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는 그만 강해지고 싶다 233화
누군가에게는 예능. 또 누군가에게는 생존 다큐.
에건 폴에게는 지금의 이 상황이 리얼 생존 다큐였다.
“오, 오해다. 우리는 그저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했을 뿐이야!”
한세린이 눈을 가늘게 뜨고 말을 이었다.
“그런 것 치고 너무 우왕좌왕하던데.”
“그, 그건 처음 보는 타입의 마물이어서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고민할 시간이 필요했던 것뿐이다.”
따지고 보면 어벤저스 사단의 반응은 지극히 상식적이었다.
차진혁 기준에서야 이미 알고 있는 마물이었지만, 어벤저스 사단 입장에서는 완전히 처음 보는 개체였으니까.
섣불리 빨려 들어간 동료를 구하려 했다가 더 많은 피해를 볼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아무리 뛰어난 플레이어들이라고 해도 그런 예기치 못한 상황에 맞닥뜨리면 그 정도 당황하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
사실 차진혁과 한세린의 눈으로 봐서 ‘우왕좌왕’이었지, 객관적인 시선에서 봤을 때 그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한세린의 기준은 김철수였다.
“김철수는 곧바로 구해냈잖아.”
“그건…….”
에건 폴은 점점 더 억울해졌다.
그런 미친 화력으로 그렇게 정교한 컨트롤을 동시에 할 수 있는 자가 누가 있단 말이냐!
그리고 솔직히 말이야 바른 말이지 우리가 무슨 우왕좌왕까지 했다고 그래!
김철수만큼 기민하게 대응하지 못했던 거지!
솔직히 김철수가 비상식적으로 대단한 거지, 우리가 못난 건 아니지 않나?
그러나 한세린은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너무 이상하네. 스트리머인 김철수가 느꼈고, 은퇴한 길잡이인 나조차도 느꼈는데 왜 흑표범은 못 느낀 것처럼 굴었을까? 김철수처럼 쉽게 구할 수 있는데 왜 아무도 구하려 들지 않았을까? 이렇게 쉬운 것들을 왜 못했을까? 아니면, 안 한 건가?”
에건 폴은 억울한 나머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억울해서 미쳐 버릴 것 같았다.
“너희들, 쉽다의 기준이 지나치게 이기적이라는 생각은 안 해본 거냐!”
그 사이, 해안가에 도착했다.
에건 폴의 얼굴이 무척 붉어져 있었고 차진혁이 히죽 웃었다.
“표정 리얼했다, 에건 폴.”
“……뭐?”
“연출은 이쯤하고, 다음 진행에 집중하자.”
차진혁은 꽤 기분이 좋아진 상태.
에건 폴의 실감 나는 임기응변으로 꽤 좋은 영상이 담긴 것 같았다.
“너 연기 진짜 잘하네. 괜히 일류가 아니구나.”
“…….”
에건 폴은 에건 폴 나름대로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내가 일류라고?
‘아무래도 김철수는…….’
‘모래지렁이를 파악하고 습격에 대비하는 것쯤은 아주 쉬운 일이지. 그러니까 에건 폴은 일부러 모른 척한 것이 틀림없어! 솔직히 그깟 것에 대처 못하는 건 말도 안 되지!’라고 생각하는 게 확실했다.
에건 폴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보통은 너무 돌발상황이라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했구나…… 라고 생각하는 게 상식적인 거 아닌가.’
내 상식이 틀린 건가.
에건 폴의 혼란스러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차진혁은 해안가에 내린 뒤 먼저 도착한 흑표범에게 시선을 옮겼다.
“해안가에 도착했습니다. 이다음은 어떻게 진행이 될까요? 어? 마침 어벤저스 사단의 길잡이, 흑표범이 무언가를 느낀 것 같습니다! 과연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요?”
흑표범은 고개를 갸웃할 뻔했다.
‘아니, 내가 뭘 느꼈어?’
그제야 뭔가 변화가 있음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 * *
흑표범이 알고 있던 진행과는 달라졌다.
그건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
이전과는 달리, 처음 도착한 해안가에서 모래지렁이를 사냥해 버렸으니까.
첫 진행이 달라지면 다음 진행도 달라지는 법이다.
“전원, 전투 준비!”
흑표범은 꼬리를 땅에 찔러 넣었다.
‘아까와 같은 감각!’
수맥같이 느껴졌다.
솔직히 지금도 수맥처럼 느껴지지만, 이제는 이게 수맥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차진혁은 역시! 아까는 모른 척했던 거구나! 라고 깨달았다.
