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는 그만 강해지고 싶다 188화
이건 아마도 내 눈에만 보이는 형상인 듯했다.
‘익숙하네.’
오래전에 획득했고 나와 상당히 오래 함께해 왔던 신비가 모습을 드러내 한 단계 성장하는 것이 느껴졌다.
문양에 손이 닿자 말캉한 무언가를 만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내 손에 닿은 그것이 구름처럼 퍼져 나가 내 몸을 감쌌고 내 온몸이 초록빛으로 물들었다.
[업적효과, ‘예술가의 고뇌’가 신비, ‘행운 그 자체’를 강화합니다.]
어째서 ‘행운 그 자체’에 예술적인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고 판단했는지 아는가?
나도 모른다.
아무튼 예술가의 고뇌는 행운 그 자체를 선택했다.
‘두 개의 궁합이 엄청 좋다!’
똑같은 김치라도 라면과 먹느냐, 요구르트랑 먹느냐가 다르다.
‘예술가의 고뇌’와 ‘행운 그 자체’는 그야말로 라면과 김치였다.
궁합이 미쳤다.
나는 포근한 침대에 누운 것 같은 편안함을 느꼈다.
‘[행운 그 자체]가 기뻐하고 있…… 아니, 미치고 있어?’
어떤 신비에는 자아가 깃든다.
어린 뇌룡을 오염시켰던 ‘광적인 집착’처럼 말이다.
지금 ‘행운 그 자체’에 약간의 자아가 깃든 것 같았다.
내 목소리에 깔깔대며 웃는 광소가 들려왔다.
‘환청?’
김치와 라면의 조합은 훌륭하다.
그러나 너무 많이 먹으면 건강에 해롭다.
‘너무 과한 거 같은 느낌인데.’
왠지 모를 불안감에 휩싸였다.
‘행운 그 자체는 이것만으로도 꽤 많은 체력소모를 요구해. 가끔은 정신력을 모조리 빨아먹기도 하고.’
기적 비슷한 효과까지 일궈내는 신비다 보니 이런저런 제약들이 있기 마련이었다.
내가 의도하지 않은 상황에서 갑자기 꿈틀거리기도 하고, 여기에 행운의 징조가 있다며 열렬히 신호를 보내기도 한다.
어떤 경우에는 제멋대로 활성화되는 경우도 있었다.
내 입장에서 이건 내가 통제할 수 없는 변수에 가까웠다.
‘그래도 행운 그 자체까지는 그럭저럭 괜찮았는데.’
근데 이게 만약 자아까지 생겨서 제멋대로 날뛰게 된다면?
이를테면 내가 조로 같은 강적과 싸우고 있는데 갑자기 튀어나와 내 체력과 정신력을 모조리 갉아먹는다면?
아주 중요한 타이밍에 어떤 균열을 만들어낸다면?
내게 좋은 쪽으로 작용하는 경우도 많겠지만 그 반대의 경우도 무시할 수는 없었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변수는 위험해.’
막으려면 지금 막아야 했다.
강화가 완전히 끝나기 전에.
내 몸에 온전히 흡수되기 전에 말이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고 있지? 네 몸에서는 무슨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거냐? 혹시 명상을 너무 날치기로 해서 부작용이 생긴 건 아니겠지?”
“그런 건 아니다.”
나는 나도 모르게 히죽 웃었다.
“내가 많이 변한 것 같아서.”
“왜 그렇게 미친놈처럼 웃는 거냐?”
예전의 나였다면, 그러니까 검술가 시절의 나였다면 지금의 이 변화를 어떻게 해서든 막았을 것이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변수는 너무 많은 위험을 만들어낸다.
“스트리머 하길 잘한 거 같아서.”
“그놈의 스트리머는 무슨.”
스트리머인 나에게 돌발변수는 엘튜브각이다.
나는 분명 당황할 거고, 내 당황은 시청자들에게 즐거움을 선물하겠지.
검술가 시절에는 상상하지도 못했고 보지도 못했던 넓은 세계가 열린 느낌이다.
