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는 그만 강해지고 싶다 148화
차진솔은 밥을 먹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의 상식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서 결국 물어봤다.
“오빠. 근데 어차피 이렇게 될 거 알고 있었고, 그래서 유도한 거 아니야?”
“어?”
“스칸노르비아 전사들 말이야. 퐁푸르인지 파퐁퐁인지 걔가 암살될 거고, 그러면 스칸노르비아의 전사들이 흥분해서 한국으로 향할 거고. 걔네들은 머리가 없으니까 수호수가 있는 서울로 쳐들어올 거고. 그거 오빠랑 유미 언니랑 세린 언니랑 다 계획한 거 아니었어?”
“그랬지?”
“근데 긴고주는 왜 외웠어?”
“아 그거?”
차진혁은 밥을 꼭꼭 씹다가 꿀꺽 삼킨 뒤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느슨해진 기강을 한 번씩 조여줄 필요가 있거든.”
“왜?”
“천사소녀잖아.”
회귀 전, 천사소녀에게 당했던 것들만 생각하면 아직도 치가 떨릴 지경이다.
천소사소녀는 한 번씩 이렇게 담금질을 해줘야 컨트롤하기 쉽다.
“그니까…… 딱히 잘못한 건 없다고?”
“잘못한 건 있지.”
“뭔데?”
“김평범의 즐거움을 빼앗은 죄.”
“아하!”
차진혁은 약간 고민에 빠졌다.
‘농담이었는데?’
사실 송하영과 곽도형이 잘못한 건 없었다.
즐거움을 빼앗았다는 건 그냥 해본 말이었다.
차진혁은 결국 유혹을 참지 못하고 중계자의 시야를 사용하고 말았다.
[……#유죄다 #유죄! #유죄!!! #감히_김평범을_건드려?]
차진혁은 저도 모르게 ‘아……!’ 하고 탄식을 내뱉었다.
아무리 봐도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다.
아무래도 차진솔이 조금씩 미쳐가는 것 같아서 속이 쓰렸다.
차진혁의 복잡해진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차진솔은 밥풀을 튀겨가며 말했다.
“말하자면 일종의 리더십이었구나.”
“……?”
“기강을 단단히 조여서 천사소녀가 다른 마음을 품지 못하도록 오빠는 오빠 나름대로 리더십을 보여준 거잖아. 맞지?”
“……그렇지?”
“고마워.”
“……뭐가?”
“영감을 받았어.”
“……무슨 영감?”
“본받아야겠다.”
[……#훌륭한_리더십 #멋진_리더 #나님도_김평범처럼]
“아니 오빠, 사실은 내가 요즘 만들고 있는 게 있거든.”
“뭔데?”
“그런 게 있어. 어떤 미친놈 때문에 만들고 있어.”
차진솔의 눈에서 열렬한 의지가 불타오르고 있었다.
차진혁이 여지껏 보지 못했던, 일종의 광기였다.
그 광기를 대변하듯 글자의 색깔이 붉은색으로 일렁거렸다.
[……#미친놈을 위하여]
차진혁은 밥 숟가락을 천천히 내려놓고서 인상을 살짝 찡그렸다.
“야, 너 요즘 연애하냐?”
어떤 미친놈인지 몹시 궁금해졌다.
* * *
방으로 돌아온 나는 ‘칸’에 대한 기억을 떠올렸다.
‘나와 싸웠던 칸의 레벨은 220대였지.’
당시 내 레벨은 200대 초반이었다.
대략 20레벨 가량 차이가 났었는데 결국은 내가 이겼었다.
사실상 그건 운이었다.
그냥 천운이 따라줘서 운좋게 내가 놈의 심장을 찌를 수 있었고, 그건 내게 있어서도 무척 찝찝하고 기분 나쁜 경험이었다.
‘지금 칸의 레벨은 200대 초반.’
레벨 격차로 보면 예전보다 지금이 훨씬 심했다.
당연히 그냥 맞붙으면 필패였다.
그렇지만 오히려 그때보다 더 상대하기 편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칸은 수호수가 버티고 있는 서울로 향하고 있으니까.
-“주인, 내 생각을 하고 있느뇨?”
말투가 영 이상해진 수호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와 영혼적인 결속이 매우 단단해진 것 같은데, 덕분에 이렇게 거슬리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하긴, 이 몸이 꽤 믿음직스럽기는 하시지.”
대꾸해 주면 끝도 없는 자화자찬을 늘어놓을 것이 뻔해서 딱히 대꾸하지는 않았다.
-“아름답기도 하고 말이시다.”
-“설마 주인, 내게 한눈에 반해버린 것은 아니겠도다?”
-“아직 주인은 내게 어울리는 배필이 아니느니라.”
-“보다 사내다워져서 늠름한 모습을 보여야 하시도다.”
수호수의 목소리를 꺼버리는 ON/OFF 버튼이 있으면 좋겠네.
