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는 그만 강해지고 싶다 265화
차진혁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드디어 강한 놈이다!’
이성이나 기술이 아닌, 본능으로 싸우는 놈이 틀림없었다.
그러면 본연의 능력을 대부분 다 끌어내서 쓸 수 있을 것이고.
르세핌이 인상을 살짝 찡그렸다.
“진짜 싸우게?”
“싸워 봐야지.”
“르세핌, 너는 뒤로 물러서 있어.”
차진혁의 말에 르세핌은 천천히 뒤로 물러섰다.
너도 전투계열 직업은 아니잖아, 우리 함께 도망가자 등의 이상적인 말은 하지 않았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어차피 누군가 싸워야 한다면 내가 아니라 김철수가 싸우는 게 맞아.’
여기서 길잡이가 오기 부리고 있어 봐야 전투에 방해만 될 뿐이었다.
‘대신 나는 미리 퇴로를 확보해 두자.’
대피 통로를 만들어서 최악의 상황에 대비하기로 했다.
사람은 지나다닐 수 있으면서 은사 타란튤라는 들어올 수 없는 크기의 대피로.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김철수의 방어결계라면 가능성은 충분해.’
간이 대피로를 만드는 작업에 착수하면서 르세핌은 입술을 깨물었다.
‘너무 안일했다.’
타성에 너무 젖어 있었다.
그녀와 플레이하는 플레이어들은 늘 아르비스의 최상위권 랭커들이었고, 따라서 이 정도 위기는 별 무리 없이 스쳐 지나가기 마련이었다.
‘김철수의 전력을 좀 더 꼼꼼히 분석하고 따진 다음에 움직였어야 했는데.’
뭐에 홀렸던 것일까, 너무 들떠서 플레이에 임하고 말았다.
반쯤 장난이자 유희로 접근했던 것이 이런 결과를 낳았다.
‘얼굴에 미쳐 가지고.’
이래서야 아르비스 랭킹 5위라고 하기 부끄러운 수준이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반성하고 후회해 봤자 늦었다.
지금부터라도 진정성 있게 최선을 다해야 했다.
“김철수, 15분만 버텨봐. 빠져나갈 수 있도록 대피로를 만들어볼 테니까.”
* * *
차진혁은 히죽 웃었다.
레벨 300대 마물과의 전투라니, 이건 확실히 어그로가 끌릴 것이라 판단해서 실시간 방송을 켰다.
[03 위기]
01 선전포고.
02 잔꼬.
03 위기.
이번 시리즈의 예고편으로 활용하면 딱일 것 같았다.
차진혁의 머리 위로 은사 타란튤라의 은사가 뿜어져 나왔다.
‘빠르다!’
언제 천장으로 이동했는지도 모를 만큼, 타란튤라는 재빨랐다.
‘절대결계.’
절대결계가 은사를 막아냈다.
일부는 절대결계와 부딪쳐 순식간에 녹아내렸고, 일부는 궤도가 바뀌어 옆으로 튕겨 나갔다.
차진혁은 그 한 번의 격돌로 깨달았다.
“레벨 300대 마물을 직접 상대하기는 버겁네요.”
아무리 기술로 커버해 보려고 해도 본질적인 레벨 차이가 너무 심하게 났다.
“절대결계와 도둑걸음을 적절히 사용해 가면서 공략법을 찾아보겠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압도적인 레벨과 피지컬을 가진 대신 지능이 떨어진다는 것이었다.
타란튤라는 재빨랐지만, 패턴은 꽤 단조로운 편이었다.
도둑걸음와 절대결계를 섞어 사용하니 어찌어찌 버틸 수는 있었다.
“하지만 상황이 그렇게 좋지는 않습니다.”
타란튤라가 뿜어낸 은사가 공간 곳곳에 뿌려지고 있다.
일부는 녹아서 독액이 되었고, 일부는 끈적이처럼 벽에 붙었다.
독 면역이 있으니 독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하지만, 끈적이처럼 벽에 붙은 것들은 말 그대로 거미줄.
차진혁의 움직임을 방해하는 요소였다.
물론 차진혁이 당하고만 있었던 건 아니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미리를 휘둘러 타란튤라의 머리를 강타했다.
“껍질이 엄청나게 단단하군요.”
그러나 레벨 300대 마물의 껍질은 두껍고 단단했다.
데미지가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타란튤라의 공세가 매서워서 강력하고 큰 공격을 준비할 여유도 없었다.
“일대일 직접 전투로는 답이 없는 상황이군요.”
약간 멀어진 르세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철수! 7분만 더 버텨!”
“게다가 저 육중한 다리마저도 위험한 흉기입니다.”
은사 타란튤라의 다리는 작은 가시들이 튀어나와 있는 형상이었다.
