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는 그만 강해지고 싶다 348화
화면은 다시 3인칭으로 바뀌었다.
하늘에서 차진혁 쪽을 내려다보는 구도.
붉은 도깨비가 내려친 대검 중 한 곳이 사람 형상으로 봉긋 솟아 있었다.
-기괴하다. 기괴해.
-저거 솟아오른 거 혹시 김철수임?
대검은 분명 단단한 강철이었다.
그런데 마치 고무라도 된 것처럼 사람 형상으로 봉긋 솟아올라 있었다.
봉긋 솟은 부분을 중심으로 쩌적- 쩌적- 금이 생기는가 싶더니 차진혁이 가볍게 뛰어 올랐다.
“생각보다 별로 안 센데.”
“…….”
아카시아는 떨떠름한 눈으로 차진혁을 바라보았다.
물론 그녀의 ‘붉은 도깨비’를 받아낸 강적들은 수차례 있었지만, 이렇게 몸으로 받아낸 사람은 처음 있었다.
“혹이 조금 났습니다, 여러분.”
차진혁은 머리를 매만졌다.
그의 말대로, 혹이 조금 났을 뿐 별다른 부상을 입지는 않았다.
“솔직히 띵한 정도의 데미지는 있을 줄 알았는데 그렇지도 않네요.”
아카시아가 눈을 가늘게 뜨고서 물었다.
“지금 네 레벨은 400 이상인가?”
“그 정도 되지.”
“내게 무엇을 더 숨기고 있지?”
“숨겨? 뭘?”
“아무리 레벨 400이라고는 해도, 스트리머의 몸으로 붉은 도깨비를 저렇게 받아낼 수는 없다.”
“맨몸으로 받아냈겠냐?”
차진혁은 아카시아가 무척이나 당황했음을 인지할 수 있었다.
“나 스트리머인 거 몰라?”
“…….”
“당연히 스트리머 전용 결계를 사용했지.”
“……스트리머 전용 결계.”
아카시아는 너무 황당해서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이렇게 어이없이 ‘붉은 도깨비’가 막힐 줄이야.
‘이게 400레벨의 피지컬인가.’
직업에 따라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아르비스의 최상위 랭커들은 보통 레벨 300대 중후반에 분포되어 있었다.
레벨 400을 상대해 본 것은 아카시아로서도 처음이어서 무척 당혹스러웠다.
‘레벨 350을 넘어가면서부터는 레벨의 격차가 무의미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최상위 랭커들은 레벨부터 본신의 능력 자체가 엇비슷했으니까.
그즈음이 ‘플레이어의 한계’라고 생각했었는데, 아무래도 그게 아닌 듯했다.
“더 이상은…… 봐줄 수 없겠군.”
“진짜?”
차진혁의 눈이 희번득거렸다.
“방금까지는 진짜 전력이 아니었던 거구나! 역시!”
어쩐지, 붉은 도깨비가 좀 심심하다 싶었다.
아카시아는 대검을 땅에 꽂고서 무릎을 꿇었다.
검왕 시절의 차진혁이었다면 당장 공격했겠지만 그는 잠자코 아카시아를 지켜보았다.
“신성한 의식을 치르는 것 같습니다.”
땅에 꽂힌 대검에 여러 가닥의 회로가 생기는가 싶더니 회로를 통해 적색 마나가 가득 차오르기 시작했다.
“마치 검에 혈관이 생기고 마력혈이 흐르는 것 같습니다. 저게 도대체 뭘까요?”
* * *
“이 검은 피를 머금으리라.”
아카시아가 눈을 감았다가 떴다.
바닥에 꽂힌 대검이 먼지처럼 비산했고, 사방에 철가루가 휘날렸다.
“오…… 상당히 멋집니다. 철가루 폭풍이 일어난 것 같습니다.”
허공을 수놓았던 발자국과 황금색 흔적들이 회색빛으로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철가루들의 방향은 저군요. 저를 둘러싸고 있습니다.”
철가루가 차진혁의 몸을 감싸고 맹렬히 회전하며 하나의 독특한 형상을 이루었다.
“갇혔습니다.”
전체적으로는 종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수십 가닥의 뼈대로 이루어진 종의 형상.
“마치 감옥에 갇힌 것 같습니다.”
아카시아가 시동어를 읊었다.
“검옥.”
점차 공간이 좁아지기 시작했고 차진혁은 커다란 압박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공간이 축소되고 있습니다. 붉은 도깨비의 공격보다 더 강한 압박감이 느껴지고 있고.”
차진혁이 다가오는 창살을 향해 손을 뻗어보았다.
절대결계로 보호하지 않은 그의 손가락에서 피가 철철 흘러나왔다.
