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는 그만 강해지고 싶다 290화
“이제 다시는 울지 않는 겁니다.”
하이드는 쪼그리고 앉은 하르코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하르코엔이 고개를 끄덕였다.
“또 날 떠나면 죽여버릴 거야. 알겠어?”
“알겠습니다.”
그제야 하르코엔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자리에 앉았다.
“그래서? 김철수를 어떻게 나한테 선물해 줄 건데?”
“레비나 광물 가루를 사용한 것 같던데, 맞습니까?”
“맞아. 역시 시종장은 나에 대해 잘 알고 있네.”
“네. 저보다 부인을 더 잘 아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요.”
“늘 그래왔지만 레비나 광물 가루를 사용한 것은 꽤 괜찮은 선택이었습니다만, 안타깝게도 김철수에게는 [제왕의 격] 혹은 [정신방벽] 같은 특성이 있는 듯합니다.”
“내가 만든 레비나 광물 가루는 그런 특성 따윈 얼마든지 돌파할 수 있어.”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하르코엔이 인상을 찡그렸다.
그녀의 기분이 급격히 나빠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보고 어쩌라고?”
“그래서 김철수를 만나고 왔습니다. 세뇌만으로는 부족하니, 거기에 확신을 더해주었습니다.”
“확신을 더해주다니?”
“함정이라는 것을 일부러 알려주었습니다. 세뇌에 당했다는 것도.”
“시종장! 미쳤어?”
“그렇기에 그자는 저를 믿게 되었습니다. 때로는 강한 충격 하나보다, 여러 개의 작은 균열이 댐을 무너뜨리는 법이니까요.”
“하지만…….”
“상관없습니다. 세뇌라는 사실을 알든 모르든, 김철수는 부인의 함정에 제 발로 찾아올 거니까요. 어차피 바뀌는 사실은 없습니다.”
하이드는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그자의 몸에 루돈 광물 가루가 있다고 알려주었습니다. 그리고 루미나 광물 가루를 선물해 주었죠. 김철수를 선물할 준비는 끝났습니다.”
불같이 화를 내던 하르코엔은 부채를 펼치고 호호 웃었다.
목소리에는 애교가 잔뜩 묻어났다.
“역시 아저씨는 내 마음을 잘 알아. 나는 아저씨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
“…….”
보고를 마친 하이드는 몸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그의 입가에는 가느다란 미소가 걸려 있었다.
-나는 아저씨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
그는 이 말을 듣기 위해서 사는 사람이었다.
무릎을 꿇고 뺨을 맞고 모욕적인 말을 들어도, 저 말 한 번이면 모든 것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걸음을 옮기던 하이드가 우뚝 멈춰 섰다.
“다만, 김철수가 이 모든 것을 간파하고 있을 가능성도 배제해서는 안 됩니다. 일부러 세뇌에 걸린 척 함정에 스스로 빠질 수도 있습니다.”
“설마 그러려고.”
“그자는 미쳤으니까요. 어쩌면 방송각이라며 설레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러면 어떡해야 하는데?”
“최악의 경우, 제가 김철수를 직접 상대할 것입니다만.”
하르코엔이 버럭! 소리쳤다.
“죽이는 건 안 돼!”
“……최대한 노력해 보겠습니다.”
“김철수 죽이면 시종장을 평생 원망하고 저주할 거야. 알겠어?”
* * *
차진혁은 감탄했다.
한세린이 아르비스와 지구 서버를 연결해서 서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가상의 공간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오, 서버 간 통신은 엄청 어려운 기술이라던데.”
“누가 그래?”
“응?”
누가 그랬다기보다는 회귀 전부터 알고 있는 보편타당한 상식이었다.
그런데 한세린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말했다.
“그냥 다들 하는 거야.”
(우주급) 최상위 랭커들은 다 한다는 말이었고, 그 말을 들은 차진혁은 그런가 보다 했다.
아무튼 이 가상의 공간에 모인 사람은, 왕유미, 강은우, 욜린, 차진혁, 한세린.
도합 다섯 명이었다.
한세린은 이 결과가 썩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아직 다섯 명밖에 못 불러. 유지시간도 30분밖에 안 되고.”
그녀는 약간 분한 듯 말을 이었다.
“아르비스의 랭커들은 20명도 넘게 불러서 1시간 넘게 유지한대.”
어쨌든 다섯 명이 원탁에 둘러앉았다.
차진혁이 이 회의를 소집한 이유는 두 가지였다.
“이번 콘텐츠의 연출 방향을 어떻게 하느냐가 첫 번째이긴 한데…… 그전에, 욜린. 내가 부탁한 건?”
