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는 그만 강해지고 싶다 123화
시스템에는 그 나름대로의 개연성이라는 것이 늘 존재하기 마련이었다.
보통은 원인과 결과가 사소하게라도 존재하는 편이었다.
시스템을 통해 어떤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질 때도 분명 있었지만, 시간이 흘러 그 결과에 대한 원인이 밝혀지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근데 내가 죽기 전까지 미스테리로 남았던 사건들이 몇 개 있었지.'
미쳐 버린 정령왕 알키나스의 침공.
이건 인류가 정말로 이해하기 어려운 부류의 사건이었다.
'정령들은 어지간하면 폭력을 저지르지 않는데.'
그런데 알키나스는 폭력을 넘어 학살을 저질렀다.
* * *
* * *
당시 아무도 그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다.
알키나스가 처음 모습을 드러냈던 곳은 미국의 네바다주였다.
알키나스는 내 딸을 내놓으라는 말만 반복하면서 근방의 사람들을 몰살시켰다.
'피해 규모는 최소 서버 시나리오급.'
정확히 기억은 안 나는데 최소 몇십만 명이 죽었다.
미국을 충격에 빠뜨린 사건이었다.
'너무 강해서 전면전으로는 알키나스를 막아내지 못했었지.'
인류는 정령왕을 처치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다른 방법을 강구하기 시작하여 결국 그 강대했던 정령왕을 정령계로 돌려보내는 데에 성공한다.
'정령문을 봉인해야 했어.'
정령문의 위치는 나도 모른다.
아무튼 특수한 능력을 가진 플레이어들이 합심하여, 자신의 목숨을 내던지면서까지 어딘가에 생성된 정령문을 봉인했다고 한다.
'정령계로부터의 정령력이 차단되면서, 결국 알키나스는 역소환되고 말았었지.'
미스테리한 사건이었다.
그 어떤 시나리오와 연관된 것이 아니었는데, 시나리오 최종 보스급의 괴물이 등장했었으니까.
시스템과 관련이 있는 것이었다면 어떤 식으로든 보상이 있어야 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이렇다 할 보상을 획득하지 못했다.
정령왕의 침공은 말 그대로 전쟁이었고, 파괴와 죽음만을 가져왔다.
'그야말로 아무런 개연성이 없었었는데.'
그래서 사람들은 이 사건을 그냥 재해로 불렀다.
'어느 날 돌아버린 정령왕이 엄한 곳에 해코지를 했다' 정도로 마무리되었던 기억이 있다.
'진짜로 딸을 납치당했던 거구나.'
이제야 하나둘씩 퍼즐이 맞춰지는 기분이다.
'이후, 정령왕에게 피해를 입었던 플레이어들은 심각한 후유증에 시달렸고, 그들을 치료해 줬던 자가 외과의사 존프릭.'
정령열에 의한 후유증을 치료해 주기도 했고, 과학기술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의수라든가 인공장기 등을 만들어 플레이어들에게 선물해 주기도 했다.
당시, 신이 내린 외과의사라는 칭송을 받기도 했었다.
'어떻게 그렇게 정령에 빠삭한가 했더니.'
여기에 이렇게 인공 실험장을 만들어 정령들을 가지고 온갖 생체실험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쁜 새끼네 그거.'
아마도 내가 지금 진행하고 있는 신세계 시나리오, '새로운 곳에 나 홀로 걷다'의 결말은 결국 정령왕의 딸을 구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겸사겸사 재해도 막는 건가?'
솔직히 말해 재해를 막아야겠다는 사명감이나 정의감 같은 건 없다.
다만, 이번 시나리오를 잘 진행해 나가다 보면 정령왕과 좋은 관계를 쌓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정령은 원한을 잘 잊지만 은혜는 절대 잊지 않는 족속이고.'
어지간하면 적을 만들지 않는다.
대신, 한 번 친구가 되면 영원한 친구로 생각한다.
일단 친구가 된 이후라면, 어지간히 나쁜 일을 저질러도 그냥 눈감아 주는 천성을 지니고 있다.
'안 그래도 정령왕과 만나보고 싶었다.'
당시 나는 정령왕과 싸워보지 못했다.
얼마나 강했으면 미국의 랭커들이 그렇게 몰살을 당했던 건지.
한 번 그 불길에 휩싸여보고 싶다.
[……도와……줄 건가?]
선택지가 떴다.
──────────
1. "물론이다, 정령왕의 딸을 찾아 존프릭의 만행을 저지하고 너희들을 지지하겠다."
2. "나의 즐거움은 그저 살을 에는 전투뿐. 너와의 전투를 꿈꿔왔다, 불의 정령 이그리트여."
──────────
와,
하마터면 2번 선택할 뻔했네.
'이건 제대로 클리어해야 해. 정신 똑바로 차리자.'
마음을 다잡았다.
"물론이다, 정령왕의 딸을 찾아 존프릭의 만행을 저지하고 너희들을 지지하겠다."
화륵-!
