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는 그만 강해지고 싶다 288화
어둠 속에 반짝반짝 빛을 내고 있는 사람.
딱 한 사람만 보였다.
‘이게 가능하구나.’
이래서 스타인가 싶었다.
저 많은 인파들 중 딱 한 명이 크게 보였다.
뮈엔느는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 와이번의 고삐를 잡아당겼다.
“내려가자.”
하강하면서 보니 깨달을 수 있었다.
‘여기도 지나치게 혼란스러워!’
아무래도 여기 남아서 이곳의 질서도 바로잡아야 할 것 같았다.
물론 남문 쪽 상황이 훨씬 심각하기는 했지만 아랑곳하지 않기로 했다.
와이번 지상으로부터 약 3미터쯤 되는 높이에 떴다.
와이번을 다루는 와이번 기사들 중에서도 최상위 실력을 가진 라이더만 가능하다는 정지비행이었다.
“다들 동작 그만!”
그녀의 목소리가 대광장 전체에 울려 퍼졌다.
뮈엔느를 알아본 사람들이 눈을 크게 떴다.
“뮈, 뮈엔느다!”
“뮈엔느?”
헬렌 제국 7대 성기사 중 한 명.
‘빛나는 창’이라는 이명을 지닌 최상위 랭커의 등장에 사람들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지금부터 상황은 내가 통제한다.”
그녀는 빛나는 창을 뽑아 들고서 천천히 땅에 내려섰다.
과연 헬렌 제국 7대 성기사다운 위용이었다.
기다란 붉은 머리카락을 질끈 동여매고 빛나는 은색 갑주를 입은 그녀는 쏟아지는 관심에 꽤 무덤덤했다.
그녀는 어딜 가나 주목의 대상이었다.
“나의 이름은 뮈…….”
뮈엔느는 낯선 느낌을 받았다.
‘어?’
모두가 자신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게 보통이었다.
실제로 처음에는 다들 집중했었다.
“7대 성기사?”
“여기 경비대장이래.”
“7대 성기사가 왜 겨우 경비대장이야?”
“예전에 상관을 폭행한 죄로 좌천 됐나 봐.”
“아하. 그래서? 철수 님 어디 가셨지?”
그러나 뮈엔느에 대한 관심은 금방 꺼졌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의 대다수는 철수랜드들.
김철수가 앞에 있는데 헬렌 제국 7대 성기사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7대 성기사가 아니라 교황이나 황제가 나타나도 상황은 똑같았을 것이었다.
교황이 앞에 있어도 ‘그 아저씨가 있는데 어쩌라고? 그 아저씨가 철수 님보다 잘생겼어?’ 하고 되물을 사람들이 태반인 것이다.
“저쪽! 저쪽으로 움직이고 계셔!”
“비켜! 비켜!”
“이 아줌마가 왜 밀어!”
밀려드는 철수랜드들로 인해 대광장은 그야말로 혼돈의 도가니.
사실 김철수로서도 약간 당황스럽기는 했다.
‘기분이 나쁜 건 아닌데…….’
아무래도 대책이 조금 필요할 거 같기는 했다.
‘우리 철수랜드들 다치면 안 되지.’
김철수가 목소리를 살짝 높여 말했다.
“다들 진정…….”
‘진정하세요’보다는 ‘진정해’가 효과가 좋겠지?
보통 반말하면 기분 나빠하는데, 철수랜드들은 반말하면 더 좋아한다는 사실은 이미 경험으로 체득한 상태였다.
“진정해.”
한 마디를 했을 뿐인데 여기저기서 꺅꺅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나 죽는다며 실신하는 사람들까지 있을 정도였다.
“너희 이러다 다친다. 질서 좀 지키고. 서로 밀지 말고.”
그러자 놀랍게도 질서가 잡히기 시작했다.
서로를 밀지 않고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혼란이 잦아든 것이다.
경비대장 뮈엔느는 황당한 표정으로 차진혁 쪽을 바라보았다.
다른 사람들보다 워낙 키가 큰 탓에 차진혁의 얼굴이 잘 보였다.
그녀는 정말로 황당했다.
“……저렇게 잘생겨도 되는 거야?”
차진혁이 단 몇 마디로 질서를 잡은 것보다, 저 비현실적인 외모가 더 황당한 뮈엔느였다.
* * *
뮈엔느가 인파를 헤치고 차진혁 앞에 섰다.
‘아, 떨려.’
사람을 앞에 두고 이렇게 떨린 적이 없었다.
매지크 제국의 대마도사들과 제국의 명예를 걸고 모의 대련을 치를 때보다 훨씬 더 떨렸다.
그렇지만 이 떨림을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았다.
