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는 그만 강해지고 싶다 297화
스트리머의 눈으로 세상을 보니, 세상에는 영감을 주는 것들투성이였다.
‘내 팬들도 정말 치열하구나.’
차진혁은 팬들의 치열함에 감동했고, 팬들의 열정에 맞는 모습을 보여주기로 했다.
정보 획득은 나중이었다.
크게 영감을 받은 그가 진심을 담아 말했다.
“우리 철수랜드들이랑 같이 내 플레이 영상 리뷰해 볼까 해.”
자연스레 소통하다 보니 결국 얘기가 나오게 되었다.
‘그래. 이게 맞는 거지!’
적당한 암살자 아는 사람?
이렇게 물었다면 차진혁은 그 스스로에게 무척 실망했을 것이었다.
철수랜드들과 즐겁게 리뷰를 진행하다 보니 아주 자연스레 암살자 고용과 관련된 얘기가 나오게 되었다.
그리고 철수랜드들은 더욱 적극적으로 호응했다.
[001호: 저저저저저저저저! 저 알아여ㅕ!!!]
1호가 채팅을 치자 나머지는 모두 침묵했다.
1호의 정보전달을 방해하지 않겠다는 강렬한 의지가 액정 너머로도 느껴질 정도였다.
차진혁은 이 상황이 마치 유능한 지휘자가 지휘하는 오케스트라처럼 느껴졌다.
[001호: 제가 딱 말씀드릴게여!>_<]
5분에 하나씩만 말할 수 있다더니, 또 이렇게 예외적인 상황이 존재하는 모양이었다.
차진혁 본인도 잘 모르는 암묵적인 룰들이 다수 존재하는 듯했다.
[001호: 영상 7분 22초. 11시 방향 ‘수인’ 카테고리에 있는 저 꼬마 인형이요! 꼬마의 이름은 닐슨. 나이는 12세. 베르지오 서버의 유명 암살자인 브릭의…… 행방불명 시기는 18년 전……]
“와.”
차진혁은 저도 모르게 감탄성을 내뱉었다.
김민지가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술술 정보가 나올 줄이야.
김민지는 핵심정보를 요약해서 올려주기도 했다.
─────
[암살자 정보]
* 이름: 브릭
* 출신: 베르지오 서버
* 나이: 미상
* 서사: 18년 전, 하르코엔이 브릭의 소꿉친구인 닐슨을 납치(했으리라 추정).
* 서사 장르: 우정 기반의 복수
* 콘텐츠 예상 별점: ★★★★☆
─────
“다 좋은데…… 왜 예상 별점이 만점이 아닌 거야?”
[001호: 제 지인의 친한 친구인데 성격이 좀 건방지대요. 그래서 철수 님의 심기를 거스를 것 같아서 별 하나 뺐어요.]
들어보니 콘텐츠 진행에 크게 문제 될 요소는 아닌 것 같았다.
차진혁은 고개를 끄덕인 뒤 빙그레 웃었다.
“고마워, 민지야.”
그러자 또 ‘♡’가 도배되었다.
왜 그런가 했더니,
[221호: 001호는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
[352호: 너무 부러워ㅠㅠㅠㅠㅠㅠㅠㅠㅠ 부러워 죽을 거 같아 ㅠㅠㅠㅠ]
[552호: 나 민지로 이름 개명하러 간다!]
차진혁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름 불러주는 게 그렇게 부러운 일인가?
“너희들도 이름 말해봐. 한 번씩 불러줄게.”
1000명의 이름을 부르는 게 뭐 대수라고.
그런데 또 철수랜드들은 이상한 곳에서 완강했다.
자연스러운 상황에 알게 되어 자연스레 불러주는 건 괜찮지만, 이런 짓으로 철수 님을 불편하게 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 그들의 진심이었다.
‘아……! 팬들도 일의 순서를 정확하게 알고 있구나.’
이러니 반성할 수밖에.
차진혁은 첫 생각과 달리 약 3시간 동안 철수랜드들과 소통했다.
중간중간, 채팅 참석율 100%라는 기염을 토해내기도 했다.
1,000명에 달하는 철수랜드 전원이 집합한 것이다.
‘이거…… 재미있네.’
아무래도 팬들과 소통하는 시간도 좀 늘려가야 할 것 같았다.
이번에 하이드랑 싸우면서 느낀 바가 많았다.
여전히 부족한 것투성이였고 배울 것이 많았다.
모든 것에 최선을 다해야 했다.
“민지. 브릭이랑 연락돼?”
[1호: 네! 돼요! 브릭한테 철수 님 찾아뵈라고 말씀드릴까요?]
“그게 된다고?”
[1호: 네! 개인적으로 되게 잘 알아요!]
