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는 그만 강해지고 싶다 180화
서둥이들은 기회를 노리고 있던 것이 틀림없었다.
‘오, 좋네.’
내 옷자락을 잡았던 큰 서둥이의 팔목에는 어느새 가느다란 은사가 둘러져 있었다.
그것은 큰 서둥이의 스킬 중 하나였는데, 실타래가 풀리듯 실이 뿜어지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내 팔 전체를 감쌌다.
‘결박 능력이 제법이야.’
아마도 직접 접촉이 있으면 능력치가 극대화되는 것 같았다.
그와 동시에 나를 껴안았던 작은 서둥이가 내 가슴팍을 깨물었다.
‘독?’
역시 이럴 줄 알았다.
어금니 쪽에 강력한 독을 숨겨둔 것 같았다.
‘무기를 사용하는 대신 이빨로 공격한 것도 신선하고.’
불사조의 심장 덕분에 아무런 영향도 없기는 했지만, 일반적인 플레이어였다면 꽤 큰일을 당했을 것이 분명했다.
‘역시 울면서 안기는 건 조심해야 돼.’
회귀 전에도 굉장히 빈번하게 쓰였던 암살방식이었다.
보통 외모가 출중한 이성의 모습으로 현혹하는 것이 보편적이었는데 어린아이나 동물의 모습을 취하는 경우도 많아서 늘 조심해야 했다.
‘나는 많이 당해봐서 안 당하지.’
서둥이들도 내가 독 저항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테니 아마도 이건 단순한 예행연습인 것 같았다.
“좋네. 이 정도면 어지간하면 먹히겠어.”
어금니에 독을 숨겨놓고 나를 물어뜯은 것 자체는 그리 대단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그 전에 셋업이 굉장히 뛰어났다.
“연기 스킬까지 따로 익혔어? 너네 모습 보니까…….”
아까 느껴졌던 그 통증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진짜 속상하더라. 안아주고 싶은 마음이 절로 들 정도였어.”
애들은 내 칭찬이 부끄러운지 아무 말도 안 했다.
“…….”
“…….”
나는 기분이 좋아져서 히죽 웃었다.
“앞으로도 갈고 닦도록 해. 훌륭한 암살자가 될 수 있을 거 같네. 일종의 미인계 계열 같은데. 미인계는 사용하기에 따라 진짜 치명적이거든. 아무튼 진짜 잘했어.”
내가 회귀 전에 제일 경계하고 싫어했던 것도 미인계 계열의 공격이었다.
생각만 해도 끔찍한 기억들이 줄줄이 떠올랐다.
‘미인계는 너무 위험하고 강력해.’
우리는 일단 마을을 둘러보았고, 나는 애들과 함께 작은 와인 바로 향했다.
와인 바는 3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한 여자가 운영하는 곳이었다.
‘어라?’
겉으로는 인간처럼 보이지만 인간이 아니었다.
사장도, 이곳의 손님들도.
사장이라 짐작되는 여자가 눈웃음을 지으며 우리에게 말했다.
“인간이 여긴 어떻게 들어왔어요?”
여자가 입을 열자 공간 전체에 좋은 향기가 가득 찼다.
달콤한 복숭아 냄새였다.
[스킬, ‘치명적인 매혹’이 사용되었습니다.]
……어? 미인계?
‘신난다.’
방어연습 해볼 수 있겠다.
* * *
루시아가 눈을 가늘게 떴다.
‘내 매혹 스킬을 완벽히 무효화시켰어?’
몽마로서의 자존심이 상하는 순간이었으나 그녀는 딱히 내색하지 않고서 빙그레 웃었다.
“대단하네요, 차진혁 씨.”
“…….”
“어쩜 그렇게 멀쩡할 수가 있어요? 적어도 설렘 정도는 느껴야 하는데. 옆의 두 분처럼.”
차진혁은 옆을 힐끗 봤다.
서지아와 서지수의 볼이 조금 붉어져 있었다.
‘와, 얘네 설마 매혹 스킬에 당한 거야?’
몽마의 유혹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다.
경지에 이른 몽마가 유혹하지 못할 대상은 아무도 없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었다.