이그리트의 몸에서 불길이 피어오르는가 싶더니 이내 불덩이가 되어 어딘가로 날아갔다.
그 움직임을 좇아보니, 저만치 멀리 3층으로 향하는 계단이 보였다.
[……부탁……하지.]
계단 앞으로 가자 특수한 결계 같은 것이 걸려 있었다.
정령의 힘은 느껴지지 않고 일종의 트랩 같았다.
'이런 건 없었는데.'
원래 이곳의 이그리트는 총 3페이즈에 돌입하는 마물로 설정되어 있다.
이그리트가 까다로워서 그렇지, 몇 번 잡고 나면 3층으로 가는 길이 열린다.
"반투명한 막 같은 게 보이네요."
일단 칼로 몇 번 때려봤으나 꿈쩍도 하지 않았다.
중계자의 시야로 보니 이름이 보였다.
──────────
[분리하는 결계]
──────────
"아주 단단해서 그냥 부수고 들어가기는 어려울 거 같기는 합니다만, 그래도 별로 상관은 없을 거 같습니다. 저한테는 새로운 업적이 있으니까요."
내가 얻은 보상을 이렇게 적재적소에 잘 활용할 수 있게 해주다니.
'신세계'는 정말 짜임새 있는 던전인 거 같아서 마음에 든다.
"아까, 메마른 광야에서 이 업적을 획득했었던 거 다들 기억하시죠?"
──────────
[인위를 부수는 자]
인위적인 모든 것을 무너뜨리라.
신세계의 법도를 무시한 모든 행위에 판단의 철퇴가 내려지리니, 그날에 모든 것은 부서지리.
업적 효과 : 인위에 의한 모든 것을 파괴하는 능력 증폭. (단, 해당 효과는 신세계에 한함.)
──────────
"인위란 자연의 힘이 아닌 사람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일을 뜻하죠. 이 결계는 사람이 만든 거 같습니다. 아마 존프릭이겠죠? 업적 적용했습니다. 과연 부서질까요?"
라칸을 휘둘렀다.
"부서지네요. 다들 이렇게 진행하시면 될 거 같습니다."
근데 이거 해금술로도 풀리나?
해봤어야 했는데 아쉽네.
봉킹은 침을 꿀꺽 삼켰다.
'뭐가 이렇게 강해?'
적은 단 한 마리.
그것도 사람 팔뚝만 한 도마뱀 하나였다.
문제가 있다면 그 도마뱀의 전신이 활활 불타고 있다는 것.
"근접계열 공격이 가능한 건, 그나마 검왕 이현성밖에 없군요."
이현성은 특별한 검기 같은 것을 덧씌워서 이그리트에게 유효한 공격을 성공해 냈다.
그 외에 다른 플레이어들은 이그리트를 제대로 공격할 수조차 없었다.
"불길이 너무 강해서 접근과 동시에 불타버립니다."
만약 이 자리에 탱커 최강벽이 없었더라면 진작에 몰살당했을 것이 분명했다.
결국 최강벽도 죽었고, 이후 이현성도 그 뒤를 따랐다.
"일단 저도 죽어야겠네요. 아쉽네요. 조금만 더 잘 공략했으면 사냥 성공했을 거 같은데요."
다들 세이브 포인트를 잘 지정해놨고, 부활했다.
즉시 부활 설정이 걸린 곳이니만큼 플레이어들은 부활 포인트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봉킹이 물었다.
"벌써 7번째 죽음인데, 다들 괜찮으세요?"
"안 괜찮았다면 여기서 나갔겠지."
여기까지 함께한 플레이어들은 대부분 정상급 플레이어들이었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국가에서 이렇게 연속적인 죽음을 지양하라고 공문을 내리고 있었으나 이들은 그런 공문 같은 건 신경 쓰지 않았다.
혹시 연속된 죽음 때문에 정신이 무너지면 그건 그 사람이 약한 탓이다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이곳을 통솔하고 있는 군주, 강민혁이 말했다.
"다음 트라이 가겠습니다. 왠지 이번에는 느낌이 좋네요."
봉킹은 다시금 불타는 요새 2층에 진입하여 중계를 이어갔다.
조금이라도 방심했다가는 불길에 타죽는 곳이기에, 그는 엘튜브를 따로 확인할 겨를이 없었다.
[히든피스, '발자취를 좇는 자들에게 앞선 발자국을 보여주다'가 만족되었습니다.]
'응?'
이해할 수 없는 알림이었다.
만족 '되었다'라는 말이 크게 거슬렸다.
'김철수가 나를 역전했다고? 1층에서 분명 헤매고 있었는데?'
1층은 그렇다 칠 수 있어도.
어떻게 2층에서 자신보다 더 앞서 나갈 수 있단 말인가?
이건 논리적으로 납득할 수가 없었다.
'지가 무슨 김평범이라도 돼?'
시간이 흘러, 결국 이번에도 실패했다.
"아, 정말 아쉽네요. 거의 죽일 수 있었는데. 이 다음에는 분명히 잡을 수 있겠습니다."
