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는 그만 강해지고 싶다 234화
차진혁이 지상으로 올라오기 직전, 어벤저스 사단은 최선을 다해 싸우고 있었다.
에건 폴은 입술을 깨물었다.
‘아까 그놈과 이름만 같지 완전히 다른 놈이야. 훨씬 강한 놈이다!’
……라고 지극히 상식적인 판단을 했지만 사실 그건 틀린 생각이었다.
암컷이 수컷보다 더 강한 것은 맞았지만 그렇다고 압도적으로 강한 개체는 아니었으니까.
아까 김철수가 수컷 모래 지렁이를 너무 쉽게 죽여서 상대적으로 지나치게 약해 보였을 뿐.
원래 지형지물을 이용하는 마물을 상대하기 까다로운 법이었다.
그래도 경험 많은 어벤저스 사단답게 모래지렁이의 공격을 비교적 잘 받아내고 있었다.
“철의 방패!”
방패를 든 플레이어가 모래지렁이의 돌진을 튕겨내려 했다.
‘그냥 막아내면 안 된다.’
까딱 잘못했다가 모래 안으로 빨려 들어가면 끝이다.
‘방향을 돌리면서 옆으로 튕겨낸…… 어?’
그러나 그것은 모래지렁이의 페인팅이었다.
여태까지 일직선으로만 공격해 오던 모래지렁이가 공격패턴을 바꿨다.
모래지렁이가 몸을 구부려 방패 플레이어 옆의 힐러를 콱! 깨물었다.
어벤저스 사단의 군주인 힉슨은 주먹을 꽉 쥐었다.
‘어그로가 튀었다고? 언제?’
황급히 명령을 내렸다.
“일단 꼬리를 붙잡아! 모래 안으로 들어가는 건 무조건 막는다!”
힉슨의 명령을 들은 두 명의 체술가가 커다란 손바닥을 구현하여 모래지렁이의 꼬리 부근을 꽉 붙잡고 늘어졌다.
꼬리를 잡힌 모래지렁이는 기동성이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거기서 힉슨은 이상함을 느꼈다.
‘머리가 약점이 아니라 꼬리가 약점이었나?’
속인 사람은 없지만 왠지 모르게 속았다는 기분이 머릿속을 관통했다.
김철수가 머리를 터뜨렸던 건, 모래지렁이의 약점이 머리여서가 아니라 그냥 기호의 문제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순식간에 판단을 내렸다.
“놈의 약점은 머리가 아니라 꼬리다!”
힉슨은 반드시 제이슨을 구해내야만 했다.
제이슨은 어벤저스 사단의 힐러.
원거리에서 치유력을 발동하면 치유력이 현저하게 낮아진다는 이유로, 동료들 곁에 서서 힐링을 고집하던 사내였다.
그래야 한 명이라도 더 살릴 수 있다면서.
나는 괜찮으니 어그로만 잘 끌어달라고 했던 녀석이었다.
‘반드시 구해줄게.’
어벤저스 사단의 플레이어들이 모래지렁이의 꼬리 부근 공격을 쏟아부었다.
그중 몇몇은 폭발을 일으켰고, 탱커들에게도 약간의 부상을 입혔으나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사이, 어벤저스 사단이 자랑하는 마법사 카린이 마법영창을 끝냈다.
“강림하라, 북풍의 여신이여.”
카린이 자랑하는 최상위 동결마법, ‘북풍의 여신’이었다.
한기를 머금은 바람이 불어닥치기 시작했다.
거대한 여신 형상의 이펙트가 피어올라 얼음으로 이루어진 날개를 펼친 뒤 모래지렁이의 몸을 뒤덮었다.
모래지렁이의 머리와 온몸이 꽁꽁 얼어붙었다.
“해치웠나?”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었다.
이변을 가장 먼저 느낀 것은 마법을 발현한 카린이었다.
그녀가 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빙계마법에 내성이 있는 놈이야.”
이건 운이 나빴다고밖에는 표현할 길이 없었다.
이건 직접 부딪치기 전까지는 모를 일이니까.
운 나쁘게도, 모래지렁이에게는 빙계 마법에 대한 강력한 내성이 있는 듯했다.
쩌적- 쩌적-
얼음이 깨지기 시작했고, 오히려 부상을 입은 탱커들의 체력이 급속도로 저하됐다.
얼었던 모래지렁이가 꿈틀대며 다시 움직이는가 싶더니, 머리부터 바닥에 처박았다.
모래 속으로 도망가려던 그 순간. 에건 폴이 다급하게 외쳤다.
“안 돼! 제이슨!!!”
그런데 약간 이상했다.
땅에 머리를 박아 넣은 모래지렁이가 더 이상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 * *
차진혁이 지상에 도착한 시점은, 빙계마법사 카린이 모래지렁이를 얼려버렸던 그 시점이었다.
