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는 그만 강해지고 싶다 178화
한세린은 늘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왜?’
남들은 남사친과 여사친이 존재한다고 말을 하곤 했다.
그런데 한세린에게는 통용되지 않는 얘기였다.
-“나 사실 너 좋아했어.”
-“우리 사귈래?”
어려서부터 알고 지냈든, 최근에 만났든, 오래전 인연이든, 아무튼 그녀 주변의 남자 사람들은 모두 한세린에게 고백을 해왔다.
그 고백들을 일일이 거절하는 것도 일이었거니와 거절한 이후도 문제였다.
깔끔하게 포기하는 경우는 그나마 양반이었다.
-“열 번 찍어서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고 했어.”
자기가 나무꾼인 줄 아는 경우도 다수 있었고.
-“네가 감히 날 거부해?”
-“네가 먼저 나한테 꼬리 쳤잖아.”
말 같지도 않은 진상을 부리는 경우도 꽤 있었다.
일상생활 영역에서는 그럭저럭 참을 만했는데 이런 현상은 플레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패스파인더 님, 저 남자로는 어떻습니까?”
-“사실 오래전부터 흠모해 왔습니다.”
한세린은 그저 플레이에 집중했을 뿐인데 갑자기 다들 고백을 해왔다.
한세린으로서는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리고 속으로 그들을 한심하게 생각했다.
‘나한테 한눈파느라 제대로 된 플레이를 하지도 못했으면서.’
플레이를 할 때는 플레이에 집중해야 한다.
플레이어로서 기본도 지키지 못하는 자들이 어떻게 한 여자의 남자가 될 수 있단 말인가.
‘제발 고백 좀 그만하라고. 짜증 나 죽겠네. 무슨 고백 공격도 아니고.’
조금 마음이 맞는 팀원을 찾았다 싶으면 자꾸 고백을 해오는 바람에 그녀는 제대로 된 팀을 꾸리기가 어려웠다.
그런데 차진혁은 좀 달랐다.
차진혁은 ‘종이병정 연구일지’를 획득한 것을 보며 순수하게 기뻐하고 있었다.
정말로 플레이를 즐길 줄 아는 자였고, 그래서 멋있었다.
아이템을 넘겨주기 직전, 한세린이 물었다.
“너는 나를 어떻게 평가하고 있어?”
“너는 훌륭한 길잡이지. 나보다 더 많은 것을 보고 많은 것을 생각하는 뛰어난 동료. 지금처럼 말이야.”
“그럼 우리도 전우이자 형제겠네?”
“당연하지!”
그 말에 한세린은 씁쓸하게 웃었다.
‘나, 차였네.’
그에 반해 차진혁은 기뻐하기만 했다.
‘역시 한세린은 한세린이지!’
회귀 전, 한세린과 함께 넘나들었던 수많은 전장들이 떠올라 행복해졌다.
차진혁은 차진혁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칭찬을 건넸다.
“두더지맨은 이거 못 찾았을걸?”
“칭찬 고마워.”
잠시 씁쓸해졌던 한세린은 남몰래 웃었다.
매일 남을 거절하는 입장에만 있다가 남에게 거절당하는 입장이 되니 굉장히 신선했다.
‘그래서 더 마음에 들어.’
나무꾼이 되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더 이상 숨겨진 건 없는 것 같아. 슬슬 나갈까?”
“어. 네 마음대로 해. 조금 더 찾아볼 거 있으면 찾아봐도 좋고. 길을 개척하는 건 네 몫이니까. 난 너만 믿는다.”
무한한 신뢰가 담긴 차진혁의 말을 듣자 한세린은 또다시 설레고 말았다.
‘저 신뢰감은 도대체 뭘까?’
무엇보다 단단한 신뢰감.
그것은 달콤하게 포장된 고백의 언어보다 훨씬 더, 한세린의 심장을 뛰게 만들었다.
‘저런 차진혁을 가지려면 단순히 내 능력을 증명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한데.’
좀 더 단둘이 있고 싶다는 욕심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아이템에 대한 파악은 끝난 거야?”
“일종의 보안장치 같은 것이 있기는 한데 별로 문제는 안 될 것 같아.”
“그래. 너한테는 해금술이 있으니까.”
어쩜 그것도 섹시해, 하마터면 말할 뻔했다.
차진혁은 곧바로 ‘해금술’을 사용해 아이템에 걸려 있는 보안장치를 해제시켰다.
“다 풀었다.”
“벌써?”
“보안이 생각보다 허술한 것 같네.”
보안장치가 허술한 게 아니라 해금술의 성능이 지나치게 뛰어나다는 생각은 한세린도, 차진혁도 하지 못했다.
“손에 쥐면 종이병정이라는 것과 관련된 정보들이 머릿속에 입력돼. 상당히 고도화된 문명 아이템이야. 너도 쥐어볼래?”
“그래.”
그저 손에 쥐는 것만으로도 온갖 정보를 획득할 수 있다.
한세린은 차진혁에게 아이템을 다시 건넸다.
