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는 그만 강해지고 싶다 136화
엘리네스는 여러모로 정상은 아닌 것 같았다.
'그래도 귀엽기는 하네.'
나를 보며 활짝 웃는 저 미소에는 해맑은 호감이 잔뜩 녹아들어 있었다.
"인증샷 찍어요!"
"……인증샷?"
어쩐지 방금까지 호된 일을 당했던 아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의 발랄함이 엿보였다.
정령왕의 딸이라서 그런지 정신적 회복이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빠른 모양이었다.
"아빠아. 폰 듀세여."
"……."
알키나스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품 안에서 핸드폰 모양의 물체를 꺼내주었다.
요즘 정령들은 핸드폰도 쓰네.
알키나스로부터 핸드폰을 받아든 엘리네스는 내 다리를 꼭 끌어안고서 사진을 찍어댔다.
이 정도 찍었으면 될 거 같은데 내 예상을 뛰어넘는 열정을 보여주었다.
그 열정이 너무 숭고해서 보여서 나는 열심히 함께해 주었다.
"헤헤, 드디어 한 장 찍어떠."
한 장이라고?
아무튼 얘도 평범한 애는 아닌 거 같다.
정령왕의 딸이니 당연한 거겠지만.
"사진 올려더 대여?"
"어디에?"
"엔트타그램!(엔스타그램)!"
엔스타그램은 전 우주적으로 사용하는 SNS다.
참고로 나는 사용해 본 적 없었다.
회귀 전, 내 계정이 있기는 했는데 그건 지원팀이랑 왕유미가 맡아서 관리해 줬었다.
'그러고 보니 지구에는 아직 도입이 안 됐네.'
"올려더 대여?"
"안 돼."
"힝, 왜여?"
언젠가 내 얼굴이 알려지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시기는 늦추면 늦출수록 좋다.
귀찮은 일이 덜 생길 테니.
엘리네스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3초 후에 울 거야!'라고 주장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엘리랑 삼촌의 소중한 추억이니까. 비밀로 간직하자. 엘리는 착한 어린이니까 내 말을 잘 들어줄 수 있지?"
"녜에."
"착하다."
"그러면은요, 머리 쓰다듬어줄 수이써여?"
"그래."
엘리네스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어주자 엘리네스는 헤헤! 하고 밝게 웃었다.
아무튼 나는 정령왕의 딸과도 계약을 맺었다.
'정령술사가 아닌데도 이게 된다니.'
나로서는 신기한 경험이었다.
알키나스는 엘리네스를 품에 안은 채 내게 말했다.
"일단 나는 정령계로 돌아가겠다. 훗날 기회가 된다면 만나게 되겠지. 반갑고 고마웠다. 이 은혜는 잊지 않겠다."
은혜를 절대 잊지 않는 정령답게 내게 한 가지 아이템도 건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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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키나스의 정령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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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 계약 없이도 나를 소환할 수 있는 매개체이다. 네가 감당할 수 없는 일이 생겼을 때 내가 도와주겠다."
등급은 신화급.
보통 사람은 살면서 구경조차 하기 힘들다는 신화급을 또 만났다.
'카드야 뽑기였으니까 운이 좋아서 그렇다 쳐도.'
겨우 50억밖에(?) 안 썼지만 운이 워낙 좋아서 뽑을 수 있었다.
근데 그건 '행운 그 자체'라는 신비 덕분이었다.
신비의 도움 없이 이런 식으로 정식 신화급 아이템을 이렇게 얻게 될 줄은 몰랐다.
가슴이 벅차오르는 가운데 나는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고 말았다.
'아.'
나는 나에게 또 커다란 실망을 하고 말았다.
'또 오디오를 비웠어?'
정령왕과의 대화에 미쳐서. 그 딸과의 계약에 심취해서. 신화급 아이템에 돌아버려서.
나는 또 방송에 집중하지 못하는 추태를 보이고 말았다.
'같은 실수를 또 했다고?'
하, 진짜 왜 이렇게 발전이 없냐, 발전이.
약간 우울해졌지만 이걸 티 내면 시청자들에게도 별로 좋은 영향은 아닐 것 같았다.
"잠깐, 정령왕!"
몸을 띄워 정령문을 향해 움직이던 정령왕이 나를 바라보았다.
"볼일이 남았나?"
스트리머로서, 꼭 해야 할 말을 하기로 했다.
같은 실수를 반복한 한심한 모습을 내 스스로에게서 지워내기 위하여.
다시 심기일전해서 비장하게 말했다.
"구독, 좋아요, 알림설정, 부탁한다."
* * *
정령왕이 정령문을 통해 정령계로 복귀했다.