날카롭고 꺼끌꺼끌해서 마치 톱 같았다.
살갗이 닿으면 찢겨나갈 것이 분명했다.
끼기기긱-!
타란튤라가 휘두른 앞다리가 벽에 닿았다.
단단한 벽이 종잇장처럼 찢겨나갔다.
“과연 강하군요.”
르세핌은 필사적으로 도주로를 개척했다.
그 와중에도 감각은 차진혁을 향해 열어두었다.
혹시라도 차진혁이 크게 당하게 되면, 일단은 구출해서 숨어야 하니까.
그런데 르세핌은 묘한 느낌을 받았다.
‘왜…… 여유 있어 보이지?’
지금 겉으로 보이기에는 무척 급박한 상황이었다.
‘전투로는 상대가 안 된다는 걸 알 텐데?’
지금도 버티는 것이 겨우였다.
그런데도 김철수는 은근히 여유로운 것처럼 보였다.
이상한 일이었다.
* * *
1번 늪지대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하르코엔, 넌 실수한 거다.’
언젠가는 반드시 하르코엔 그 미치광이 여자에게 복수할 것을 다짐했다.
‘고맙다. 김철수. 네가 빨리 와준 덕분에 훗날을 기약할 수 있게 됐어.’
사실 그 또한 하르코엔 부인을 완전히 믿지 않았다.
꼬리 자르기를 당할 확률이 높다는 것을 그 또한 알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는 하르코엔의 수집품들에 대해서 이미 알고 있었고, 미리 많은 대비를 해놓았다.
지금 입고 있는, 온갖 종류의 부식으로부터 몸을 보호해 주는 내의가 바로 그것이었다.
가격이 무려 10억이었는데 10억 값을 톡톡히 해냈다.
‘감각은 돌아오고 있고.’
은사 타란튤라와 김철수가 격렬하게 싸우고 있는 지금.
지금이 유일한 기회였다.
‘이 은사를 녹여내야 해.’
그는 몰래 입에 물고 있던 작은 구슬 하나를 뱉어냈다.
구슬의 이름은 묵화주.
묵화주는 정령왕의 불꽃을 담은 구슬로서, 무려 100억에 달하는 아티팩트였다.
아까워할 새도 없이 시동어를 읊었다.
“묵화, 발동.”
검은 불꽃이 피어 올랐다.
정령왕이 다루는 지옥의 겁화에 비해서는 아주 조촐하고 미약한 수준이지만, 그래도 은사를 천천히 녹여내는 것 정도는 가능했다.
‘아깝기는 해도…… 목숨값치고는 싸지.’
하르코엔으로부터 계약금 1000억도 받았으니 무척 남는 장사였다.
은사의 일부를 녹여낸 1번 늪지대는 몸을 뒤틀어 빼냈다.
손끝과 발끝의 피부가 녹아내려 뼈가 보일 지경.
‘그래도, 일단 살았다.’
* * *
차진혁이 말했다.
“300대 마물과의 직접전투로는 승산이 없다는 것은 알겠습니다.”
애초에 알고 있었지만 몸으로 체감해 보니 더욱 신났다.
이렇게 강한 놈이 있다니.
근데 아르비스의 랭커들은 얘를 한 칼에 썰어버리기도 하잖아.
세상은 넓고 강자는 많은 것이었다.
“즉살을 사용하려고 해도 여유가 나지 않는군요.”
워낙 공격이 매서워서 검은 범의 노래를 사용하기에도 마땅치 않았다.
“그렇다면 테이밍은 어떨까요?”
[스킬, ‘길들이기(물리)’를 사용합니다.]
그러나 길들이기도 그리 쉽지는 않았다.
애초에 레벨 차이가 너무 심해서 스킬 자체를 튕겨내 버렸다.
“이런. 발이 묶였습니다.”
결국 차진혁의 발이 묶였다.
끈적한 은사 덩어리가 차진혁의 왼쪽 발목을 감쌌다.
“땅에 붙어버린 느낌인데요.”
워낙에 끈끈하고 질겨서 칼로도 잘리지 않았다.
그사이, 타란튤라가 또다시 은사 덩어리를 뱉어냈다.
“이번에는 오른쪽 발목이 제압당했습니다.”
사냥감을 포획하는 데 성공했다 여겼는지 타란튤라의 움직임이 느려졌다.
타란튤라가 차진혁을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차진혁 바로 앞에 선 타란튤라가 입을 크게 벌렸다.
당장에라도 차진혁을 삼킬 것만 같았다.
“겁을 주는 것 같은데요?”
이것은 하르코엔의 의지였는데 그녀는 차진혁이 공포을 공포에 떨게하고 싶었다.
저 아름다운 얼굴에 공포와 두려움이 깃들면 얼마나 예쁠까.
