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는 그만 강해지고 싶다 231화
한세린은 목소리를 낮추고서 내게 말했다.
“내가 뭘 모르는 척하고 있는데?”
“그야…….”
얘도 방송 생각해 주나?
일부러 모르는 척해주나?
“아니 뭐 별 건 아니고.”
흑표범도 그렇고 얘도 그렇고 뭐, 다들 생각이 있겠지.
사실 흑표범을 믿는다기보다는 한세린을 믿는 편에 가까웠다.
그래도 혹시 몰라 한세린에게 다시 말했다.
“여기 백사장 밑에 벌레들 숨어 있잖아.”
“……벌레가 숨어 있다고?”
“어. 설마 몰랐냐?”
“…….”
표정만 보면 정말 리얼하다.
진짜 몰랐던 것 같은 모습이다.
“몰랐어.”
“…….”
아니, 진짜라고? 한세린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얘가 연기를 하는 건지 진짜인지 도무지 모르겠어서 중계자의 통찰을 써봤다.
[#벌써 감이 죽었나 #나 왜 안 느껴져?]
나로서도 좀 당황스럽기는 하지만, 어쨌든 얘는 길잡이로서 그럴 수도 있다고 본다.
‘근데 쟤는 현역이잖아.’
흑표범은 알아야 하는 거 아닌가?
그사이 한세린이 내 말을 흑표범에게 전했고, 흑표범은 전진을 잠시 멈췄다.
흑표범이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얼굴에도 복면을 하고 있었는데 눈빛이 꽤 거슬렸다.
내가 길잡이 영역을 침범한 것이 좀 짜증 난 모양이다.
[#방송에 미친놈 #역겨운 가짜 헌화]
기본적으로 얘는 나를 별로 안 좋아하는 거 같다.
사실 세상 사람 모두가 날 좋아할 수는 없는 거니까 날 좋아하든 말든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는데, 저 마인드가 실망스럽기는 했다.
‘스트리머가 방송에 미쳤으면 칭찬해 줘야 하는 거 아니냐? 그걸 싫어하면 어떡해?’
[#내 친구의 죽음은 #유희거리가 아니다]
‘음, 친구를 잃었으면 제정신이 아닐 수도 있겠지.’
내가 이제 이런 생각도 할 줄 안다.
예전 같았으면 일단 때리고 봤을 텐데. 정말 나도 보편적인 사람이 된 것 같아서 기쁘다.
흑표범이 내게 물었다.
“정말이냐? 이 밑에 마물이 숨어 있다는 사실이.”
“나는 그렇게 느껴.”
“정말 그런지 확인을 좀 해봐야겠군.”
흑표범은 땅에 꼬리를 꽂아 넣고서 눈을 감았다.
중심 잡는 것 외에도 여러모로 쓸모가 있는 모양이었다.
약간의 시간이 흐른 뒤, 흑표범이 눈을 번쩍 떴다.
“이 아래는 아무것도 없다.”
“…….”
아닌데. 있는데. 그렇지만 이건 길잡이의 영역이니까 크게 간섭하지는 않기로 했다.
내가 딱히 별다른 말을 하지 않자 내게 핀잔을 주기도 했다.
“길잡이를 좀 믿어라.”
“…….”
이 아래 분명히 마물이 있다고 계속 주장할 수 있겠지만 굳이 그러지는 않았다.
생각해 보니, 이렇게 상황을 연출한 뒤 나중에 마물이 튀어나오면 더 좋은 영상이 나올 거 같다.
그걸 생각하니 벌써부터 짜릿하네.
흑표범이 내게 경고했다.
“시간을 지체하면 안 돼. 이곳은 밀물이 점점 밀려드는 필드다. 정말 중요한 게 아니면 길잡이의 발목을 잡지 않았으면 좋겠군.”
근데 나는 괜찮은데 오히려 한세린이 기분 나쁜 듯했다.
“야. 네가 못 느낀 걸 김철수가 느꼈을 수도 있잖아.”