정령문에서 활활 타오르던 불꽃은 사그라들었고, 공중에 흉물처럼 우두커니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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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쇄된 정령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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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써 정령왕도 제 구독자가 되었습니다. 정령왕 알키나스 님, 삼등이가 되신 것을 환영합니다."
삼등이는 '3등이'에서 유래된 내 구독자 애칭이다.
내가 3등을 목표로 하는(했던) 플레이어니까 구독자 애칭을 삼등이로 정했다.
사실 평범이로 할까 하다가 그러면 내가 김평범인 게 너무 티 나지 않을까 싶어서 삼등이로 했다.
확실히 내 사회성은 높아진 것 같고, 개인적으로는 삼등이라는 별칭이 꽤 마음에 든다.
내 (초기) 방향성과 아주 잘 맞는 거 같다.
나는 폐쇄된 정령문의 상세설명을 확인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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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쇄된 정령문]
불로 이루어진 열기의 세상, 그곳과의 소통이 단절되었다.
그러나 맺음이 있으면 끊음이 있고, 끊음이 있으면 맺음이 있듯.
오늘의 폐쇄는 끝이 아니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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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알림이 이어졌다.
[신세계 시나리오, '새로운 곳에 홀로, 그리고 함께 걷다'가 완성되었습니다.]
정령문을 폐쇄하고 신세계와 지구를 잇는 것이 이 시나리오의 완결인 것 같았다.
내 발밑에 오망성 마법진이 생성되었다.
순식간에 마력회로가 뻗어 나가고 강렬한 마력이 뿜어져 나오면서 내 몸을 뒤덮었다.
나를 어딘가 다른 곳으로 이동시키는 이동 마법이었다.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신세계는 승자독식의 강자존. '홀로 걷는 자'가 모든 것을 독식합니다.]
오.
'홀로 걷는 자'는 솔로잉 모드를 택한 나를 지칭하는 말이다.
그러니까 내가 모든 것을 혼자 먹는다는 소리다.
[승리자의 아량으로 보상을 양보 혹은 공유하시겠습니까?]
봉킹에게도 비슷한 알림이 들리고 있는 것 같다.
애절한 눈빛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어느샌가, 나는 '동쪽 성읍'에 홀로 남겨져 있었다.
"애초에 시스템이 신세계는 승자독식의 강자존이라고 설명을 했습니다. 그런데 보상을 공유하거나 양보하는 것은 원칙에 위배되는 바보 같은 짓이죠."
물론 그런 알림이 없었어도 당연히 제가 다 먹었을 거기는 합니다만.
그 말까지는 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나는 이제 사회성이라는 것을 배워가고 있는 중이고, 나는 어느덧 제법 괜찮은 사회성과 상식을 가진 사람이 되었다고 자부하고 있으니까.
['홀로 걷는 자'의 보상이 주어집니다.]
[대업적, '홀로 걸어 완성한 자'를 달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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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걷는 자]
앞서간 발자국을 남긴 이여, 그 걸음이 영광되도다.
새로운 세계를 향한 그대의 개척이 훗날을 이롭게 하리.
그대의 발자국을 좇던 모든 이들은 영원히 그대를 뒤쫓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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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업적을 달성하자 또다시 '명예의 전당'에 등록하겠냐는 알림이 들려왔다.
"아…… 명예의 전당."
예전, 대업적 '완성된 튜토리얼'을 달성했을 때에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명예의 전당 등록을 거부했었다.
명예의 전당은 등록해 봐야 어차피 남는 게 명예밖에 없으니까.
그냥 내가 1등이라고, 내가 이렇게 잘했다고 광고하는 효과밖에 없으니까.
'그…….'
등록하면 안 되나?
어차피 내가 방송으로 이 내용을 모두 공개하고 있는데?
'아냐. 초심을 잊지 말자.'
나는 레벨 150까지만 이렇게 하고 은퇴하는 거다.
그 이상으로 넘어가면 이제 진짜로 위험해질 수도 있다.
나야 그렇다 치더라도, 예전처럼 어이없이 가족들을 잃을 가능성도 생긴다.
'내가 사람이면 정신 차려야지.'
명예의 전당 등록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 자체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냥 이건 마음가짐의 문제였다.
튜토리얼 초반, 이 명예의 전당을 처음 마주했을 때 나는 이것을 아메바 같은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 마음가짐을 잊지 않기로 했다.
"명예의 전당은 등록 안 하겠습니다."
근데 왜 이렇게 마음이 쓰리지?
저거 등록한다고 좋은 게 아무것도 없는데?
나는 씁쓸함을 감춘 채 말을 이었다.
"대업적 효과를 확인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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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적효과:
1. 던전, 신세계 내에서 획득한 모든 업적효과의 상시적용.