이후 모래지렁이는 마법 저항에 성공해냈고, 빨판 달린 입으로 힐러를 흡착하여 모래 안으로 도망치려고 했다.
그 시점에 차진혁은 깨달았다.
‘나를 위한 연출!’
에건 폴.
저 녀석은 도대체 어디까지 방송을 생각한단 말인가.
방송의 큰 그림을 그려내는 능력은 정말 인정해 줘야 했다.
‘아까는 화려하고 강력하게 공격했으니까.’
이번에는 다른 연출을 해보기로 했다.
미리는 차진혁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읽어냈다.
미리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은밀하게 속삭일게요. 당신의 머리, 맛있게 먹겠습니다.
솔직히 아까 황금 빛줄기를 쏘아냈던 것은 멋을 위해서 그렇게 했다.
약간은 억지로 꾸며낸 느낌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눈에 보이지 않는 강맹한 검압, 아니, 망치압을 만들어내서 쏘아냈다.
사실 이것이 본래 공격에 가까운 공격.
거추장스런 화려함을 덜어놓자, 훨씬 자연스럽게 기운이 운용되었다.
그것은 검기처럼 재빠르고 날렵했으나 예기(銳氣)는 아니었다.
그보다 훨씬 둔탁했고 무거운 파괴력을 지니고 있는 힘이었다.
어벤저스 사단의 그 누구도 차진혁의 공격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잘 먹었어요. 황홀하게 맛있어.
차진혁도 이번 공격에는 정말 만족했다.
‘오차가 전혀 없었다!’
아까는 무려 0.2㎝의 오차가 있었는데 말이다.
‘완벽한 공격이었어.’
성취감이 밀려들었고 성장한 기분을 만끽할 수 있었다.
약간의 시간이 흐른 뒤, 어벤저스 사단의 플레이어들은 모래지렁이가 사망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에건 폴은 이게 어찌 된 일인지 파악해 보기 위하여 녹화된 영상을 돌려보았다.
‘아……!’
그제야 보였다.
저만치 멀리서 김철수가 망치를 휘두르는 모습이.
‘눈에 보이지 않는 강맹한 공격이 날아들었다.’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았지만 영상으로는 어느 정도 읽어낼 수 있었다.
플레이어들이 땅을 파보니, 모래지렁이의 머리 부분이 깨끗하게 증발해 있었다.
아까는 거대한 모래 구덩이가 생겼었는데 이번에는 그런 현상도 없었다.
정말 깔끔하게 모래지렁이의 머리만 날아갔다.
그리고 제이슨은 기절한 상태.
“제이슨!”
기절했지만 큰 부상은 없는 듯했다.
그 사이, 김철수가 자신을 향해 다가와 말했다.
“고맙다. 너 진짜 진심이구나.”
이렇게 극적인 타이밍에 극적으로 힐러를 구할 수 있도록 판을 짜주다니! 합방한 보람이 있네!
“네가 이렇게 방송에 진심일 줄은 몰랐다. 솔직히 감동받았다.”
……내가 감동을 줬어?
에건 폴은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다.
* * *
길잡이는 직접 전투에서는 한 발자국 떨어져 있기 마련이었다.
그래서 남들보다 김철수 일행의 복귀를 빨리 알아차렸다.
그리고 김철수가 망치를 휘두르는 것까지 똑똑히 봤다.
처음에는 허공에 무슨 짓을 하는가 싶었지만 결과를 본 그는 침을 꿀꺽 삼킬 수밖에 없었다.
화려하면서 파괴적인 건 그렇다 칠 수 있다.
그건 화력이 강한 딜러 계열 플레이어들의 공통적인 특성에 가까웠다.
‘근데…… 안 보여.’
길잡이의 눈으로 봐야 겨우 보일 정도.
파괴력이 강하면 화려하고 눈에 띈다.
응축된 힘이 강한 만큼 피하기 쉬워지는 것이 너무 당연한 이치였다.
‘광역 계열의 파괴력에, 저격 계열의 정교함에, 암살자 계열의 은밀함까지 갖추고 있다고?’
그는 합당한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
‘신기를 가지고 있구나.’
신기. 신의 무구라 불리는 것.
룰 브레이커를 강화했다는 것까지는 공개되었지만 김철수가 공개한 게 다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틀림없었다. 김철수는 신기 보유자였다.
‘근데 예상 밖이기는 하군.’
흑표범은 김철수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동료의 죽음마저도 방송거리. 그러니까 유희로 써먹는다고 생각했으니까.
동료의 비석 앞에 국화꽃을 헌화할 때도 너무 역겨워서 참을 수 없었다.
그나마 에건 폴은 인간적으로 애도라도 하지, 흑표범이 본 김철수는 딱히 애도하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정말로 시신을 구해왔잖아.’
