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는 그만 강해지고 싶다 291화
방송 및 녹화가 불가능하다는 알림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차진혁은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았다.
그저 하르코엔 쪽을 묵묵히 바라보기만 했다.
하르코엔은 치렁치렁한 붉은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굉장히 쨍한 색이어서 하얀 피부가 유독 도드라져 보였다.
깃털이 잔뜩 달린 부채로 얼굴을 반 정도 가린 채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부채 위로는 반짝반짝 빛나는 붉은 눈동자가 보였는데, 차진혁은 그 눈동자를 보자마자 설레고 말았다.
‘광인의 눈빛이다!’
요즘에는 광인들의 눈빛을 좀 피하고 싶어 하는 편이기는 했다.
아무래도 광기에 물들어갈 것 같았으니까.
그렇지만 이토록 순수한 광기를 보니 차진혁의 본능이 꿈틀거렸다.
‘저렇게 치열한 눈빛은 오랜만인데.’
무어라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의 갈망과 집착이 눈에 녹아들어 있었다.
눈빛이 밧줄이 되어 차진혁 자신을 꽁꽁 옭아매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머릿속에서는 저번과 마찬가지로 속삭임이 들려왔다.
[오, 나의 아름다운 주인이여, 그대의 발에 입맞춤을 올리게 하소서.]
[오, 나의 아름다운 주인이여, 그대의 발에 입맞춤을 올리게 하소서.]
수많은 사람들의 목소리가 수없이 속삭이는 것 같았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이 공간 자체가 아주 특별하게 설계된 공간인 것 같네.’
스트리머에게 끔찍한 공간임과 동시에, 세뇌가 훨씬 더 강하게 작용하는 공간인 것 같았다.
“오, 나의 아름다운 주인이여, 그대의 발에 입맞춤을 올리게 하소서.”
차진혁은 본능에 몸을 맡겼다.
몸이 움직이고 싶어 하는 대로 그대로 내버려 두자, 몸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와. 이거 진짜 신기한 느낌이네.’
마리오네트가 된 것 같았다.
힘을 주지 않는데, 팔과 다리가 저절로 움직여 하르코엔 앞으로 다가가 무릎을 꿇었다.
하르코엔의 붉은 구두가 보였는데, 사실 붉은 구두보다 저 가느다란 발목이 더 눈에 들어왔다.
‘지금 베면 쉽게 벨 수 있겠는데?’
음,
정확하게 베어버릴 수 있을 거 같은데.
너무 좋은 타이밍인데.
‘벨까?’
순간 차진혁은 흠칫했다.
‘개버릇 남 못 준다더니!’
이건 확실한 실수였다.
아무래도 세뇌에 당한(?) 상태여서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 같다.
‘부술까 말까를 고민했어야지, 김철수!’
옛 버릇이 남아서 벨까 말까를 고민하고 말았다.
이건 명백한 실수였다.
미리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서운해요. 하지만 이해할게요. 누구나 실수는 하는 법이니까.
‘미안하다.’
자신의 실수를 반성하는 것과는 별개로, 차진혁에게는 또 다른 고민거리가 있었다.
‘근데 좀…….’
무릎을 꿇고 하르코엔의 발에 입을 맞추는 건 좀 별로인 기분이었다.
이미 하르코엔 앞에 무릎 꿇고 엎드린 상태.
여기서 허리만 숙여서 입맞춤을 하면 되었다.
“나의 뮤즈, 나의 김철수, 기쁜 마음으로 내 발에 키스를 허락하노라.”
차진혁은 마음을 굳게 먹었다.
‘요즘 나는 치열함을 잊었다.’
오늘은 자꾸 실수투성이다.
벨까 말까를 고민하는 커다란 실수에 이어서, 저 발에 키스를 할까 말까를 고민하는 치명적인 실수까지 해버리다니.
‘이딴 걸로 고민하면 스트리머로서의 자격이 없는 거지!’
방송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버릴 수 있어야 한다.
그게 바로 모든 스트리머들의 기본이었다.
‘겨우 이 정도로 고민한다고?’
아무래도 자꾸 초심을 잃는 것 같았다.
그는 마음을 부여잡았다.
그런데 그때, 목소리가 들려왔다.
“물론 몸이 마음대로 말을 듣지는 않겠지만.”
“…….”
차진혁은 티 나지 않게 동작을 멈추었다.
‘와, 운이 좋았다.’
키스할까 말까를 고민하는 그 찰나, 하르코엔은 그걸 ‘마비’로 이해한 것 같았다.
만약 고민하지 않고 바로 키스했다면 마비에 당하지 않았다는 걸 들킬 뻔했다.