“살짝 닿았을 뿐인데 이렇게 되는군요. 예리한 검기를 잔뜩 머금고 있습니다.”
차진혁이 히죽 웃었다.
“칼날의 감옥이라. 멋진 기술이다.”
공간이 점점 더 좁아졌고 그에 따라 수많은 시청자들이 방송에서 이탈했다.
-이건 못 버티겠다.
-이건 19금 무조건 걸릴 듯.
-나 실제로 피 났어.
차진혁도 예상하지 못했던 방송의 부작용이었다.
방송을 통해 전해지는 검옥의 예기가 시청자들에게까지 생생히 전해지다 보니, 방송에 깊이 몰입한 몇몇 시청자들의 피부에 생채기가 난 것이었다.
-이러다 철수 님 죽는 거 아냐?
-아르비스 최상위 랭커가 부끄럽지도 않냐!
-명백한 스트리머 보호조약 위반이다.
그리고 이 상황은 왕유미를 통해 차진혁에게도 전달되었다.
‘아, 이건 아니지.’
조금 더 타이밍을 기다려 극적으로 연출해보려고 했는데 부상을 입은 시청자들이 있다?
이건 스트리머로서 간과할 수 없는 문제였다.
이번 콘텐츠는 이쯤에서 끝내야 할 것 같았다.
“내가 속인 것이 있다.”
검옥 운영에 집중하고 있는 아카시아의 동공이 흔들렸다.
왠지 모를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아니. 흔들리지 말자.’
검옥은 그녀가 목숨만큼 아끼는 검을 제물로 하는 검술.
검을 파괴하여 상대의 목숨을 잡아먹는 기술이었다.
붉은 도깨비를 막아낸 자는 여러 명 있었으나, 검옥을 막아낸 자는 없었다.
‘검옥을 마주친 이는 반드시 죽었다.’
저 눈앞의 김철수 또한 그러리라 굳게 믿었다.
그녀는 본인의 검을 믿었고, 검술을 믿었고, 경험과 의지를 믿었다.
그녀는 누구보다 오랜 시간 수련에 수련을 거듭해 왔고, 최강의 검술가가 되기 위해 뼈를 깎는 노력을 해왔다.
‘그 시간과 노력은 결코 나를 배신하지 않는다.’
그녀가 소리내어 말했다.
“나의 의지가 네 죽음을 원한다.”
“사실 레벨 100 올렸다는 건 거짓말이었다.”
방송으로 공개하지는 않았지만 수호수를 통한 레벨업 보정에는 나름의 페널티가 존재했다.
레벨을 너무 지나치게 많이 올리면 수호수가 지쳐 버렸다.
“내가 올린 레벨은 50이었고.”
레벨 350.
그것으로도 붉은 도깨비를 막아내기에는 충분했다.
“사실 절대결계도 안 썼어.”
그 말에 아카시아의 집중이 깨질 뻔 했다.
흔들리지 말자.
저건 나의 집중을 깨려는 적의 계략일 뿐이다.
“이번에는 레벨 400인데.”
전력을 다해서 빨리 이 상황을 끝내야 했다.
“여기에.”
신화급 카드 뒷면을 보여주었다.
──────────
[그 길의 정상에서, 내려다보다]
──────────
“이걸로 +20 판정.”
도합 레벨 420이 되었다.
“그리고 요즘 잘 안 썼는데 말이죠.”
[특성 스킬, ‘빠른 미래를 보라’를 사용합니다.]
[직업 스킬 개방을, 일시적으로 30레벨만큼 앞당깁니다.]
결론적으로, 레벨 450 직업 스킬을 개방할 수 있었다.
“처음으로 공개합니다. 레벨 450 스트리머 전용 스킬. 전능의 연출가입니다.”
[스킬, ‘전능의 연출가’를 사용합니다.]
* * *
모든 공간이 회색빛으로 물들었다.
시간이 정지해 버린 세상.
차진혁의 앵글에 잡히는 모든 곳이 방송의 요소였다.
차진혁이 검옥에 손을 대자 아까와는 다른 상황이 펼쳐졌다.
“이 검옥은 지우겠습니다.”
그가 말함과 동시에 검옥이 사라졌다.
“상처가 나신 분들이 있다고 들었는데 정말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이건 예상하지 못했어요. 아카시아가 생각보다 약한데 또 생각보다 강한 구석이 있네요.”
멈춰버린 아카시아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움직임을 둔화시키겠습니다.”
아카시아의 다리에 손을 댔다.
이곳은 ‘연출자’의 공간.
차진혁이 원하는 모든 것이 가능했다.
“다리를 돌로 만들었고요.”