차진혁은 한 발자국 뒤로 빠진 채 어벤저스 사단의 모습을 담았다.
“아까는 수컷이었고 이번에는 암컷입니다.”
그 말을 들은 흑표범은 찔끔 놀랐다.
‘수컷, 암컷이 따로 있었다!’
수맥 형상의 모습으로 겨우 느껴지는데.
김철수는 더 많은 것을 이미 파악한 모양이었다.
“아까보다 덩치가 더 크고 날렵한 놈이야.”
아무래도 수컷보다 암컷이 더 강한 개체인 듯했다.
어벤저스 사단의 군주인 힉슨이 플레이어들을 배치하고 전투태세에 돌입했다.
덕분에 모래지렁이의 급습에 아무도 빨려 들어가지 않았다.
잠깐 모래사장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던 모래지렁이는 또다시 모래 안으로 숨어들었다.
힉슨이 외쳤다.
“놈의 약점은 머리다!”
그것은 너무나 합당한 추론이었다.
김철수가 망치질 한 번으로 통째로 날려버린 개체였으니까.
그리고 그 모습을 보며 김철수는 히죽 웃었다.
‘머리가 약점이라니.’
때려보니까 머리가 제일 단단하던데.
푸악!
모래를 파헤치며 모래지렁이가 또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체술가 계열의 몇몇이 달려들어 모래지렁이의 시선을 끌고, 궁수 몇이 화살을 쏘아내서 머리를 맞췄다.
‘쟤네도 용 쓴다, 용 써.’
차진혁도 저들의 마음을 아주 잘 이해할 수 있었다.
어벤저스 사단은 기본적으로 에건 폴이 꾸리고 있는 연합이고, 당연히 방송을 위해 움직이는 연합이다.
‘내가 그란델을 상대할 때 꽤 힘겨웠었는데.’
차진혁 나름대로 위기감을 연출하고 긴장감을 보여주기 위해서 많은 방법을 동원해야만 했다.
그래서 어벤저스 사단이 뼈 빠지게 노력하는 것이 훤히 보였다.
머리가 약점이 아닌데 머리를 공략하고 있는 것부터, 저들이 방송에 진심이라는 사실을 느낄 수 있어서 기분이 좋았다.
‘방송 컨셉을 통일했으면 좋았을걸.’
차진혁은 압도적인 클리어가 이번 방송의 컨셉이었다.
그러나 어벤저스 사단의 컨셉은 그렇지 않은 것 같았다.
이런 걸 사전에 협의했어야 했는데 실수였다.
‘또 배웠다. 다음에는 사전에 확실히 협의해서 진행해야지.’
그렇다고 방송에 저토록 진심인 저들의 플레이를 방해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모래지렁이야 아까도 때려잡은 개체니까 똑같은 영상을 중복해서 보여줄 필요도 없었고 말이다.
“그럼, 우리는 우리 콘텐츠를 진행해 볼까?”
차진솔이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우리 콘텐츠? 뭔데?”
사실 차진솔은 꽤 지루한 상태였다.
차진혁이라면 한 방에 때려잡을 수 있는 마물로 뭐 저렇게 비장하게 연출하고 심각하게 플레이하는 건지.
시청자들 입장에서는 비장한 전투일지 몰라도 차진솔 입장에서는 고구마였다.
“시신. 수습해야지.”
“시, 시, 시신이요?”
방어능력이 월등한 만큼, 차진솔보다 조금 더 지루함을 느끼고 있던 목재현이 찔끔 놀랐다.
수많은 시체를 봐왔지만 여전히 시체는 무서웠다.
“그래. 모래지렁이, 저놈이 땅 아래에 굴을 엄청나게 많이 파놨으니까.”
한세린이 물었다.
“김철수. 땅 아래에 시신이 있는 게 느껴지는 거야?”
“어. 너도 느껴지지?”
“…….”
차진혁은 딱히 한세린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내가 대충 느꼈으면 너도 느꼈겠지 뭐, 하는 정도의 마음이었다.
“그, 근데 형. 이거 땅굴 아래로 들어갔다가 땅굴 무너지면요?”
“네가 덩쿨 식물같은 걸로 대충 지지하면 되지 않아? 음, 일종의 터널처럼 말이야.”
“……아! 그렇게 할게요.”
김정현은 말없이 주먹만 불끈 쥐고 있었다.
늘 정의로움에 목마른 그는, 시신을 찾아낼 수만 있다면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고…… 고…… 씽.”