차진혁은 설마 싶어 루시아에게 물어보았다.
“얘네한테도 매혹 걸었어?”
“아니요. 안 걸었어요. 그냥 당신이 내 매혹을 부수면서 그 효과가 주변으로 조금 흩어졌을 뿐이죠.”
차진혁은 인상을 찡그렸다.
“그러니까, 스킬을 정통으로 맞은 게 아닌데도 매혹에 영향을 받았다고?”
큰 서둥이와 작은 서둥이를 번갈아 보면서 쳐다봤다.
서지아와 서지수는 죄지은 사람인 양 차진혁의 눈길을 피했다.
“그래도 그 정도면 준수하죠. 심장박동이 조금 빨라지고 얼굴이 붉어지는 수준에 그쳤으니.”
“…….”
“당신 때문에 유혹의 영향을 받은 거니까 너무 신경은 쓰지 않아도 좋아요, 차진혁 씨.”
정신계열 스킬은 여러 가지 변수에 따라 그 위력이 천차만별로 달라지게 된다.
정신계열 스킬이 작용하는 순간의 분위기, 상황, 함께 있는 사람, 피공격자의 심리 상태 등등.
루시아는 한눈에 서둥이들의 상태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저 둘은 차진혁에게 아주 큰 호감을 가지고 있고. 그 덕택에 마음에 빈틈이 많았어.’
그런데 차진혁은 그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오히려 저 둘에게 크게 실망하는 것 같아서 이 상황이 조금 우스웠다.
“차진혁이 저렇게 둔감한 사람이었다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내가 얼마나 민감한데.
그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참았다.
자기 입으로 자기를 자랑하는 건 하수들이나 하는 짓이니까.
“내 동생은 힘든 짝사랑을 하고 있나 봐. 아, 내 동생의 이름은 릴리아. 알고 있죠?”
“……아, 어쩐지 냄새가 비슷하더라니.”
“보통은 얼굴이 닮았다고 표현하는데.”
“그러고 보니 얼굴도 닮은 거 같고.”
루시아는 호호호! 웃음을 터뜨렸다.
“릴리아 얼굴을 제대로 기억하기는 해요?”
“보면 구분할 수는 있지.”
“그냥 떠올리라고 하면?”
“몽마의 얼굴을 그렇게 주의 깊게 관찰하고 머릿속에 담는 인간이 어디 있냐?”
미치지 않고서야 그런 짓을 하는 플레이어는 없다.
차진혁 기준에서는 그랬고, 사실 대부분 몽마의 얼굴을 기억했다.
차진혁 기준에서 몽마의 얼굴을 열심히 기억하는 놈들은 다 미친놈이었다.
미인계에 당하고 싶어서 환장한 미친놈들.
루시아는 흐음, 하고 턱을 매만지다가 물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혹시 미인계 등에 호되게 당했거나 끔찍한 경험을 한 적이 있어요? 내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그런 기록은 없던데. 혹시 제왕의 격 같은 거 갖고 있어요?”
차진혁은 순간 움찔할 뻔했으나 루시아가 계속 말을 이었다.
“아니, 제왕의 격을 갖고 있어도 이건 불가능한데 도무지 정체를 모르겠네.”
“…….”
“혹시 아르비스 같은 데서 넘어온 부캐는 아니죠?”
* * *
루시아의 술집을 발견한 것은 내게도 아주 좋은 일이었다.
보통 몽마의 술집은 일종의 ‘정보를 교환하는 장소’로 운영된다.
이곳에서 많은 퀘스트도 얻을 수 있고 필요한 정보를 나눌 수도 있다.
그래서 몽마의 술집을 보통 ‘교류의 술집’이라고 표현한다.
지구에는 그런 개념이 본격적으로 도입되지 않았지만, 우주적으로 보면 아주 흔한 일이기도 했다.
‘벌써부터 이렇게 자리를 잡았을 줄은 몰랐지만.’
나는 이곳에서 아르비스 행성 출신의 ‘위대한 길잡이 골럼베룸’을 찾을 생각이었다.
여기서 열심히 플레이하다 보면 만날 수 있을 거란 판단이었는데, 여기에 몽마의 술집에 있다면 일이 훨씬 수월해질 가능성이 높았다.