골룸이 이상한 소리를 해댔다.
“그냥 먼치킨이라고 하지?”
“…….”
내가 먼치킨 특성을 가지고 있는 걸 티 낸 적이 있었던가?
계속 무시해 왔는데, 생각보다는 눈치가 빠른 놈인 것 같다.
* * *
[신비, ‘행운의 신’을 획득하였습니다.]
내 몸에 커다란 가호가 깃든 것 같았다.
어떻게 표현해야 맞는 표현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황금빛 따사로운 햇살이 내 몸을 뒤덮은 것 같았다.
포근한 이불에 돌돌 말린 것 같기도 했다.
아무튼 기분 자체는 좋았다.
‘다만…….’
사용할 엄두는 나지 않았다.
이거 사용했다가는 체력과 정신력이 남아나지 않을 것만 같은 직감이 들었다.
‘뭐, 써봐야 정확히 알긴 하겠지만.’
그러나 지금은 아닌 것 같다.
이왕 써보려면 안전하게 수호수의 권역에 들어가서,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는 곳에서 조용히 써봐야겠다.
“이로써 클리어는 완료되었다. 그런데 클리어 보상 산정이 꽤 오래 걸리는군. 이런 경우는 관리자의 개입이 있는 경우가 대다수이다. 혹은 서버의 밸런스를 흔들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란 보상이 주어지는 경우이거나. 또는…… 하여…… 하고…… 한 것이다.”
설명충이 또 설명을 시작했다.
나도 다 아는 내용이지만 그냥 대충 들어줬다.
편집자가 고생하는 거지, 내가 고생하는 건 아니니까.
[클리어 보상으로 ‘피카소의 붓’이 주어집니다.]
[던전 클리어의 공헌도에 따라 그 주인이 결정됩니다.]
약 3초의 시간이 흐른 뒤.
[플레이어 ‘골룸’에게 피카소의 붓이 주어집니다.]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아무리 봐도 내가 훨씬 잘했는데 골룸한테 이게 간다고?
그럼 골룸이 이겼다고?
‘……아!’
나는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내가 스트리머로서 보여준 게 아무것도 없다!’
만약 내가 길잡이였다거나 탱커였다거나 딜러였다거나했으면 분명 내게 모든 공헌도를 몰아줬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나는 스트리머였고, 스트리머의 본분인 방송을 켜지도 않았다.
물론 영상을 계속해서 녹화 중이기는 했다지만 그래도 역시 스트리머의 꽃은 생방인데 말이다.
그런데 골룸이 빽! 소리를 질렀다.
“어떤 미친놈들이 나한테 공헌도를 몰아줘!”
골룸은 콧김이 보일 만큼 세차게 씩씩댔다.
어찌나 화가 났는지 몇 가닥의 머리카락이 하늘로 솟아올랐다.
“누가봐도 김철수가 잘했는데!”
골룸은 분을 이기지 못하고 발로 땅을 꾹꾹 밟았다.
“관리자 나와! 어떤 대가리에 똥만 찬 관리자 새끼가 공헌도 판정을 이따위로 해? 안 나와? 시스템 판정이야 뻔한데 그걸 인위적으로 마구 바꾸어댔으니 이렇게 오래 걸리고 던전 내 마력 흐름이 버벅거리지! 이런 시X것들이 어디서 개수작을 부려! 이거 봐라! 출구에 노이즈 낀 거! 얼마나 만져댔으면 이따위야! 내가 이거 정식으로 문제 삼을 거야! 이 개새X들아! 으아아아아아!!!”
* * *
골룸이 한동안 행패를 부렸으나 관리자들은 보이지도 않았다.
한참 후에 골룸은 씩씩대며 말했다.
“지들도 꿀리는 게 있으니까 못 나오지.”
“근데 너 왜 그렇게 열 내냐?”
“너는 이 보상이 맞다고 생각하냐? 이거 분명 서버급 아이템이다. 게다가 귀속형이라고.”