그것도 목왕의 능력으로 손수 만들어낸 관에 담아서 말이다.
모래지렁이의 서식처 안에서 저런 걸 만들어 오려면 얼마나 많은 심혈과 노력을 기울였을지, 모래지렁이를 직접 상대해 봤기에 잘 알고 있었다.
에건 폴과 어벤저스 사단은 관 앞에 둘러섰다.
에건 폴이 대표해서 관 뚜껑을 열고 얼굴을 확인해 봤다.
“마이클. 폴.”
어벤저스 사단의 플레이어들은 눈시울을 붉혔다.
저번에 사망한 동료들이 맞았다.
“고맙다, 김철수.”
차진혁은 어깨를 으쓱하면서 어벤저스 사단 애들이 잠시 묵념하는 것을 기다려주었다.
이들과의 플레이 자체가 너무 희한한 느낌이었다.
던전 안에서 타인의 죽음을 추모한다는 건, 원래 배부른 소리였다.
던전 내에서는 설령 내 가족이 죽어도 전진해야만 한다.
어물쩍거리는 1초가, 타인의 삶과 죽음을 가르기도 한다.
‘묵념이라.’
한세린은 조금 불만인 모양이었다.
차진혁에게 작게 속삭였다.
“아니. 벌써 30초나 썼어. 30초 동안 뭐가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데 애도는 무슨 얼어 죽을 애도야? 얼굴 확인했으면 얼른 관뚜껑 닫고 플레이부터 진행해야 할 거 아냐?”
“…….”
“뭐라고 해야 하는 거 아냐?”
차진혁도 저 말에 크게 공감했다.
머리로는 말이다. 하지만 말은 다르게 했다.
“잠깐 기다리자.”
“……왜?”
너답지 않게 왜 그래?
한세린의 눈동자에는 의문이 가득 담겨 있었다.
“어…… 음.”
왠지 모르게 저 묵념의 시간이 그리 아깝지 않은 것 같은 느낌인데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차진혁 스스로도 몰랐다.
그래서 만능 핑계를 들이댔다.
“솔직히 나는 잘 모르겠는데, 사람들이 이런 장면을 좋아하더라고.”
“아하. 방송각?”
“그렇지.”
“그렇다면야 뭐. 그렇대, 얘들아.”
한세린이 차진솔과 목재현, 김정현을 향해 말해주었고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다들 납득한 표정이었다.
차진혁은 한 마디를 삼켰다.
‘그리고 솔직히 여기 난이도 별로 안 높아 보이거든?’
던전을 하도 많이 돌아다니다 보니 대충 감이 온다.
이곳이 어려운 곳인지 어렵지 않은 곳인지.
솔직히 힘 빼고 대충 해도 충분히 클리어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자신감이 차올랐다.
‘하지만 이런 말은 하지 말아야지.’
사고는 늘 예상치 못한 순간에 찾아온다.
괜히 방심했다가는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나는 길잡이가 아니니까!’
이런 예감 같은 건 믿지 않기로 다짐하며 초심을 다잡았다.
* * *
정신을 겨우 추스린 흑표범은 다시금 안내를 시작했다.
“이 모래사장을 지나면 정글 같은 필드가 등장한다. 그곳을 며칠간 뚫고 지나가면 아주 오래된 사원이 하나 있어. 뭐, 에건 폴의 방송을 봤다면 이미 알고 있는 부분이겠지만 말이야. 다만, 모래지렁이라는 변수가 발생했던 만큼 정글 필드 안에서도 변수가 발생할 수도 있다.”
차진혁이 손을 들어 올렸다.
“주요 필드가 사원 안이라면, 정글 필드에서의 안내는 전직 패스파인더에게 맡겨보는 건 어때?”
“…….”
어, 약간 불만 같네? 이럴 때는 때리면 되는데.
그런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차진혁은 방송을 생각했다.
어떻게 하면 더 재미있는 그림이 나올지, 시청자들이 더 잘 납득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것은 스트리머의 의무였으니까.
“아니, 너희 쪽 길잡이를 무시하는 건 아니고. 길잡이한테는 체력과 집중력이 필수잖아. 체력 비축 좀 하라고.”
흑표범은 인상을 살짝 찡그렸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듣고 보니 김철수의 말이 맞았기 때문이었다.
“그러지. 이곳에는 몇몇 동물형 마물들이 존재한다. 개중 제일 위험한 개체는 붉은 반달곰이야. 레벨은 200초반. 육탄계열 마물이라 직접 상대하면 체력소모가 꽤 심할 거다. 붉은 반달곰 서식지는 우회해서 가는 것을 추천하지.”
“뭐라는 거야?”
한세린은 하아- 한숨을 내쉬었다.
“던전에서 무슨 국밥 말아먹는 소리 하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