2. 시나리오 최초 진행 시, 획득한 업적효과 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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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신세계 내에서 획득한 업적은 [인위를 부수는 자]인데요."
인위를 부수는 자는 인위적으로 만든 것들에 대한 상성을 높여주는 업적.
이를테면 기계형 마물이나 키메라 같은 마물에게 큰 힘을 발휘하게 해준다.
"그게 원래 신세계 내에서만 적용되었는데, 이제는 던전 바깥에서도 모두 적용되는 상시효과인 것 같습니다!"
꽤 흡족한 효과였다.
특정 종류의 마물/상황에 대해서 확실한 우위를 가져갈 수 있는 힘이니까.
"그리고 어떤 시나리오를 최초로 진행하게 되었을 때에 메리트도 주어졌는데요. 거기서 획득한 업적효과를 강화할 수 있네요."
이건 이것 나름대로 나중에 엘튜브각 하나 뽑을 수 있을 거 같다.
일단 방송을 이어갔다.
"그간 폐쇄된 정령문의 이름이 바뀌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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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리어 게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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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길 통하면 밖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이미 클리어는 인정된 모양이네요."
지금 당장에라도 신세계를 클리어할 수 있다.
회귀 전, 내가 알고 있는 공략과는 너무 많이 달라지기는 했지만 아무튼 이미 클리어는 해낸 셈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대로 저길 통과할 생각이 없었다.
"기본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클리어 게이트는 열렸지만, 처음 받았던 퀘스트를 클리어하러 가보겠습니다."
나는 한참을 걸어 '신세계'의 초입, 아조프 마을 서문에 도착했다.
서문을 지키는 경비병 NPC가 나를 알아보았다.
"오, 자네! 용케 살아 돌아왔구만! 열꽃은? 구해왔는가?"
"예, 여기 있습니다."
내가 '신비로운 열꽃'이 든 화병을 건네주었다.
NPC가 화병을 받아든 순간, 화악-! 하고 보라색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어?'
화병을 받아든 NPC가 그 자리에서 타죽었다.
그리고 이상한 알림이 이어지기 시작했다.
* * *
[신세계의 씨앗이 발아합니다.]
타죽은 NPC의 잔해에서 요상한 식물이 자라기 시작했다.
그것은 점점 빠르게 자라나더니 잭과 콩나무에 나오는 거대한 콩나무처럼 하늘 높이 치솟아 올라 하늘에 닿았다.
"구름에 닿았습니다. 높이가 어느 정도 될지 모르겠는…… 아조프 마을 전체가 바람결에 흩어지고 있네요."
내가 알던 신세계는 사실 '신세계'라는 이름이 붙기에 너무 거창하기는 했었다.
"마을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거대한 마법진이 대신했습니다."
처음 보는 광경에 나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이럴 줄 알았으면 '드론 비행 촬영' 같은 스킬도 익혀놓을걸.
1인칭 시점을 고수한다는 편협한 사고에 사로잡혀서 그런 기술을 익혀놓지 못한 게 아쉬웠다.
하늘 위에서 보면 되게 새로울 텐데.
"그리고 어두워지고 있습니다."
마법진은 오색(五色)으로 밝게 빛나고.
하늘 높이 치솟은 거대한 나무는 붉은 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별이 쏟아집니다."
깜깜해진 하늘에 수많은 별이 꼬리를 그리며 낙하했다.
하늘의 수많은 별이 움직이자 마치 땅이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졌다.
달리는 차 안에서 보는 나무가 뒤로 움직이는 것처럼.
"아름다운 광경이네요."
그런데 순간 쾅! 하는 소리가 났다.
나는 직감적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보지 않아도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알 것 같았다.
"하늘 높이 자란 이 나무가 세계의 천장에 부딪친 것 같습니다."
던전, '신세계'는 무한한 세상이 아니었다.
저 높은 하늘에, 내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높은 곳에 세계가 끝나는 지점이 존재하는 듯했다.
거대하게 자란 나무는 더 높이 자라고 싶은데 밑동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나무는 용을 쓰고 있고, 하늘이 흔들리는 느낌이 드네요."
아름다운 꼬리를 그리며 낙하하던 유성우는 어느덧 불규칙한 모습으로 기이하게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쾅!
폭발음이 들렸다.
"유성우는 더 이상 아름답지 않습니다."
유성우도 멀리서 볼 때에나 아름다운 거지, 그 유성이 내 주변으로 떨어지면 메테오스톰이 되는 거다.
콰과광!
먼지구름이 자욱이 피어올랐다.
갈 길 잃은 유성들이 이곳, 신세계에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이대로 가면 신세계는 무너져서 멸망할 것 같군요. 이 안에 있는 저도 함께요."
그렇지. 이래야 던전이지.
여지껏 너무 쉽다 했다.
"재미있어지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