부활한 봉킹은 조급함을 숨긴 채 엘튜브를 열어 김철수의 플레이를 살펴봤다.
김철수는 이미 3층에 도착해 있었다.
'3층? 3층이라고?'
말도 안 돼!
소리칠 뻔했다.
검왕 이현성.
그리고 검왕과 라이벌로 불리는 최강벽이 함께하고 있는 이 파티가 이렇게 고전을 하고 있는데.
어떻게 솔로잉을 진행하고 있는 김철수가 벌써 3층에 올라갔단 말인가.
'앞으로 좀 돌려봐야겠어.'
스크롤을 조금 옮겨 앞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살펴봤다.
'저 난폭한 정령이랑 대화를 나눴다고?'
결국 대화는 성공적이었고 3층으로 가는 길이 곧바로 열려 버렸다.
그는 소리 지르고 싶었다.
'이게 맞는 거냐!'
저게 되냐 싶었는데 저게 됐다.
그때, 또 다른 경쟁자 중 한 명인 '킹갓제네럴유미'로부터 메시지가 도착했다.
['킹갓제네럴유미'님께서 1,000,000 다이아를 후원하였습니다.]
["봉킹 님, 나한테 엄청 좋은 아이디어 있는데 들어보쉴?"]
3층으로 올라가는 길이 열렸다.
그곳에 발을 내딛자 또 다른 알림이 들려왔다.
[히든피스, '발자취를 좇는 자들에게 앞선 발자국을 보여주다'를 만족하였습니다.]
아마도 봉킹TV와 함께하는 애들은 2층에서 고생 중인 것 같았다.
'이런 걸로 좋아하면 안 되는데?'
나는 콘텐츠가 가지는 본질적인 재미와 질에 집중하고 있다.
저들은 하지 못하는, 오로지 나만 진행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이야기.
그러니까 단순히 '클리어 속도'는 나랑 별로 상관이 없는 얘기이고, 내가 별로 신경 쓰지도 않는 문제다.
분명히 그렇긴 한데 자꾸 웃음이 나왔다.
히죽.
'어딜 넘봐?'
속도는 중요한 게 아니긴 하지만 그래도 이왕 하는 거, 내가 더 빠르면 좋겠지.
아 이제야 속이 좀 편안하네.
마음이 편해진 나는 3층에 진입했다.
[필드, '불타는 요새 3층'에 진입하였습니다.]
3층은 1, 2층과 양상이 사뭇 달랐다.
"불타고 있지 않네요?"
멀쩡한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열기는커녕 오히려 꽤 서늘한 바람이 창을 통해 들어오고 있었다.
"창문이 열려 있습니다. 만약 여기에 존프릭이 있었다면 저기로 도망갔을 거라 짐작이 되는데요."
무턱대고 쫓는 것은 별로 좋은 방법은 아니다.
단서를 조금 찾아보기로 했다.
3층은 1, 2층보다 훨씬 좁은 방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제가 처음 보는 도구들 같은 것이 땅에 널브러져 있고요. 아, 이건 가위 같네요. 굳이 중계자의 시선으로 살펴보지 않아도 누군가 급하게 도망친 현장 같다는 건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겠네요."
이런 데에 보통 시나리오와 관련한 단서 같은 것이 숨겨져 있기 마련인데.
"침대보가 사람 모양으로 타 있습니다. 무언가에 의하여 결박되었던 거 같습니다. 존프릭이 정령왕의 딸을 납치해서 무슨 실험 같은 걸 한 모양입니다."
슬슬 마음이 급해졌다.
빨리 단서를 찾아서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 지루하지 않을 텐데.
나는 속도를 높여 이곳저곳을 뒤져봤다.
[돌발 미션이 생성됩니다.]
[돌발 미션 생성자 : 바람 나그네]
어?
최근 뜸했어서 내 방송 안 보나 싶었는데 오랜만에 바람 나그네가 돌발 미션을 생성시켰다.
바람 나그네를 보면 늘 강미나가 생각난다.
"바람 나그네는 고품격 시청자야. 뒤끝 없지, 진상 안 부리지, 이상한 요구도 안 하지, 그냥 자기한테 재미만 있으면 큰 대가를 지불하는 성향이거든. 진짜 개쿨해. 미션 대가도 엄청 좋은 거 주고, 미션 난이도도 대체로 낮은 편이고 친절해."
나도 바람 나그네한테는 약간의 고마움을 갖고 있다.
예전에 가출천견 미션을 줘서 악마와 싸울 수 있도록 도와줬으니까.
근데 그런 호감과는 별개로, 초기 시청자가 아직까지도 내 방송을 꾸준히 보고 있다는 사실이 나를 더 기쁘게 했다.
요즘 계속 느끼는 거지만 나도 스트리머 다 된 거 같다.
[미션명 : 존프릭 사살]
[미션 보상: 불사조의 심장]
나는 나도 모르게 방송 진행을 멈추고 미션 보상을 살펴봤다.
'불사조의 심장?'
진짜 이걸 준다고?