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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는 그만 강해지고 싶다-134화 (134/437)

회귀자는 그만 강해지고 싶다 134화

공무원 시절.

내 사회적 위치는 매일 오락가락했다.

어떤 사건을 잘 해결하고 나면 국민적 영웅이라 칭송받기도 했는데 또 어떤 실수를 저지르고 나면 만인의 쓰레기가 되곤 했다.

말이 좋아 사회적 위치의 변동이지, 사실 그냥 동네북이었다는 뜻이다.

근데 왕유미의 합류와 함께 꽤 많은 것이 변했다.

"진혁 씨, 진혁 씨는 그렇게 가면 안 된다니까요?"

어느 날, 민간인 피해가 발생했었다.

얘기하자면 복잡하지만 아무튼 일가족이 사망한 사건이었다.

참고로 그들을 구하려고 했으면 우리가 죽는 상황이었다.

여느 때처럼 언론에서 우리를 두드려 팼고, 그중에서도 이번 타겟은 나였다.

내게 공식적인 입장을 내놓고 사과를 하라는 요구가 빗발쳤다.

나는 힘없는 공무원이었고 국민적 여론이 들끓으면 그 요구를 들어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국가 차원에서 지원되는 이 달달한 꿀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뭐든지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게 있는 거 아니겠는가.

-진혁 씨는 그냥 배 째라 포지션으로 가야 해요.

왕유미는 내게 이상한 컨셉을 주문했다.

-나 믿고, 그렇게 가요. 할 말 다 하세요. 그들을 구하려고 했으면 내가 위험했다. 그들을 구하지 못한 것은 못내 가슴이 아프…… 아니다, 그냥 제가 대사 만들어줄 테니까 그렇게 인터뷰해요.

대본(?)을 받아든 나는 꽤 곤란했었다.

내가 아는 대국민 사과는 보통 납작 엎드려서 '죄송합니다 한 번만 봐주세요' 하는 것인데, 이걸 대국민 사과라고 해야 할지 잘 모르겠는 수준이었다.

죽음에는 깊이 애도한다, 그러나 나는 잘못한 것이 없다 라는 게 주요 골자였다.

-이렇게 인터뷰를 하라고요? 욕 엄청 먹을 텐데?

-나 믿으세요. 진혁 씨 캐릭터는 이렇게 가는 게 맞아요.

왕유미는 윙크하며 찡긋 웃었다.

-잿빛세계의…….

-그만!

-월, 왕, 폐, 하.

나는 소름이 돋아서 왕유미로부터 도망쳤었다.

어쨌든 나는 왕유미가 조언해 준 대로 움직였고 결과적으로는 내게 굉장히 유리한 상황들이 펼쳐졌다.

이유는 잘 모르겠는데 왕유미 표현으로는 '극성빠'들과 '팬덤'이 형성되었다.

듣기만 해도 소름 돋는 잿빛 어쩌고가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잘 먹혔다나 뭐라나.

이런저런 상황들이 꽤 많이 벌어졌는데 아무튼 결과적으로 왕유미의 조언은 늘 최선이었다.

'이해는 안 되지만 해보자.'

* * *

왕유미의 제안을 받게 된 봉킹은 황당했다.

-김철수의 얼굴을 가리라는 것까지는 오케이. 알겠음.

김철수는 철저히 1인칭 시점으로만 방송을 진행한다.

게다가 늘 '기만자의 가면'을 사용하여 진짜 얼굴을 숨긴다.

진짜 모습을 드러낼 건데, 그때 김철수의 얼굴을 가리라는 것까지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근데 그게 지금 상황에서 무슨 의미가 있어? 지금 얼굴 까서 뭘 어쩔 건데?

-의미가 있어요. 보면 알아.

-그니까 무슨 의미?

-내 나름대로 정보를 모아보니까, 엘리네스 얼빠에요.

-얼빠?

-그래서 존프릭한테 납치당했다던데요?

