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는 그만 강해지고 싶다 235화
“……뭐?”
한세린의 도발적인 말에 흑표범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김철수를 대할 때와는 사뭇 다른 태도와 말투였다.
흑표범이 보는 한세린은 이중인격자 그 자체였다.
“영상으로 봤어. 붉은 발톱 반달곰은 이곳의 최상위 포식자 아냐?”
“맞다. 그러니 우회하는 것이 합리적인 선택이지.”
“그게 왜 합리적이지?”
한세린은 진심으로 흑표범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럼 그놈 서식지 주변에 귀찮은 날파리들이 없다는 뜻이잖아. 그럼 당연히 그쪽으로 가야지.”
“……뭐?”
“강한 한 놈을 패는 게 약한 여러 놈 패는 거보다 덜 귀찮잖아.”
“그러다 그 한 놈이 지나치게 강하다면?”
“그래봤자 백옥갑옷 기사보다는 약하지 않아?”
백옥갑옷 기사를 때려잡으러 왔는데 그까짓 붉은 발톱 반달곰을 왜 우회한단 말인가.
“……그건 그렇다만. 팀원들의 체력 안배 같은 건 안중에도 없나?”
“그리고 제일 센 놈 서식지에 던전 클리어의 실마리가 숨겨져 있을지도 모르고. 왜 제일 강한 놈이 있는 곳을 피해 가지?”
두 갈래 길이 있으면 그중 난이도 높은 곳을 선택한다.
한국맵 기준으로는 이게 당연한 상식이었다.
“도대체 플레이를 누구한테 배운 거야?”
그건 흑표범이 하고 싶은 말이었다.
한국맵 기준으로 당연한 것이, 미국맵 기준으로는 당연하지 않았다.
유럽맵과 미국맵은, 효율적인 플레이보다는 안전을 더 중요시하는 경향이 컸다.
“뭐, 붉은 발톱 반달곰이 단독 행동을 한다는 게 좀 불행이기는 하지만.”
불행? 단독 행동을 하니 다행인 거 아닌가? 자동 번역구슬이 고장 났나?
흑표범은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한세린의 뜻을 깨달았다.
‘몰이 사냥을 못해서 불행하다고?’
보아하니 자유의 성녀, 목왕, 권왕 또한 ‘불행히도’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한 곳에 모여 있으면 빨리 처리할 수 있다나 뭐라나.
‘아무래도 김철수 팀은 전원이 미쳐 있는 것 같다.’
놀랍게도, 그나마 김철수가 제일 정상인 것 같기도 했다.
김철수가 망치를 보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알겠어. 꼭 머리를 터뜨리게 해줄게. 조금만 참아. 착하지?”
저게 제일 정상이었다.
* * *
[해운대 던전, ‘정글 필드’에 진입하였습니다.]
꽤 친절한 필드였다.
[정글 필드, ‘붉은 발톱 반달곰 서식지’에 진입하였습니다.]
수풀은 점점 더 무성해졌고, 커다란 나무들에는 맹수가 할퀴어놓은 듯한 발톱 자국이 있었다.
아무래도 붉은 발톱 반달곰의 영역표시인 것 같았다.
“자, 그러면 우리 스타일로 시작해 보자.”
그제야 김철수 팀원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이제는 지루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한세린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부탁해, 김정현!”
김철수 스타일로 던전 플레이가 진행되기 시작했다.
* * *
김정현은 영역표시가 되어 있는 나무를 향해 주먹을 뻗었다.
굉장히 두껍고 커다란 나무였건만, 단 한 번의 주먹질로 두 동강이 나버렸다.
어벤저스 사단의 군주, 힉슨은 기함을 토했다.
‘미친!’
김철수 팀은 미쳤다.
그러므로 어벤저스 사단이라도 정신을 차려야 했다.
“우리는 방어 태세를 갖춘다.”
붉은 발톱 반달곰은 육탄전에 능하다.
직접 부딪쳐서 좋을 것이 없는 놈들이었다.
‘길을 안내한다면서 왜 이런 소란을 피워!’
흑표범에게 기감을 널리 퍼뜨릴 것을 주문했다.
놈은 꽤 강한 개체지만 은밀하지는 못한 편.
힉슨은 여러 번 팀원들에게 주지시켰다.
“붉은 발톱 반달곰 자체가 두려운 게 아니다.”
어벤저스 사단의 능력이라면 붉은 발톱 반달곰쯤은 얼마든지 사냥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체력안배다. 부상도 입으면 안 돼. 버려진 사원에 들어가기까지 우리는 힘을 비축해야만 한다.”
김철수 팀과는 플레이 스타일이 영 맞지 않는 느낌이었다.
