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는 그만 강해지고 싶다 267화
“한 가지에 너무 매몰되면 다른 것을 보지 못하기 마련이죠. 방어신비의 접근을 아예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솔직히 차진혁도 놀랐다.
‘아무리 기습이었다지만…… 한 방에 쓰러져?’
다시 한번 깨달았다.
눈에 보이는 강한 공격보다, 오히려 눈에 보이지 않는 적당한 공격이 훨씬 더 위력적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원래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이렇게 경험할 때마다 늘 새롭고 짜릿했다.
‘근데 아쉽네.’
시청자들 사이에 호불호가 좀 갈릴 수도 있었다.
너무 쉽게 끝내버렸으니까.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한 방에 멀리 가버릴 수가 있단 말인가.
그럼 혹시?
“……해치웠나?”
보통은 살아나는 마법의 주문.
살아나주면 좋겠는데.
차진혁은 쓰러진 1번 늪지대를 슬쩍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 마법의 주문도 소용 없었다.
방어신비 환상검희의 망치질은 상당히 강력했고, 뒤통수는 너무 치명적인 급소였다.
“아…… 시청자 여러분들께 유감스런 소식을 전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번 콘텐츠는 참교육이 아니라 역사냥이었다.
결국 역사냥을 제대로 하려면 1번 늪지대의 능력 중 무언가를 빼앗아 와야 하는 건데, 1번 늪지대가 너무 쉽게 가버리는 바람에 콘텐츠를 제대로 뽑아내지 못했다.
“역사냥에는 실ㅍ…….”
‘어?’
그때, 환상검희에게서 특별한 기운이 느껴졌다.
정확히 말하면 1번 늪지대의 지식 중 일부가 환상검희에게 이식된 것 같았다.
“역시 방어신비가 한 건 해냈습니다.”
미리가 가진 삼키는 권능을 일부 모방한 것이 틀림없었다.
검이 아닌 망치를 드는 것부터 시작하여, 여러모로 주인을 닮아가는 신비였다.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아직, 콘텐츠는 끝나지 않은 것이다.
“C.B를 만들어내는 방법을 알 것 같습니다. 제 방어신비가 상대의 뒤통수로부터 유효한 정보를 삼킨 것 같습니다. 좀 더 확실히 하기 위해 1번 늪지대의 사무실로 돌아가보겠습니다.”
다만, 르세핌은 약간 의아했다.
‘역시 방어 신비가 한 건 해냈다니? 저게 방어신비인 거랑 무슨 상관이야?’
* * *
앞장서서 걷던 르세핌이 물었다.
“저기, 있잖아, 김철수.”
“왜?”
“아까 왜 무기를 내려놓은 거야? 진짜 나를 구하려고, 위험을 무릅써도 좋다고 생각한 거야?”
그것은 사실 1번 늪지대의 시선을 끌기 위함이었다.
방어신비가 제대로 공격할 수 있는 판을 깔아주기 위해서.
‘근데, 그게 다인가?’
차진혁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약간 철수랜드 같은 구석이 있어서.”
“철수랜드라면…… 네 팬클럽 말하는 거지?”
“어.”
“…….”
나는 네 팬 아니거든?
르세핌은 그렇게 말할까 하다가 관두었다.
“뭐, 네가 잘생기긴 했으니까. 너처럼 생긴 애는 처음 봤어.”
“네가 아직 진짜 잘생긴 애를 못 봐서 그렇겠지.”
“나 아르비스 최상위 랭커야. 내가 잘생긴 애들을 못 봤겠냐?”
“진짜 잘생긴 애는 아직 못봤겠지.”
차진혁은 어깨를 으쓱했다.
“너랑 플레이하면서 깨달은 건데, 네 기준이 생각보다 너무 낮다.”
“…….”
“초심을 좀 찾아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 르세핌.”
르세핌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혼나는 거 오랜만인데.”
그녀는 보통 혼을 내는 입장이었지, 혼이 나는 입장은 아니었다.
그래서 이 경험이 무척 신선하고 신기했다.
“좀 더 혼내주라.”
“뭐?”
“아, 아니. 아무것도 아냐. 아무튼 너 길잡이 쪽으로 전향 진지하게 고려해 봐. 네 진짜 재능은 길잡이 쪽이 틀림없어.”
차진혁은 으음, 하고 턱을 매만졌다.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리기에는 좀 그랬다.
‘진짜 그럴 수도 있잖아?’
그는 자신의 재능이 ‘검’인 줄 알았다.
그랬는데 시간이 지나 다시 보니 검이 아니라 ‘망치’였다.
마찬가지로, 사실은 스트리머가 아니라 길잡이가 천직일 수도 있는 거 아니겠는가.
“네 말이 아주 틀렸다는 건 아닌데…….”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두더지맨이나 한세린(비록 지금은 군주로 전향했지만)과 비교하면 약간 부족한 것 같기는 했다.
