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는 그만 강해지고 싶다 320화
차진혁이 말했다.
“모두 아시다시피, 제3지옥의 주민들의 마음을 얻기 위하여 지옥좌는 저와 연합하여 지구의 문물을 지옥에 전파하는 중입니다. 이것은 꽤 효과가 좋아서 지구와 지옥 모두에게 이득이 되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 중이죠. 저희는 평화적이고 합법적인 방법으로의 합병을 추구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차진혁은 간만에 3인칭 시점으로 방송을 진행했다.
그는 미리 연습한 ‘아주 안타까운 표정’을 짓고서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나 세상만사가 뜻대로 풀리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미리 준비한 자료 영상들을 풀었다.
영상 속, 지옥의 귀족이라 짐작되는 한 사람이 지옥 주민을 거꾸로 매달아 놓고 매질을 하고 있었다.
-“이 변절자 새끼!”
“지구 및 4지옥에 우호적인 주민들을 납치하여 폭행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실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또 다른 자료화면도 준비했다.
지구에서 파견 나온 기술자들의 숙소에 대량 살상마법을 퍼붓는 장면이었다.
“마침 제가 근처에 있어서 겨우 막아내기는 했으나 정말 위험할 뻔했습니다.”
……라고 하기에는 사실 기술자로 위장한 탱커들이기는 했으나 어쨌든 그 사실까지 말할 필요는 없었다.
“저희 기술자들의 안전에 만반의 준비를 하고는 있으나 사고는 언제 어느 때나 벌어질 수 있는 법이죠.”
합병을 강경하게 반대하는 세력들이 있기 마련이었다.
“저는 더 이상 좌시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저는 지금 3지옥의 대귀족 중 한 명인 필리악의 대저택 앞입니다.”
여기까지 오는 길이 꽤 험난하기는 했다.
체력도 꽤 많이 빠졌고 –빠진 척했고- 몸 여기저기에 작은 생채기-극적 연출을 위해 일부러 맞아준-도 입었다.
차진혁이 찾아올 것을 이미 알고 있었던 필리악이 나름대로 철저히 준비했기 때문이었다.
“저는 3일 전, 필리악에게 서신을 보냈습니다. 3일 내로 항복하고, 주민들에게 가혹한 탄압을 그만두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서신을 배달한 우체부를 죽이더군요.”
차진혁은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그 또한 우체부가 사망할 거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한 것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천사소녀에게 부탁해 서신만 몰래 놓고 나오는 건데…… 이건 제 불찰입니다. 죄송합니다.”
그 모습에 수많은 시청자들이 격분했다.
-저걸 왜 김철수가 사과함?
-칼 때문에 누가 죽으면 칼 만든 장인이 사과해야 함?
-죽인 건 필리악인데 사과는 김철수가 하고 있네 어이없을 무다.
“사실 저도 이러한 절차 없이 쳐들어가고 싶었으나…… 아무래도 그러면 안 되는 것이겠지요. 기본적인 규칙이 있기에, 그리고 모두가 그 규칙을 지키고 있기에 이 세상의 질서가 유지되고 있는 것일 테니까요.”
왕유미로부터 오케이 사인이 담긴 메시지가 전해졌다.
연출은 여기까지 해도 될 것 같았다.
“더 이상 평화적인 방법으로만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차진혁은 정신을 집중했다.
신유리의 바빌론 캐논을 모방하며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나의 오른손은.”
스트리머 효과들을 사용해 멋지게 연출했다.
그의 발밑에 육망성 모양의 황금 마법진이 생성되고, 그로부터 강풍이 일었다.
은은한 황금빛 기류가 용솟음치며 차진혁의 몸을 둘러쌌다.
차진혁의 옷자락과 앞머리가 휘날렸다.
황금빛 기류 중 일부는 산산이 부서져서 마치 불꽃이 휘날리는 것 같기도 했다.
물론 캐논의 위력과는 전혀 상관없는 효과였다.
“길을 개척한다.”
속으로 읊었다.
내 오른손의 흑염룡이여!
그가 손바닥을 펼치자 굵은 황금빛 줄기가 쏘아졌다.
일부러 약간 땅 쪽을 조준했고, 그에 따라 땅에 기다란 생채기가 새겨졌다.
누군가 거대한 삽으로 땅을 길쭉하게 파낸 것 같았다.
콰과광!
중세 유럽의 성 모양을 하고 있는 대저택을 향해 쏘아진 빛줄기가 첨탑 하나를 통째로 무너뜨려 버렸다.
실로 가공할 만한 위력이었다.