말투가 왜 이렇게 공격적이야?
번역구슬은 그 효과가 상당히 뛰어나서 거의 원어민에 가깝게 뜻이 전달된다.
“도태된 길잡이는 빠져.”
“뭐?”
“듣자 하니 두더지맨과의 경쟁에서 밀렸다던데.”
저 멀리, 미국 땅에 있어서 그런가.
좀 왜곡된 정보를 갖고 있다.
한세린은 두더지맨과의 경쟁에서 패배해서 군주로 전향한 게 아니고, 군주로서의 재능이 훨씬 뛰어나서 군주로 전향한 거다.
내가 검이 아니라 망치를 들기 시작한 것처럼 말이다.
저 새끼 아무리 지금 제정신이 아니라지만 말을 좀 함부로 하네.
-관자 깰까요?
방금 츄릅, 하고 입맛 다시는 소리 난 거 같은데.
그래도 함께 던전을 클리어하고 있는 동료의 머리를 깨는 건 상도덕에 너무 어긋나는 일이다.
한세린은 흑표범을 계속 도발했다.
“현역이면서 김철수보다 못한 길잡이 노릇을 하느니 차라리 나처럼 은퇴라도 하는 게 어때?”
“마물은 없다. 김철수가 잘못 느꼈겠지. 이 아래 거대한 수맥이 흐른다. 마치 움직임이 뱀이나 지렁이 같아서 김철수가 오인했을 것이다.”
“나는 김철수의 말이 맞다고 봐.”
“네가 느꼈나?”
“아니. 난 못 느꼈지.”
“그럼 입 다물고 따라와. 이 원정의 길잡이는 나야.”
“…….”
한세린은 무척 불만인 듯했으나 더 이상 토를 달지는 않았다.
흑표범의 말대로, 이번 원정의 길잡이는 흑표범이니까.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가기 마련이고 한 원정의 길잡이는 한 명이어야 했다.
‘얘네 둘이 싸울 줄은 몰랐네.’
분위기가 꽤 냉랭했다. 사실 어벤저스 사단이 나를 보는 시선이 그리 곱지만은 않았다.
‘내가 에건 폴의 경쟁자라서 그런가?’
원래 10명이 모이면 개중 3~4명 정도는 나를 굉장히 좋아하고 4~5명 정도는 내게 별생각이 없고, 1~2명 정도가 나를 싫어한다.
근데 여기 모인 30여 명 중 대충 20여 명 정도는 나를 싫어하는 느낌이다.
비율이 평소랑 좀 달랐다.
중계자의 통찰로 일일이 살펴보면 더 정확히 알 수 있겠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하지는 않았다.
“쓸데없이 시간이 너무 지체됐군. 해안절벽으로 간다.”
흑표범의 인솔 아래, 우리는 해안절벽 쪽으로 향했다.
어벤저스 사단이 이미 공략해 봤던 곳이니만큼, 우리는 그리 어렵지 않게 나룻배를 획득했다.
여섯 명씩 한 조를 이루어 나룻배를 머리에 지고 이동하여 원래 있던 모래사장에 도착했다.
“배를 띄워. 차례차례 올라탄다. 저기 섬으로 건너갈 거야.”
* * *
나는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있어. 지렁이같이 생긴 거대한 놈이.’
모래에 숨어 있는 거대한 지렁이.
지금 당장 이름이 보이는 건 아니지만 뭔지 알 것 같다.
말 그대로 ‘모래 지렁이’라 불리는 개체였고, 레벨은 190대로 그렇게 강한 놈은 아니었다.
다만 사람을 모래 안으로 끌고 들어가서 질식시키는 특성을 가지고 있어서 상대하기 까다로운 부분이 있었다.
말하자면 본신 능력은 그렇게 강하지 않지만 지형지물을 굉장히 잘 쓰는 타입이라고나 할까.
‘사냥을 준비하고 있는데.’
분명히 느껴졌다. 곧 놈은 사냥을 시작할 것이다.
