은 맵(국가) 혹은 서버 단위로 진행되는 것이 대부분.

그렇다 보니 이곳 저곳에서 수많은 조각들이 모여 하나의 커다란 흐름을 만들어내야 했다.

방향과 과정은 복잡하고 다양했지만 중간지점들은 명확했다.

차진혁의 시나리오 설명에 나타난 (1), (2), (4) 숫자가 바로 그 중간지점들.

우주급 시나리오를 진행하는 과정에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말하자면 필수관문이었다.

-뭐야, 왜 3 없음?

-오류인가?

-진짜네? 3이 없는데?

시청자들 중에서도 정확한 이유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한마갤에 백과사전 떴다.

백과사전은 실시간으로 자신의 분석글을 올렸다.

[김철수의 우주급 시나리오에 (3)이 없는 이유]

[본래 우주급쯤 되는 시나리오는 개인이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여 수많은 갈래들이 하나로 모이는 필수 지점들이 존재하는데…… 보통은 반드시 그 순서를 따라가야만 다음 시나리오가 개방된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보통’의 경우를 뜻한다. 김철수의 플레이 방식을 보통 혹은 상식적이라 표현할 만한 이들은 아마 없을 것이다.]

이제 실시간 시청자가 20억을 돌파했다.

각양각색의 의견을 지닌, 20억이나 되는 시청자들 중에서도 차진혁이 ‘상식적인 사람’이다, 라는 것은 절대적으로 부정했다.

-하긴. 김철수는 미쳤지.

-방미새임 ㅋㅋ 인정 ㅋㅋ

-피사트 가문의 보구를 재료 아이템으로 쓰는 놈이 세상에 어디 있음?ㅋㅋㅋ

[본래 수많은 갈래가 합쳐져서 (3) 지점을 열고, 그를 통해 (4)로 나아가야 하는 법. 그러나 김철수는 (3)을 그저 통과해 버렸다. 기상천외한 방식으로 (3)을 부숴버린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알아보니 한국맵에서는 이를 일컬어 스킵이라 표현한다더군.]

-그 스킵이 이 스킵임?ㅋㅋㅋㅋㅋ

-스킵이 맞긴 하네.

-가슴이 웅장해지는 스킵이네 ㅋㅋ

-한쿡인 : 저건 스킵이 맞다.

차진혁은 꽤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3)번이 사라진 것은 아쉽습니다만…… 결과적으로 진실이 혹한의 불꽃 속에 있다는 것을 알아내는 내용이었겠지요.”

아마도 피사트 가문과 접점을 만들고 그들의 신뢰를 얻어 이 정보를 손에 넣게 되는 복잡한 과정을 거쳤을 테지만 생각보다 일이 쉽게 풀렸다.

‘스킵이 되는구나!’

아무래도 우주급 시나리오를 클리어하는 조금 더 올바른 방법을 깨달은 것 같아 기분이 좋아졌다.

* * *

차진혁은 피사트 가문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기로 약속했다.

약속의 과정은 간단했다.

“검의 현인 그리들이여. 나는 피사트 가문이 내게 협력하기를 바란다.”

“그리…… 하겠습니다.”

그리들은 여전히 저항했지만 별로 소용없었다.

차진혁은 문득 아쉬웠다.

‘조금만 저항해 주지. 그러면 테르서박 데려와서 폭력적인 방법으로 편안하게 구원해 줄 텐데.’

애황 마르코를 테이밍하는 데 성공한 테르서박은 지금도 눈에 불을 켜고 테이밍 상대를 찾고 있었다.

‘물론 검의 현인이 마르코보다 더 격이 높은 존재겠지만서도…….’

그래도 이미 반쯤 복종하고 있으니 일이 꽤 쉽지 않을까 싶었다.

적절한 폭력을 섞어주면 충분히 테이밍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어쨌든 반항하지 않는 상대를 그렇게 만들기란 차진혁으로서도 좀 저어되는 일이었다.

‘역시 나는 정상이라니까.’

일각에서는 자신을 미친놈으로 보는 시선이 있지만 그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의 착각이라 생각했다.

‘진짜 미친놈이었다면 이런 상황을 고려하지않고 일단 머리부터 깼겠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겠다는 협정서에 함께 사인을 한 뒤, 차진혁은 걸음을 나섰다.

좀 쉴까 싶었지만 실시간 시청자 20억을 달성한 그는 도저히 쉴 수 없었다.

여기서 방송을 끊는 건 20억 명의 기대를 저버리는 행위.

