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는 그만 강해지고 싶다 292화
쪽.
작은 소리와 함께 입술의 감촉이 느껴졌다.
‘뽀뽀라고?’
연애 콘텐츠도 아닌데 이런 스킨십이라니.
차진혁 입장에서는 상당히 충격적인 상황이었다.
이런 스킨십을 할 일이 연애 콘텐츠 말고 뭐가 있겠는가.
‘기분 더럽네.’
콘텐츠를 강제당한 것 같아서 기분이 아주 별로였다.
생각해 보니 왕유미가 연애 콘텐츠든 가상 연애 콘텐츠든 절대 안 된다고 말했던 게 생각이 났다.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하르코엔은 자객이나 다름 없었다.
콘텐츠를 망치는 자객!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진상이었지만 그래도 참았다.
‘프로 방송인이라면 참아야지.’
이 정도 역경과 고난은 견뎌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순간, 하이드가 모습을 드러냈다.
하르코엔의 등 뒤에서 갑작스레 나타난 그는 하르코엔의 목을 졸라 기절시켰다.
“김철수. 괜찮나?”
“…….”
차진혁은 고개를 갸웃했다.
하르코엔을 기절시켜? 무슨 꿍꿍이지?
“약속대로, 이 가문의 모든 것은 네가 가져라. 나한테는 하르코엔만 있으면 돼.”
하이드는 차진혁에게 가까이 다가오는가 싶더니 움찔, 하고 놀랐다.
“이미 다 알고 있었군.”
가까이 가보니 알 수 있었다.
차진혁은 세뇌에 걸리지 않았고, 심지어 이 상황을 녹화 중이었다.
“어떻게 녹화 중인 거지?”
“…….”
참고로 차진혁은 무척 화가 난 상태였다.
‘내가 발 키스도 참고, 볼 뽀뽀도 참았는데. 타이밍을 노리고 있었는데!’
하르코엔이 결정적으로 차진혁 자신을 인형화하려는 작업에 착수하는 그 순간.
그 순간에 맞추어 실시간 영상으로 터뜨리려고 했는데 하이드가 중간에 끼어든 것이었다.
“어쩔 수 없군. 지금이라도 방송 켜야겠어.”
최선이 안 되면 차선을 선택하는 수밖에.
방송을 시작했다.
“분명 저는 이런 알림을 들었습니다.”
아까의 알림을 화면에 공유했다.
[통신상태가 원활하지 않습니다.]
[시스템과의 연결이 불안하여 녹화가 불가합니다.]
“그렇다면 제가 과연 어떻게 방송이 가능한 걸까요?”
* * *
여유로이 방송을 진행하는 차진혁을 보며 하이드는 깊은 내적 갈등에 휩싸였다.
‘지금이라도 찔러야 하나?’
기습해서 죽여야 하나?
아니면 조금 내버려 둬야 하나?
지금 죽이면 이 상황을 어떻게든 무마할 수 있을 것이기는 했다.
‘하지만…… 저놈이 어떻게 방송 불가 설정을 풀어냈는지를 알아야 해.’
하르코엔 부인은 본인의 전투력은 보잘것없지만 연금술의 대가였다.
연금술을 활용하여 각종 포션과 약품들을 제작하고, 그것으로 커다란 효과를 발휘하게 만드는데 일가견이 있었다.
방송 불가 설정 또한 그렇게 만든 것이었다.
말하자면, ‘대(對) 스트리머 전용 농축 포션’을 공간 곳곳에 발라 결계를 활성화시킨 것이었다.
그것은 김철수에게 미리 건네주었던 루미나 광물가루가 그 효과를 더욱 증폭시킬 것이었다.
이 정도면 김철수가 아무리 대단한 스트리머라고 할지라도 방송에 실패해야 했다.
‘그것만 알아내고 죽인다.’
차진혁이 답을 알려주었다.
“한세린은 무척 훌륭한 플레이어입니다. 늘 새로운 영감을 주고, 곁에서 많은 가르침을 주는 동료이죠.”
하이드는 차진혁의 말에 집중했다.
차진혁이 꽁꽁 숨겨놓았던 파훼비법.
그것 하나만 듣고서 곧바로 차진혁을 찔러야 했으니까.
‘그 비밀스러운 대책이 무엇이냐?’
차진혁이 놀라운 비밀을 공개했다.
“한세린이 가르쳐주었습니다. 군주가 그 정도도 못하면 군주냐고.”
* * *
하르코엔의 함정에 제 발로 걸어들어오기 전.
한세린이 말했다.
“스트리머에게 가장 치명적인 것이 뭐겠어? 보나 마나 방송을 못 하게 막는 거겠지. 더 심하면 녹화도 못 하게 하는 거고.”
그에 대한 대비책이 필요하다고 했다.
“군주는 플레이어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하고, 각 플레이어들의 능력을 극대화하여 최선의 결과를 이끌어내는 직업이잖아?”
논리는 장황했으나 결과적으로는 하나였다.
“방송 안 끊어지게 내가 도와줄 수 있어. 이건 군주 전용 스킬이라서 길잡이 능력보다는 훨씬 나을 거야.”