“자. 다시 가져가.”
“찾은 건 너잖아. 나한테 완전히 양도하게?”
“나는 길잡이로서 숨겨져 있던 아이템을 찾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기뻐. 선물이 됐어.”
“그렇다면야.”
히든 아이템 최초공개 한다는 섬네일 만들 생각에 벌써 설렜다.
“나가자.”
“그래. 그래도 혹시 모를 위험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손 좀 잡아줘.”
차진혁의 손을 잡은 순간, 한세린은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이 남자를 좋아하고 있구나.
차진혁은 한세린의 손을 잡고 [안녕히 가십시오, 여기까지 ‘삼키는 민어의 몸속 세상’이었습니다.] 게이트를 통과했다.
“응?”
차진혁은 바닥에 널브러진 반쯤 시체가 된 차진솔을 발견했다.
“너 왜 그러고 있냐?”
차진솔은 눈동자만 겨우 돌려 힘겹게 말했다.
“이 치질 유발자야. 작작 좀 하지, 진짜.”
* * *
나는 나약한 항문검과는 비교할 수 없이 훌륭한 업적을 세우고야 말았다.
결국 테르서박이 ‘삼키는 민어’를 길들이는 데 성공했다는 것이 그 증거였다.
“길들였다고 표현하지 말아…… 아니다, 됐다. 아무튼 교감에 성공했다. 다 너희 덕분이다. 진심으로 감사를 표한다. 혈사제에게도 무척 감사를 표한다.”
테르서박은 깊은 감명을 받은 듯 나와 한세린에게 고마워했다.
두더지맨이 옆에서 ‘나도 활약을 했다, 두지’라고 말했으나 아무도 그 말에 대꾸해 주지는 않았다.
“김철수. 너는 정말 내게 많은 영감을 선사했다.”
그러고 보니 테르서박의 눈빛이 좀 맑아진 것 같기도 했다.
장기의 상처를 파헤치던 한세린과 닮아져 있었는데 아주 바람직한 변화라고 할 수 있었다.
“노력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뛰어넘을 수 없고, 즐기는 자는 즐기며 노력하는 자를 뛰어넘을 수 없고, 즐기며 노력하는 자는 치열하게 즐기며 치열하게 노력하는 자를 뛰어넘을 수 없다는 것을 가르쳐주었다. 진심으로 고맙게 생각한다. 치열맨, 아니 치열좌.”
테르서박은 몇 번이나 내게 감사를 표한 뒤 몇 가지를 얘기했다.
“아무래도 스왈로우 씨는 어떤 시설에서 탈출한 것 같다. 그 시설은…… 잘은 모르겠지만 지구에는 없는 곳 같군.”
“스왈로우랑 대화가 돼?”
“조금은.”
테르서박이 어항에 손을 넣자 삼키는 민어가 가까이 다가갔다.
참 신기한 일이었다.
“스왈로우 씨에게 무언가를 강제로 먹여가며 연구를 한 것 같군.”
“그건 이거겠지.”
나는 인벤토리에서 ‘정체 모를 섬유질’을 꺼냈다.
그러자 테르서박이 머리를 감싸 쥐고 괴로워했다.
“그만. 그걸 치워줘!”
삼키는 민어가 느끼는 감정이 전이된 것 같았다.
“그걸로 뭘 했는지는 알 수 없다. [삼키는 민어] 시나리오는 클리어가 된 건가?”
“클리어됐지.”
회귀 전, ‘삼키는 민어’가 사망하면서 이 시나리오는 영영 사라지게 됐었다.
그러나 나는 결국 연계 시나리오를 받아냈다.
“아직 방송에 공개 안 했으니까 보안은 유지해 줘야 한다.”
“그러지.”
“다음 시나리오는 [시설의 추격자들]이다. 아무래도 네가 말했던 그 시설의 관련자들이겠어.”
테르서박은 검지손가락을 물어뜯으며 몸을 달달 떨었다.
“왜 그래?”
“스왈로우 씨가 극도로 두려워하고 있다. 김철수. 스왈로우 씨를 보호할 수 있는 방법이 좀 없을까?”
내게는 반가운 제안이었다.
──────────
[시설의 추격자들]
삼키는 민어를 연구하던 시설에서 고용한 추격자들이 삼키는 민어의 행적을 좇기 시작하였다.
아무래도 삼키는 민어에게 많은 비밀이 숨겨져 있는 듯하다.
──────────
삼키는 민어를 수호수의 권역 내에서 보호하는 것이 그나마 안전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먼저 말해볼까 했는데, 다행히 테르서박이 먼저 보호를 요청했다.
“연희동에 집을 하나 구해줄게. 당분간 한국에서 지내도록 해. 수호수가 널 지켜줄 거야. 그동안 스왈로우랑 교감하도록 하고.”
“스왈로우 씨.”
“그래, 스왈로우 씨랑 교감해. 어떤 정보를 더 얻을 수 있을지 모르니까.”