그리고 솔직히 방송이 재미있기도 했고.
“내가 그 정도는 아닌 거 같아. 그래도 네 조언이니까 염두에는 두고 있을게.”
“일단 그거면 됐어.”
르세핌은 만족한 듯 씨익 웃었다.
몹시 기분이 좋아진 그녀의 귀가 쫑긋거렸다.
“그건 그렇고 내가 거미를 통해 봤던 그 여자의 몽타주를 좀 그려주면 좋겠는데.”
“해줄게.”
차진혁은 타란튤라의 기억을 읽은 것을 토대로 하여 몽타주를 그려냈다.
추적 전문가인 르세핌의 도움을 받아 거의 정확하게 묘사할 수 있었다.
“음, 대충 이렇게 생긴 것 같네.”
“옆구르기 하면서 봐도 하르코엔인데?”
“실존하는 인물인 거지?”
“어. 아르비스의 전통적인 명문가의 귀족이야.”
“얘가 뒷배였으려나? 근데 왜?”
아르비스의 고위 귀족쯤 되는 인물이 왜 자신을 노린단 말인가.
“그 여자는 아름다운 걸 좋아하거든.”
“근데?”
“말했잖아. 너는 진짜 잘생겼다고.”
그러자 차진혁의 얼굴이 굳어졌다.
르세핌이 보기에는, 차진혁이 처음으로 긴장한 것처럼 보였다.
“왜? 아르비스의 고위 귀족이라는 얘기가 나오니까 이제 슬슬 겁이 나기 시작했어?”
“강은우가 위험해.”
* * *
‘역사냥 콘텐츠’ 시리즈는 아직 공개되지 않았지만 차진혁은 꾸준히 쇼츠 영상을 업로드했다.
디온에서의 소동 때문에, 아르비스에서도 차진혁을 주목하는 사람이 많아진 상태.
-이거 진짜 하르코엔 부인 아님?
-몽타주 빼박인데.
차진혁이 공개한 몽타주는 하르코엔 부인이 틀림없었다.
-와, 이 정도면 저격 아니냐?
-하르코엔 부인이 인형을 모으는 취미가 있다고는 하던데.
사실 도시괴담 같은 것이 존재하기는 했다.
하르코엔 부인이 사실은 살아 있는 사람을 인형으로 만든다는 소문.
-소문이 진짜냐?
-하르코엔 부인이 타 서버에서 사람 사 오는 거 본 목격자들 있음. 그게 인형 재료라던데.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그딴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함?
-댓글 지워라 ㅉㅉㅉ 그러다 고소당한다.
어쨌든 하르코엔 측은 즉각 보도자료를 뿌렸다.
항간에 떠돌고 있는 소문은 모두 사실무근이며 자신을 음해하는 음모론이라는 내용이었다.
순식간에 하르코엔 부인을 옹호하는 여론이 들끓어 올랐다.
-하르코엔 부인이 설마 그런 짓을 했겠냐?
-김철수가 거미랑 싸우던 그때에도 하르코엔 부인은 쌀알 보육원에서 봉사활동 중이셨다. 뭘 좀 알고 떠들어야지 ㅉㅉ
하르코엔 부인은 명문가의 귀족이었고, 봉사활동과 구호활동에 아주 적극적인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다.
-하르코엔 부인이 그럴 리가 없다.
……라는 것이 어느새 중론이 되었다.
한편, 하르코엔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녀의 시선은 [보물]이라는 글자로 향해 있었다.
“나는 김철수를 가져야겠어.”
“하지만 부인, 지금은 시기가 별로 좋지 않습니다.”
머리에 꽂았던 옥비녀를 집어 던졌다.
옥비녀는 보고를 올리던 남자의 뺨을 스쳐 지나가, 돌로 만든 벽면에 푹- 꽂혔다.
남자의 뺨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지금 시기가 중요해? 내 눈앞에서 보물을 놓쳤잖아.”
“김철수는 언제든지 잡아 올 수 있습니다. 지금은 너무 위험합니다.”
“위험한 걸 위험하지 않게 만들어야지. 그러라고 그대가 있는 거잖아, 시종장.”
하르코엔 가문의 시종장인 하이드.
그는 하르코엔이 어렸을 때부터 가문의 대소사를 처리해 온 가문의 중추였다.
하르코엔 부인이 어렸을 때에는 그녀의 호위기사이기도 했었고.
지금은 하르코엔 부인이 가장 믿고 신뢰하는 사람이었다.
하이드가 허리를 살짝 숙이며 대답했다.
“시간을 조금만 주십시오. 어차피 김철수는 곧 잊혀질 것입니다. 그때 움직이면 됩니다. 반드시, 부인의 손아귀에 보물을 안겨드리겠습니다.”
그제야 하르코엔 부인의 입가에 가느다란 미소가 서렸다.
“역시 내가 믿을 사람은 아저씨뿐이야. 가까이 와, 상을 줄게.”