아까는 그냥 지인의 친한 사람이라고 안 했나?
그 정도면 모르는 거 아닌가?
……라는 상식적인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런 생각은 치열하지 못한 것이었다.
“오, 그럼 그래 줄래?”
[1호: 물론이죠! >_<♡]
“고마워.”
[1호: 고맙긴요. 제가 도움이 될 수 있어서 다행이에요 ㅠㅠㅠ]
* * *
차진혁은 약간 놀랐다.
‘김민지, 너는 도대체…….’
베르지오 서버.
역사 깊은 서버 중 하나였으며 아직 지구와 제대로 연결이 되지 않은 서버였다.
그런데 그 서버의 유명 랭커인 브릭이 지구를 찾아왔다.
청담동의 최갑수 공방으로.
“민지야, 고마워.”
앱에서는 온갖 하트와 이모티콘을 남발하던 소녀 김민지는 얼굴이 잔뜩 붉어진 채 기둥 뒤에서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그마저도 부끄러웠는지 이내 기둥 뒤로 숨어버렸다.
최갑수(돈벼락)가 끌끌 혀를 찼다.
“여기가 무슨 만남의 광장도 아니고.”
“저도 여기가 접선 장소일 줄은 몰랐습니다. 민지가 통보한 거라서요. 다음부터 이런 일이 또 있으면 저희 집으로 하죠.”
“그건 안 될 말이지.”
“뭐가 안 됩니까?”
“네 프라이버시를 죽어도 지키려는 사람이 있어서.”
“제 프라이버시요?”
“그런 게 있어.”
최갑수는 고개를 저었다.
아까 전에 편애광신(김민지)이 말했다.
-“우리 철수 님 프라이버시 절대 지켜.”
김민지는 외부인들에게 김철수의 집 주소를 절대 공개하지 않겠다고 단언한 상태.
-“그럼 저희 공방은요? 저도 여기 집으로 씁니다.”
-“그걸 내가 알아야 해?”
-“…….”
편애광신이 왜 ‘편애’광신인지 적나라하게 느낄 수 있는 대목이었다.
“자네 영상이 공개되기 전에 자네 플레이를 직관하는 것도 나름 재미있고 말이야. 자. 인사 나누게. 이쪽이 베르지오 서버의 암살자 브릭.”
“내가 브릭이다.”
브릭은 테이블 위에 올라서 있었다.
몸집이 무척이나 작았다.
키가 대략 40㎝ 정도.
윤기 나는 잿빛 털을 가진 생쥐계열 수인족이었다.
그는 오른쪽에 사람의 손바닥만 한 크기의 얄쌍한 검을 차고 있었다.
“그래, 김철수 경. 내게 의뢰를 하고 싶다 하였나?”
입 주변에는 털이 여섯 가닥 길게 뻗어 있었는데, 그 털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무척 강렬한 감정을 느끼는 중이었다.
[#의뢰_제발 #내게도_명분이_필요하다 #하르코엔_넌_내가 죽인다]
18년 전 실종되었던 친구를 드디어 찾았다는 감격.
하르코엔을 향한 분노.
복잡하고 뜨거운 감정이 그의 머릿속을 온통 지배하고 있었다.
차진혁은, 우정을 기반으로 한 복수 서사극의 도입부에 진입했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래. 이 몸께서 하르코엔을 직접 죽여주지.”
“나는 아직 의뢰도 안 했는데?”
일이 너무 쉽게 풀리자 차진혁은 약간 의심했다.
예쁜 거, 귀여운 거, 너무 쉬운 거.
모두 조심해야 할 대상이니까.
그런데 브릭은 약간 마이웨이였다.
차진혁의 말에는 딱히 대답하지 않고 하고 싶은 말만 이어갔다.
“보수는 미리 생각해놓은 게 있다.”
“한 번 들어보자.”
너무 터무니없는 요구일 경우에는 의뢰 자체를 다시 생각해야 했다.
‘하르코엔의 유산은 내 거여야 해.’
뛰어난 연금술사 가문인 하르코엔의 유산들을 살피다 보면, 어쩌면 수호수와 관련된 비밀들을 더욱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차라리 돈을 주면 줬지, 하르코엔의 것들은 넘겨주기 어려웠다.
차진혁은 약간 긴장한 채 물었다.
“뭐지?”
“나의 고향에도 황금 수호수를 심어서 키워주는 것이 조건이다.”
브릭이 손바닥만큼 짧은 –그러나 브릭의 몸집에 비해서는 기다란- 검을 빼내 차진혁을 겨누었다.
“물론, 황금 수호수를 키워내지 못한다면 나는 그대도 죽일 것이다.”
“…….”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기사도에 맞지.”
“…….”