“그러니까 너한테는 좋은 거 아니냐?”
“…….”
골룸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렇긴 하네?”
“나는 또 네가 아이템 빼앗긴 줄 알았지.”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지. 플레이에는 상도덕이라는 게 있는 거고, 나는 이런 편파판정은 용서할 수 없다. 내 자존심이 허락 못 해.”
말을 하다가 점점 더 열이 뻗친 골룸은 또 버럭 소리를 질렀다.
“참고로 나는 부캐다! 내 본캐 이름은 골럼베룸. 주 활동서버는 아르비스. 나는 절대 이 일을 그냥은 안 넘어가. 다 가만 안 둔다!!!”
한동안 이새끼 저새끼 이팔 저팔 시팔을 찰지게 내뱉던 그는 마지막으로 한 마디를 내뱉었다.
“지금이라도 번복하면 문제 삼지는 않겠다. 여기는 오픈 초창기 서버이고, 아직 일에 능숙하지 못한 관리자들의 실수라고 생각하면 넘어갈 수는 있는 문제니까!”
그리고 얼마 후.
결국 알림이 다시 들려왔다.
[시스템 오류가 발견되었습니다.]
[시스템 오류를 정정합니다.]
관리자들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으나 골룸에게 주어졌던 ‘피카소의 붓’이 차진혁에게 전달되었다.
골룸은 여전히 불만이 가득했다.
“시스템 오류는 무슨. 까고 있네. 시스템 오류 메시지가 뜨면 이런 마력흐름이 아냐.”
차진혁은 문득 궁금해졌다.
“그런 걸 구별할 수 있냐?”
“당연하지. 이거 마력값 역산하면 지금 관리자 놈들이 누군지도 파낼 수 있어.”
“네가 그런 걸 할 수 있다고?”
골룸이 얼굴을 살짝 붉혔다.
“나는 아니고, 골럼베룸.”
차진혁이 혀를 쯔쯧 찼다.
“이렇게 굴 거면 부캐는 왜 키우냐?”
“…….”
“부캐 가지고 와서 본캐 능력으로 과시할 거면 왜 부캐로 오냐고?”
“…….”
“보면 볼수록 치열하지를 못하다니까.”
“지한테 아이템을 넘겨줘도 지X이냐, 지X은.”
“아이템 넘겨준 건 고마운데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이번 플레이가 별로 치열하지 않았던 건 인정하는 거 아니냐? 그러니까 피카소의 붓을 나한테 넘긴 거고.”
“아무튼 맞는 말만 골라서 해서 사람을 빡치게 하는 재주가 있는 놈이다.”
골룸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서는 출구 앞에 섰다.
“뭐, 나름대로 깨달음을 얻었으니 됐다. 너한테는 꽤 고맙게 생각한다. 다음에 또 같이 플레이하면 좋겠군.”
“…….”
“……왜 대답 안 하냐?”
골룸의 표정에 간절함이 깃들었다.
“너는 나한테 꽤 많은 영감을 주는 놈이다. 잃어버렸던 초심을, 꺼져 버렸던 열정의 불씨를 되살릴 수 있는 희한한 놈.”
“…….”
“가끔씩은 나랑 같이 플레이 하자.”
“……생각해 보고.”
간절함을 넘어 애절함이 깃들기 시작했다.
“제발. 오늘 느낀 바가 많다. 내가 치열하게 플레이하마. 약속하지.”
“보고.”
* * *
출구에서 빠져나왔을 때 나는 예기치 못한 상황과 마주치고 말았다.
‘서둥이들?’
나는 순간 이성을 잃을 뻔했다.
무언가가 머릿속에서 툭! 끊어지는 느낌이었다.
제왕의 격이 아니었더라면 정말로 이성을 잃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너냐?”
서둥이들은 꽤 처참한 몰골이었다.
온몸이 피투성이였고, 종이사슬로 등을 맞대고 결박되어 있었다.
“이제야 나타났군, 골룸. 그리고 김철수.”