“…….”
차진혁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기로 했다.
마치 치명적인 마비효과에 당해버린 것처럼.
* * *
하르코엔의 함정에 제 발로 찾아가기 전, 차진혁은 르세핌과 간단한 만남을 가졌다.
정확히 말하자면 르세핌이 자고 있는 차진혁의 방에 몰래 숨어 들어왔다.
“간만에 실력 있는 암살자인가 했는데…… 저, 혹시 날 암살하려는 건 아니지?”
“도대체 왜 아쉬워하는 거야?”
“무슨 소리야? 이런 걸 아쉬워하는 사람이 세상천지에 어디 있겠어?”
“…….”
차진혁이 약간 아쉬워한 것과는 별개로, 르세핌은 한 가지를 선언했다.
“네가 나 말고 한세린을 선택했다는 건 존중할게. 하지만 한 가지는 알아둬. 내 서브 직업이 연금술사라는 걸. 연금술사로서의 도움이 필요하다면 나를 부르도록 해.”
“…….”
르세핌의 말을 들으며 차진혁은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두더지맨도 그렇고 한세린도 그렇고.’
처음에는 내가 안 미치니 다른 애들이 미쳐가나 보다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그게 아닌 것 같았다.
회귀 전과 시대가 좀 달라진 느낌이었다.
‘내가 유행에 못 따라가나?’
회귀 전의 상식에만 사로잡혀 있어서 새로운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건가?
트렌드에 뒤처지나?
‘나는…… 덜 치열한가?’
* * *
르세핌은 하이드가 준 가루를 살펴보더니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하이드가 너한테 이 가루를 줬다고? 이건 루미나 광물가루인데? 그것도 불순물이 전혀 섞이지 않은, 엄청 정제된 루미나 광물가루.”
“이걸 알아?”
“어. 엄청 희귀한 거거든.”
차진혁 또한 ‘그렇게나 희귀한 거라면 오히려 몰라야 하는 거 아닌가?’라는 지극히 상식적인 생각은 하지 못했다.
“게다가 이렇게까지 깨끗하게 정제된 건 용도가 정해져 있어.”
“무슨 용도인데?”
“레비나 광물가루랑 화학작용을 일으켜서 사람의 신경을 마비시켜.”
“독 같은 건가?”
“비슷한데 독은 아냐. 이건 연금술의 영역이고, 독저항보다는 정신저항의 영향을 더 많이 받아.”
르세핌은 레비나 광물가루와 루미나 광물가루에 대한 설명을 이어갔다.
이것의 분자식이 반응했을 때 어떤 화학작용이 일어나며, 이 화학작용이 인체의 신경계에 어떠한 영향을 끼치는지에 대해서 약 3분간 쉬지 않고 말했다.
“흥미로운 건 이것에 중독된다고 해도 당사자는 자신의 몸이 마비되는 것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는 거지.”
“그래?”
“어. 그래서 이 가루들에 당한 사람들을 보면 표정이 아주 평안해. 자신의 몸이 마비되었다는 걸 모르니까.”
차진혁은 솔직히 조금 감탄했다.
‘초보 수준이라더니?’
분명 자기를 일컬어 ‘초보 수준의 연금술사’라고 했는데 차진혁이 보는 르세핌은 절대 초보가 아니었다.
‘기준이 왜 저래?’
남들이 들으면 ‘네 기준이 더 이상해’라고 말했겠지만 이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 * *
운 좋게 하르코엔을 속이는 데(?) 성공한 차진혁은 무릎 꿇은 상태로 멈추었다.
‘제대로 당한 것처럼 표정은 평온하게.’
하르코엔이 무슨 짓을 벌일지는 모르겠지만 자꾸 심장이 두근거리는 통에 당혹스러웠다.
괜히 너무 설레는 티를 냈다가는 이게 연기라는 걸 들키고 말 테니까.
‘한세린도 잘하고 있겠지?’
‘레비나 광물가루 & 루미나 광물가루’에 대해서 알게 된 이후, 한세린은 군주로서 정교한 계획을 수립했다.
-“개중 가장 가능성이 높은 건 너를 직접 데려가려고 하는 거겠지. 보통의 경우는 직접 나타나지는 않겠지만 하르코엔은 보통 미친 게 아니거든. 적당히 미쳤다면 여기까지 상황을 끌고 오지 않았을 거야. 상황이 이렇게 됐다는 건, 하르코엔이 완전히 미친놈이라는 뜻이야.”
한세린은 과연 미친 사람답게 미친 사람의 관점을 잘 읽어냈다.