왕유미는 '단순히 외모만 중요했던 것은 아니다. 존프릭이 본인 특유의 차원접합 능력과 정령친화적인 기술들로 호감을 먼저 사기는 했……'까지 썼다가 모두 지워버렸다.

이런 것들은 아주 사소한 문제였다.

중요한 건 정령왕의 딸 엘리네스가 얼빠라는 사실 그 자체였으니까.

-이게 통한다고 생각하는 거냐? 진심?

봉킹 입장에서는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였다.

-이게 안 통한다고 생각하는 건가요? 진심?

몇 분 후.

봉킹은 기함을 토했다.

여지껏 공포에 질려 있던 엘리네스가 경계심을 일부 풀어버린 것이었다.

엘리네스는 더 이상 도망치지 않았다.

너무 황당한 기현상에 봉킹은 말문이 막힐 뻔했으나 그는 프로였다.

"김철수의 뒷모습, 엘리네스의 앞모습이 보입니다. 김철수가 무슨 마법을 부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상하게도 엘리네스가 인터뷰에 응하는 모습이네요. 여전히 두 눈에는 두려움이 가득해 보이기는 합니다만…… 어? 김철수가 내미는 손을 잡고 일어섭니다."

봉킹은 자리를 옮겨서 차진혁 쪽으로 다가갔다.

지나치게 가까이 가면 엘리네스가 너무 긴장할 것 같아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차진혁을 보았다.

'시X.'

김철수가 어째서 자신의 얼굴을 제대로 드러내지 않는가에 대해서 말이 많았다.

얼굴에 큰 화상을 입어서다, 굉장한 추남이다, 위압감 혹은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문신이 잔뜩 되어 있다, 등등.

봉킹은 약간의 패배감을 느꼈다.

'저 얼굴을 안 드러냈는데 비공식 랭킹 1위야? 그것도 압도적인?'

봉킹은 얼굴도 경쟁력이라고 생각한다.

잘생긴 게 다는 아니지만, 잘생기면 당연히 유리하다.

저런 무기를 꺼내놓지 않은 채 비공식 랭킹 1위를 유지하고 있는 차진혁이 문득 부러워졌다.

목소리가 들려왔다.

"녜에. 엘리 이름은 엘리네스에여. 무서워써여."

엘리네스는 칭얼대며 차진혁의 품에 안겼다.

차진혁은 투박한 손놀림으로 엘리네스의 등을 토닥여주고 있었다.

어느순간 엘리네스는,

"갠탸나, 갠타냐, 해주세여."

라며 응석을 부리고 있었다.

봉킹은 이 상황을 납득하기 어려웠다.

'김철수가 얼굴 드러낸 거 말고 뭐가 달라졌는데?'

그 외에 상황은 아무것도 바뀐 게 없다.

그런데 엘리네스는 경계를 풀었고, 김철수에게 안겨서 울고 있다.

'이게 나라냐!'

그가 여러 종류의 패배감을 느끼고 있을 무렵, 화악- 하고 불길이 일었다.

정령문에서 검은색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순간, 하수구 전체를 검은 불이 집어삼켰다.

봉킹은 더 이상 방송을 진행할 수 없었다.

'뭐야?'

잠깐이지만 기억이 끊어진 느낌이었다.

"저 죽었나요?"

주위를 둘러보니 다들 죽어서 세이브 포인트에서 되살아난 모양이었다.

'최강벽도 죽었어?'

봉킹이 최강벽에게 물었다.

"이게 무슨 일이죠? 공격이 있었나요?"

"공격은 전혀 없었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인지조차 못하고 사망한 다른 이들과 달리, 최강벽은 꽤 큰 공포를 마주해야만 했다.

"그저 존재감만으로 우릴 죽인 거야."

"존재감만으로요? 그게 가능합니까?"

"나도 몰라. 처음 본 거라서."

최강벽은 입술을 깨물었다.

아무리 상대가 극강의 정령왕이라고 할지라도, 이렇다 할 공격을 받지도 않았는데 사망하다니.