내 머릿속에 목소리를 정통으로 꽂아넣는 힘이 있어서 굉장히 거슬리고 정신이 산만해졌다.
‘제왕의 격이 없었다면…….’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저 수호수의 정신산만한 혼잣말에 온통 정신이 빼앗겨 아무 생각도 못 했을 것 같다.
‘고민이네.’
한 가지 고민이 있었다.
김철수로 나설 것이냐, 김평범으로 나설 것이냐.
보다 적극적으로 싸우려면 당연히 김평범인데.
보다 나다운 모습으로 싸우려면 김철수다.
이제 나의 정체성은 검술가가 아니라 스트리머이므로, 김철수로 나서는 게 더 맞지 않나 싶기도 하고.
‘근데 명분은 김평범으로 쌓았는데 김철수가 나서는 것도 좀 이상한 거 같고.’
여러모로 생각이 깊어지는 밤이었다.
* * *
차진혁은 쇼파 중앙에 앉은 채 왕유미와 한세린을 지켜보았다.
‘왕유미와 한세린이 저렇게 친해졌어?’
한세린도 원래 왕유미를 싫어했었다.
정확히 말하면 좋아는 했으나 두려워했었다.
‘근데 지금은 영혼의 단짝이 따로 없네.’
차진혁은 할 말을 잃고서 둘을 바라보았다.
둘은 옆에 딱 붙어 앉아서 호감 어린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며 신나게 떠들고 있었다.
“패스파인더가 이렇게 통찰력이 뛰어날 줄 몰랐어. 오홍홍!”
“나도 이렇게 말 잘 통하는 친구가 생길 줄은 몰랐네.”
왕유미가 스칸노르비아의 전사들을 정의했다.
“문명화를 그다지 거치지 못한 야만인들. 힘과 폭력에 의존하는 바보들. 그게 스칸노르비아 전사 놈들이징!”
“그래서 성장에 한계가 있는 법이고.”
스칸노르비아 서버의 사람들은 나면서부터 강한 완력과 체력을 타고난다.
그러나 그 힘에만 지나치게 의존하는 경향이 짙어서 성장한계가 뚜렷한 편이었다.
“맞어맞어. 고릴라가 피지컬이 암만 좋아도 결국 지배자는 인간이지롱!”
뛰어난 길잡이인 한세린은 이미 워프포탈을 통해 ‘스칸노르비아’ 서버에 잠입했었고 그곳에 대한 정보를 실시간으로 끌어모았다.
그 일련의 과정에는 흑장미 연합의 도움이 있었다.
“그들은 스스로가 강하고 뛰어난 전사여서 강대서버들로부터 침략당하지 않는다고 자부하고 있는 바보들이야.”
한세린이 직접 보고 파악한 바에 의하면 실상은 달랐다.
“스칸노르비아는 지배해 봤자 먹을 게 아무것도 없는 서버였어.”
강대서버 입장에서는 굳이 침략하거나 다스릴 이유가 없는, 쓸모없는 서버였다.
“워낙 호전성이 강하고 멍청해서 노예로 쓰기도 애매하고.”
“하지만 개중에도 뛰어난 개체가 있기 마련이었으니!!!”
왕유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게 바로 위대한 지도자 칸. 전사들 중에서 그나마 머리를 쓸 줄 아는 개체랍니다. 그러니까 첫 공략지를 영국맵으로 잡았겠죵. 제일 만만한 맵이라고 판단했고, 섬이라서 대륙 세력의 방해도 덜 받을 테니깐!”
한세린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원래대로라면 수호수가 있는 한국에는 얼씬도 하지 않을 것이었겠지만, 일류전사의 암살로 인해 전사들이 흥분해서 날뛰게 되었고!”
옛 동료 한세린을 보는 차진혁의 마음이 나름대로 복잡해졌다.
‘한세린 원래 저런 열혈 캐릭터 아닌데.’
차진솔도 그렇고, 한세린도 그렇고.
차진혁이 원래 알고 있던 성격들과 조금씩 변해가는 것 같았다.
‘갑자기 둘이 크로스는 왜 하는데?’
왕유미의 텐션이 더욱 높아졌다.
“흥분한 전사들을 달래기 위해서라도, 어쩔 수 없이 칸은 한국으로 와야할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내부에서 폭동이 일어날 테니깐요!”
“결국 좋으나 싫으나 수호수가 버티고 있는 서울에서 한바탕 싸움이 벌어지겠지. 심지어 네미시스함포가 버티고 있는 이곳에서. 사실 지금 칸은 어떻게든 여길 오고 싶지 않을 거야.”
칸은 그들이 완전수라 여기는 21일 뒤, 한국의 서울을 치겠다고 공표했다.
김평범과 그 수하들을 잡아들이면 한국을 용서하겠다는 조건과 함께.
차진혁은 이들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들을 조금 더 자극해야 한다는 소리겠군. 그들의 분노가 가라앉지 않도록.”
“역시 진혁 님의 통찰력!”
“제법이야, 김철수.”
