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는 그만 강해지고 싶다 281화
키하엘이 절규하던 그때.
마침 세르찬도 차진혁의 집을 찾아왔다.
언제 정리했는지 A4용지 수십 장이 되는 보고서를 가지고 왔다.
“오, 키하엘! 같은 부서에서 또 일할 수 있게 되어 반갑군.”
그의 거대한 이두박근이 꿈틀거렸다.
키하엘과 다시 일할 수 있어서 꽤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같은 내용으로 미셸 이사장님께 보고 올리고 오는 길입니다. 김철수 님도 아셔야 할 것 같아서 가져와 봤습니다.”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척척.
이렇게 보고서를 작성해 와서 프레젠테이션을 하는 모습에 차진혁은 약간 감동받았다.
“아무래도 지구 서버 플레이어들의 레벨이 지나치게 높아졌습니다. 관리자들의 예상을 훨씬 상회했죠. 말하자면 질이 너무 좋아졌습니다.”
시스템이 용인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다고 했다.
“그렇다면 가장 간단한 답은 하나죠. 질이 너무 좋아졌으니 양이라도 줄이자.”
세르찬은 기대 가득한 눈으로 키하엘 쪽을 바라보았다.
키하엘은 워라밸을 추구하고, 월급 이상의 일을 하는 것을 무척 싫어하는 편이었지만, 그와는 별개로 똑똑하고 유능한 편이기는 했다.
“왜 자꾸 날 봐요?”
“이럴 경우, 시스템이 택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 뭐가 있지?”
“……모릅니다.”
세르찬이 찡긋 윙크했다.
“에이, 알면서.”
이후 약간의 침묵이 흐르기 시작했고 그 침묵을 견디지 못한 키하엘이 결국 입을 열었다.
이미 답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시간을 조금 달라고 했다.
“……3시간 내로 조사해서 정확히 보고 올리겠…… 습니다.”
“역시 키하엘이라면 그럴 줄 알았지.”
으득,
키하엘은 이를 갈았고, 차진혁은 두 사람의 팀웍에 굉장히 만족스러웠다.
“3시간 후에 보자.”
그리고 3시간이 흘렀다.
* * *
키하엘은 그간의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세르찬에게 걸리면, 그냥 일을 얼른 처리하는 것이 그나마 빨리 퇴근할 수 있는 길이라는 걸.
그것이 키하엘이 터득한 생존방식(?)이었다.
그래서 그는 3시간 동안 최선을 다해서 자료들을 정리했고 꽤 그럴듯한 보고를 올릴 수 있었다.
“이런 경우 보통은 밸런스 조절을 대량학살을 인위적으로 일으키는 편입니다.”
그 방법은 크게 보면 두 가지였다.
“첫째. 마물이나 대규모 시나리오를 통한 직접적인 학살. 둘째. 질병 등을 활용한 간접적인 학살. 시스템의 경우 보통은 전자를 선호하긴 합니다만.”
그래야 볼거리가 풍성해지고 박진감이 넘치니까.
“다만, 비교적 최근에 개미여왕이 등장했었죠.”
사실은 훨씬 많은 사람이 죽었어야 했는데 차진혁의 지나친(?) 활약으로 피해가 너무 적었었다.
“개미여왕만 해도 사실 지구 서버의 기준을 많이 초과했었던 거라서요.”
세르찬은 키하엘의 보고가 무척 마음에 드는 듯 흡족한 얼굴로 추가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그런 기준 같은 건 얼마든지 무시하고 강행할 수 있잖아. 히드라 같은 마물들을 대거 투입시킨다거나.”
“물론 평소라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좀 어렵습니다.”
“어째서지?”
“이번 수호수 사건으로 우주의 이목이 지구에 쏠려 있는 상황이라서요. 시스템도 명분없이 대량학살을 벌이기는 어려울 겁니다.”
세르찬은 남몰래 크으, 하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
잘 키운 후배 하나 열 후배 안 부러웠다.
“그러면 결국 후자의 방법으로 가겠군?”
“예. 아마도 질병을 이용할 확률이 가장 높겠습니다.”
차진혁도 꽤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키하엘의 얘기를 들었다.
역시 고용하길 잘한 것 같았다.
약은 약사에게, 시스템 관리는 시스템 관리자에게.
“그러면 대략적인 방향은 세 가지로 좁혀집니다.”
1. 전파율이 높으나 치명률이 낮은 질병.
2. 전파율은 낮으나 치명률이 높은 질병.