종이술사 매켄드라였다.
어느새 주변에는 종이병정들로 가득 차 있었다.
‘침착하자.’
나는 최대한 분노를 다스리며 주변을 살폈다.
종이배 위에 타고 있는 놈들은 화살을 내게 겨누고 있었고, 다리 위에도 꽤 많은 종이병정들이 나를 향해 창을 겨누고 있었다.
도망칠 구석은 없어 보였다.
저만치 다리 건너편, 피투성이가 된 서지아가 입 모양만으로 ‘도망쳐……’ 하고 중얼거리는 것이 보였다.
퍽!
종이병정 하나가 창대로 서지아의 머리를 내리쳤다.
서지아는 비명 한 번 지르지 못하고 푹 무너졌다.
‘저 씨X새끼가……!’
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필사적으로 끊어지려는 이성을 붙잡아야 했다.
“김철수. 너는 내가 죽여주겠다고 말을 했었지.”
매켄드라는 삐에로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삐죽 솟은 모자에 밀가루를 바른 것처럼 하얀 얼굴, 그리고 눈가는 다이아 형상으로 검게 칠해져 있었다.
동화 속 왕자님이나 입을 법한 하얀 스타킹과 부풀어 오른 바지까지.
예나 지금이나 병신 같은 모습은 그대로였다.
‘알키나스는 더 이상 소환 못하고.’
그렇다면 뇌룡?
그러나 뇌룡으로는 선제공격을 가할 수 없다.
그저 소극적인 방어만이 가능할 뿐.
단순히 뇌룡의 존재만으로 매켄드라를 쫓아내거나 위협할 수는 없었다.
‘숫자도 너무 많고, 매켄드라 본신의 능력도 지금의 나보다는 강할 거다.’
“머리통 굴러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군.”
매켄드라는 입을 가리고 웃었다.
딱히 감정을 숨길 생각은 없는 듯, 생각이 모두 읽혔다.
[#공포에 #침잠 되어라]
“아무튼 여러모로 걸리적거리는 놈이었어. 네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
매켄드라가 검지손가락을 폈다.
“첫째. 저년들이 처참하게 찢겨 죽는 걸 먼저 구경한 다음 토막 나거나.”
“…….”
중지를 펴고서 말을 이었다.
“둘째. 먼저 처참하게 찢겨 죽은 다음 저년들이 토막 나거나. 자 어때, 네 선택은 무엇이지?”
“쟤들은 살려줘.”
“내가 왜 그래야 하지?”
“…….”
“너는 내가 아끼는 수하인 헤일릭을 죽였잖아. 내 잠자리 파트너도 죽였고.”
“잠자리 파트너?”
“케인 말이다, 케인! 루시아 그년이 운영하던 여관 302호. 설마 모른다고 하지는 않겠지?”
“…….”
매켄드라가 손가락을 튕기자 종이병정 중 하나가 창을 들어 올렸다.
무릎 꿇고 앉은 서지수의 허벅지를 깊이 찔렀다.
서지수는 새어 나오려는 비명을 억지로 참아냈다.
‘내가 여기서 괴로워하면 안 돼.’
그건 치열하지 못한 거야.
지금의 내가 진혁 오빠에게 어떤 변수도 만들어서는 안 돼.
서지수는 비명을 지르지 않았고 기어이 참아내다가 결국 기절해 버렸다.
매켄드라는 즐거운 듯 호호! 웃었고, 구경꾼들이 하나둘 몰려들었다.
“나는 너희를 다 죽일 거야. 김철수 네놈과 관련된 모든 놈들을.”
매켄드라는 주변을 둘러보며 크게 말했다.
“자, 너희들도 모두 보아라. 멋모르고 설치던 애송이, 김철수의 초라한 최후를!”
매켄드라는 알지 못했다.
차진혁은 늘 치열했다는 것을.
매켄드라와의 갈등이 예고되었던 시점부터 이미 그는 치열하게 준비를 해왔다.
다만, 그게 오늘인지 몰랐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