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는 그만 강해지고 싶다 304화
브릭은 우수에 찬 표정으로 추억을 회상했다.
“그때의 우리는 참 찬란하고 귀여웠었다, 김철수 경. 내리쬐는 햇살도 반짝이는 개울물도…….”
“그래서? 넬슨이 천재였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거지?”
“물론 그렇다, 김철수 경. 넬슨은 어려서부터 각종 세공능력과 솜씨를 인정받았다. 신동이라 불렸지.”
그 재능이 워낙 뛰어나 많은 가문이 넬슨을 양자로 입양하려고 눈독을 들였단다.
“넬슨의 어머니는 넬슨이 가장 유복한 환경에서 자라기를 바라셨어.”
브릭의 특징 중 하나는 얘기를 하다가 자꾸 엉뚱한 길로 빠진다는 것이었다.
“참고로 넬슨의 아빠라는 놈은 넬슨이 두 살 때 바람을 피웠다. 충격적인 건 넬슨의 어머니를 빼고 주변인들은 다 알고 있었다는 것이지!”
차진혁은 단련된 스트리머답게 다시 토크(?)를 정리해 주었다.
매끄러운 인터뷰 진행을 연습하는 기분이었다.
“넬슨이 유복한 환경에서 자라길 바랐던 어머니가 내렸던 선택이 뭐냐?”
“바로 하르코엔 가문으로 보내는 것이었다!”
브릭의 콧수염이 바르르 떨렸다.
“하르코엔 가문에서 적극적으로 넬슨을 지원하고 싶다고 했다. 하르코엔 가문으로 향하던 날, 갑자기 행방불명 되었던 거지.”
브릭은 그 앙증맞은 주먹을 꽉 쥐었다.
“하르코엔은 참 뻔뻔한 여자였다, 김철수 경. 넬슨의 행방불명에 하르코엔 가문의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니나, 저희 집으로 오는 길에 당한 참변이니 도의적인 책임을 지겠다며 그의 어머니에게 3,000만 다이아를 건넸어.”
“…….”
“근데 더 어이없는 건 중간에 그 돈을 그 아빠 새끼가 가져갔다는 거지! 생물학적 친권자라는 이유로 말이야!”
“죽였나?”
“아직.”
어느새 차진혁도 브릭의 말에 빨려들어갔다.
어린 시절 이야기라 동화 같을 줄 알았더니, 자극 범벅의 막장드라마 아닌가.
“왜 안 죽였지?”
“넬슨이 행방불명 되었으니까! 그런 놈은 넬슨 앞에서 죽여야 진정한 정의 아니겠나, 김철수 경. 그리고 넬슨 어머니와 넬슨의 뜻도 물어봐야 하고 말이야. 아, 참고로 넬슨의 어머니는 지난 18년간 넬슨을 찾아다니다가 반폐인이 되셨어, 김철수 경.”
“흐음.”
참 기구한 운명이다 싶었다.
남편은 바람나서 도망가, 아들은 행방불명 돼, 아들 명목으로 지급된 위로금은 남편이 가로채, 지금은 반쯤 폐인이라니.
“멀지 않은 미래에 그 새끼를 죽일까 하는데.”
“시간이 맞으면 중계해도 되나?”
“물론이지!”
차진혁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무슨 얘기 중이었더라. 아, 그래. 넬슨과 관련된 얘기 중이었지.’
우주급 시나리오의 다음 진행방향이 카트리나의 가문을 가리키고 있었다.
연금술사(?)인 르세핌의 도움을 크게 받았으니, 다음에는 보석장인의 도움이 필요할 가능성이 높았고,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넬슨과의 연결은 행운이라 할 수 있었다.
한참 다른 얘기를 하던 브릭도 문득 정신을 차리고서 말을 이었다.
“알다시피…… 나는 암살자이고 적이 아주 아주 많지. 나를 좋게 보는 인간들은 별로 없어. 그리고 장인들과의 사이도 썩 좋은 편이 아니고 말이야.”
