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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는 그만 강해지고 싶다-272화 (272/437)

회귀자는 그만 강해지고 싶다 272화

해맑게 웃고 있는 엘리네스를 보며 르세핌은 잠시 떨떠름해했다.

‘뭐지?’

초월적인 격이 느껴졌다.

이건 엘리의 귀여운 외모나 분위기와는 별개였다.

현재의 강함과도 상관이 없었다.

모든 생명체는 그 특유의 격이 존재했는데, 저 깜찍한 소녀에게서 느껴지는 격은 결코 일반적인 수준이 아니었다.

“저 애는 누구야?”

“내 계약 정령, 엘리.”

차진혁은 인상을 살짝 찡그렸다.

“너 진짜 내 방송 안 봤구나.”

“볼 시간이 없었어.”

르세핌은 순간 흠칫했다.

……아니, 근데 왜 나 변명하고 있지?

어쨌든 엘리의 이름이 낯설지 않았다.

“엘리. 음, 엘리. 이름이 귀에 익은데.”

“꽤 유명할걸? 정령왕의 딸이니까. 본명은 엘리네스고.”

“……아! 그 팔불출 정령왕 알키나스의 딸?”

르세핌은 걸음을 멈췄다.

‘다른 정령왕도 아니고 알키나스의 딸이라고?’

우주에는 수많은 정령계가 존재하고, 그중에서도 네임드 정령계가 있기 마련이었다.

알키나스는 정령왕들 중에서도 네임드라 불리는 정령왕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한 서버 정도는 통째로 불태워버리고도 남을 정도로 강력한 힘을 보유한 정령왕.

그렇다 보니 이제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아까는 김철수를 자연스레 딜러로 생각했어.’

딜러로 생각했다가, 테이머로 생각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정령왕의 딸과 계약을 맺었다니.

사실은 정령술사에 재능이 뛰어났던 건가.

“알키나스의 허락이 없으면 절대 불가능한데…….”

“당연히 알키나스가 허락해 줬지.”

“…….”

르세핌은 갑자기 어깨를 쭉 폈다.

그러고서 짐짓 우쭐대는 표정으로 말했다.

“역시 넌 내 제자가 될 자격이 있는 것 같다.”

“제자?”

“그러다 보면 결혼도 하고 그러는 거겠지.”

“좋은 생각이야.”

“……어?”

“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냐.”

벌여놓은 것들이 많다.

베셀리티 관련된 우주급 시나리오도 진행해야 하고, CB공장도 찾아야 하고, 그를 통해 수호수도 성장시켜야 한다.

‘상황극까지 하면 좋기는 하겠지만…….’

요즘 쇼츠영상으로 이런 거 많이 올라오던데.

가상 결혼 컨셉 영상도 꽤 인기를 끌고 있는 모양이어서 욕심이 나기는 했지만 지금은 너무 바빴다.

“나중에 하자.”

“받아들일 줄은 몰랐는데…….”

“어?”

“너도 마음이 조금은 있었구나?”

“조금 아니고 많이 있는데?”

“…….”

왜인지 르세핌의 귓불이 조금 붉어져 있었다.

* * *

사이나 제도.

수많은 섬으로 이루어져 있는 이곳에는 회색빛 공장들이 가득했다.

차진혁이 지금 걷고 있는 이곳 또한 그랬다.

무채색 컨테이너 건물들이 즐비했고 인적은 드물었다.

“H지구의 I지역. 이 언저리인 것 같은데.”

차진혁은 늪지대 크루가 관리하던 공장문을 찾아 열었다.

문을 열자마자 꽤 습한 기운이 화악- 밀려들었다.

나뭇잎 냄새와 흙냄새가 섞인 냄새가 느껴졌다.

‘이거…… 방송 쓸 수 있나?’

왠지 방송으로는 못 쓸 것 같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운드를 채워 넣었다.

“일단 이지가 없는 노동자들인 것 같네요. 모두 조종벌레에 의해 움직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곳에서 일하고 있는 공장 노동자들은 프로그래밍 된 AI들처럼 제 할 일만 하고 있었다.

외부의 자극에도 딱히 반응이 없었다.

그야말로 살아 움직이고 있는 인형에 가까웠다.

“이들이 이곳에서 조종벌레를 대량으로 양산하고 있습니다.”

르세핌은 인상을 찌푸린 채 공장 안을 둘러보았다.

대충 살펴보니 관리자급은 이미 도망친 것 같고, 단순 노동자들만 남은 것 같았다.

“아르비스에 이런 비윤리적인 작업장이 존재한다니 믿을 수가 없네.”

“그럼 인터뷰를 해보죠.”

“야, 쟤네들 전부 이성이 없어. 인터뷰는 못…….”

당연히 인터뷰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빠각!

[스킬, '길들이기(물리)'를 사용합니다.]

차진혁이 미리로 한 노동자의 뒤통수를 때렸다.

뒤통수를 얻어맞은 노동자는 앞으로 풀썩! 쓰러졌다.