* * *
에건 폴은 직접 전투에 참여하고 있는 플레이어들보다 훨씬 더 넓은 시야를 가지고 있다.
스트리머라는 직업 때문이기도 했지만, 전투 플레이어들보다 상대적으로 훨씬 여유가 있어서이기도 했다.
김철수팀의 대화를 듣게 된 그는 귀를 의심했다.
“그, 근데 형. 이거 땅굴 아래로 들어갔다가 땅굴 무너지면요?”
사실 에건 폴 입장에서는 이상한 질문이었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땅굴이 무너질 걸 걱정하기보다는 땅굴 안에서 모래지렁이가 급습할 것을 두려워해야 하는 거 아닌가?
‘모래지렁이에 대한 두려움은 전혀 찾아볼 수 없군.’
“네가 덩쿨 식물 같은 걸로 대충 지지하면 되지 않아? 음, 일종의 터널처럼 말이야.”
“……아! 그렇게 할게요.”
너무 쉽게 납득해 버리는 모양새에 허탈해질 정도였다.
게다가 아, 그렇게 할게요라니?
토목공학자들이 봤다면 기함을 토할 일이었다.
“고…… 고…… 씽.”
“그게 언제 적 유행어냐, 내 방송 컨셉 레트로 아니다.”
“죄송…… 합니다.”
김철수도, 자유의 성녀도, 목왕도, 권왕도.
모래지렁이에는 아무런 감흥이 없어 보였다.
그러니까 ‘고고씽’ 같이 사소한 말에 트집을 잡고 있지.
어벤저스 사단이 사활을 다하여 사냥하고 있는 저 날랜 마물이 저들에게는 그냥 공기처럼 보이는 모양이었다.
‘자, 잠깐!’
저들은 정말로 모래 구덩이 안으로 몸을 던졌다.
에건 폴 입장에서는 너무 비상식적인 일이었다.
‘우리는 육지에서 사냥하는 것도 이렇게 버거운데.’
아예 모래지렁이의 터전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 * *
앞장서서 걷던 한세린이 말했다.
“습격을 안 하네.”
“그러게.”
차진혁으로서도 예상한 일은 아니었다.
참고로 말하자면 예상 못한 게 아니라 예상 안 했다.
모래지렁이가 어떻게 움직이든 알 바 아니어서, 생각 자체를 안 했던 것에 가까웠다.
한세린이 정답을 내놓았다.
“수컷이 죽게 되면서 아마 공포 같은 게 각인됐나 봐. 정신적으로 연결이 되어 있었다든지.”
“잘됐네. 혹시 힘 조절 잘못했다가 시신까지 날려 버리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히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 같았다.
레벨 197의 암컷 모래지렁이는 차진혁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한세린이 뛰어갔다.
“저기 있다!”
이곳에서 두 구의 시신을 수습할 수 있었다.
목재현이 순식간에 나무로 된 관을 만들어 시신을 수습했다.
무서워 죽겠다면서도 할 일은 곧잘 했다.
“여기에는 더 이상 시신이 없는 것 같아.”
“그래. 지상으로 올라가자.”
김정현이 관 두 개를 통째로 짊어졌다.
인벤토리에 넣을 수도 있었지만, 그것은 망자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며 굳이 그렇게 했다.
차진혁은 피식 웃었다.
‘비효율적인 짓을 하고 있네.’
검왕 시절이었다면 저런 짓 못하게 했을 텐데.
스트리머가 된 지금, 김정현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뭐, 여기가 그렇게 급박한 곳은 아니니까.’
저렇게 큰 관을 두 개나 짊어지고 있으면 당연히 기동성이 떨어진다.
0.1초에 생과 사가 오가는 치열한 전장에서야 저러면 안 되겠지만 여기는 아주 일상적이고 평화로운 곳이니까 그냥 내버려 두기로 했다.
‘근데…… 좀 이상하다?’
예상 외로, 정말 위험한 상황이 연출되었다.
‘나서야 하나?’
거기서 차진혁은 깨달음을 얻었다.
‘아!’
에건 폴이 왜 저렇게 힘겹게 싸우고 있는지.
또 왜 플레이어 하나가 빨려 들어갈 듯, 정말로 위험한 상황이 연출됐는지 알 것 같았다.
‘에건 폴. 네 녀석.’
약간 감동받았다.
‘내가 극적으로 등장하는 무대를 꾸며주고 있나 보다.’
그렇다면 그에 응해주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