차진혁이 침묵하자 브릭은 선심 쓰듯 얘기했다.
“기사도를 모르는 자에게는 조금 혼란스러울 수도 있겠지. 생각할 시간은 이틀 주겠다, 김철수 경.”
먼발치에서 대화를 듣고 있던 김민지는 순간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죽여? 감히? 네가? 철수 님을? 건방져도 너무 건방져!
별 하나를 빼는 게 아니라 5개를 뺏어야 했는데, 아무래도 실수인 것 같았다.
“오, 정말 좋은 조건이군.”
차진혁이 티 없이 밝게 웃고 있었다.
* * *
광란의 마도사 퓌렐.
그녀는 저택으로 돌아와 한참을 씩씩댔다.
아무래도 사라 키옌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X이…….”
퓌렐은 대체로 사람은 좋아하지 않는 편이지만, 사라는 유독 싫어했다.
아무런 노력도 없이 키옌 가문을 물려받은 후계자였으니까.
혈육 간의 전쟁을 통해 지금의 이 자리를 거머쥔 퓌렐에게 있어서 사라는 눈엣가시나 다름없었다.
‘됐다. 까짓거, 내가 죽이면 되지.’
7대 명가의 가주가 또 다른 7대 명가의 가주를 습격한다?
그건 모양새가 너무 좋지 않았다.
사람들은 7대 명가를 하나의 덩어리로 보는 경향이 컸고, 그 내에서 분열이 일어나는 것을 그리 달가워하지 않을 것이었다.
제국 수뇌부들 또한 그랬고.
아르비스 7대 명가는 7대 명가로서 굳건히 버텨주어야 했다.
“내가 그딴 거 언제부터 그렇게 신경 썼다고.”
3대 제국의 황제들이 좀 귀찮게는 하겠지만 상관없었다.
뭐라고 하면 그냥 어쩌라고 배째, 하기로 마음먹었다.
‘하르코엔을 내가 죽이면.’
키옌 가문이 자리 잡은 방향인 북쪽을 바라보았다.
‘키옌 가문이 하지 못한 것을 내가 해내는 셈이 되는 거지.’
다른 명가들은 더 이상 키옌 가문을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
그림자는 그림자답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야겠지.
“7대 명가는 얼어죽을 7대 명가.”
앞으로 다가올 세상에는 7대 명가가 아닌 5대 명가만이 남게 될 것이었다.
한편, 사라 키옌은 책상에 앉아 건오징어 다리를 질겅질겅 씹었다.
새로 알게 된 간식인데 마요네즈나 고추장을 찍어 먹으면 그렇게 맛있을 수 없었다.
“오징어, 맛있네.”
그녀는 별생각 없었다.
“책이나 열심히 파다가 퇴근해야지.”
* * *
차진혁과 브릭의 계약은 성립되었다.
차진혁이 말했다.
“내가 동행해도 되겠지?”
“네가? 왜?”
“스트리머니까. 영상 따야지.”
“흠, 그렇군.”
약간 생각하던 브릭이 피식 웃었다.
“이 몸의 재빠름을 감당할 수 있다면, 그리고 이 몸의 은밀함을 흉내 낼 수 있다면.”
“…….”
“하지만 내 암살 작업에 방해가 된다면 가차 없이 그대의 두 다리를 베어버릴 것이다, 김철수 경.”
말은 그렇게 했지만 브릭은 별생각 없었다.
‘아마 두 다리가 잘릴 일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김철수는 어차피 나를 따라올 수조차 없을 테니까!’
……라고 생각했는데,
‘나, 나를 따라오고 있잖아?’
범상치 않은 스트리머라는 말을 진즉에 들었지만, 그래도 일류 암살자인 자신의 몸놀림을 따라올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 그래. 들판을 따라오는 것 정도는 할 수 있겠지.’
빠르게 움직이는 것과, ‘안 들키고’ 빠르게 움직이는 것은 다르다.
그리고 ‘안 들키면서 복잡한 곳을 빠르게’ 움직이는 것은 정말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이 절벽 너머에 하르코엔의 대저택이 있다. 각종 결계와 삼엄한 경비를 뚫고 들어가야 하지.”
“결계를 뚫는 방법은?”
“그건 영업기밀이라 알려줄 수 없고, 그냥 내 움직임을 똑같이 재연해서 따라오면 된다, 김철수 경.”
브릭은 차진혁을 힐끗 쳐다보았다.
놀라운 신체 능력을 가진 스트리머인 것은 맞지만 이쯤에서 그만둘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마 들키면 거의 무조건 죽을 것이다. 명색이 제국 7대 명가 중 하나인 곳이니 말이야.”
이 정도 말하면 보통은 겁을 먹으니까!
그런데 차진혁은 웃고 있었다.
“좋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