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한세린이 신나서 말했다.
“자. 저거. 저거. 저거.”
손가락으로 나무들을 가리키자 나무들에 하얀색 ‘X’ 표식이 생성되었다.
포인트를 지정하는 군주들의 기본 스킬이었다.
김정현이 주먹을 내지를 때마다 나무들이 박살 났다.
나무들이 불쌍한 수준이었다.
목재현이 나무 덩쿨을 소환하여 박살 난 나무들을 치워내자 뻥 뚫린 길이 생성되었다.
어쨌든 길이 만들어지기는 했다.
한세린은 약간 애교 섞인 목소리로 차진혁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런 정글필드에서는 길을 찾아가는 것보다 만들어가는 게 더 빨라.”
나 잘했지? 이렇게 하는 거 맞지?
하는 목소리와 표정이어서 차진혁은 또 거북함을 느꼈다.
저딴 교태 가득한 목소리는 안 듣고 싶다.
그렇지만 이건 또, 나름대로 시청자들을 향한 설명일 수 있어서 그냥 내버려 둘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뻥 뚫린 공간을 만들어내면 마물의 습격도 훤히 보이고.”
붉은 발톱 반달곰은 숨었다가 공격하는 놈은 아니었다.
“어, 마침 저기 멀리 있네.”
뻥 뚫린 길 끝에 붉은 발톱 반달곰이 한 마리 보였다.
힉슨은 긴장을 유지한 채 팀원들에게 말했다.
“먼저 권왕에게 달려들 거다. 탱킹능력이 워낙 좋으니까. 우리는 걱정말고 최대한 강한 공격을 퍼부어서 일격에 끝낸다.”
어벤저스 사단으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 * *
흑표범은 한세린의 공략 방식이 너무 기괴하다고 느꼈다.
길이 없으면 만들어서 간다니.
그가 아는 길잡이는 길을 찾는 사람이지 길을 만드는 사람은 아니었다.
‘아. 그러고 보니…….’
지금은 군주로 전직했다지만 예전 한세린의 직업에 대해 들은 적이 있었다.
한세린의 예전 직업은 비밀 파괴자였다.
‘이래서 파괴자인 건가.’
결과적으로 길은 생겼고, 붉은 발톱 반달곰이 나타났다.
어벤저스 사단은 힉슨의 지시대로 최대한 전력을 보존하며 붉은 발톱 반달곰과 싸우려고 했다.
그에 반해 김철수팀은 그런 것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 모양새였다.
“용서…… 해라. 곰…… 친구.”
김정현은 코뿔소처럼 쿵쾅대며 앞으로 달렸다.
그 모습은 마치 전차 같았다.
힉슨이 눈을 크게 떴다.
‘저렇게 부딪치면……! 무조건 손해일 텐데.’
붉은 발톱 반달곰은 육탄전에 특화된 개체.
저런 식으로 무작정 부딪치면 너무 많은 손해를 본다.
저런 작은 손해들이 쌓이면 던전 클리어에 악영향을 끼친다.
‘도대체 무슨 생각이냐! 군주는 왜 안 말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붉은 발톱 반달곰이 몸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한 것이었다.
인간에게 극도의 적개심을 가지고 있는 마물이 기세에 눌려 도망쳤다.
힉슨으로서는 충격적인 경험이었다.
코뿔소처럼 내달렸던 김정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가왔다.
“도망…… 갔습…… 니다.”
그러더니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귀여워서…… 죽이고 싶지…… 않았는데. 다……행.”
김정현은 동물 애호가여서 동물형 마물에게 좀 약한 편이었다.
어쨌든 붉은 발톱 반달곰은 도망쳤고, 위협은 사라졌다.
격렬한 전투를 대비했던 어벤저스 사단으로서는 어이가 없는 일이었다.
긴장이 풀려 버린 팀원들을 향해 힉슨은 다시금 말했다.
“모두 알다시피 이건 운의 영역이다. 놈이 달려들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어. 정신 똑바로 차려.”
그사이, 김정현은 한세린이 지정하는 나무들을 모조리 부숴버렸다.
그게 신이 났는지 김정현은 땀을 흘리며 웃으며 주먹을 휘둘렀다.
파앙! 폭발음이 터져 나왔다.
“이런…… 실……수.”
너무 즐거운 나머지 힘 조절을 제대로 못했다.
한 나무를 완전히 박살 내버렸다.
바스라져 버린 나무는 형체조차 알아보기 힘들었다.
에건 폴은 녹화영상을 찍으며 감탄했다.
“어, 엄청난 파괴력입니다. 놀라운 것은 저런 파괴력을 선보이면서 아직 전혀 지친 기색이 없다는 거죠. 괴물 같은 능력입니다.”