그래서 넬슨에게 스승을 소개해 주고 싶어도 소개해 줄 수가 없다고 했다.
“내가 아주 뛰어난 스승을 알아.”
“보통 그렇게 뛰어난 스승들은 이미 제자를 많이 받아서 여력이 없던데?”
차진혁이 알고 있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취미를 즐기고 있어서 시간이 많은 사람.
바로 카트리나였다.
* * *
카트리나는 활짝 웃으며 우렁차고 사내다운 목소리로 차진혁을 맞이해 주었다.
“어서 와 오빠.”
우람한 팔 근육과 웅장한 대흉근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카트리나. 할 얘기가 있어.”
차진혁이 대뜸 반말을 하자 카트리나는 ‘드디어 오빠가 대놓고 반말을 해주네? 나 좀 기뻐?’라며 응수했고, 차진혁은 그냥 자기 할 말만 이어갔다.
얘기를 모두 들은 카트리나는 턱을 매만졌다.
“흐음. 그러니까 나한테 보모 역할을 해달라는 거지?”
“보모 아니고 스승.”
“그게 그거지 뭐.”
카트리나는 호호호! 웃었다.
“혹시 이름이 넬슨이야? 18년 전 행방불명 되었다던?”
“넬슨을 알아?”
“알지. 이쪽 업계에서는 만년 만에 나타난 신동이라고 떠들썩했었거든.”
차진혁은 순간, 카트리나의 표정이 잠깐 어두워지는 것을 발견했다.
스트리머의 눈썰미가 아니었더라면 발견하기 어려웠을 정도로 미묘하고 빠른 표정 변화였다.
‘뭐지?’
어느새 표정을 숨긴 카트리나는 또 호호 웃었다.
“나를 낳아준 년이 양자로 삼고 싶어 했었던 기억이 나네.”
“…….”
나를 낳아준 년?
차진혁은 순간 긴장했다.
‘이런 말은 방송에 내보내면 안 되겠지?’
실시간 방송이 아니라서 다행이었다.
나를 낳아준 년이라니.
그렇게까지 심한 비속어가 들어가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 정도로 신랄한 욕은 거의 처음이었다.
아무래도 카트리나의 가정사가 꽤 복잡한 모양이었다.
“아무튼 난 귀찮은 건 딱 질색이야. 하지만 우리 철수 오빠 부탁이라면 내가 생각은 해볼 수 있지.”
카트리나는 은근슬쩍 차진혁에게 몸을 기울였다.
“나도 유혹해 볼 수 있어?”
“…….”
차진혁은 순간 심각하게 고민했다.
‘나는 미인계를 본능적으로 거부할 정도로 아직 부족하고 모자란 놈이다.’
그런데 거기에 더해 여장남자를 유혹한다?
이건 정말 치열하지 않으면 생각조차 해보기 어려운 도전이었다.
“아직은 엄두가 나질 않는군.”
“[아직은]이라는 건 나중에는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거야?”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내가 조금 더 치열할 준비가 된다면 유혹…… 해보지.”
차진혁은 또다시 반성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 치열하고 간절한 스트리머였다면 여기서 말을 더듬지 않았을 것이다.
미인계에 거부감을 느끼지도 않았을 거고, 남자를 유혹하는 것에도 거리낌이 없었을 것이다.
더 치열했다면 그랬을 것이었다.
‘나는 아직 덜 치열하다.’
매일같이 부족함을 느꼈다.
“뭐…… 일단은 그 정도면 충분히 만족해. 좋아, 넬슨이라는 녀석을 한번 만나볼게.”
* * *
넬슨은 수달계 수인족이었고 브릭보다 덩치가 더 작았다.
전체적인 생김새는 생쥐계 수인족인 브릭과 비슷하기는 했지만, 브릭보다 더 매끈하고 윤기 나는 털을 가지고 있었다.