물론 사장인 몽마의 호감을 사기는 해야겠지만.
“술 좀 줘봐. 제일 비싼 걸로.”
사장의 마음을 사는데 가장 좋은 건 역시 돈지랄이다.
“호호, 화끈하네. 우리 집 술이 꽤 비싼데 괜찮겠어요?”
내가 괜찮다며 어깨를 으쓱하자 루시아는 ‘네, 손님’ 하고 내게 호감을 보여주었다.
술을 좀 팔아주다가 본격적으로 정보를 좀 얻으면 될 것 같았다.
‘근데 좀 아쉽기는 하네.’
서둥이들은 진짜 살기를 담지 않았고, 루시아도 마찬가지로 최선을 다한 유혹 공격을 하지는 않았다.
그렇다 보니 뒷덜미가 짜릿한 긴장감을 느끼기에는 다소 부족한 점들이 있었다.
동생인 릴리아 때문인가 싶었는데 또 그것도 아니었다.
“릴리아를 신경 쓰냐고? 아니? 자매끼리 한 남자를 만나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닌데?”
서둥이들은 큰 충격을 받은 듯했다.
“어머, 몽마는 인간과 아주 많이 다르단다, 얘들아.”
아 애들한테 이상한 거 가르치는 거 같은데 내버려 둬야 하나.
심지어는 표정 변화가 별로 없고 과묵한 서지아마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묻고 있었다.
“정말인가요?”
루시아는 몽마의 습성에 대해 꽤 많이 알려주었다.
“내가 차진혁을 유혹하든 말든, 릴리아도 상관하지 않을 거란 말이지. 몽마에게는 일처다부나, 일부다처의 개념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아. 우리는 자유로운 사랑과 뜨거운 육체 교류를 갈망하는 종족이니까.”
자유로운 사랑과 뜨거운 육체 교류라는 명목으로 온갖 종류의, 인간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관계들도 굉장히 많다고 했다.
“나도 어릴 때는 릴리아랑 사귀었거든.”
“도, 동생이랑 사귀었다고요?”
“그런 반응은 실례지. 우린 인간이 아니라 몽마인걸. 너희들의 시선으로 우릴 판단하지 않았으면 해.”
“미안해요.”
서둥이들은 침을 꼴깍꼴깍 삼키며 루시아의 말을 경청했다.
그만 말려야 할 거 같은데.
루시아가 찡긋 윙크하며 말했다.
“자매가 한 남자를 좋아하는 건 지극히 평범하고 흔한 일이야. 한 남자와 연애하는 경우도 아주 많고.”
애들은 이상한 자극이라도 받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한 남자를 같이 좋아한 경험이 있나 보다.
“내가 아는 어떤 7쌍둥이는 한 여성체와 연애했어.”
“7, 7쌍둥이요? 다 남성체였어요?”
“아니? 남성체도 있고 여성체도 있었어. 남매였거든.”
서둥이들은 무척 혼란스러운 듯했지만 ‘그래, 종족이 다르니까’라며 결국 납득해 냈다.
서둥이들의 리액션이 워낙 풍부했던 탓에 루시아는 서둥이들과의 시간이 무척 즐거운 듯했다.
“음, 나는 남성체보다는 여성체 쪽이 더 취향이기는 해. 유혹하는 재미도 있고. 귀여운 애들 좋아하거든.”
취기가 오른 작은 서둥이가 자신의 가슴팍을 가리면서 -왜 가리는지는 모르겠다- “그, 그럼 저도?”라고 경계하는 모양새를 보이자 내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되도 않는 소리를 하고 있어.”
“왜, 왜?”
“네가 루시아 취향이었으면 진작에 유혹당했지. 아직까지 몽마가 널 유혹하지 않았다는 건, 네가 취향이 아니라는 거야. 도대체 뭘 봐서 유혹당할 걸 경계하는 거야?”
“내, 내가 어디가 어때서?”
당연한 소리를 했을 뿐인데 왜 발끈하는지 모르겠네.
“유혹당하고 싶은 거야?”
“그런 건 아니지만.”
그러자 루시아가 빙그레 웃었다.