하이드가 하르코엔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한쪽 무릎을 꿇은 뒤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하르코엔이 하이드의 손등에 가볍게 키스했다.
하이드의 손등에 립스틱 자국이 남았고, 하이드가 천천히 일어섰다.
“오랜만에 상을 받았으니 저도 움직여보아야겠네요.”
* * *
1번 늪지대의 사무실을 찾은 차진혁은 예상외의 복병을 마주했다.
“어…… 그러니까…….”
사무실 입구에는 하얀색 머리끈을 이마에 묶은 여자가 한 명 서 있었다.
그녀는 피켓을 들고서 1인 시위를 하는 중이었다.
[선량한 시민의 소중한 일자리를 빼앗은 김철수는 각성하라, 각성하라!]
늪지대 크루가 전멸하면서 직장을 잃어버린 욜린이었다.
욜린의 표정은 상당히 진지했는데, 어떻게 보면 절실해 보이기도 했다.
“당신 때문에 당장 내일 밥을 굶게 생겼다고요!”
“…….”
차진혁은 머리를 긁적거렸다.
욜린에게는 미안한 일이었다.
“어떻게 할 거예요! 여기만큼 좋은 직장 찾기도 힘든데!”
“…….”
차진혁은 턱을 매만졌다.
“일단 내가 자료들을 좀 찾으려고 하는데 도와줄 수 있어요? 페이는 넉넉하게 쳐줄게요.”
“정직원이었던 나를 한순간에 실업자로 만들더니, 이제는 프리랜서로 고용하시겠다? 그건 좀 너무한 거 아니에요?”
욜린은 입술을 앙다물고서 차진혁을 노려보았다.
“페이는 넉넉히 줄게요.”
“나는 목돈 싫거든요?”
그녀는 목돈이 필요 없었다.
매달 따박따박 안정적인 월급이 나오는 삶! 워라밸이 보장된 삶!
그것이 욜린이 추구하는 삶이었다.
“음…… 그럼 이건 어때요?”
차진혁이 판단하기에 욜린은 늪지대 크루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사람이었다.
C.B를 만드는 법을 제대로 알아내기 위해서는 욜린의 도움이 필요할지도 몰랐다.
“제가 안정적이고 편한 일자리를 하나 소개해 줄게요. 제 소개면 어지간하면 취직될 건데.”
“……진짜요?”
그제야 욜린의 표정이 약간 풀어졌다.
경계심이 누그러지고 마음이 온화해진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순간, 차진혁은 아주 흐릿한 무언가를 보았다.
[#힘순찐]
아주 찰나였지만 분명히 보았다.
‘뭐지?’
차진혁은 눈에 힘을 주고 욜린을 계속 살펴보았다.
당장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네. 분명히 취직은 될 거예요. 트리니티가 운영하는 재단이라서 망할 일도 잘 없고요. 근데 최소한의 면접이나 검증은 해야 할 것 같네요. 아주 최소한으로요.”
“그러니까 형식적인 절차 같은 걸로 이해하면 되는 거죠? 나 진짜 절실해요.”
“네네. 여기서 받았던 연봉의 1.5배를 약속할게요. 정년 보장. 혹시 정년 보장이 안 된다고 하면…… 최소한 정년까지 받을 월급 일시불로 수령하게 해줄게요.”
“네, 사장님.”
욜린의 표정은 봄날의 햇살처럼 밝아졌다.
적대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그녀의 입가에는 영업용 미소가 장착되었다.
차진혁은 다시 한번 눈에 힘을 주었다.
[#힘순찐]
이번에는 보다 정확하게 보였다.
‘힘순찐? 힘을 숨긴 찐따?’
아무래도 욜린에게 무언가 숨겨진 것이 있는 모양이었다.
“제가 무엇을 도우면 될까요, 사장님?”
“C.B와 관련된 연구자료를 좀 찾아보려고 합니다. 도와줄 수 있죠?”
“물론이죠. 금고 열쇠를 좀 가져올게요.”
“여기 금고가 있었습니까?”
“금고가 없는 사무실도 있어요?”
……보통 그게 있나?
사무실을 제대로 운영해 본 적이 없어서 딱히 감이 없었다.
욜린은 책상 서랍에서 금색 열쇠를 하나 꺼내고서 차진혁을 안내했다.
금고는 아예 다른 건물에 숨겨져 있었다.
“두 블럭 건너서 허름한 건물 안에 숨겨져 있어요.”
욜린의 말대로 금고가 하나 보였다.
말이 좋아 금고지, 사실 커다란 방 하나가 통째로 금고였다.
“여기가 사장님, 아니, 전 사장님과 임원분들이 쓰셨던 금고거든요.”
차진혁은 방을 둘러보다가 문득 책 한 권을 발견했다.
“저건 뭡니까?”
“아, 저건……! 아, 저걸 잠깐 까먹고 있었네.”
욜린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