* * *
‘종이병정 연구 일지’를 살펴본 송하영이 말했다.
“정보가 상당히 제한적이네. 종이병정이라는 것을 만들어 군대를 조직할 수 있나 봐. 근데 이게 뭘 의미하는지는 모르겠어. 종이군대라도 쳐들어오는 건가?”
그리고 얼마 후 그 말이 실제가 되었다.
“세상에. 진짜로 종이로 만든 군대가 튀어나오다니.”
종이술사 매켄드라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자신이 범우주 연합인 ‘블랙’의 고위급 간부라 소개하며 지구 서버의 몇몇 맵들을 자신이 접수하겠다고 선언했다.
“캘리포니아 쪽 사상자가 벌써 3,000명이 넘었어. 필사적으로 저항하고 있기는 한데 소용이 없나 봐. 플레이어 한 명한테 이렇게 농락당하는 날이 올 줄이야. 현재로서는 거의 식민지화됐다고 봐야 해.”
“그래.”
회귀 전과 같았다.
미국 맵을 본진으로 두고서 전 세계에 종이군대를 파견하게 될 거다.
“그리고 캐나다 맵 밴쿠버 쪽도 거의 점령당했어.”
얼마 후 송하영은 점령당한 맵들의 공통점을 찾아냈다.
“3등 군주들이 설치던 그곳들이야. 3등 군주에 대해서는 너도 알고 있지?”
“알지. 날 귀찮게 했었잖아.”
노원구의 건물주들과 사람들을 동원하여 내게 손해배상을 청구했었다.
한국에 파견되었던 3등 군주는 헤일릭이었고.
“아참. 곽도형과 케일린이 연합에서 헤일릭을 제거하는 데 성공했다고 말했었나?”
“아니 안 했는데. 죽였어?”
“그랬대.”
“언제?”
“네가 삼키는 민어 몸속에 들어가 있을 때. 아무튼 헤일릭을 제거한 덕분인지 한국에는 종이술사의 지부가 설립되지 않았어. 뭐 일각에서는 네 덕분에 한국의 평화를 지킬 수 있었다 어쨌다 하기는 하는데 중요한 건 아니지?”
중요한 건 매켄드라였다.
매켄드라는 더욱 발 빠르게 움직였다.
“제일 큰 문제는 사우디아라비아의 리야드를 점거했다는 건데. 아무래도 석유자원에 대한 지배력을 확보하려는 모양이야. 그걸 빌미로 지구를 쥐고 흔들려는 것 같아. 종이 병정들이 워낙 강력해서 플레이어들도 속수무책이고.”
“그렇겠지.”
비록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고, 석유를 대체할 수 있는 각종 자원들이 생겨나고는 있지만 여전히 석유는 아주 중요한 자원이었다.
“그래서 송하영, 네 생각에 매켄드라가 노리는 게 뭔데? 걔들이 석유를 노릴 거라고 생각해?”
“그건 아닐 것 같아. 지구를 제외한 다른 서버들 중에 석유를 쓰는 곳은 없거든.”
나는 매켄드라가 노리는 게 무엇인지 알고 있다.
지구의 서버급 아이템, ‘피카소의 붓’을 얻기 위한 전초전을 벌이고 있는 것이었다.
회귀 전에는 결국 지구의 서버급 아이템인 피카소의 붓을 빼앗겼었고, 이후 매켄드라는 최강의 서버인 아르비스 서버의 최상위급 랭커로 성장하게 된다.
“딱히 지구를 점령하는 것에도 관심은 없는 듯해. 스칸노르비아 전사들처럼 수탈을 하는 것도 아니고. 플레이에 일부 제약을 둘 뿐, 악랄한 짓은 전혀 하지 않고 있어. 이 정도 규모의 군대를 동원하려고 했으면 밑작업들이 많이 필요했을 텐데 말이야.”
그러기 위해서 많은 인적/물적 자원이 필요하다.
3등 군주들을 미리 파견해서 수많은 어그로를 끌었던 것도 다 돈이고 자원이다.
송하영이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노리는 건 하나겠지. 아마도 지구에만 존재하는 서버급 아이템.”
송하영은 인상을 살짝 찡그리고 긴고아를 톡톡 두드렸다.
“이거처럼 성능 하나는 더럽게 확실한 거 말이야.”
매켄드라가 종이병정 군대를 활용하여 지구 곳곳을 점령해 가고 있는 가운데, 꽤 흥미로운 이야기가 들려왔다.
-“내가 가장 아끼는 수하 헤일릭이 한국맵에서 살해되었다. 나는 이를 결코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매켄드라는 헤일릭을 살해한 범인으로 나를 꼽았다.
사실 내가 한 건 아니지만 딱히 부정하지는 않았다.
-“급한 일들이 마무리되면 내가 직접 너를 찾을 것이다, 김철수. 하루하루 공포에 떨며 두려움에 잠식되어라.”
그리고 나는 송하영에게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종이를 받아든 송하영이 눈을 크게 떴다.
“이게…… 도대체 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