-“중간에 증거인멸하겠답시고 나를 죽이지만 않으면 좋겠다.”
보통 그러면 안 따라오는 게 맞지 않나?
……와 같은 보편타당한 대화는 없었다.
역시 좋은 플레이를 하려면 목숨을 거는 게 당연한 거지.
한세린, 너도 치열하구나, 라고 말하려고 했는데 한세린이 말했다.
-“하지만 김철수 직관을 놓칠 수는 없지.”
왠지 이유가 좀 이상하기는 했지만 어찌 됐든 한세린의 예측은 거의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죽이지 않으면 나도 함께 끌고 가려고 할 것 같아. 나 정도면 꽤 매력 있게 생기지 않았나?”
-“생긴 거랑 상관이 있냐?”
-“그 여자, 얼빠야.”
그 말을 제대로 납득한 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한세린의 말대로 되었다.
“저 여자애는 궤짝에 넣도록 해.”
복면을 쓴 부하들이 모습을 드러내 한세린을 결박한 뒤 커다란 궤짝에 한세린을 넣었다.
이후, 하르코엔이 손가락을 튕기자 유령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네 마리의 유령은 커다란 꽃가마를 들고 허공에 둥둥 떠 있었다.
“자, 나의 아름다운 뮤즈. 나와 영원을 약속하자.”
두 마리의 유령이 더 생성되는가 싶더니 차진혁의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차진혁은 혹시라도 연기가 들킬까 싶어 두근두근하며 유령들에게 몸을 맡겼다.
[끙차, 끙차.]
유령들이 이상한 소리를 내며 차진혁을 꽃가마 위에 앉혔다.
두 마리의 유령은 자신의 등을 하르코엔 부인에게 내주었다.
하르코엔은 유령들을 계단 삼아 천천히 올라 차진혁 옆에 앉았다.
그녀의 눈에는 차진혁을 향한 사랑이 가득했다.
“어찌 이리 아름다울꼬.”
차진혁은 차진혁 나름대로 감탄 중이었다.
‘꽃가마라니.’
이렇게 낭만 있는 탈 것이라니.
어떻게 보면 뇌룡보다 더 감성이 있는 것 같았다.
오늘도 새로운 걸 배운 하루였다.
* * *
‘이거 참 신기하네.’
유령이 움직이는 꽃가마는 희한한 방식으로 움직였다.
앞으로 가는가 싶더니 또 뒤로도 움직이고, 똑바로 움직이고 있는데 세상이 거꾸로 보이기도 했다.
분명 계단을 오르고 있는데 내려가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온통 뒤죽박죽이었다.
‘워프포탈 같은 것도 있고.’
사방천지가 결계였다.
이중, 삼중, 사중으로 보안이 되어 있는 공간으로 향하는 것 같았다.
꽤 한참을 움직이고 나서야 하르코엔의 비밀공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붉은 카펫이 깔려 있는 복도.
양쪽 벽면에 은은하게 타오르는 마법등.
그리고 그 밑에 일렬로 늘어선 나체의 인형들.
차진혁은 인형들을 보는 순간 느낄 수 있었다.
‘인형이 아니잖아?’
저건 인형이 아니라 인간이었다.
‘소문이 사실이었네.’
하르코엔이 사실 인형을 수집하는 게 아니라 사람을 수집한다고.
우스갯소리지만, 실종자들의 절반은 하르코엔의 저택에 숨겨져 있을 거라는 말이 있었는데 그 실체를 눈으로 확인하자 차진혁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하르코엔…….’
차진혁은 하마터면 하르코엔 쪽을 쳐다볼 뻔했다.
사람을 인형으로 만들어 수집한다니.
‘치열했구나. 너.’
약간 감탄했다.
이렇게까지 평온한 표정의 인형(?)을 만드는 것도 놀라운데, 여태까지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고 이럴 수 있었다고?
얼마나 치열하면 이게 가능하단 말인가.
솔직히 저 치열함에는 박수를 쳐줘야 하는 일이었다.
“나의 아름다운 철수. 철수만 있다면 저런 보잘것없는 것들은 불태워버려도 좋아. 철수의 방은 저쪽이야.”
하르코엔이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끙차, 끙차.]
유령 꽃가마가 계속 앞으로 움직였다.
방문에 이런저런 명패들이 붙어 있었다.
[집사]
[수인]
[나체]
[미인]
그리고 마침내 [보물] 룸 앞에 도착했다.
“나의 철수를 위해 준비한 방이야. 이 안에서, 철수를 진정하고 영원한 나의 것으로 만들게.”
하르코엔이 차진혁의 볼에 가볍게 키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