* * *
제3지옥의 대군주 필리악은 차진혁의 침공을 이미 대비 중이었다.
그 나름대로는 꽤 열심히 준비를 했다.
‘여기 도착하기도 전에 죽여 버리면 최고겠지만…… 그건 어렵겠지.’
절대결계라는, 극강의 방어능력을 가진 플레이어니까.
그 또한 실시간 통해 차진혁의 위치와 전략 등을 실시간으로 파악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그는 무언가 이상함을 감지했다.
‘뭔가가…… 좀 다르다?’
미리 배치해 두었던 암살자들이 처리되는 장면이나 트랩이 파괴되는 장면 같은 건 나오지 않았다.
‘뭐지?’
그는 깨달을 수 있었다.
‘실시간으로 방송을 조작하고 있다!’
이것은 편집자 강철의 힘이었다.
어느덧 강철 또한 실시간 방송을 몇 초 안에 분석하고 편집하여 내보낼 수 있는 수준이 된 것이었다.
차진혁 입장에서는 암살자들이나 트랩을 파괴하는 장면을 굳이 내보낼 필요가 없었다.
아르비스를 이미 경험한 차진혁의 체감상 이곳의 난이도는 무척 낮았던 것이다.
일부러 몇 대 맞아줘서 생채기를 내기는 했는데, 괜히 과정을 보여줬다가는 조작 논란에 휩싸일 것 같았다.
질 낮은 콘텐츠는 보여주지 않는 것이 낫겠다는 판단에 일부러 내보내지 않았다.
그러나 필리악의 생각은 달랐다.
‘이 비겁한 놈! 얼마나 비열한 수를 쓰고 있는 거지?’
얼마나 더러운 방법을 쓰고 있으면 방송에서는 다 잘라낸단 말인가.
‘하지만 소용없다.’
필리악은 몸을 쓰는 것보다는 머리를 쓰는 것이 훨씬 익숙했다.
‘이럴 때를 대비하여 드론을 띄워놓았다.’
지금 당장 영상을 확인할 수는 없지만, 김철수의 저열한 짓거리가 다 녹화되고 있을 것이었다.
이윽고, 콰과광! 굉음과 함께 땅이 울렸다.
첨탑 하나가 완전히 박살 나서 주저앉는 것이 보였다.
필리악 입장에서는 또 어이없는 일이었다.
‘결계가 가동되고 있었을 텐데?’
결계를 부수고도 저 정도 위력인 건가?
아니면 결계를 미리 부숴놓은 건가?
‘어찌 됐든 둘 다 괴물 같은 능력인 건 틀림없지.’
필리악은 뚜벅뚜벅 걸어 본관의 문을 활짝 열었다.
분수대가 있는 중앙정원을 가로질러 차진혁을 향해 걸었다.
그의 겉모습은 무척 위풍당당했다.
“더러운 침략자가 무슨 낯짝으로 이곳을 찾아왔느냐?”
이미 서신 내용에 다 적혀 있었다.
일대일로 겨루어서 승패를 가르자는 결투 서신.
패배하는 자가 깨끗하게 결과를 받아들이고 상대에게 복종하자는 내용이었다.
“지옥좌의 부탁을 받아 네 녀석을 잡아가려고 왔다. 서신에서 미리 밝혔듯 일대일 결투를 제안하지.”
“흥.”
필리악은 차진혁의 잔꾀를 내다보았다.
‘내가 전투에는 그리 적합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날 골랐겠지.’
지금도 지옥좌와 치열좌에게 반대하는 세력이 곳곳에서 활약하고 있다.
‘그 수많은 이들 중 하필이면 날 골랐다는 건, 네놈이 그만큼 비겁하고 잔머리를 잘 굴리는 놈이라는 뜻이겠지.’
……였으나 실상은 조금 달랐다.
필리악이 가장 유명했기 때문이었다.
쉽게 말해 어그로가 잘 끌렸다.
‘그러나 그것은 너의 오만이고 실수가 될 것이다.’
어차피 그 또한 차진혁과 일대일로 싸워서 이길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고 있었다.
‘너는 나의 충정심을 너무 우습게 보았다.’
그는 여기서 죽어도 상관없었다.
제3지옥의 자주권을 위해서, 여지껏 지켜온 전통을 위해서, 그는 최선을 다할 생각이었다.
‘너는 결코 여기서 살아나갈 수 없을 것이다. 준비는…… 다 끝났다.’
그때,
차진혁이 말했다.
“물론 나는 스트리머이기 때문에 직접 전투는 피할 생각이다.”
“……뭐?”
필리악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차진혁을 바라보았다.