“이제 조종벌레 길들이는 것에 많이 익숙해진 상태입니다.”

밖으로 꺼낸 조종벌레가 죽지도 않고 잘 살아 있었다.

굳이 삼키지 않아도 조종벌레와의 정신적 결속을 강하게 할 수 있었고, 그를 통해 노동자의 기억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읽어낼 수 있었다.

‘와, 뭐야?’

나 또 성장했잖아?

차진혁은 괜스레 기뻐졌다.

물론 스트리머로서의 성장이라고 보기에는 애매했지만, 어쨌든 성장은 성장이니까.

이렇게 체감이 확 되는 성장은 그를 늘 기쁘게 만들었다.

다만, 쓰러진 노동자는 몇 번인가 몸을 파득 거리다가 이내 축 늘어졌다.

‘CB로 기억을 읽어내는 걸 보통 인터뷰라고 표현하나?’라는 생각이 든 르세핌은 조심스레 물었다.

“그래도…… 저 사람은 피해자 아니야?”

“어, 나도 그런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고.”

이곳에 있는 노동자들 대다수는 극악무도한 범죄자들이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업적들부터가 대단했다.

“십살(十殺)은 다들 기본으로 갖고 있어.”

여기서 제일 선량한 녀석이 연쇄살인마였다.

온갖 흉악범들이 여기 몰려 있었다.

르세핌은 나름대로 합당한 의문점을 제기했다.

“어떻게 이런 애들만 골라서 데려왔지?”

티 안 나게 몰래 데려오려면 차라리 노숙자 같은 사람들이 훨씬 나았을 텐데.

르세핌은 왠지 모르게 약간 불길해졌다.

“교도소에서 차출해서 데려온 건가……?”

“역시 똑똑하네.”

“진짜라고?”

르세핌은 뜨악 하는 표정을 지었다.

교도소에서 인력을 차출하여 노동에 투입하는 건 일상적인 일이지만, 범죄자들에게 CB를 먹여서 일하는 인형으로 만드는 건 흔하지 않은 일이었다.

최소 100년 전에나 쓸 법한 비윤리적이고 비도덕적인 처사.

“교도소에 있다가 차출된 애들이야.”

차진혁은 조종벌레들을 테이밍하면서 이들의 기억들을 읽어냈다.

한 마리, 한 마리의 기억이 아주 온전한 건 아니었지만 여러 마리의 조종벌레들을 테이밍하니 조각들이 맞춰지기 시작했다.

차진혁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걸, 늪지대 정도 규모의 애들이 할 수 있는 건가?”

“못하지. 걔네가 무슨 수로 교도소의 범죄자들을 빼 오겠어.”

차진혁이 히죽 웃었다.

파면 팔수록 뭔가가 더 많이 나올 것 같았다.

* * *

욜린은 매우 협조적이었다.

“네, 사장님. 맡겨만 주세요.”

차진혁은 욜린에게 공장의 관리를 맡겼다.

딱히 할 건 없고, 그냥 공장에 상주하다가 무슨 일이 있으면 차진혁에게 연락하는 역할이었다.

욜린이 진지한 표정으로 한 가지를 확인했다.

“MK재단으로 취업한 거죠, 저?”

“네. 조만간 채용서류 도착할 겁니다. 이사장님이 직접 보내준다고 했어요.”

[#드디어 #인생직장 #충성충성충성]

다른 사람도 아니고 트리니티 클럽의 이사장이 운영하는 재단에 취업하게 되다니.

게다가 할 일도 별로 없었다.

그냥 앉아서 책이나 열심히 보면 되는 것이었다.

“진짜로 책 구입비는 경비처리 해주신다는 거죠?”

“네. 물론입니다. 그 이름에 대한 공부도 맘껏 해도 됩니다.”

“흐흐흐.”

욜린의 눈에 또 광기가 깃들었다.

차진혁은 저 광기를 경계하는 사람이지만 지금의 저 광기는 몹시 마음에 들었다.

꽤 저렴한 값(?)으로 베셀리티의 흔적을 좇을 수 있을 것 같으니까.

‘게다가 저거.’

[#힘숨찐]

욜린이 크게 기뻐하며 마음의 경계가 풀어질 때마다 한 번씩 보이는 저 ‘힘숨찐’이란 글자가 차진혁을 설레게 만들었다.

‘저 눈빛을 하고 있는 욜린이라면 이 직장을 지키기 위해 어떻게든 최선을 다하겠지.’

지금은 ‘힘을 숨긴 찐따’지만, 이 꿀직장을 훼손하려 드는 누군가가 있다면, 더 이상 힘을 숨기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욜린은 ‘월급이 따박따박 나오며 워라밸이 보장되는 직장’에 대한 집착이 거의 우주 제일이었으니까.

“아, 그리고 월급은 선불입니다.”

“회사에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회사에 뜨거운 사랑을, 고용주에게 무한한 영광을!”

[#힘숨찐]

두꺼운 글씨가 나타났다 사라졌다.

* * *

왕유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가상결혼 콘텐츠는 절대 안 돼요.”