차진혁은 차진혁 나름대로 녹화를 진행했다.
“아, 저기서 힘 조절을 못하고 나무를 완전히 박살 내버렸네요. 군주가 요구한 게 저 정도는 아니었는데 말이에요.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 * *
팀원들 전원에게 알림이 들려왔다.
[붉은 발톱 반달곰의 영역수(領域樹)를 모두 파괴하였습니다.]
[히든 피스, ‘정글의 제왕을 쫓아내다’를 만족하였습니다.]
다들 얼떨떨해하는 가운데 흑표범은 약간 망연자실했다.
‘저자의 말이 맞았잖아?’
그의 눈에 한세린의 자신만만한 표정이 잡혔다.
거봐, 내 말이 맞지? 강한 놈부터 공략해야 한다니까? 그리고 일단 부수고 길을 만들다 보면 뭐가 되기 마련이라고.
흑표범은 저 표정에 자존심이 무척 상했으나 그래도 길잡이로서 물어볼 건 물어봐야 했다.
“……알고 있었나?”
“뭘?”
“영역을 표시한 나무들을 부수면 히든 피스를 획득할 수 있다는 걸. 그래서 일부러 안 죽인 건가?”
“그걸 다 알고 플레이하는 사람도 있냐?”
한세린은 한심하다는 듯 흑표범을 바라보았다.
“그걸 알 수 있으면 내가 세상 모든 히든 피스 다 얻었게?”
“하지만…….”
흑표범이 본 한세린은 마치 모든 걸 다 알고 있는 사람 같았었다.
그래서 어떻게 알아낸 거냐고, 어떤 통찰과 관찰을 진행한 거였냐고 물어보려고 했다.
“야. 넌 생각이 너무 많아. 일단 하다 보면 뭐라도 돼.”
“그러면 동반되는 위험성이 너무 크지 않나?”
“하아. 던전이 안 위험하면, 그게 던전인가. 개답답하게 구네.”
“…….”
흑표범은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런 식으로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어떻게든 안전하게, 최대한 조심스럽게 던전을 클리어하는 데에만 집중해 왔었던 그였다.
덕분에 팀 동료들의 사망률은 극히 낮은 편이었고.
‘새로운…… 길이 보이는 듯 하다.’
약간의 깨달음이 찾아오는 것 같은 느낌.
그러나 그것은 마치 금단의 영역에 발을 들이는 기분이라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일단 히든피스 보상을 확인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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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왕의 영역표식]
정글의 제왕은 단단하고 날카로운 발톱으로 영역을 표시하였습니다.
제왕의 힘을 빌어 영역을 표시할 수 있습니다.
사용횟수 :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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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톱 모양의 아이템이 플레이어 전원의 인벤토리에 전송되었다.
군주인 힉슨이 시험삼아 아이템을 사용해 보았다.
근처 나무에 발톱이 새겨졌다.
[제왕의 영역이 생성되었습니다.]
힉슨 주변으로, 반경 약 1미터 가량의 공간에 녹색 마나선이 생성되었다.
그것은 일종의 결계였는데 안전지대 비슷한 느낌이었다.
차진혁은 방송을 이어갔다.
“결계를 형성해서 마물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아이템 같습니다. 지금 당장은 별로 쓸모없어 보이지만, 어쩌면 쓸모가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더 진행해 보겠습니다.”
차진혁은 한세린의 안내를 받아 걸음을 옮겼다.
흑표범 입장에서는 정말 황당하게도, 하루 만에 ‘버려진 신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육체적인 체력소모는 말할 것도 없고, 정신력 소모도 훨씬 덜했다.
차진혁도 꽤 만족스러웠다.
‘고구마 구간 하나도 없이 쭉쭉 진행했네.’
중간에 히든 피스까지 얻었으니 방송 컨셉을 아주 잘 살리고 있다고 볼 수 있었다.
아직까지는 아주 순조로웠다.
일단 이곳에서 하루 휴식하며 재정비 시간을 가졌다.
* * *
다음 날 아침.
‘이제부터가 중요해.’
어벤저스 사단과 김철수팀은 신전 앞에 섰다.
“고대, 돌을 쌓아 만들어진 신전 같습니다. 전체적인 형상은 피라미드와 닮아 있네요. 신전 전체에 이끼와 곰팡이가 자라나 있습니다. 굉장히 오래된 건물 같네요. 높게 뻗은 이 계단을 올라가면 건물 내부로 들어가는 입구가 있는 구조입니다.”
차진혁은 어벤저스 사단의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그만의 계획을 실행해 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