반사적으로 뒤쪽도 쳐다봤다.
완전히 박살 난 첨탑이 보였고, 그는 순간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저런 걸 하고서 스트리머랍시고 빠진다고?’
아무리 생각해도 황당한 발언이었다.
그런 주제에 눈이 맑은 걸 보아하니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건 아니었다.
‘생각보다 체력이 많이 떨어진 건가?’
그런데 그 다음이 문제였다.
“나는 흑기사로 뮈엔느를 지목하겠다.”
아르비스의 랭커, 뮈엔느가 나섰다는 사실이었다.
필리악은 코웃음을 쳤다.
“흥, 아르비스의 최상위 랭커가 여기 있다는 거냐?”
“그래.”
“허세도 정도껏 부려라.”
게다가 뮈엔느는 철두철미한 원칙주의자.
살면서 휴가도 한 번 안 냈다고 알고 있었다.
아무리 평화적인 방법을 추구하고 있다고는 해도, 남의 침략 행위에 도움을 줄 인물은 결코 아니었다.
‘그렇다면 왜 이런 허세를 부리는 거지?’
금방 들통날 거짓말을 하고 있는 어떤 이유가 있을 것이 분명했고, 필리악은 그 이유를 찾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그런데 그때.
차진혁 뒤에 가만히 서 있기만 했던 사람이 로브를 벗어 얼굴을 보여주었다.
정말로 헬렌제국 7대 성기사 중 한 명인, 우주랭커 뮈엔느였다.
* * *
며칠 전, 뮈엔느는 사표를 제출했다.
“뮈엔느. 잘 생각해라. 이제 겨우 1년 남았다.”
뮈엔느는 사실 한 도시의 경비대장 정도로 남아 있을 인물은 아니었다.
시장이 그 사실을 가장 잘 알고 있었다.
황실 근위대에서 상관을 폭행한 죄로 좌천되었고, 이제 1년만 있으면 황실로 복귀할 수 있는 최강의 실력자.
“1년만 더 버티면 너는 원래의 영광을 되찾을 수 있다. 여지껏 잘 해오다가 왜 갑자기 사표를 내는 거지?”
“저는 출발이 많이 늦었습니다.”
“출발? 무슨 출발?”
“이대로라면 르세핌에게 밀리고 말 것입니다.”
시장은 고개를 갸웃했다.
르세핌은 길잡이고, 뮈엔느는 성기사.
서로 가는 길이 완전히 다른데, 도대체 밀리고 말고 할 게 뭐가 있단 말인가.
“철수랜드로서 부끄럽지 않은 모습을 보이고 싶습니다.”
얘기를 들어본 시장은 입을 쩍 벌렸다.
“……그러니까 그 덕…… 뭐라고?”
“덕질입니다.”
“그래. 그 덕질을 본격적으로 하기 위해서 생업도 때려치우겠다?”
“돈은 쓸 만큼 모아놓았습니다.”
시장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그의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뮈엔느를 붙잡아야 했다.
이 도시 치안의 절반은 뮈엔느가 담당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니까.
“잘 생각해 봐, 뮈엔느 경.”
“이미 많은 심사숙고를 거쳤습니다, 시장님.”
“아니아니. 그러니까 결국에는 김철수를 덕질하고 싶고, 더 나아가서 김철수에게 큰 도움을 주고 싶은 거잖나?”
“그렇습니다.”
“1년만 더 여기서 버틴 다음 황실 근위대에 복귀하고, 권력을 쟁취하는 쪽이 김철수에게 도움이 되지 않겠어?”
“…….”
“그때, 김철수를 아르비스로 들이기 위해서 나한테 로비 비슷한 것을 했던 게 생각나지?”
“……예,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런 권력을 자네가 가진다면? 김철수를 위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를 수 있다면? 어쩌면 르세핌보다 훨씬 유능한 철수랜드가 될 수 있는 것 아닌가?”
“…….”
거기까지 말한 시장은 아차! 싶었다.
‘저 지독한 원칙주의자를 상대로 무슨 말을……!’
아무리 마음이 급했다기로서니 이건 뮈엔느를 모욕하는 말이었다.
평소의 신념을 무시하는 발언이었으니까.
뮈엔느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아니, 아니, 뮈엔느 경, 그러니까 내 말은…….”
시장이 급히 변명하려는 찰나, 뮈엔느는 제출했던 사표를 다시 품속에 넣었다.
잔뜩 긴장했던 시장이 휴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일단 휴가를 좀 내주십시오.”
그녀가 지금 차진혁과 함께할 수 있는 이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