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는 그만 강해지고 싶다 176화
[필드, ‘삼키는 민어의 꼬불꼬불한 세상’에 입장합니다.]
한세린과 나는 새로운 필드에 진입했다.
입장에 특별한 이벤트는 없었고, 나는 한세린의 손을 놓았다.
“전체적으로 동굴 같은 느낌이네요.”
자글자글한 주름이 가득하고 비교적 물컹물컹한 공간이었다.
어두컴컴해서 멀리까지 보이지는 않았다.
일단 중계자의 조명을 사용해서 주변을 훤히 밝혔다.
“길잡이가 조도 확보하라고 얘기하지도 않았는데 그렇게 마음대로 행동할래?”
한세린의 말은 분명히 맞는 말이었다.
내가 검술가라면 말이다.
“방송에 조명이 생명인 거 몰라?”
“방송이기 이전에 플레이 중이잖아.”
“나한테는 플레이가 곧 방송이야.”
한세린은 약간 불만인 듯 나를 살짝 노려보았다.
“다음부터는 내게 먼저 허락을 받도록 해.”
나참, 조명 가지고 되게 뭐라고 그러네.
하지만 얘의 입장이 이해가 안 되는 건 또 아니었다.
어두컴컴한 곳의 경우, 조도가 갑작스레 바뀌는 것이 트랩의 발동조건인 곳도 많으니까.
운이 나쁘면 불을 밝혔다는 이유로 화살이 눈알에 꽂힐 수도 있었다.
‘어두울 때도 방송을 잘 진행할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해 봐야겠다.’
이를테면 적외선 카메라를 사용한 것 같은 촬영기법이라든지.
여기서 나가면 ‘물속에서 말하기’ 와 ‘어둠 속에서 방송하기’를 연습해야 할 것 같다.
한세린이 짐짓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알았어?”
“그래, 뭐.”
얘 덕분에 ‘어둠 속에서는 방송을 진행하기 어렵다’라는 내 실력의 한계를 알게 되었다.
고마움의 의미로 그냥 알겠다고 대답했다.
“손도 마음대로 잡지 말고.”
“야, 그거야말로 이상하다. 길잡이니까 더 잘 알 거 아냐. 지금 너를 보호할 사람은 나밖에 없고, 이런 수상한 공간에 입장하면 우리 둘이 함께 움직여야…….”
“아무튼! 의견은 묻고 잡으란 말이야. 사람 헷갈리니까.”
헷갈릴 것이 뭐가 있다는 건지 모르겠다.
내가 모르는 일류 길잡이의 무슨 사정이 있나 보다.
아무튼 한세린은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벽을 탐색하고 마력을 뿌려서 옳은 길을 찾아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커다란 개체의 몸속에는 기생충들이 있을 거 같은데 기생충은 딱히 없네요.”
이렇다 할 위기가 없어서 텐션이 좀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조명을 켜지 말 걸 그랬다.
어둠이 주는 나름의 긴장감이라도 있었을 텐데.
방송이 조금 루즈해질 무렵, 한세린이 말했다.
“너도 느꼈겠지만 여기는 아주 복잡한 미로야.”
“근데?”
원래 비밀 개척가 한세린의 장기가 바로 미로에서 길 찾기였다.
미궁 형태의 던전도 아니고, 마물 몸속의 필드에서 얘가 길을 못 찾을 리는 없겠지.
“굉장히 길어. 아마 옳은 길을 찾아 움직이면 보름은 걸릴 것 같아.”
“아…… 너무 긴데. 못 줄여?”
“아무리 빨라도 10일 정도. 중간에 위험한 기생마물이나 트랩이 없다는 가정하에 말이야.”
“기생마물이나 트랩이 있겠지?”
“있을 확률이 높지. 그럼 시간이 더 걸린다는 뜻이고.”
최소 10일.
그 기간 동안 미로를 헤매는 건 그리 좋은 콘텐츠는 아닌 것 같았다.