“지수. 너는 충분히 매력적이야. 다만 내 취향이 아닐 뿐, 그러니까 자신감을 가지렴. 그냥 인간이란 종족 자체가 원래 내 취향이 아니야. 아니, 아니었어. 요기, 차진혁 씨를 보기 전까지는.”
약간 나른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는데 바람에 약간 설레기 시작했다.
오, 드디어 제대로 날 유혹하는 건가.
유혹을 좀 적극적으로, 살벌하게 해주면 좋겠다.
회귀 이후에는 제대로 된 미인계를 당해본 적이 별로 없으니까.
미리미리 연습하고 대비해야 실전에서도 잘 방어할 수 있다.
“릴리아가 하도 잘생겼다고 말하길래 콩깍지가 제대로 씌었다고 생각했어. 미모를 엄청 부풀리고 과장했다고 말이야.”
“…….”
“근데 과장이 아니라 오히려 겸손한 표현이었네.”
“나를 어떻게 표현했는데?”
“머리카락은 마치 검은 비단이 흘러내리는 것처럼 곱고 단정하게 뻗은 눈썹과 흑요석 같은 눈동자는 밤하늘처럼 먹먹했다. 가을의 단풍으로 물들인 것 같은 붉은 입술은…….”
“그만.”
릴리아의 감성이 상당히 촌스럽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표현마저 저렇게 진부했을 줄이야.
릴리아도 좀 더 치열할 필요가 있다.
아니, 나를 유혹한다면서 어떻게 그렇게 노력을 안 하는지 모르겠네.
어쨌든 루시아는 내게 꽤 큰 호감을 보여주었다.
내가 하룻밤 만에 무려 1,200만 다이아를 썼으니 그럴 만도 했다.
‘돈이 좋기는 좋네.’
공무원 시절에는 예산 때문에 눈치를 많이 봤었는데.
지원팀의 안지원 씨가 제발 예산 좀 아껴 써달라며 간곡하게 빌고 또 빌 때 내 마음이 얼마나 불편했는지 모른다.
“혹시 이 일대에서 활동하는 길잡이 목록 같은 걸 구할 수 있을까?”
“길잡이 목록 말인가요, 손님?”
“그래. 당분간 여기서 활동할 거라서.”
“잠시만요.”
루시아는 가슴팍에 손을 넣는가 싶더니 두루마리 하나를 꺼냈다.
“살펴보겠어요?”
적극적으로 유혹 좀 해주면 좋겠는데 딱히 그런 시도는 하지 않아서 아쉬웠다.
‘어디 보자.’
길잡이 목록을 살펴보았다.
‘바로 1번에 있네.’
위대한 길잡이 골럼베룸.
나는 그 부캐의 각성명을 알고 있다.
‘각성명 골룸.’
종이술사 매켄드라가 골룸의 도움을 받아 ‘피카소의 붓’을 찾아냈었다.
“골룸. 이 자를 소개시켜 줄 수 있겠어?”
“아, 골룸, 이분이요?”
루시아는 약간 곤란한 모양새로 팔짱을 꼈다.
“여태까지 모든 의뢰를 거절했거든요. 내가 몇 번 모험가들을 소개시켜 주기는 했는데, 그때마다 나를 뭐로 보냐며 하도 진상을 부리는 탓에…….”
“무슨 문제라도 있어?”
“모르겠어요. 돈에 관심이 없나 봐요. 무려 7억을 제시해도 화를 내던데.”
나는 골룸이 왜 그런 반응을 보였는지 알고 있었다.
“그냥 얼굴이나 한번 보자고 전해줘.”
“또 엄청 진상 부릴 거 같은데. 다른 유능한 길잡이도 많은데, 어때요?”
“단순 소개료로 1억 다이아 줄게.”
“당장 모셔오겠습니다, 손님.”
루시아는 싱글벙글 웃으며 어딘가로 사라졌다.
몇 시간 뒤, 루시아는 한 사람과 함께 돌아왔다.
‘골룸!’
위대한 길잡이.
아르비스 내에서도 손꼽히는 랭커, 골럼베룸이 틀림없었다.
쿵! 쾅! 쿵! 쾅!
내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