칸은 어떻게든 핑계거리를 만들어서 한국행을 미룰 것이다.
겉으로는 당장에라도 물어뜯을 것처럼 으르렁대면서.
시간이 지나 흐지부지되기를 바라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차진혁이 씨익 웃었다.
옛 동료들은 확실히 그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방송 켜야겠다.”
그들 덕분에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가 김철수로서 더욱 활약해야 한다는 것을.
* * *
HARD 운동의 계승자이자, 찰스의 친구였던 에이린은 평화를 울부짖었다.
세계 각국과 EPU에 적극적인 도움을 요청했고 영국 내에서 해방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김평범의 등장과 함께 에이린은 눈물을 터뜨렸다.
‘결국…… 영웅은 있었다.’
김평범이 모습을 드러내자 스칸노르비아의 전사들의 관심사는 김평범 쪽으로 옮겨갔다.
믿었던 유럽의 플레이어들이 외면하고 있는 사이, 바다 건너편 작은 나라의 영웅이 평화를 위해 몸을 일으킨 것이었다.
시간이 흘러 스칸노르비아의 침략자들은 영국 군함들을 차출하여 한국으로 향했다.
상대적으로 영국맵의 사정은 훨씬 나아졌다.
영국인들 입장에서 김평범과 곽도형은 영웅이었고 독립투사였다.
[우리는 김평범의, 평화를 사랑하는 정신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힘이 있는 자가 어떻게 힘 써야 하는지. 김평범은 우리에게, 무엇이 올바른지에 대한 가르침을 내려주고 있다.]
극악무도한 플레이를 지향하는 김철수와는 사뭇 다른 행보였다.
진정 힘 있는 자가 그 힘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좋은 본보기를 보여주고 있었다.
[김평범이야말로, 우리가 나아가야 할 이상향이며 우리의 영웅이다.]
에이린은 눈물을 흘리며 수많은 글을 각종 언론사에 기고했다.
그리고 홀로 탄식했다.
“김철수와 김평범. 그렇게 양극단의 인간이 어떻게 같은 나라에서 태어난 거지?”
인류의 해악 김철수. 인류의 영웅 김평범.
그 둘이 어떻게 한 시대에, 저 작은 나라에 함께 태어난 것인지 그녀로서는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그녀의 글들은 각종 커뮤니티는 물론이고 한마갤에서도 꽤 큰 호응을 얻었다.
한마갤의 네임드, ‘백과사전’이 에일린의 글에 답글을 게시했을 정도였다.
[그녀의 말에 상당 부분 동의한다. 그러나 이것은 오로지 김평범의 독단은 아니라고 판단한다. 김평범에게는, 그를 지원하는 매우 훌륭한 싱크탱크가 존재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국맵 고유의 특성에 대하여 공부하고 연구할 필요가 있다. 그곳에 비밀이 있다. 그곳이 어떠한 곳이길래 그러한 플레이어들이 탄생하였는가. 그것을 연구한다면 플레이어들은 진일보할 수 있을 것이다.]
[-글 작성자: 백과사전]
스칸노르비아의 위대한 지도자 칸과 지구서버의 영웅 김평범과의 대격돌이 예고된 가운데, 지구서버의 긴장감이 높아져만 갔다.
그사이 김철수가 등장하여 ‘스칸노르비아의 야만인들 따위가 어떻게 김평범과 싸워 이길 수 있겠느냐’며 여러 차례 도발 영상을 올리고 방송을 진행했다.
스트리머 김철수의 영향력은 상당해서 지구서버에 전 우주적인 관심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김평범의 유명세에 기생하는 ㅈ밥 찌끄래기가 또 나대는구나. 재주는 김평범이 부리고 돈은 김철수가 가져가네 ㅉㅉㅉ 수호수고 나발이고 김철수는 칸한테 한방 컷이 확실함.]
[-글 작성자: 과대포장사절]
[방구석에서 찌질이 새기, 너 같은 새기들 때문에 이 나라가 발전이 없는 거다, 어머니는 안녕하시냐, 너 같은 거 ♩♬♪♬♬♩ 미역국 ♬♩♬♩]
[글 작성자: 김철수는신이시다]
한마갤의 네임드들이 치고받고 싸우면서, 김철수에게 더 많은 관심이 쏟아졌다.
폭발적인 관심이 집중되는 가운데 차진혁조차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미국 7함대가 해상에서 스칸노르비아의 침략자들을 궤멸시켰다는 소식이었다.
‘이게 가능하다고?’
회귀 전에는 단 한 번도 벌어지지 않았던 일이었다.
해당 영상은 미국 스트리머 에건 폴을 통해 생생히 전달되었고, 수많은 시청자들이 에건 폴의 방송으로 몰려들었다.
사상 처음으로 김철수의 방송화력보다 에건 폴의 방송화력이 더 강해지는 현상이 나타났다.
차진혁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에건 폴……!’
처음으로(?) 자존심이 크게 다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