"확실한 건…… 정령왕이 우릴 정말로 죽이려고 공격했다면."

최강벽의 목덜미가 찌릿찌릿했다.

그에게는 꽤 명확한 미래가 보였다.

"부활 설정값조차도 깨져 버렸겠지. 오히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군."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최강벽은 주먹을 꽉 쥐었다.

"김철수가 없다."

김철수는 정령왕의 존재감으로부터 살아남은 것이 분명했다.

김철수는 살았는데 자신은 죽었다.

자존심에 엄청난 상처를 입고 말았다.

그는 너털너털 걸어가 이현성 옆에 앉았다.

"너의, 상당한 것을 가르는 검은 잘 견식 하였다. 이현성."

"……."

"그 검을 내게도 보여다오."

어쩐지 말투가 약간 이상해지기는 했으나 –멋들어진 김철수의 영향을 받았다- 최강벽은 자신의 말투가 이상해졌음을 인식하지 못했다.

"내 검을?"

"우리는 공동의 목표가 생겼다. 스트리머이면서 탱커인 나보다 단단하고, 검술가인 너보다도 강하지. 적어도 내 분야, 내 영역에서는 놈을 이겨야 하지 않겠어?"

"……그렇지."

이현성의 눈에도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어차피 하수구에 다시 진입해 봐야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없어. 그러니."

이현성이 검을 뻗었다.

말보다는 행동이 훨씬 빠르니까.

"자! 나도, 갈라보아라! 수련이다!"

"원한다면."

봉킹은 둘의 모습을 보며 무척이나 황당해했다.

"갑분대련……?"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게 방송을 이어가고 있지만 속으로는 외치고 싶었다.

야 이 미친놈들아!

왜 여기서 갑자기 대련을 하고 지X이냐!

부활한 지 3분도 안 지났다고!

그리고 무슨 사극 찍냐! 말투가 왜 그런 건데!

봉킹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김철수에게 잠식되고 있어.'

봉킹은 속으로 다짐했다.

나는 미치지 않으리라.

김철수 바이러스에 감염되지 않으리라!

* * *

일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이놈!"

하수구는 이미 알키나스가 피워올린 검은 불꽃으로 가득 찬 상황.

우주를 통틀어 가장 뜨겁고 악랄한 불.

이성을 잃은 불의 정령왕이 다루는 지옥의 겁화.

바로 묵화(墨火)였다.

차진혁은 저도 모르게 히죽 웃을 뻔했다.

'애들은 다 죽었고.'

정령왕의 등장과 함께 모조리 사망했다.

'근데 난 살았네?'

지금 뜨겁긴 했다.

그러나 나름대로는 버틸 만했다.

'3분?'

아니,

'4분?'

아니,

'잘하면 5분까지도 버틸 수 있겠는데?'

정령왕의 살의가 느껴졌다.

날카롭고 예리한 살기가 수백 갈래의 창이 되어 차진혁 자신의 몸을 난도질하는 것만 같았다.

정신이 잘게 잘게 쪼개지고 몸이 수백 토막 나는 것처럼 아찔해졌다.

그렇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기뻤다.

'5분 정도는 버텨보고 싶다.'

검술가 시절의 자신이었더라면?

불사조의 심장을 제대로 섭취한 지금보다 불 저항력이 약했을 것이었다.

'그때의 나보다, 지금의 내가 더 강한 거야. 적어도 불 저항에 관해서는.'

과거의 자신을 뛰어넘은 이 성취감은 차진혁을 들뜨게 했다.

'조금만 더 불길이 치솟아주면 좋겠는데.'

그러나 아쉽게도 상황은 오래가지 못했다.

엘리네스가 차진혁과 알키나스 사이를 막아섰기 때문이었다.

엘리네스가 짧은 두 팔을 양옆으로 쫙- 벌리며 알키나스를 막았다.

"아빠! 이 오빠 차캐."

"엘리. 비키거라!"