손가락으로 손목 부근을 만지자, 아카시아의 양손이 저절로 모였다.
손목을 구속하는 둥그런 링이 생겨났는데 그 모습이 긴고아와 무척 흡사했다.
‘테르서박도 만들었는데 내가 못 만들면 안 되지.’
“제 공간 안에서는 긴고아와 거의 똑같은 성능을 지녔습니다. 시간제한은 있지만요.”
아무렇지도 않은 척 말을 이어가고는 있으나 차진혁도 점점 숨이 가빠왔다.
‘몇 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좀 아쉬운 부분이었다.
수호수 보정을 받고 있는데도 이 정도였다.
만약 수호수 보정이 없었다면 사용조차 할 수 없는 수준의 스킬인 듯했다.
‘물레벨 주제에 레벨 450 스킬을 마음껏 사용할 수는 없다는 거겠지.’
이 스킬을 제대로 사용하려면 적어도 레벨 500은 되어야 할 것 같았다.
450은 말 그대로, ‘전능의 연출가’를 사용하기 위한 최소의 조건이었을 뿐.
“이쯤 되면 밑작업은 거의 끝난 것 같습니다.”
잿빛 세계에 점차 빛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색이 돌아온 세상.
아카시아가 눈을 크게 떴다.
‘이건 도대체……!’
방금까지 분명 검옥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검옥이 사라져 있었다.
게다가 다리는 돌로 변해 있었고, 손목은 긴고아와 비슷하게 생긴 것으로 속박되어 있었다.
“무슨 짓을…….”
“너에게 실망했다.”
“…….”
“내 모든 전력을 끌어낼 수 있는 좋은 이벤트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네가 너무 약했지.”
아직 보여주지 않은 것이 있었다.
“수호수의 권능은 아직도 남아 있다.”
적절한 타이밍에 최적의 효과를 노려 보여주려 했건만 그건 이미 실패였다.
“수호수의 마지막 권능은, 바로 일반 필드에 있는 내 동료들을 소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교묘하게 앵글 밖으로 잡았던 송하영을 잡아서 보여주었다.
“히히. 잘 훔쳤다.”
송하영의 손에는 아까 아카시아가 꺼내 들었던 지도가 들려 있었다.
“사실 혹시 몰라 다른 애들도 대기시켜놨다.”
차진혁의 말에 따라 앵글 밖에 숨어 있던 그의 동료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권왕 김정현.
목왕 목재현.
그림자 살수 서둥이들.
자유의 성녀 차진솔.
거기에 빛나는 창 뮈엔느까지.
일대일 전투에 다른 동료들을 불러모은다?
예전의 자신이었다면 염두에 두지 않았을 방식이었다.
‘검왕 시절의 나였다면 비겁하다고 생각했겠지.’
아카시아도 비슷하게 생각했다.
“비겁하군.”
그녀의 시선이 뮈엔느 쪽으로 향했다.
“나를 이렇게 만든 건 뮈엔느 경. 당신인가?”
“나는 창술가야. 이 정도 이능을 부릴 수 없다는 건 그쪽이 잘 알고 있을 텐데?”
“……그렇다면 르세핌이나 카트리나의 짓이겠군. 비겁하기 짝이 없는 술수다.”
“그리고 뭐가 비겁하다는 거지? 스트리머가 원래부터 일대일 결투를 하는 플레이어였던가?”
사실 뮈엔느와 아카시아의 사이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둘 다 최상위 랭커로서 서로를 존중하는 사이였다.
그러나 지금의 뮈엔느에게서 아카시아에 대한 존중과 호감을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철수 님에게는 철수 님의 방식이 있다.”
“…….”
“스트리머에게는 스트리머의 방식이 있다는 뜻이지.”
아카시아는 인상을 찡그렸다.
“스트리머…….”
자꾸 스트리머를 강조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이상했다.
스트리머가 전투계열 랭커를 상대로 이렇게 싸울 수는 없는 거였으니까.
“그럼 이것들도 스트리머의 힘이라고 주장하는 건가? 내 손목을 긴고아로 묶고, 다리를 돌로 만들어버리는 이 기이한 힘을? 스트리머에게 이런 힘이 있다는 건 처음 듣는데.”
그럴 리 없었다.
이런 힘은 아마도 최근 김철수에게 적극 협조하고 있는 르세핌이나 카트리나의 힘일 거라고 생각했다.
차진혁이 뚜벅뚜벅 앞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당연히 처음 듣겠지. 레벨 450을 찍은 스트리머를 처음 봤을 테니까.”
그가 아카시아 앞에 섰다.
“마지막 기회를 주겠다, 아카시아.”
아카시아 입장에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말이 이어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