그녀는 그런 얼굴을 한 수집품을 갖고 싶었다.
“입이 굉장히 크네요.”
차진혁은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휙 던졌다.
그것은 타란튤라의 입속에 쏙 들어갔다.
“입을 크게 벌려준 덕분에 쉽게 넣을 수 있었습니다.”
차진혁은 방송 제목을 바꿨다.
[04 반격]
“실시간 방송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차진혁은 무척 흡족해졌다.
‘예고편 뚝딱이네!’
* * *
본격적인 추적을 시작하기 전.
구금되어 있던 차진혁이 풀려나기 직전.
그제야 정신을 차린 릴링이 차진혁을 찾아왔다.
“철수 님. 괜찮으세요?”
릴링은 울먹거리고 있었다.
“저 때문에…… 저 때문에…….”
뿌우-
소리를 내며 엉엉 울었다.
마음이 얼마나 괴로운지는 몰라도 콧잔등에 난 뿔이 시꺼멓게 변해 있었다.
“너 때문 아니야.”
때마침 차진혁은 정당방위로 풀려나게 되었다.
릴링이 엉엉 울고 있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러니까 울지 마라. 좀 속상하다.”
“…….”
그러자 릴링은 뿌앵- 하며 더욱 큰 울음을 터뜨렸다.
산만 한 덩치로 차진혁을 안고서 어리광부리듯 잉잉 울었다.
폭풍 같은 오열의 시간이 지나고서 차진혁이 말했다.
“네 안에 아직도 조종벌레가 있어. 그거 끄집어 내야 해.”
길들이기를 하려다가 실패했다.
말하자면 반만 길들이기가 된 상태.
“지금은 1번 늪지대가 궁지에 몰려있는 상태라서 이 조종벌레에 신경 쓰지 못하고 있는 거 같은데…… 여유가 생기면 또 이걸로 무슨 짓을 할지 몰라.”
“네!”
릴링은 차진혁이 하는 말이면 뭐가 됐든 다 진리라는 듯한 태도로 일관했다.
“조금 아플 수도 있어. 내 테이밍이…….”
문득, 테르서박의 말이 떠올랐다.
폭력을 전제로 한 테이밍은 진짜 테이밍이 아니라고.
‘테이밍만 잘하면 되지, 그게 뭔 상관이냐고 생각했었는데…….’
근데 테르서박의 말에도 일리가 있는 것 같았다.
릴링을 아프게 하려니 마음이 영 내키지 않았다.
“알아요. 물리 길들이기잖아요.”
어느새 뿔이 분홍색으로 변한 릴링이 환하게 웃었다.
“맘껏 때려주세요. 저 피부가 엄청 단단하거든요.”
“최대한 빨리 할게.”
“천천히 해도 돼요. 전 철수 님을 믿어요!”
“…….”
그 순수한 눈을 본 차진혁은 처음으로 느꼈다.
‘물리 길들이기가 뛰어난 건 사실이지만…… 만능은 아니다.’
언젠가 미래를 위해 또다른 길들이기 기술이 필요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어쨌든 지금은 어쩔 수 없었다.
릴링은 비명 한 번 지르지 않고 차진혁에게 협조했고, 결국 몸 속에 숨어 있던 C.B를 토해낼 수 있었다.
‘그래도 한 번 해봤다고…… 살아 있네?’
이래서 연습이 중요한 것이었다.
조종벌레는 죽지 않고 살아 있었다.
* * *
차진혁이 중얼거렸다.
“폭력은 모든 것을 해낼 수 있다. 만약 해내지 못했다면, 폭력이 부족했던 것이다. 그렇게 믿었던 적도 있었습니다. 어리석었죠.”
테르서박의 말이 일부 맞다.
폭력이 전부는 아니었다.
“길들이는 방식은 여러 가지입니다.”
때려서 안 되면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
“테이밍한 조종벌레를 활용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겠죠.”
타란튤라의 몸에 CB가 들어갔다.
차진혁이 완벽하게 통제하고 있는 CB가.
“이런 식의 테이밍은 처음이라 집중이 조금 필요할 거 같습니다.”
차진혁은 타란튤라를 눈앞에 둔 채 눈을 감았다.
일반적으로, 레벨 300대 마물을 앞에 두고 할 수 있는 행동은 아니었다.
“다행히 저는 다양한 정신적인 연결과 유대를 경험해 보았습니다.”
수호수가 그랬고, 미리가 그랬고, 뇌룡이 그랬고, 엘리가 그랬다.
이미 많은 경험과 연습을 쌓아온 차진혁이기에 조종벌레와의 연결이 생각보다 훨씬 쉽고 자연스러웠다.
“자, 이제 은사 타란튤라는 제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