길잡이로서도 훌륭한 편이었지만, 한세린의 기준은 일반인의 기준이 아니었다.
차진혁이 되물었다.
“군주 전용 스킬 중에 스트리머를 돕는 스킬이 있다고?”
차진혁으로서도 처음 듣는 사실이었다.
군주들은 보통 전투계열 플레이어들의 능력을 극대화하는 편이었다.
스트리머의 능력을 향상시켜주는 군주는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다.
스트리머의 능력을 극대화하는 군주라니? 보통은 똥망 테크트리 아닌가?
……싶다가도, 똑똑한 한세린이니 일단 믿고 들어보기로 했다.
“당연하지. 그 정도도 못하면 군주라고 할 수 있겠어?”
“하긴.”
“아무튼 뭐 이런저런 제약이 있기는 해. 너랑 나랑 거리가 30미터 이상 떨어지면 안 되고, 한 번에 한 명의 스트리머밖에 도울 수 없고, 체력 소모도 좀 크긴 해.”
한세린은 그게 영 마음에 안 들었다.
“모름지기 군주라면 너랑 1000미터 이상 떨어져도 도울 수 있고, 한 번에 수십 명의 스트리머를 도울 수 있어야 하는데 말이야. 아직 많이 부족하긴 해도 일단은 널 도울 수 있을 거야. 아참, 그리고 하이드가 준 루미나 광물가루 있지? 그건 혹시 모르니까 내가 가지고 있을게.”
하르코엔과 하이드가 준비한 모든 것을, 한세린이 부쉈다.
* * *
하이드는 어이가 없었다.
어떤 아주 특별한 비결이 있는 줄 알았더니, 차진혁의 설명은 너무 간단했다.
“한세린이 가르쳐주었습니다. 군주가 그 정도도 못하면 군주냐고.”
장황하고 구체적인 설명은 없었다.
그냥 한세린이 도왔다가 끝이었다.
‘군주가 스트리머의 능력을 극대화해?’
이론상 분명히 가능한 일이기는 했다.
군주들의 버프 능력은 워낙 다양하니까.
그러나 스트리머에게 저런 정성을 쏟는 군주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도무지 가성비가 맞지 않으니까 말이다.
‘김철수의 방송에 하르코엔의 콜렉션들이 잡혔다.’
실제로, 왕유미의 방송에 수많은 시청자들이 몰리고 있는 중이었다.
방송 제목은 [하르코엔의 수집품].
-와, 저거 실화냐?
-저거 진짜 사람으로 만든 인형 같은데?
-우리 아르비스에서 저런 일이 벌어진다고?
-말도 안 되는 루머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이 4,200년대가 맞는 거냐?
어지간해서는 다른 서버의 방송을 보지 않은 아르비스 시민들도 다수 접속했다.
-와 완전히 미친X이네.
-저게 진짜였다니, 저게 아르비스의 명문 귀족이라니, 너무 부끄러워서 접시물에 코박고 싶다.
그런데 하르코엔을 옹호하는 시청자들이 대거 유입되었다.
상황을 중계하던 왕유미는 순간, ‘세력’이 개입했음을 직감했다.
-ㅉㅉ 주작방송 퀄리티 보소 ㅉㅉㅉ
-내 지인이 하르코엔 부인이랑 친한데, 저건 가짜임 ㅋㅋㅋ
-아무리 방송이 좋아도 그렇짘ㅋㅋㅋ 주작 미쳤누ㅋㅋㅋ
김철수의 방송이 조작방송이라는 여론이 힘을 얻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몰려들어서 그렇게 주장했다.
하르코엔 얼굴의 특징들을 짚어내서 저건 가짜라는 둥.
저 인형들은 정교하게 CG로 합성된 거라는 둥.
하이드의 표정이 딱 보니까 연기자 섭외한 거라는 둥.
-하긴, 근데 아무리 그래도 아르비스의 명문 귀족이 저런 짓을 하겠어?
-김철수가 미쳤다고 저런 조작방송을 함? 뒷감당은 어떻게 하려고?
-하르코엔은 자비롭기로 유명한 귀부인임. 일년 기부액이 어지간한 기업매출 뺨 때림.
여지껏 그렇게 많은 음해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르코엔이 일절 반응하지 않았다는 것을 그 증거로 들었다.
-착한 하르코엔만 불쌍하네 ㅠㅠㅠ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아는 건 서버 불변의 진리.
-이번 방송은 진짜 선 넘었지.
-김철수는 정식으로 사과하고 자숙해라 ㅉㅉ 어쩐지 너무 나대더라니 언젠가 큰 사고 칠 줄 알았다.
왕유미는 호오, 하고서 동글뱅이 안경을 고쳐 썼다.
“얘네들 가입일이 최근이죠?”
“응.”
모니터 앞에 앉은 왕유미 옆자리에는 막대사탕을 문 김민지가 앉아 있었다.
왕유미가 다시 확인차 말했다.
“1호님. 이건 1호님이 적극적으로 먼저 개입하고 가담하는 것이 아니라, 제가 1호님한테 물어보는 걸 단순히 수동적으로 대답해 주는 것에 불과한 거죠?”