가도 가도 똑같아 보이는 길이 나오는 콘텐츠를 누가 좋아하냔 말이다.
‘방송은 성실하게 재미있는 콘텐츠를 계속 뽑아내야 하는데.’
이건 위기였다.
“김철수. 혹시 여기서 뇌룡 소환이 가능해?”
“세계가 단절된 게 아니라면 아마도?”
아마 가능할 것 같았다.
그러나 문제는 또 남아 있었다.
“근데 뇌룡 소환하면 삼키는 민어가 죽을 것 같은데.”
“상관없지 않아? 삼키는 민어를 사냥하는 게 목적이라면 오히려 그게 가장 빠르긴 하겠네.”
한세린의 눈이 반짝거렸다.
마물의 몸속에서 뇌룡을 소환하면 어떤 현상이 벌어지는지 흥미가 돋은 모양이었다.
“그건 안 돼.”
“왜?”
“그건…….”
나약한 항문검과 똑같이 할 수는 없잖아?
적어도 항문검보다는 더 위대한 것을 증명해야지.
단순히 삼키는 민어를 사냥하는 것만으로는 의미가 없다고.
이렇게 말할 수는 없어서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테르서박과의 약속이 무거워서.”
* * *
여의도 한강공원 벤치에 앉아 방송을 살피던 테르서박은 크게 감동을 받았다.
-“테르서박과의 약속이 무거워서.”
과연 세계 랭킹 1위의 스트리머다웠다.
약속의 무게는 굉장히 무거웠다.
‘내가 김철수의 입장이었더라면…… 뇌룡을 소환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끝내 김철수는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려고 노력했다.
그것만으로도 무척 고마웠다.
그의 가슴 속에 뜨거운 감정이 피어올랐다.
‘어떻게든 삼키는 민어와의 교감에 성공해야 해.’
그는 두더지맨을 닦달하여 오리맨을 타고서 한강으로 향했다.
마력흔을 묻혀놓았기 때문에 삼키는 민어를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는 특수제작한 낚싯대로 삼키는 민어를 잡아 올렸다.
“에게게, 이게 삼키는 민어야, 두지?”
“그래.”
삼키는 민어는 현재 손바닥만큼 작은 붕어 형태로 변해 있었다.
“이렇게 잡을 수 있었으면 진작 잡지 왜 잡았어, 두지?”
“자신이 없었다.”
“응?”
“테이밍은 곧 교감이다. 감의 영역이지. 아까까지의 나는 삼키는 민어를 잡아 올릴 수 없었다. 자신감도 약했고 해내야겠다는 사명감도 부족했지.”
그러나 이제는 달라졌다.
마음가짐이 조금 달라졌을 뿐인데, 그의 교감능력은 대폭 상승했다.
“약속의 무게를 알아버린 이상. 나는 반드시 교감에 성공해야만 하겠지.”
* * *
“뚫고 가자.”
“뚫고…… 간다고?”
이건 패스파인더의 방식이 아니라 두더지맨의 방식에 훨씬 가까운데.
보통 패스파인더 한세린은 올바른 길을 ‘찾고’, 두더지맨은 길을 ‘만드는’ 역할에 가까웠다.
그런데 이제는 길을 뚫고 간단다.
“벽이 말랑말랑해서 잘라내기 쉬워. 구멍을 내서 이동하면 돼.”
비밀 개척가였던 한세린이 비밀 파괴자로 전직했다는 것을 조금 실감했다.
“사람으로 치면 대장에 구멍이 나는 건데, 괜찮을까?”
“괜찮지 않으면?”
한세린이 인상을 살짝 찡그리고서 말을 이었다.
“배에 빵꾸 좀 나는 게 뭐가 대수라고.”
“하긴.”
우리는 벽에 구멍을 뚫으며 이동했다.
처음에는 질겨서 잘 안 잘렸는데, 검기를 씌워서 연습하다 보니 꽤 익숙해졌다.
“이제 꽤 잘 자르네?”
“그러게.”
처음에는 괴로운 듯 삼키는 민어가 몸부림쳤었다.