3. 전파율도 높고 치명률도 높은 질병.
차진혁이 물었다.
“그럼 시스템 입장에서는 전파율도 높고 치명률이 높은 질병이 제일 편한 거 아닌가?”
“그런 경우에는 보통 치료약이 있기 마련이다.”
“아! 그럼 지구에는 뭘 쓸까?”
“세 개를 섞어 쓰겠지.”
……아!
차진혁은 순간, 순진했던 자신을 자책할 수밖에 없었다.
왜 세 방법 중 하나를 골라 쓸 거라고 생각했을까.
세 가지 방법을 다 쓰는 게 효율이 제일 좋은 데 말이다.
“현재 지구의 수준을 고려했을 때, 시스템이 사용할 수 있는 바이러스들은 몇 가지로 한정된다. 그것들은…….”
* * *
왕유미는 동글뱅이 안경을 고쳐 썼다.
‘일단은 질병이 퍼지게 내버려 두는 게 나을까…… 아니면 예방에 힘쓰는 게 나을까…….’
사람을 살리는 측면에서만 보면 예방에 힘쓰는 것이 당연히 좋았다.
‘근데 예방하면…… 엘튜브 각이 안 설 거 같은데?’
시스템이 인위적으로 만든 질병 또한 플레이의 일환.
플레이를 하다가 사람이 많이 죽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개인이 먼저 나서서 예방을 한다는 것도 사실 웃기는 일이었다.
‘아! 아니다!’
그녀는 이내 생각을 고쳐먹었다.
“예방에 힘쓰죠!”
미리 최대한 대비해서 피해를 최소화한다.
그것은 어찌 보면 극적인 효과를 보여주기에는 좀 약할 수도 있었다.
“시간이 많이 흘러서 사실이 밝혀지면 우리한테 엄청 좋은 패로 작용할 거예여!”
남몰래 베풀었던 선행이 우연한 기회로 밝혀지게 되는 것은 드라마틱한 효과를 낳는다.
“말하자면 씨앗을 미리 뿌려놓는 거죠. 멀리 보면 훨씬 더 좋은 방법이 될 것 같아여! 나중에 빵! 하고 극적으로 터뜨리는 건 저한테 맡겨주세여! 드라마 한 편 써볼게여!”
왕유미의 말을 듣고 차진혁은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사실 그 또한 고민하던 중이었다.
일단 질병이 퍼지게 놔둔 다음 힐러들이 활약하게 하는 편이 엘튜브 각에는 더 좋다고 생각했었으니까.
사람들이 더 많이 죽는 거야 플레이를 하다 보면 어쩔 수 없는 거고.
‘나는 분명히 그렇게 생각했어.’
더 많은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예방에 힘쓴다?
그건 아주 바보 같은 일이었다.
아름다운 평화와 공존을 외치던 옛 시대는 이미 끝났다.
스스로를 지키지 못하는 자가 죽는 건 너무 당연한 시대가 되었다.
차진혁은 분명 그렇게 생각했는데, 이상하게 마음이 약간 찝찝했었다.
‘예방하는 쪽이 더 좋은 엘튜브각이라면 그렇게 하는 것이 맞겠지!’
더 많은 사람들을 구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그렇게 해야 하는 거 아닐까?
그냥 내가 방송만 생각하는 게 맞을까?
……와 같은 구체적인 생각까지는 하지 못했고 그냥 어렴풋이 찝찝하기만 했다.
그에게도 드디어 최소한의 인간성이 자라나기 시작한 것이었다.
* * *
에건 폴이 차진혁에게 처음 느꼈던 감정은 불신이었다.
‘나보다 더 뛰어난 스트리머가 있다고?’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다.
차진혁과 만난 이후로 그가 느꼈던 감정은 놀라움과 충격이었다.
‘저렇게 플레이를 한다고?’
함께 플레이했을 때 경악했고 이내 그것은 그에게 큰 자극이 되었다.
‘나도 김철수처럼 되고 싶다.’
이후 그는 차진혁에게 막연한 동경을 품게 되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그 동경은 이내 좌절이 되었다.
‘나는 김철수처럼은 될 수 없다.’
때문에 약간의 슬럼프가 찾아오기도 했다.
김철수처럼은 될 수 없다는 사실이 거대한 상실감이 되어버렸으니까.
그 시기가 지나고 나니 이제는 순응의 단계에 이르렀다.
‘그래. 김철수는 김철수지.’
이제는 마음의 평화를 되찾은 상태.