지금 어벤저스 사단 애들이 나룻배에 몸을 싣고 있다.
말하자면 이쪽 숫자가 줄어들고 있는 중.
아마 10명 이하로 떨어지면 우리를 덮치겠지.
‘근데 이쯤 되면 흑표범도 느낄 법한데?’
자존심 때문인가. 왜 반응이 없지?
모래 지렁이는 무시하고 클리어를 진행할 생각인가?
이쯤 되니 한세린도 느낀 것 같았다.
“이제 나도 느껴져. 흑표범도 분명 느꼈을 거야. 근데 모른 척하고 있는 거 같아.”
“클리어에 별로 영향을 안 끼친다고 판단해서 그런 거겠지 뭐.”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거 같기도 했지만 별로 상관은 없었다.
아무튼 절반가량의 인원이 나룻배에 올라탔다.
그리고 얼마 후 예상대로 모래 지렁이의 습격이 시작되었다.
팍!
모래가 솟구침과 동시에 약 5미터 가량의 지렁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전체적으로 연분홍빛을 띠는 놈이었다. 눈은 퇴화되어 없고, 날카로운 이빨이 많이 달린 커다란 입을 가지고 있었다.
입 주변에는 징그럽게 생긴 빨판이 굉장히 많이 돋아나 있었는데 저걸로 사냥감을 빨아당긴 뒤 모래를 끌어들이는 수법을 사용했다.
‘뭐지?’
나는 당연히 저쪽에서 대비하고 있을 줄 알았다.
아마 원거리 계열 딜러들이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는데, 보아하니 꽤 당황한 모양새였다.
‘아니 진짜 왜 저러지?’
길잡이로서 은퇴한 한세린이 느꼈으니까 사실 흑표범도 느꼈다고 보는 게 맞을 텐데.
흑표범이 경고 안 해줬나?
“크아악!”
한 플레이어가 모래 안으로 끌려들어갔다.
발버둥 쳤으나 빠져나오기 힘들어 보였다.
‘대처할 줄 알았는데.’
왜 이걸 대처 못하지?
설마 일부러 이런 상황을 연출한 건가? 에건 폴의 방송을 위해서?
아니 그래도 아무리 방송이 좋다지만 동료를 희생시켜가면서 위기감을 연출하지는 않았을 거 같다.
어벤저스 애들은 약간 우왕좌왕하는 중이었다.
‘일단 3분 이내에 구해야 하니까.’
관통력을 가진 마법이나 스킬 등으로 얼른 공격해서 놈이 먹잇감을 포기하고 도망치게 만들거나 통증을 참지 못하고 모래 위로 솟구치게 만들어야 한다.
아무래도 둔기인 미리보다는 대검 라칸이 관통공격을 사용하기에는 좋겠지.
-주인…… 나도 할 수 있어요.
저기서도 이제야 궁수계열 애들이 활을 준비하고 있는 거 같다.
내 생각보다 1초나 느렸다.
1초면 목숨 몇 개가 오가는데 진짜 왜 이렇게 답답하게 구는 건지 원.
-나도 날카롭게 파고들 수 있어요. 나를 써줘요.
얘는 또 엄청 흥분해서 달뜬 숨소리를 내뱉었다.
-내가…… 터뜨릴 거야. 머리를…… 하아…… 관자를!!!
너무 간절한 목소리여서 외면할 수가 없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미리를 꺼내 들었다.
‘검을 들면 검기인데…….’
망치 들면 ‘망치기’인가? 검기에 비해서 약간 멋이 없는 느낌인데.
내 마음을 읽었는지 미리가 흥분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해머…… 포스.
오 그래, 해머포스. 이건 어감이 괜찮은 거 같다.
얘도 환상검희한테 꽤 많은 영감을 받았는지 시동어 같은 것을 중얼거렸다.
-날카로울 수 없는 자가 날카로움을 기원하나니, 결국은 뚫어내리라. 부서져라. 머가리여.
미리와 공명하는 것이 느껴졌다. 미리와 하나의 몸이 된 기분.