카트리나는 두 손으로 넬슨을 조심스레 들어 올린 뒤 볼을 비볐다.
“넬슨이 이렇게 귀여운 생물체인 줄은 몰랐는데.”
“……아아…… 어어…… 아아……!”
넬슨은 카트리나의 격한 인사에 미처 반항하지 못했다.
한차례 폭풍 같은 인사가 끝난 뒤, 도련님처럼 단정하게 차려입은 넬슨이 허리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넬슨이라고 합니다.”
“알아. 너네 아빠가 이 새끼 맞지?”
카트리나는 미리 준비한 사진을 하나 꺼내서 보여주었다.
넬슨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마, 맞습니다! 제 아버지를 알고 계십니까?”
“어, 나를 낳아준 년의 내연남.”
넬슨은 ‘내연남’이라는 말에 얼굴을 찌푸렸다가 이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약간의 생각을 거친 뒤 한 마디를 내뱉었다.
“예?”
“반가워, 동생.”
“……동생이요?”
“내 아버지도 이 새끼일 수도 있어. 4분의 1 확률로.”
“그, 그게 무슨……!”
“당시에 나를 낳아준 년의 애인이 네 명쯤 됐거든. 누가 내 아빠인지는 몰라.”
차진혁은 저도 모르게 허- 하고 탄식을 내뱉고 말았다.
스승을 소개해 주려고 온 자리에 막장 콘텐츠를 찍게 될 줄이야.
‘엄청 자극적인데?’
확실한 어그로도 끌 자신도 있었다.
‘근데…….’
차진혁은 녹화를 중지했다.
‘왠지 이걸 콘텐츠화하고 싶지는 않네.’
그에게도 사람의 마음이 생기기 시작했다.
카트리나가 피식 웃고서 차진혁에게 물었다.
“근데 보통 이런 얘기를 들으면, 수달계 수인족 남성체랑 인간 여성체가 짝짓기를 할 수 있는지부터 묻지 않아?”
“……아.”
생각해 보니 그런 거 같기도 하고.
굉장한 가십거리가 될 것이 분명했다.
스트리머이자 엘튜버로서 당연히 관심을 가질 만한 내용이었다.
‘근데 나는 왜 이걸 안 물었지?’
정확한 답은 찾을 수 없었다.
여러모로 생각이 많아지는 순간이었다.
* * *
결국 카트리나는 넬슨을 가르치는 것을 거부했다.
“얘를 보면 자꾸 더러운 옛 생각이 나서 말이야.”
카트리나는 가게 안으로 들어가서 독주 한 병을 꺼내왔다.
“오빠도 마실래?”
“……그래.”
차진혁도 의자에 앉아 카트리나가 주는 술잔을 받았다.
이내, 카트리나가 옛이야기를 시작했다.
“말했었나? 나 가출한 거라고.”
“취미를 즐기고 있다고만 알고 있었는데.”
“정확히 말하면 가출한 거야. 집에서 값비싼 보석들을 한 뭉텅이로 훔쳐 왔어. 호호호호! 그리고 지구로 도망친 거지!”
카트리나는 한참 동안 낄낄대며 웃었다.
그 보석들은 값으로 환산할 수도 없다나 뭐라나.
잠자코 말을 듣던 차진혁이 넌지시 물었다.
“네가 가출한 걸 알아주길 바란 건가?”
“…….”
카트리나는 움찔 놀랐으나 더 이상 내색하지는 않았다.
“그토록 값비싼 보석들을 훔쳐서 집을 나왔고 이 지구에 보석상점을 차렸는데도, 가문의 누구도 널 찾지 않았던 거군.”
카트리나는 ‘가출’ 혹은 ‘도망’이라고 표현했지만 그런 것치고는 행적을 너무 대놓고 보여주고 있었다.
얼굴을 가린 것도 아니고 음성을 변조하지도 않았다.
카트리나라는 이름을 숨기지도 않았고, 자신의 방송에 얼굴 한 번 가리지 않고 그냥 나왔었다.