“알아봤어요.”
두 번째는 바로 하르코엔에 대한, 보다 심도 있는 조사.
상대를 정확히 알아야 보다 매끄러운 진행이 가능할 테니까 말이다.
“아시다시피 뛰어난 연금술사고요. 대대로 부자였다고 해요. 그녀의 가문은 지금으로부터…… 해서…… 하고…… 근데 흥미로운 기록을 하나 찾아냈는데요. 초대가주의 이름이 카르빙턴이거든요? 근데 이게 헬렌제국 측 고대 발음으로 읽어내면 음…… 키헥튼 정도로 읽을 수 있어요. 이 키헥튼은 가르비누의 심복 중 한 명이었고요.”
욜린이 조사한 내용은 꽤 흥미로웠다.
“그러니까 하르코엔 부인의 가문이 시작된 때. 그리고 종로의 카트리나 명인의 가문이 시작된 때가 거의 엇비슷하게 겹치는 거죠. 둘 다 가르비누의 동료였고요. 그렇지만 이상하리만치 알려진 바는 적어요. 마치 누군가가 일부러 기록을 숨긴 것처럼요.”
역사덕후인 욜린은 신이 나서 떠들었다.
“카르빙턴이 뭘 했는지는 몰라요. 다른 기록들을 짜 맞추어 보면 꽤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것 같기는 한데, 역시 기록들이 많이 사라져 있어요. 아주 흥미롭죠?”
한편, 강은우는 욜린의 말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는 아르비스에 함께 가지 못한 것이 너무 안타까웠다.
‘거대세력에 홀로 맞서는 고독한 영웅의 일대기 같은 세계관을 구축할 수 있을 거 같은데……!’
가상의 공간, 홀로그램으로 보이는 차진혁의 모습을 보며 그는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홈페이지 마스터의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차진혁이 방송에 진심이듯, 그 또한 그의 직업에 진심이었다.
“저, 혹시 저도 아르비스로 넘어갈 수 있을까요?”
욜린이 대신 대답했다.
“어려울걸요? 사장님이 데려갈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밖에 없고, 이미 한세린 양이 함께 갔잖아요? 가려면 절차가 많이 복잡한데…….”
“마시멜로급 추천장이 있으면요?”
“그것도 너무 남용하긴 힘들어요. 마시멜로 님이 저번에 사장님 초대했…….”
“아니, 마시멜로 말고요. 마시멜로 급이요.”
“뭐…… 사람에 따라 다르긴 할 텐데, 가능할 수도 있겠죠? 근데 그런 사람이 은우 씨를 초대한다고요? 인맥이 있어요?”
강은우는 씨익 웃었다.
“아뇨. 이제부터 알아보려고요.”
“그게 그렇게 쉽지 않을 거예요. 아르비스 랭커들은 콧대가 엄청 높거든요.”
욜린은 강은우에게 꽤 호감이 있었고, 강은우가 상처받을 것을 걱정했다.
“너무 무모하게 굴지는 말아요. 상처받을 거예요.”
* * *
‘이제부터 알아보려고요’라고 대답하기는 했지만 강은우는 나름 자신 있었다.
최근 자신에게 접촉해 온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깊은 새벽, 잠을 자고 있던 강은우의 집에 누군가가 잠입했다.
“당신이 홈페이지 마스터, 강은우?”
“그렇습니다만.”
놀랄 법도 하건만, 강은우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이런 일이 너무 잦았기 때문이었다.
특히 철수랜드 2기를 뽑고 난 이후부터는, 2~3일에 한 번씩 이런 일이 벌어졌다.
“놀라지 않는군.”
“특별할 일은 아니니까요. 왜요? 철수 님 미공개 사진들을 구매하려고 그래요?”
“……내가 누군지도 묻지 않나?”
“그야 어차피 철수랜드 아니겠어요?”
철수랜드라는 기치 아래, 모두는 똑같았다.
상대가 누구든 별로 상관없다는 입장이었다.
“내가 기척을 아예 못 느꼈을 정도니까…… 이 정도면 철수랜드 공식 2기 멤버 중 한 명이겠네요. 아이디는 뭐예요?”
그 말에 뮈엔느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녀는 김철수를 너무 늦게 알았다.
조금만 더 빨리 알았더라면 공식 2기 멤버가 되었을 텐데.
그 억울함 때문에, ‘홈페이지 마스터는 원래 기척을 못 느끼는 계열의 직업 아닌가?’라는 지극히 상식적인 의문을 가지지 못했다.
그런데 강은우의 눈이 가늘어졌다.
“……설마.”