신검합일과 비슷한 이 기분은 늘 나를 들뜨게 했다.
‘재미있다.’
이것만으로도 내게 큰 쾌감을 안겨다주었다.
미리와 깊은 교감을 나누면서, 미리를 들어 올렸다.
미리의 전신에 황금색 기운이 일렁거렸다.
-빨리 쏴줘……요.
우리는 정신적으로 깊이 결속이 되어 있고, 현재 미리의 마음이 곧 내 마음.
나 또한 마음이 달아올랐다.
‘놈의 위치는, 여기!’
검기를 쏘아내듯 해머포스를 쏘아냈다.
나도 모르게 힘이 잔뜩 들어갔다.
* * *
에건 폴은 먼저 나룻배에 오른 상태.
김철수를 카메라에 담는 와중에 그는 깜짝 놀라 두 눈을 꿈뻑거렸다.
‘김철수가…….’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김철수 자체가 황금색 망치처럼 보였다.
눈이 보이지 않는 거대한 거인이 망치를 휘두르는 것 같았다.
‘쏘아졌다?’
검기와도 같은 저 황금빛 기운이 땅을 향해 쏘아졌다.
쿠구구궁!
약간의 지진이 일은 느낌이었다.
물가에 잔진동이 일었고 해안가에 떠 있는 나룻배들이 흔들거렸다.
“저건 도대체…….!”
한차례 모래 폭풍이 이는가 싶더니 거대한 구멍이 생겨버렸다.
지름 약 6미터.
모래사장이었던 그곳에는 커다란 싱크홀이 생겼다.
에건 폴은 황급히 드론을 날리고 줌을 당겨 싱크홀 안쪽을 촬영했다.
‘모래가…… 녹았어?’
모래가 녹았다가 급속도로 굳으면서 일종의 벽이 되었다.
덕분에 싱크홀의 모양이 유지되고 있었다.
“정말로…… 마물이 있었습니다.”
에건 폴은 아까 한세린과 흑표범의 언쟁에 끼어들지 않았다.
그는 김철수와 한세린을 신뢰하지만, 그렇다고 흑표범을 믿지 않는 건 아니었다.
그런데 김철수의 말이 맞았다.
‘마물의 머리통이 날아갔어.’
정말 신기한 것은 머리통이 통째로 증발하는 그 가운데, 빨려 들어갔던 앤더슨은 무사했다는 사실이었다.
앤더슨은 현재 기절한 상태.
당연한 말이지만 에건 폴의 방송에서는 난리가 났다.
-와 저게 스트리머라고? 말도 안 돼.
-저걸 뭐라고 해야 함? 원거리 광역딜러?
-원거리 아니고 근거리 아님?
-원거리 근거리 다 가능한듯 ㅋㅋㅋ
미국 최상위 랭커들도 보여주기 힘든 수준의 화력을 스트리머인 김철수가 보여주었다며 난리가 났다.
-근데 앤더슨은 전혀 안 다친 거 같은데.
-그럼 저건 광역기가 아니라 정밀타격기라는 거네?
시청자들은 놀라운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
-정밀타격기인데 너무 강해서 광역기처럼 보인 듯.
-ㅁㅊ? 저게 정밀타격기라니.
-저 정도 화력을 구사하는 딜러 중에 저 정도 컨트롤 보여주는 랭커 있음?
-없음. 절대 없음. 한 번도 못 봄.
어벤저스 사단은 황급히 구조대를 편성해 앤더슨을 끌어올렸다.
말 그대로 앤더슨은 털끝 하나 다치지 않았다.
-저 화력으로 이 컨트롤이 가능함?
-근데 김철수 표정 왜 저래?
김철수는 어딘지 모르게 불만족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아…… 0.2㎝나 빗나갔네.”
차진혁의 기준에서는 너무 심한 컨트롤 미스였다.
그리고 차진혁은 중계자의 통찰로 흑표범의 속마음을 읽어내기로 했다.
‘도대체 무슨 꿍꿍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