“렌마의 경비대장, 뮈엔느다.”
“아. 그래.”
뮈엔느의 뒤를 따라온 부관 토마스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놈! 누님이 어떤 분이신데 반말……!”
그러나 뮈엔느가 말을 잘랐다.
“각성명, 주식회사 상남자와 대련을 치른다지?”
“그래.”
“이 자식아! 우리 누님께 반…….”
토마스는 그 자리에서 기절했다.
빠각! 소리와 함께.
그 찰진 격타음을 듣게 된 차진혁은 약간 설레기 시작했다.
‘와, 방금 제대로 못 봤는데?’
창대를 휘두른 것 같았는데 움직임을 정확히 읽어내지 못했다.
기다란 무기는 휘두르기 불리하다.
그런데 뮈엔느에게 그런 불리함 같은 건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았다.
‘엄청난 실력자다!’
얼마나 강한 걸까?
한번 싸워보고 싶은데.
그리고 새삼스레 자신의 위치가 많이 달라졌음을 느꼈다.
‘검왕 시절에도 이 정도 랭커는 만나본 적이 없어.’
한국에서나 검왕이었지, 우주에서도 검왕은 아니었으니까.
그에 반해 뮈엔느는 우주급 랭커였다.
회귀 전에는 감히 만나보기도 어려운 수준의 랭커.
‘그만큼 내가 성장했다는 거겠지.’
회귀 전에도 검이 아니라 망치를 들었다면 어땠을까?
왜 그때는 검이 내 재능이라고 확신했었던 거지?
약간 아쉬운 마음이 들 정도였다.
“큰 혼란이 예상되므로 내가 중재를 하겠다. 공식적인 결투에는 중재자가 있어야 하니까.”
공식 결투에는 중재자가 붙는다.
아르비스 서버에서는 당연한 룰이었다.
뮈엔느 정도의 랭커가 중재자이자 보증자로 서준다는 것은 결투 당사자들에게도 영광이었다.
결투자들이 제발 중재자로 서달라며 머리를 조아리는 게 보통이건만, 오늘은 뮈엔느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결투 중재를 하면 철수 님을 좀 더 앞에서 열심히 관찰할 수 있겠지?’
소녀가 된 것 같았다.
그녀로서도 왜 이런 기분을 느끼고 있는 건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제발 거부하지 말아주세요!’
하지만 이런 마음을 티 낼 수는 없었다.
마음은 조급했지만 겉으로는 여유로이 말했다.
“최근 알아보니 너는 아르비스의 명예 시민 자격을 획득했다더군. 나는 아르비스의 시민을 보호해야 할 의무를 지니고 있다. 혹시나 위험한 상황이 벌어진다면 내가 너를 지켜주마.”
좋아, 잘했어 뮈엔느!
철수 님한테 멋진 모습을 보여주자. 목소리는 안 떨렸겠지? 나 꽤 멋있었지?
“…….”
차진혁은 딱히 대답하지 않은 채 뮈엔느를 빤히 바라보았다.
뮈엔느는 그 눈빛을 담담히 받아내기가 어려웠다.
‘왜 눈을 똑바로 못 보는 거야, 뮈엔느!’
스스로의 마음을 다잡고 차진혁과 눈을 마주치려고 했으나 그럴 수 없었다.
뮈엔느가 은근슬쩍 차진혁의 시선을 피했다.
“내가 약해 보인다는 거지?”
“…….”
뮈엔느는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잘은 모르겠지만 자신이 크게 실수한 것 같았다.
* * *
헬렌 제국의 대도시 렌마.
외측 남문.
“성문이 부서진다!”
“대장님께서 직접 오신다고 했다!”
“저 언데드 같은 광인들을 막아!”
병사들은 남문을 사수하기 위해 무진장 애를 썼다.
“물대포라도 쏴야 할 거 같습니다!”
“대장님께서 오신다고 했어! 힘들어도 버텨라!”
헬렌 제국의 7대 성기사가 오기만 한다면 분명 상황은 자연스레 종료될 것이다.
언데드처럼 꾸역꾸역 밀려드는 저 광인들 중에는 분명 아르비스의 시민들도 있을 것이고, 시민들을 향해 물대포를 발포했다가는 무슨 욕을 먹을지 모른다.
일단은 최대한 평화적으로 방패만 들고서 막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뮈엔느 대장님이 오신다. 모두 이를 악물고 버텨!”
“너무 늦으십니다! 와이번을 타고 오시는데 이렇게 오래 걸릴 일입니까?”
남문의 수비대장이 인상을 찡그렸다.