“광란의 마도사 퓌렐을 찾아가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퓌렐 헤이나를 만나 얘기해 보면 ‘혹한의 불꽃’에 대한 정보를 좀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헤이나 가문으로 찾아가려던 찰나.

붉은 불꽃에 둘러싸인 퓌렐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랜만이야, 김철수.”

“잘 됐네요. 안 그래도 찾아가려고 했는데.”

“재수없는 새끼. 용건이 있을 때만 나를 찾지?”

차진혁은 물끄러미 퓌렐을 바라보았다.

거짓말 조금 보태서 퓌렐은 붉은색이 사람이 된 것 같았다.

허리까지 길게 늘어져 반짝이는 붉은색 머리카락과 새빨간 눈동자는 불꽃이 타오르는 것 같이 강렬했다.

몸에 딱 달라붙는 소재의 붉은 로브를 입고 있어서 그녀의 육감적이고 풍만한 선이 한껏 강조되었다.

덕분에 차진혁은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오……!”

차진혁의 감탄에 퓌렐은 한껏 어깨를 펴고 팔짱을 낀 채 신체 일부를 일부러 강조했다.

그녀의 가슴팍에 뚜렷한 음영이 생겼다.

“좀 야하게 입어봤는데, 어때?”

김철수가 감탄하는 걸 보며 퓌렐은 기분이 좋아졌다.

아, 김철수가 이런 취향이구나.

그런 줄 알았으면 좀 더 야하게 유혹해 볼걸.

그때, 차진혁이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썸네일로 써도 되냐?”

“……뭐?”

“자극적이라서 어그로 끌릴 거 같은데.”

퓌렐은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고서 손가락을 튕겨 차진혁에게 불덩이를 하나 쏘아냈다.

라이터의 불꽃만큼 작고 초라한 불꽃이었지만 차진혁은 그 안에 담긴 강맹한 파괴력을 읽어낼 수 있었다.

[신비, ‘흘리는 바람’을 사용합니다.]

은근슬쩍 불꽃을 피해내자 불꽃이 다시금 넘실넘실 날아와 차진혁의 등에 닿았다.

[특성, ‘절대 결계’를 사용합니다.]

절대 결계를 불꽃 크기만큼 작게 만들어 국소부위에 집중했다.

더 좁은 면적을 단단하게 만들어 퓌렐의 불꽃을 막아낸 것이다.

순간, 퓌렐이 피워올린 불꽃이 수백 가닥으로 갈라지며 차진혁 몸 주변으로 흩어지는가 싶더니 차진혁의 정수리 쪽을 향해 치솟아 올랐다.

이내 그것은 몸집을 불리며 활활 타올라 차진혁의 몸 전체를 종의 형상으로 뒤덮었다.

차진혁은 신나서 입을 열었다.

“이건 내 검옥을 형상화한 기술?”

퓌렐은 혀로 붉은 입술을 달싹이며 히죽 웃었다.

-내 검옥이래 ㅋㅋㅋㅋ

-아카시아: 시X…….

-아카시아둥절ㅋㅋㅋㅋㅋ

“알아봐줘서 고맙네. 내 환영 인사야, 어때?”

차진혁은 절대 결계를 유지한 채 검옥을 형상화한 불꽃에 한참 동안 둘러싸여 있었다.

어지간한 탱커들도 온몸이 녹아내릴 정도의 고열이었지만 차진혁은 그다지 괴로워하지 않았다.

다만 고열을 버티지 못한 차진혁의 상의가 녹아내렸을 뿐이었다.

탄탄하고 균형 잡힌 상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역시 섹시해.”

실시간 시청자 숫자가 22억 명을 돌파했고, 수많은 이들이 ‘3인칭’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3인칭!

-3인칭을 주세요!

-3인칭!!!!!!!!!!!

그러던 와중 퓌렐이 먼저 말을 꺼냈다.

“방송으로 봤어. 날 찾아오려고 했지? 혹한의 불꽃 속에 진실이 어쩌고라며?”

“맞아.”

“안 가르쳐줘.”

‘오히려 좋아!’

차진혁은 오히려 기뻤다.

콘텐츠에는 기승전결이 있어야 하는 거니까.

만약 여기서 퓌렐이 ‘그래, 비밀을 알려주지’하고 나오면 콘텐츠의 재미가 급감해 버리는 것이다.

차진혁은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떻게 해야 나는 진실에 닿을 수 있는 거지, 광란의 마도사, 퓌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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