“맞아!”
“가입일도 최근이고, 활동이력도 별로 없고, 말하자면 가계정들이고. 구린내가 많이 나네요.”
“어떻게 전부 다 악성코드 심어버릴까?”
“그러면 또 너무 적극적인 개입이 되잖아여. 그러면 안 된다면서영.”
왕유미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김민지의 정체까지는 모르겠지만, 왕유미는 김민지를 어떻게 활용해야 최대한의 효율을 낼 수 있는지 계산을 끝내놓은 상태였다.
김민지의 얼굴이 잔뜩 붉어져 있었다.
“아, 나 너무 열 받는데. 저것들 집에 싹 다 불질러 버리고 싶다아아아!”
“걱정 마세요.”
왕유미가 김민지의 두 손을 꼭 붙잡았다.
“정의는 언제나 승리하니까요.”
“……무슨 말이야?”
“초반에야 여론 조작단이 활개 칠 수 있겠죠. 그들은 돈으로 움직이는 애들이고, 말하자면 알바들이거든요? 알바들의 화력은 팬의 화력을 넘을 수 없어요. 돈으로는 진정한 사랑을 넘어설 수 없으니까요!”
왕유미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수많은 시청자들이 각종 증거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하르코엔 얼굴의 특징 요약 정리 -방송 속 하르코엔이 찐인 이유]
[방송에 등장한 인형들이 CG가 아닌 101가지 이유.]
[켄시아로 분석기법을 활용한 하이드의 표정 분석.]
-여론 조작 미쳤냐?ㅋㅋㅋㅋㅋㅋ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이렇게 티 나게 여론몰이를 해?
-저런 놈들은 꼭 가계정이더라. 야, 얼굴 까봐.
댓글부대는 잠자던 철수랜드의 코털을 뽑고 말았다.
우주 각지의 철수랜드가 왕유미의 채널로 몰려들고, 각종 커뮤니티에 엄청난 화력을 뿜어냈다.
김민지는 크게 흥분한 채 주먹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잘하고 있어!”
수많은 철수랜드들이 크게 활약했다.
몇몇 서버에 트래픽이 과도하게 몰려서 약간의 서비스 장애가 일어날 정도였다.
“여기 묻어서 나도 좀 개입해도 되겠다, 그렇지?”
“그러면 티 안 나지 않을까요?”
철수랜드들의 대장(?) 격, 1호 철수랜드 김민지도 비교적 적극적으로 나설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다.
* * *
하이드는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죽인다.’
아무리 증거를 조작한다고 해도, 김철수 정도 되는 스트리머가 실시간으로 이곳을 지나치게 많이 보여준다면 하르코엔도 화를 피하기 어려웠다.
김철수를 죽이고 어떻게든 사건을 덮어야 했다.
‘하르코엔. 너는 너무 여린 아이니까. 죄는 내가 지고 가마.’
수많은 생각들을 뒤로한 채, 그는 즐겨 사용하는 낫을 휘둘렀다.
사악-
예리한 날붙이가 무엇인가를 갈랐다.
푸악!
피가 솟구쳤다.
차진혁의 피였다.
‘분명 대비는 하고 있었는데.’
차진혁의 옆구리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상당히 끔찍한 광경이었지만 차진혁은 침착했다.
“피가 콸콸 쏟아져 나오…….”
그러나 방송을 이어가기 힘들었다.
시종장 하이드의 움직임이 너무 빨라서 제대로 대응할 수 없었다.
차진혁은 무척 자존심이 상했다.
급습을 허용한 게 문제가 아니라 방송을 제대로 진행할 수 없다는 게 문제였다.
‘이런 극한의 상황 속에서도 방송을 할 수 있어야 하는 건데!’
안타깝게도 그 정도 실력은 되지 않음을 자각했다.
절대결계를 제대로 사용할 틈을 주지 않고 하이드가 달려들었다.
‘공격 타이밍을 예측할 수가 없다.’
타이밍을 맞추어 절대결계를 사용해야 그 효과가 극대화되는데, 하이드의 공격 타이밍을 읽기 어려웠다.
박자와 리듬을 완전히 빼앗긴 상태. 주도권은 하이드의 것이었다.
하이드가 몸을 숙이는가 싶더니 갑자기 시야에서 사라졌다.
‘어디지?’
실력 차이가 너무 많이 났다.
과연 아르비스 명문가의 시종장다운 실력이었다.
‘어?’
아주 간만에, 목 뒷덜미를 찌릿하게 울리는 감각이 느껴졌다.
죽음이 매우 근접했을 때에만 느끼는 감각.
회귀 전에는 많이 느꼈었으나 회귀 후에는 그다지 경험하지 못했던 이 감각이 목덜미를 타고, 척추를 타고, 발가락 끝까지 전해졌다.
그의 직감이 강하게 경고하고 있었다.
‘죽는다.’
그러나 하이드는 지나치게 빨랐다.
‘뒤?’
절대결계를 펼쳐 목 뒤를 보호하려고 했으나,
‘앞이라고?’
어느새 하이드가 앞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하이드의 낫이 차진혁의 목을 노리고 쇄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