김철수는 애초에 비교대상이 아니었다.
완전히 다른 세상에 사는, 종이 다른 인간이었다.
그래서 마음이 좀 편해진 상태였는데 오늘 또 놀라고 말았다.
‘말하자면 대규모 업데이트가 있을 예정이라는 거잖아?’
지구 플레이어들의 질이 너무 좋아졌으니 양이라도 줄이겠다라.
그런 업데이트가 있을 예정이라니.
‘그러니까…… 그 업데이트를 미리 예측해서 준비한다고?’
예전에 소문에 들은 적이 있기는 했다.
한국 플레이어들은 개발자도 모르는 걸 알아내서 개발자를 괴롭힌다고.
그와 비슷한 맥락인 것 같았다.
아직 이루어지지도 않은 업데이트를 미리 대비해서 플레이를 하겠다니.
‘이제는…….’
불신. 놀람. 동경. 좌절. 순응.
그 다음 찾아온 감정은 오히려 ‘안도’였다.
‘지구에 김철수가 있어서 다행이다.’
그는 미국에 영향력이 아주 큰 플레이어였고, 그 또한 미리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이봐, 김철수. 할 말이 있다.”
“뭔데?”
에건 폴의 표정은 평소보다 훨씬 진지했다.
그는 차진혁 앞에 서서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묵직한 어조로 약속했다.
“말 잘 들으마.”
* * *
K-군단의 힐러들을 대표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자유의 성녀 차진솔.
그녀를 필두로 하여 힐러들과 결계술사들이 합심하여 안전지대를 만들어갔다.
전직 관리자들이 전해준 정보를 토대로, 질병들이 침투할 수 없는 안전지대들이었다.
뿐만 아니라 혹시 병에 걸리더라도 최대한 빨리 치료할 수 있도록 간이 시설들을 갖추기 시작했다.
꽤 조직적으로 움직였으나 크게 이슈화되지는 않았다.
병의 발발이 아직 확정된 것도 아니었고, 지나친 혼란을 야기할 필요는 없었으니까.
그 모습을 지켜본 에건 폴도 자극을 받았다.
그 또한 평소 친분이 있던 랭커들과 함께 곧 있을 위기를 대비했다.
‘한국만큼 척척 움직이지는 못하는군.’
한국은 K군단이라는 단일 세력이 나라 전체를 꽉 쥐고 있지만 미국은 그렇지 않았다.
기본적인 영토 자체도 한국보다 훨씬 커서 아무래도 한국처럼 조직적으로 움직이기는 쉽지 않았다.
‘그래도 준비는 잘 되어간다.’
방송밖에 모르던 에건 폴은 이제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을 더 많이 살릴 수 있는 기회야.’
예전 같았으면 이런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그러나 김철수의 등장으로 인해, 그의 생각이 다방면으로 열리기 시작했다.
어차피 스트리머로서는 대성할 수 없다, 김철수처럼은 될 수 없다는 생각이 다양한 생각을 하게 만들어주었다.
‘그렇다면 숭고하고 명예로운 일을 해도 되겠지!’
방송각만 재는 것이 아니라 좀 더 가치 있고 명예로운 일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되었다.
이는 차진혁의 회귀 전에는 없었던 변화였다.
다만, 모두가 차진혁과 에건 폴의 생각에 협조적인 건 아니었다.
미국의 유명 랭커, ‘슈퍼 닥터’라 불리는 로날도가 대표적이었다.
“납득이 안 되는군. 왜 에건 폴은 김철수의 하수인을 자처하는 거지?”
힐러들은 치료하는 사람이지 예방하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런데 예방에 힘쓰라니? 이건 어불성설이었다.
“왜 우리에게서 정당한 플레이의 기회를 박탈하는 거냐?”
“로날도. 그런 게 아니다.”
“아니긴 뭐가 아니냐? 전투계열 플레이어들더러 마물 잡지 말고 레벨업 하라는 거랑 똑같은 거 아니냐?”
“…….”
“병에 걸린 사람들이 엄청나게 늘어난다고? 그건 힐러들에게는 몰이사냥의 기회가 왔다는 뜻이지.”
게다가 자연적으로 발생한 병도 아니라 시스템이 인위적으로 만든 병이다?
그렇다면 그것 또한 플레이의 영역이고, 힐러들에게는 아주 큰 성장의 기회였다.
“너는 지금 김철수의 말만 듣고 우리에게서 자유로운 기회를 박탈하려고 하고 있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