카트리나가 씁쓸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뭐, 그런 거지. 우리 집에는 그런 보석이 너무 많아서, 사실 내가 뭘 훔쳐 갔는지도 잘 모를걸. 나는 내놓은 자식이니까. 내가 가출한 것도 모를 거야. 아니면 알아도 신경 쓰지 않거나.”
“그런 일련의 상황들이 네 여장과 관련이 있는 건가?”
카트리나는 술잔에 담긴 주황색 술을 한 입에 털어 넣고서 물었다.
“혹시 지금 방송각 재고 있는 거?”
“아니.”
차진혁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방송은 진작에 껐다. 녹화도 안 하고 있고.”
“……왜?”
“왜라니?”
“자극적이잖아. 방송 소재로 좋지 않아?”
“…….”
차진혁은 대답할 말이 궁색해졌고, 카트리나는 또 호호! 웃었다.
“사람의 마음을 가진 미친놈인가 봐, 오빠는.”
“사람의 마음을 가진 것은 당연하지만 미친놈은 아냐.”
“원래 미친놈은 자기가 미친놈인 줄 몰라.”
“실례되는 말을 하는군.”
“이러니 내가 오빠한테 뻑이 가지.”
술이 얼큰하게 오른 카트리나는 주절주절 많은 얘기를 꺼냈다.
“나도 천재라고 불렸어. 넬슨만큼 말이야. 가문의 기대를 듬뿍 받으며 자랐지.”
그러던 어느 날, 카트리나는 자신의 성정체성에 큰 혼란을 느끼게 되었다고 했다.
“저주했어 내 몸을. 내 몸에는 남자의 생식기가 달려 있었으니까.”
카트리나는 자신을 남자의 신체를 가진 여자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오랜 시간이 흐른 후 그는 여자가 되고 싶다고 말했고, 가문 내에서 배척받는 신세로 전락했다.
“우리 가문은 엄텅 보수덕이라서 마리야. 여당 남자 따위는 돈대할 수 업는 거거덩(우리 가문은 엄청 보수적이라서 말이야. 여장 남자 따위는 존재할 수 없는 거거든).”
“그럼 차라리 여자가 되는 편은?”
초강대 서버인 아르비스라면 그것이 가능했다.
아르비스 서버의 시민정서 때문에 불법이기는 했지만, 어쨌든 완벽한 성전환이 가능하기는 했다.
“그으래! 차다디 여다가 대려고 해찌, 나눈! 날 낳아준 년더 아예 여자가 돼서 오면 이해해 준다고 그래떠(그래! 차라리 여자가 되려고 했지 나는! 날 낳아준 년도 아예 여자가 돼서 오면 이해해 준다고 그랬어.)”
그런데 거기에는 함정이 있었다.
불법적으로 성전환을 해주는 플레이어들 및 가문 중 대다수가 카트리나의 가문과 직간접적으로 연관이 되어 있다는 것.
-“미안하지만 나는 못 해주네. 다른 데 알아보게.”
-“미안합니다. 못 해줄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다른 서버의 플레이어들에게 시술을 맡기는 것도 그리 좋은 선택은 아니었다.
-“내가 해줄 수는 없지만 절대 어수룩한 자에게 시술을 받으면 안 됩니다. 당신이 가진 재능이 망가질 수도 있어요.”
-“솔직히 한다면 제가 해주고 싶을 정도군요. 부디 부탁이니 훌륭한 실력을 가진 시술사에게 시술을 받도록 하세요.”
차진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가 되고 싶다는 마음과, 보석장인으로서의 재능을 잃고 싶지 않다는 두 마음을 충분히 이해했다.
‘가만.’
그런데 얘기를 듣다 보니 실마리가 풀리는 것만 같았다.
모두에게 윈윈인 방법이 떠올랐다.
카트리나, 넬슨, 그리고 차진혁 자신까지 말이다.
오로지 회귀자만이 알 수 있는 방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