그럴 때면 이 필드 전체에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 같았는데 이제는 좀 괜찮아졌다.
내 검술 실력(?)이 더 좋아졌다는 의미였다.
‘시청자 숫자가 줄어들고 있어.’
실시간 시청자 숫자가 30만 명에서 29만 5천 명으로 무려 5천 명이나 줄어들었다.
위기감이 몰려들었다.
나는 방송 제목을 바꿨다.
[얘가 시나리오급인 숨겨진 이유?]
그리고 물었다.
“근데 한세린. 얘가 왜 시나리오급 마물일까?”
“뭐?”
“심지어 이름 자체가 곧 시나리오잖아. 근데 개미여왕이나 연희함락전보다 좀 임팩트가 떨어지는 것 같지 않아?”
한세린은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크기를 제 마음대로 변화시킬 수 있는 특별한 형태여서? 사실 테르서박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찾아내는 것 자체가 거의 불가능하잖아. 외부에서의 공격은 모조리 튕겨내고.”
“과연 그게 다일까?”
한세린은 발에 붙은 끈적끈적한 반액체를 떼어냈다.
“글쎄. 뭔가 다른 것이 연계되어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겠지. 계속 이렇게 [정체 모를 섬유질]이 걸리적거리는 것도 이상하기는 하고.”
오.
얘가 드디어 약간 감을 잡은 것 같다.
“하긴, 네가 이걸 사용해서 [종이병정의 방호복]을 만들었을 때는 솔직히 나도 놀랐다.”
종이병정은 머지않은 미래에 등장할, 종이술사 매켄드라의 복선이다.
종이병정이라는 단어 덕분에 나도 깨달았다.
이 ‘삼키는 민어’가 바로 연계 시나리오의 시발점이라는 사실을.
‘당시 나약한 이현성이 삼키는 민어를 죽여 버리는 바람에 시나리오는 제대로 클리어되지 못했고.’
그때 부분 클리어를 했던 걸로 안다.
이 삼키는 민어를 살려서 뭔가를 해야 완벽한 클리어가 될 거 같다.
그리고 연계 시나리오가 시작될 거고.
한 번 생각의 물꼬를 튼 한세린이 빠르게 말을 이었다.
“김철수. 네가 예전에 내게 물었었지. 블랙이 뭔가 노리는 다른 게 있지 않겠냐고.”
“그랬지.”
“어쩌면 이 물고기가 블랙과 어떤 연관이 있을지도 몰라.”
“뭐?”
“이것 봐봐.”
한세린은 벽면 여기저기에 눌어붙은 ‘정체 모를 섬유질’을 떼어냈다.
“삼키는 민어는 나름대로 미식하는 물고기야. 한 번 삼킨 것을 또 삼키지는 않았다고.”
유람선을 삼키고 그다음은 다리를 삼켰다.
“그리고 삼킨 모든 것을 깨끗하게 녹여 버려.”
철근도 콘크리트도 철판도 그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삼키는 민어가 모조리 소화시켜 버렸다는 의미였다.
“근데 이 정체 모를 섬유질의 흔적이 너무 많아. 누군가 인위적으로 먹인 것처럼 말이야.”
“…….”
“내가 아까 방호복을 만들어냈던 거 기억나지? 그거 내 손바닥만 한 양으로 만든 거야.”
한세린은 ‘정체 모를 섬유질’을 벅벅 긁어 땅에 내려놓았다.
“이거 봐. 이 정도 양이면 아까 같은 방호복을 수십 벌은 만들 수 있을 정도의 양이야. 이건 삼키는 민어가 삼킨 것이 아니라…… 강제로 삼켜진 게 아닐까 싶을 정도야.”
“한 번에 많은 양을 삼켰을 수도 있잖아.”
“그렇다고 보기에는 이것들의 위치가 너무 골고루 분포되어 있어. 아까 위에도 있었고 여기 필드 초입에도 있고. 한참을 뚫고 들어왔는데 여기도 이렇게 많잖아.”