“뮈엔느 경은 스스로 말씀하신 것을 늘 지키는 분이시다. 직접 오신다고 하셨으면 오실 분이시다. 7대 성기사의 명예를 뭘로 아는 거냐! 부모님이 소천하셔도 약속을 지키실 분이다. 조금만 더 버텨라!”
안타깝게도 뮈엔느는 철수랜드로 다시 태어났다.
신념을 버리고서.
* * *
차진혁은 감회가 꽤 새로웠다.
‘검투장 같은 곳은 오랜만이네.’
검왕 시절에는 많이 경험했었는데.
그때의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주상남자는 차진혁을 보며 피식 웃었다.
“이런 경험은 처음이겠지.”
환경과 장소에 따라 능력이 달라지기 마련이다.
주상남자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김철수는 이런 대규모 격투 시설을 경험해 본 적이 없었다.
‘수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몰려든 이 상황에서 네놈이 과연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을까?’
경험이 없는 자들이 이곳에서 제 실력을 발휘할 수 있을 리 없다.
주상남자는 자신의 승리를 확신했다.
‘내 레벨은 300을 돌파했다.’
하르코엔 부인이 내준 비약 덕분이었다.
레벨급 차가 이렇게 많이 나면 실력 차는 무의미해지기 마련이었다.
“하늘 위에 또 다른 하늘이 있다는 것을 이 자리를 빌려 알려주…….”
……멋있게 경고했는데 경고만 멋있는 결과를 낳았다.
빠각!
미리가 주상남자의 머리를 강타했다.
‘컥!’
이상한 일이었다.
레벨이 300이 넘었는데, 차진혁의 움직임을 제대로 읽어내기 어려웠다.
그의 공격은 절대 결계에 번번이 막혔다.
[신비, ‘중계자의 천적’을 사]
신비를 제대로 사용할 틈도 주지 않았다.
차진혁이 곧바로 접근하여 미리를 휘둘렀기 때문이었다.
[신비 사용이 취소되었습니다.]
정신이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그저 손발을 어지러이 움직여 차진혁의 공격을 막아내거나 피하는 게 전부였다.
‘왜, 왜 이렇게 빠르지?’
편집으로도 어떻게 버무릴 수 없을 만큼 현격한 실력 차이가 존재했다.
‘말도…… 안 돼.’
결국 주상남자는 바닥에 쓰러졌다.
결투가 시작된 지 불과 4분 만의 일이었다.
그야말로 압도.
그는 마치 거대한 벽과 싸운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정상급 전투계열 플레이어와 싸운 것 같았다.
이를테면, 저기 중재자를 자처한 뮈엔느 같은.
“힘을 숨겼구나.”
차진혁이 쓰러진 주상남자 앞에 섰다.
차라리 이렇게 되자 마음이 편해졌다.
하르코엔의 비약으로 레벨 300을 넘겼는데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실력 차이가 난다?
‘김철수와 내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실력의 벽이 존재하는 것이다.’
거대한 벽을 느끼고 나니 홀가분해진 기분이었다.
그는 딱히 저항할 의지가 생기지 않았다.
“죽여라.”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지구에서부터 나를 추적해 오지 않았나? 추적 전문가들을 고용해서 말이야.”
“나는 군주 한 명을 고용했을 뿐이다.”
“……그래. 군주 한 명.”
주상남자는 차진혁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래. 방송의 재미와 극적인 연출을 위해 그렇게 공개는 했겠지.’
하지만 카메라가 꺼진 이후에는 아마도 르세핌 같은 상위 랭커를 고용했을 것이 분명했다.
‘이 순간에도 컨셉을 유지하는 걸 보니, 너는 진정한 프로였구나. 어쩌면 김철수에게 죽는 것이 그리 부끄러운 일은 아닐지도 모르겠군.’
그는 담담히 죽음을 받아들이려고 했다.
그의 방송에 참여한 실시간 시청자 숫자는 역대급. 이거면 되었다.
그는 실시간 방송 제목을 [최후]로 설정했다.
이 정도면 꽤 멋진 마지막이 되겠지.
“이제 죽여라.”
“죽이라고?”
차진혁은 기분 나쁜 듯 인상을 찡그렸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냐?”
“……진심이다.”
주상남자는 약간 의아했다.
왜 기분 나빠하는 건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일어나라, 주식회사 상남자.”
주상남자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일으켜서 더 패려고? 정말 잔인한 놈이군.
아마 이번 영상에서는 원초적인 재미를 추구할 생각인 것 같았다.
“그냥 죽여다오. 마지막만큼은…… 명예롭고 싶다.”
차진혁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너는 지금 네 목숨을 핑계로, 가장 중요한 것을 외면하고 있다.”
그의 표정은 진지함을 넘어서 경건하기까지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