“…….”
“공식 2기 멤버도 아닌데, 공식 1기, 무려 2번인 우리 집에 몰래 잠입한 건가요?”
“……당신이 2번인가?”
“당연하죠. 1기 2번이고요. 철수 님과 직접적으로 가장 많이 소통하고 있어요.”
“…….”
“하아. 공식 2기도 아닌데 우리 집에 몰래 잠입하는 건 상도덕이 아닌데.”
“…….”
우주랭커 뮈엔느는 왠지 모를 압박감을 느꼈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크게 잘못한 것만 같았다.
“무자격 씨. 다음부터 이런 짓은 그만두는 게 좋아요. 다른 철수랜드들이 용서하지 않을 테니까. 돌아가요. 공식멤버 아니면 미공개 사진이나 영상들은 안 팔아요. 이건 철수랜드들끼리 다 합의된 거고요.”
“잠깐.”
뮈엔느는 다급해졌다.
“내 이름은 뮈엔느. 헬렌 제국, 대도시 렌마의 치안을 담당하는 경비대장이다.”
뮈엔느라는 이름이 가지는 무게는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아르비스에서 가장 강한 사람이 누구냐를 꼽을 때, 꼭 열 손가락 안에는 들어가는 이름이니까.
“네, 그래봤자 무자격 씨죠.”
“나, 나는 뮈엔느……!”
“네, 무자격.”
“최근 김철수가 머렌에 들어왔다. 나는 머렌의 치안 담당자고.”
그제야 강은우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그럼 철수 님 편의를 많이 봐줄 수 있겠네요?”
“무, 물론이다. 나는 철수 님의 편의를 많이 봐줄 수 있어.”
어느새 호칭도 ‘김철수’에서 ‘철수 님’으로 바뀌었다.
머렌의 행정담당자들이 들으면 뒷목을 잡을 얘기가 오고 갔다.
“나한테 생각보다 실권이 꽤 있는 편이다.”
결국 강은우가 책상 쪽으로 걸어갔다.
“그렇다면야…….”
인화한 사진 몇 장을 꺼냈다.
“정성 들여 찍은 S컷 사진들이거든요. 외부 유출하지 말고 혼자만 보세요.”
“약속하겠다!”
뮈엔느의 시선은 사진을 쥔 강은우의 손을 따라다녔다.
왼쪽으로 움직이면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움직이면 오른쪽으로.
마치 간식을 간절히 바라는 강아지 같은 모양새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 더. 철수 님이 일부러 함정에 빠질 예정이거든요?”
“함정?”
“네. 주소는 여기 있어요. 아마 별일은 없을 건데, 혹시 모르니까 알고 계시라고요.”
뮈엔느는 고개를 빠르게 위아래를 끄덕였고, 그제야 강은우는 사진들을 건네주었다.
뮈엔느는 아주 소중하고 경건하게 사진을 받아든 뒤, 와이번을 타고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그녀는 오늘 세상을 얻었다.
* * *
차진혁은 꼬불꼬불 이어진 골목길을 따라 걸었다.
그리 깨끗한 거리는 아니었다.
‘아르비스 서버에도 이런 거리가 있구나.’
말하자면 이곳은 빈민가였다.
곳곳에 오물이 아무렇게나 버려져 있었고, 술에 취한 노숙인들이 코를 골며 잠들어 있었다.
외부인을 경계하는 건지, 차진혁을 본 사람들은 창문을 닫기도 했다.
렌마, 37번 거리, 골목 귀퉁이, 하얀 벽돌집.
한세린은 과연 전직(?) 길잡이답게 굉장히 쉽게 길을 찾아 안내해 주었다.
“여기네.”
정말로 하얀 벽돌로 만들어진 3층 집이 있었다.
굉장히 낡은 집이었는데, 빗물이 흘러내린 자국들이 선명했다.
“그럼 들어간다?”
“그러자!”
차진혁은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저 표정은…… 던전 진입 전의 내 표정인데?’
아무래도 한세린이 계속 미쳐가는 기분이 들었다.
삐걱-
하고 나무문을 열고 들어갔다.
‘어라?’
하얀 벽돌집 안에 들어선 차진혁은 깜짝 놀랐다.
[통신상태가 원활하지 않습니다.]
[시스템과의 연결이 불안하여 녹화가 불가합니다.]
겨우 한두 발자국 차이인데.
스트리머에게는 무척 끔찍한 공간으로 변해 있었다.
2층 계단에서 누군가 내려오고 있었다.
“환영해요, 내 사랑스러운 뮤즈. 내 아름다운 김철수.”
하르코엔 부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