솔직히 나도 이 ‘삼키는 민어’가 블랙과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었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좋아. 시청자 숫자 다시 높아지고 있어.’
* * *
“오 마이 갓!”
테르서박은 전력을 다해 뛰었다.
어항을 제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며 차진솔을 찾았다.
“네. 얼른 치료 부탁드립니다.”
삼키는 민어의 항문 부근에서 피가 질질 새어 나오고 있었다.
“스왈로우 씨가 무척 괴로워하고 있어요. 도와주세요.”
테르서박은 삼키는 민어에게 스왈로우 씨라는 이름을 붙여준 상태.
차진솔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물고기의 치질을 치료해 주라니. 사람을 우습게 봐도 유분수지.”
차진솔은 두더지맨을 한 번 쏘아봤다.
“진짜 중요한 일이라면서요. 중요한 회의도 미루고 왔는데 이게 뭐죠? 물고기 치질 치료해 주라는 게 그렇게 급해요?”
“그, 그게, 두지…….”
테르서박이 말했다.
“아참, 이 사실을 말 안 했군요. 스왈로우 씨의 진짜 이름은 삼키는 민어입니다.”
“뭐라고요?”
“이 안에 당신의 오빠와 패스파인더가 있습니다. 본체가 죽으면 그 안의 세상이 어떻게 될지 몰라요.”
“그런 건 진즉 말했어야지! 내가 뭘 어떻게 하면 돼요?”
“말 그대로 치료하면 됩니다.”
“하지만 난 마물을 치료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어요.”
“당신은 혈사제 아닙니까? 나는 느낄 수 있어요. 피를 매개체로 한 당신이라면 스왈로우 씨를 치료할 수 있습니다. 나를 믿어봐요.”
차진솔은 삼키는 민어, 그러니까 스왈로우 씨의 치질(?)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테르서박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계속 치료해 주셔야 합니다. 방송 보시면 아시겠지만 스왈로우 씨의 몸속 세상에서 꽤 잔인한 플레이가 자행되고 있거든요.”
테르서박은 이마에 삐질삐질 새어 나온 땀을 닦아냈다.
“혈사제, 당신이 아니었다면 스왈로우 씨는 죽었을 겁니다.”
“혹시 이거, 아니 스왈로우 씨가 죽으면 어떻게 되는데요?”
두더지맨이 끼어들었다.
“그건 내가 대답하겠다, 두지. 본체가 죽는다는 것은 말하자면 던전이 붕괴되는 것과 비슷할 거 같다, 두지. 던전이 붕괴되면 안에 있는 플레이어들은 모두 사망할 수도 있지, 두지.”
그 말에 차진솔은 더욱 집중했다.
‘이 무슨 개복치 같은 생선이 다 있어.’
신성력이 너무 과해져도 중독 증세가 일어난다.
아주 미량의 신성력을 꾸준하게 밀어 넣어줘야 했다.
사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호흡도 한 번에 크게 내뱉는 게 쉽지, 가늘고 길게 뽑아내는 건 어려웠다.
“방플을 추천한다, 두지.”
두더지맨이 핸드폰을 보여주었다.
차진혁의 방송이었고 마침 차진혁이 내벽을 잘라내고 있었다.
그 타이밍에 맞추어 차진솔은 힐을 사용했다.
“이런 방플은 부끄러운 게 아니다, 두지.”
그리고 몇 시간이 흘러 결국 차진혁은 검은색으로 일렁거리는 게이트를 하나 발견했다.
심지어 [안녕히 가십시오, 여기까지 ‘삼키는 민어의 몸속 세상’이었습니다.]라는 친절한 안내판까지 붙어 있었다.
차진혁이 게이트에 가까이 다가가 살핀 뒤 물었다.
“어때? 출구 찾은 거 같지? 여기로 나가면 바로 클리어되는 구조 같은데?”
“아니. 잠깐만 기다려.”
잠시 게이트를 살펴보던 한세린이 이상한 말을 꺼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