“쇼츠영상으로 꽤 뜨던데…….”

“그건 그들이 김철수가 아니니깐 그렇죠!”

왕유미는 동글뱅이 안경을 고쳐 썼다.

동글뱅이 안경 너머로, 차진혁이 경계하는 그 광기가 또다시 일렁이고 있었다.

‘왜 내 주변에는 다 저런 사람밖에 없는 거지?’

자신을 제외하고 모두 저런 눈빛을 하고 있는 것 같아서 조금은 긴장하기로 했다.

저런 광기에 물들면 보다 보편적이고 상식적인 생각을 못하게 되니까.

대중을 상대하는 직업을 가진 자신만큼은 상식적이고 보편적인 사람이 되어야만 했다.

“김철수는 만인의 아이돌, 만인의 김철수여야 해요. 누군가랑 가상 결혼 콘텐츠를 하는 순간…… 반드시…….”

왕유미가 다시 안경을 고쳐 쓰고서 스산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죽어요. 누군가 한 명은. 아마 르세핌이 죽겠죠.”

“죽는다고?”

“철수랜드들이 반드시 지키는 철칙이 있어요. 바로 김철수를 독점하려 들지 않는 것!”

“…….”

“김철수를 독점하려 드는 순간, 그자는 철수랜드들의 공적이 되는 거예요. 그 정도 불법을 좌시할 만큼 너그러운 철수랜드는 없으니까!”

여러모로 반박하고 싶은 부분이 많았지만 굳이 말을 보태지는 않았다.

지금의 왕유미는 약간 미쳐 있는 상태였으니까.

미친 사람에게는 일반적인 말이 잘 통하지 않는 법이다.

“그렇게 되면, 철수랜드 1호부터 눈이 돌아갈걸요? 1호는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어요.”

차진혁으로서는 약간 이해하기 어렵기는 했지만 어쨌든 왕유미의 조언은 늘 옳았으니, 이번에도 그냥 받아들이기로 했다.

어차피 가상결혼 콘텐츠까지 진행하기에는 여유도 없었고 말이다.

“음, 그래서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공개할까요? CB공장과 관련된 건 아무래도 숨기는 게 낫겠죠?”

“아무래도 그럴 것 같아. 트리투리 영감에게 비밀스러운 정보를 제공받아서 그걸로 우리 수호수를 좀 더 육성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자.”

“역사냥 콘텐츠는 성공한 걸로 봐야겠죠?”

“그렇겠지, 아무래도. 조종벌레를 훨씬 잘 다룰 수 있게 됐거든.”

다시 생각해 보면 늪지대 크루는 정말 아낌없이 주는 나무였다.

조종벌레를 다룰 수 있도록 연습하게 해주고, 그를 통해 다른 각도의 테이밍 방식에 대한 생각을 깨우쳐주고, 다음에는 조종벌레를 얻는 방법도 알려주었다. 거기에 더해 조종벌레를 다루는 노하우까지 전부 나눠주기까지 했다.

“역사냥 콘텐츠는 성공했지만, 그 능력이 너무 보잘것없고 비윤리적이라 공개하지는 않는 걸로 가야겠네여!”

조금 미쳐 있기는 해도 하나를 말하면 열을 이해하는 왕유미라 편하기는 했다.

왕유미와 강철의 손을 거치면 아마 또 한 편의 대서사시가 나올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아졌다.

며칠 뒤, 차진혁은 새로운 콘텐츠를 하나 진행하기 시작했다.

간만에 실시간 영상이었다.

“수호수를 키워보겠습니다.”

참고로 수호수는 발악하는 중이었다.

차진혁의 머릿속이 웅웅- 울렸지만, 이걸 방송에 내보내지는 않았다.

-싫어! 싫으시도다! 아주 싫으시도다!

“아르비스의 훌륭한 농부, 트리투리 님에게 배워 특별히 공수해 온 특수제작 비료입니다.”

-벌레 싫다! 벌레 싫으시도다! 나는 그런 거 안 먹어도 무럭무럭 잘 자라시도다!

차진혁이 황금 수호수 앞에 섰다.

황금 수호수의 몸통과 가지가 세차게 떨리고 있었는데, 그에 따라 황금빛 가루가 주변에 꽃잎처럼 휘날리고 있었다.

“와…… 저기 봐. 과연 신령한 나무라고 불릴 만하네.”

몸을 떠는 수호수의 모습은 마치 춤을 추는 것 같기도 했다.

“김철수랑 수호수랑 연결되어 있다며?”

“김철수의 마음을 느끼고 있나 봐.”

“엄청 기쁜가 보다.”

많은 사람들이 연희 삼거리로 몰려들었다.

경찰들은 한순간에 밀려든 인파로 진땀을 빼야만 했다.

-안 먹어! 안 먹어! 안 먹는다고! 제발! 벌레 싫어어어어어!

황금빛 가루가 더욱 세차게 휘날렸다.

차진혁이 히죽 웃었다.

‘편식하면 못 써.’

착하지, 자, 아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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