"아니얌. 이 오빠 죠은 사람이야."

한동안 대치가 이어졌다.

정령왕의 딸은, 이성을 잃은 정령왕의 이성을 되찾게 해주었다.

어느새 주변을 가득 채웠던 '묵화'는 사그라들었고, 차진혁을 향한 날카로운 살기도 조금씩 잦아들었다.

'3분 20초를 버텼네.'

차진혁 스스로도 놀라운 결과였다.

레벨 150도 안 되는 초보-차진혁 기준에서 초보-가 분노한 정령왕이 피워올리는 묵화 앞에서 무려 3분 20초를 아무렇지도 않게 버텨냈으니까.

'더 실험해 보고 싶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겠지?'

정령왕과 정령왕의 딸이 눈물겨운 부녀상봉을 치르고 있었다.

스트리머인 차진혁은 이 감동적인 장면을 극적으로 담아야 할 의무가 있었다.

'BGM도 깔면 좋겠는데.'

그렇지만 어떤 BGM을 깔아야 좋을지.

어떤 구도로 저들을 촬영해야 할지에 대한 감이 별로 없었다.

차진혁은 오늘도 또 반성을 하고 말았다.

'히든 피스 공략하고 마구잡이로 싸워댈 줄만 알았지, 이런 소소하고 따뜻한 연출은 생각도 못했잖아?'

이건 차진혁에게 새로운 도전이었다.

생각해 보니 강미나는 이런 것도 굉장히 잘했던 것 같았다.

사람의 감정선을 건드리는 연출 말이다.

다음에는 강미나를 따라다니면서 약간 공부를 해야 할 것 같기도 했다.

"……응. 저 오빠가 구해줘떠. 갠탸나, 갠탸나 해줘떠."

꽤 오랜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상황은 일단락되었다.

엘리네스는 울다가 지쳐 알키나스의 등에 업혀 곤히 잠들었다.

정령왕 알키나스가 차진혁에게 다가왔다.

"오해해서 미안하군. 그리고 고맙다."

"고마울 거 없어. 정령들의 목소리를 들었을 뿐이니."

알키나스의 몸이 움찔했다.

"내 존재감이 느껴지지 않는가?"

"느껴지지. 그 존재감만으로도 내 동료는 모두 불타 죽었는데."

"신기한 자로군. 보통은 날 두려워하는데 말이야."

존재감만으로도 주눅 들어서 고개를 들지 못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런데 차진혁은 달랐다.

'단순히 두려움을 숨긴다의 개념이 아냐. 이자는, 내게 그 어떤 두려움도 느끼지 않고 있다.'

마치 뇌의 어딘가가 고장 난 것 같은 느낌에 가까웠다.

"간만에 만나는 미친놈인가."

"미친놈?"

미친놈이라고?

이렇게 정신 똑바로 차리고 스트리머로서 착실히 성장 중인 나한테?

시청자들에게 동의를 구했다.

"이건 선 넘는 발언이죠? 맞죠?"

차진혁이 인상을 살짝 찡그리고서 말을 이었다.

"딸을 구해준 은인에게 할 말인가?"

"칭찬이네. 나는 미친놈을 아주 좋아하거든. 불에 대한 친화도가 상상 이상인데, 혹시 불사조의 심장이라도 먹은 건가? 네비디아의 불꽃까지 느껴지는데 말이야."

"먹었다."

"용케 살아남았군. 보통은 타죽었을 텐데."

"운이 좋았어."

"겨우 운이 좋다 정도로 살아남을 수 있었을 것 같은가? 기본적으로 불에 대한 엄청난 친화도를 타고났어야 겨우 가능할까 말까야."

알키나스는 흐음, 하고 고개를 갸웃하다가 꽤 오랫동안 생각에 잠겼다.

한참 후, 결국 마음의 결심을 끝낸 알키나스가 입을 열었다.

"이봐, 은인, 잠시 손을 줘봐. 확인해 봐야 할 것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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